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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식(1864~1932)은 문경 가은출신이다.
초명은 철회哲會,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도암島庵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신철회申哲會가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민지리 186번지이다. 원래의 생가는 없어지고, 문경시에서 새로 복원한 집이 있다.(경상북도 기념물 제153호) 그는 내부의 주사‧통훈대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격동의 역사 속으로 뛰어든 것은 1895년이다. 그해 단발령이 있자 그는 의병을 일으키고, 밀정혐의가 있는 가은면加恩面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尙州에 사는 강용이姜龍伊 등을 농암籠岩장터에서 처단하였다.
이어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광무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한국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신태식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도대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울진·평해·영양·영덕·영월·제천·원주·홍천·철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908년 9월 홍주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적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주楊州 산안山安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 나가사부로[長三郞]를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이강년의 진에 합류하여 소모후군장召募後軍將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12월 14일 영평 리동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잡혔다. 그는 1909년 2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한 그는 10년으로 감형되었다.
1918년 1월에 출옥한 신태식은 조선독립후원의용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920년대 비밀결사 가운데 대표적인 조직으로, 주요 활동은 군자금을 모집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독립만세가 터지자 간도지역에서도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북인의 주 활동무대였던 유하현 삼원포에서도 독립선언이 일어났다. 200여 명의 한인들이 조국독립을 위한 연설회를 갖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잇따른 독립선언과 불길처럼 일어난 3‧1독립만세! 이는 겨레의 독립과 자주를 세계만방에 천명한 것이었다. 3‧1독립선언 뒤 많은 청년들이 만주로 들어왔다. 이에 늘어나는 망명인들을 추스르고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신흥무관학교를 확대 개편하는 한편 자치단체 한족회를 꾸리고, 4월 군정부도 세웠다. 그런데 마침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1월 17일, 군정부는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한편 명칭을 서로군정서로 바꾸었다. 서로군정서는 군자금 모집・무장활동・선전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쳤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밑거름이 되었다. 신태식이 바로 이 단체를 지원하고자 나선 것이다.
의용단은 1920년 9월에 결성되어 1922년 12월까지 활동하였다. 그 결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은 신태식申泰植을 비롯한 김찬규金燦奎‧이응수李應洙이다. 신태식은 경북단장을, 김찬규는 경남단장을, 이응수는 경북총무를 각각 맡기로 하였다. 구성원은 대부분 경상도 특히 경북지역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신태식은 경상북도 단장을 맡아 동지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듬해 겨울 일제 경찰에게 기밀이 탐지되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1922년 12월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12월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24년 6월 출옥 뒤에도 신태식은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1932년 69세로 서거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관련자료] 문경의 순국선열 · 호국영령 열전(문경시.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