Theme 다니엘의 세 친구 Date 2014.6.22
Text Dnl 3,28-30
(28)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9)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30)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1. 세월호 참사로 인하여 구원파를 비롯한 여러 이단들의 폐해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국무총리 후보자가 교회에서 행한 강연이 정국을 들끓게 하면서 신앙의 의미도 점검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우리 모두 자신의 신앙을 좀더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여러분, 예수를 잘 믿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구원 받아 천국에 갑니다. 복을 받아 복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잘 믿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복을 받아 만사형통하게 되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면 예수 잘 믿으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단3장의 이야기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3장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청년들 얘기가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다니엘의 친구들이었습니다.(1,6-7)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아직 푸릇푸릇한 10대의 청춘 시절에 그만 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남의 나라에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똑똑하다고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당시 많은 나라들을 점령하고 점령한 나라들에서 인재들을 강제로 차출하여 교육을 시켰는데 거기에 끼었다고 성경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 젊은이들은 비록 나이가 아직 어렸지만 아주 순수하고 열심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면서 절대로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신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감히 교육책임자에게 자기들의 작정한 바를 말하였습니다.(1,8) 물론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이 청년들의 작정은 다행히도 웃사람들 눈에 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이들은 모두 중요한 관직에 오릅니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예수 질 믿으면 복을 받고 형통케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허언이 아닙니다. 사기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분명히 복을 받아 누린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단3장에서는 이들이 너무 신앙이 좋았기 때문에 겪는 고초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시기하고 모함하며 해꼬지를 하는 무리들에 의해 자신들의 믿음 때문에 심각히 우려할 만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왕에게 감언이설을 하여 신앙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짓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금으로 왕 신상을 만들어놓고 무조건 거기에 절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 명령을 어길 시에는 즉시 풀무불에 넣어 태워죽이는 형을 집행한다는 처벌조항이 있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분명히 복을 받고 잘 됩니다만 신앙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에 의해 엄청난 위험과 고난을 당하게도 됩니다.
크리스천이 성결하게 살아도 핍박받습니다. 자기들과 같은 식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학생들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고 같이 어울려 비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당하는 외로움’을 철저히 견뎌야 합니다. 그렇게 겪는 외로움을 힘들게 여기면 이미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왕따와 박해는 도리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맞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4,4)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이런 고난 중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17)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7-18) 예수님의 제자로서 길을 가면서, 외로움을 당하거나 비방을 당하면,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오히려 기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고난을 겪는 것은 충분히 각오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이런 믿음을 순교자의 믿음, 이런 정신을 순교자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무도 다행인 것은 예수 잘 믿어서 생기는 고난이나 아픔을 또 다른 큰 복을 담아내는 복주머니로 믿고 받으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119,71)는 말씀이 응답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들에게 닥친 위협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 편에만 속해 있겠다고 고백한 바람에 그들은 평소보다 일곱배나 더 뜨겁게 달군 용광로에 던져졌습니다. 얼마나 뜨거웠던지 던져넣던 형 집행관이 불에 타 죽을 정도였지만 그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그 용광로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서 충격을 먹은 왕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3,26)라고 불러냈는데 보니 정말 아무 흠 없이 살아나왔습니다. 또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모함하던 적대자들은 다시는 적대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왕의 조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그 지방에서 그 지위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신격화 하려던 왕이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만을 참 하나님으로 높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예수 잘 믿는 것을 이 세상에서 잘 되고 이 세상에서 오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하고만 연관지어 생각하다가 보니 그만 주객이 전도되어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무병장수가 신앙보다 우선이 되고 신앙은 그것을 얻고 누리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부귀영화와 무병장수가 선의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악한 사탄의 사상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더 높은 권좌에 오르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 그것보다도 우선하게 하였습니다. 돈을 위해 지위를 위해 인격 같은 것은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목숨까지도 하찮게 여겨 너무도 쉽게 해하게 되니 남의 인명을 해하고 자신의 목숨을 해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고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고 하지요. 사람들은 행운이라는 네잎클로버를 찾겠다고 무수한 세잎클로버의 행복들을 짓밟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격이 전제될 때에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격이란 경천애인(敬天愛人), 즉 하나님을 경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범주 안에 있을 때에만 생성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경천애인의 정신, 그것은 성경에서 속사람이라고 하는 ‘영성(靈性;spirituality)’이 하나님의 성령 안에 있을 때에 그 진위가 가려집니다. 창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生靈; living soul)’dl 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영이 죽어있는 상태에서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 범사에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을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바르고 선하며 복되게 길이길이 살 수 있는 길이다. 그렇게 사는 동안에는 순풍에 돛단 듯이 순적하게 항해할 때도 있고, 때로는 역풍을 만나 힘들고 어렵게 항해할 때도 있다. 그 항해가 짧을 수도 있으며 길 수도 있다. 순풍이냐? 혹은 역풍이냐? 기냐? 아니면 짧으냐? 그것이 정사(正邪) 선악(善惡) 화복(禍福)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높으신 분인 하나님과 즐거운 동행을 하고 있느냐의 여부만이 참된 행복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 믿음으로 살기 위해 생명의 위협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 바로 순교신앙입니다.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죽을 때가 되어 죽는 죽음은 참 죽음이 아니요 살기 위해 사는 것은 진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순교자 중 한 분인 서기훈 목사님께서 순교를 앞두고 남긴 유언은 순교의 의미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우리 모두는 당연히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4. 오늘이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순교신앙이란 분명히 신앙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것이 맞지만 절대로 종교적 열광주의는 아닙니다. 순교신앙이란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신비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확신이 있는 것이 맞지만 결코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고 교회 전통에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 신앙을 어떤 경우에도 고수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우리 모두 순교자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