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안[東安]’이라고도 한다. 중국 헤이룽장성 지시시[鷄西市]의 동부에 있는 우수리강 지류인 무링강[穆稜河] 북쪽 기슭에 위치하여 농업지대·탄전지대의 중심지를 이룬다. 동·남쪽은 러시아와 접하며, 조선족·후이족[回族]·몽골족 등이 함께 거주한다. 청(淸)나라 때인 1908년에 미산부[密山府]를 설치하였고, 1913년에 미산현으로 개칭하였으며, 1988년 시(市)로 승격하였다. 1903년 초간국(招墾局)이 설치된 후부터 부근 평원지대의 개간이 이루어져 조·밀·콩·밭벼·옥수수·감자 등의 농작물 생산이 풍부하고, 대규모의 국영 기계화 농장이 있다.
총매장량 20억t으로 추정되는 탄전이 있어 지시탄광에서 채탄되며, 철광·석탄 등의 광업이 발달하였다. 교통으로는 린미철도[林密鐵道:林口∼密山]가 가로 방향으로 관통한다. 싱카이호[興凱湖]·펑미산[蜂密山]·신카이류[新開流] 문화유적 등의 명승지가 남아 있다.
(독립운동사)청사 조성환선생(1875.7.9~1948.10.7)은 서울 낙원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906년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신민회 동지들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북경으로 망명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간도, 노령 등지를 편력하면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지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1916년 9월 신규식, 민충식, 박은식 등과 체화동락회를 조직하여 교민의 단결 및 재외한인단체와의 연락을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에 전념하면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918년 11월에는 39명의 대표 중 1명으로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여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공표하였으며, 3·1독립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여 제1회 의정원회의에서 노령 대표의원 및 군무차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1920년 북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참모장에 임명되었고, 무기 구입 등 독립군의 무장 및 전력 강화에 주력함으로서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 등 10개 독립운동단체들이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서일(徐一)을 총재로 추대하게 되자 홍범도,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되어 독립군을 이끌었다.
한말의 지사들에게 이곳은 봉밀산(蜂蜜山)으로 알려졌다.
이런 봉밀산 일대가 독립전쟁 근거지 건설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먹고 사는 문제였다. 천리길가에는 끊임없이 벼와 옥수수, 감자밭이 대평원처럼 펼쳐져 있었다. 땅은 지금도 기름졌고, 수량도 풍부해서 가뭄걱정이 별로 없었다. 청나라가 여진족의 발상지인 이곳을 출입을 금하는 봉금(封禁)지역으로 오랫동안 묶어놔서 버려진 땅들을 개간하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쉬웠다. 그 청나라는 망해가고 마적떼가 날뛰는 무주공산이었기 때문에 1907년에 봉기했던 의병부대가 일제의 토벌작전에 쫓겨 간도지역으로 모여들었고, 두만강 건너 함경도 지역에서 살기가 어려워진 조선의 농민들이 남부여대해 넘어왔던 것이다. 생존해야 싸울 수 있었는데 밀산은 그 조건에 적합했다. 둘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사실상 일제지배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자 한말의 지사들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치루면서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할 근거지 건설을 열망하기 시작했다. 그 1차 대상지가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의 만주지역과 연해주 지역이었다. 1904년의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대립관계에 있던 러시아의 연해주지역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북지역은 일제의 직접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고, 중국 중앙정부의 힘도 미약해서 가장 호조건이었다. 일정한 국제 외교적인 안전지대로 인식됐던 것이다. 셋째는 군사적인 이유였다. 1904년에 용산에 일제가 조선군주차사령부를 세우고 전국에 경찰과 헌병대 조직을 만들어 거미줄 같은 감시망을 건설하자, 국내에서 무장항쟁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일제의 감시도 피하고 역량을 키워 국내에 진공할 수 있는 군사거점이 필요했고, 두만강 건너의 간도지역은 이 조건에 맞았다. 그 중에서도 밀산지역은 러시아의 연해주와 맞닿아 있어서 만일의 경우 안전지대로 도피할 수 있었다. 이 동북지역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을 식민지화한 뒤 일본이 차기 점령지로 노리고 있었고, 미국 또한 필리핀을 식민지화한 이후 만주에 욕심을 내던 지역이었지만, 1910년 전후한 상황은 정치, 군사적으로 공백지대였다. 이 봉밀산 일대야말로 한말지사들에게 새로운 신천지였고, 절망스런 조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독립전쟁의 근거지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내외의 항일세력들은 봉밀산 지역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현장답사를 하기 시작했고, 1907년 1월에 국내에 들어온 안창호 선생은 신민회를 조직해 독립전쟁준비에 들어가면서 이강 등을 연해주에 파견하고 봉밀산 일대에 근거지 건설계획을 구체화한다. 이상설 등 근왕파들도 이승희를 보내 토지매입을 시작했다. 한편 1905~1907년 의병전쟁 이후 1908년까지 간도지역으로 옮겨왔던 홍범도부대를 비롯한 의병부대들도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흥개호興凱湖, 싱카이호Xingkai(中國語]
면적 4,380㎢, 호수면 해발 69m, 평균수심 4∼5m, 최대수심 7.03m이다. 러시아어로는 항카호(湖)이고, 중국 헤이룽장성 동남쪽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에 있다. 북부의 약 4분의 1이 중국 헤이룽장성에 속하고, 남부의 약 4분의 3이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프리모르스키주)에 속한다. 남·서쪽으로 많은 하천이 흘러들고, 호수의 동북쪽으로 흘러나오는 쑹아차허[松阿察河]는 우쑤리강[烏蘇里江]에 의해 배수된다. 둥베이 지방 최대의 담수호라고 하나 계절에 따라 변하며, 구조분지 중앙에 형성된 호수로 중국령의 호안은 습지대이다.
북쪽 기슭에는 사주에 의해 분리된 작은 호수인 샤오싱카이호[小興凱湖]가 동서로 길게 놓여 있다. 플랑크톤이 많은 부영양호로 11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 결빙한다. 물이 많을 때는 서로 연결된다.(퍼옴)흑룡강성 밀산시에 위치한 흥개호는 오래전부터 북국의 '녹보석'의 미명을 지녀왔다. 흥개호는 제3세기지각변천으로 형성된 구조호수이다. 대, 소의 2개 호수로 조성되었는데 큰호수가 중러 국경호수이다. 흥개호는 수역이 광활하고 수초가 무성하며 고기떼들이 많다. 더우기는 각종 조류의 서식지이다. 특산인 큰뱅어는 중국 4대 담수 명물고기의 하나이다. 신선하고 입맛이 좋은 특점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 흥개호는 호수모양이 '월금'과 비슷하다하여 金代에는 '북금호'라 불렸다. 청나라때에 '흥개호'라 이름을 고쳤다. '흥개'는 만족어인데 '물이 높은데서부터 낮은데로 흐른다'는 뜻이다. 통계에 따르면 흥개호에는 도합 어종이 68가지 있다. 그중 제일 이름있는 것으로 큰뱅어와 흰새우이다. 큰뱅어는 흥개호특산으로 중국 4대 담수 명물고기의 하나이다. 고기품질이 연하고 국을 끓여놓으면 젖빛이 돈다. 가히 말해 흥개호에 가면 큰뱅어료리는 반드시 먹어보아야 한다. 흥개호는 흑룡강의 주요한 수산양식기지의 하나이다. 흥개호로는 중국에서 조류관상자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다. 흥개호는 동북아후조대 통로에 위치해 있으며 삼강평원 후조이사의 최대 '역'이다. 매년 봄가을이면 이곳은 후조의 천당이라고 한다. 수천수만마리 후조들이 하늘을 뒤덮어 장관을 이룬다 했다. 현재 이곳에 도합 각종 진귀한 조류가 232가지 있으며 세계적으로 멸종에 가까운 조류도 17가지나 있다. 소흥개호는 흥개호와 천연적인 모래언제에 의해 격리되어 있는데 모래언제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각종 록음방초, 진귀한 금수가 흥개호에 아릿다운 색채를 더해주고 있다.4백여만평의 농장을 경영하는 왕사장이 귀한 것이라고 권유한 이 물고기 요리가 입에 맞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