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경복궁역에서 중학동창들을 만났다. 녀석들과는 자전거를 타고 임진각과 강화도등을 다녔고 함께 바둑 탁구 당구등으로 많이 어울렸었다.
만나러 가는 길에는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광역버스를 탔는데 seatbelt를 하라는 방송을 규정이라며 늘 한다. 처음에 몇번은 했는데 아무도 하지를 않아서 오늘은 나도 안했다. 시속 삼백킬로를 넘는 KTX에 입석표를 과다하게 팔아 이백억 이상을 남겼다니 이나라의 안전둔감증은 언제나 나아질까?
먼저 간 곳은 봉평(?) 메밀국수를 하는 곳이었는데 점심시간으로는 늦은 한시경이었는데도 길에서 삼십분이상을 기다려야했다. 그런데 앉아서 국수를 한입 먹어본 순간 그 기다림이 값진 것이었다는 기쁨이 치솟았다. 무엇을 먹고 아 하는 감탄사를 내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쫄깃한 면과 시원한 국물 그리고 아삭아삭하게 맛진 열무김치등이 기막힌 삼박자를 이루었다.
친구의 인도로 통인시장을 구경하고 해공선생의 집 그리고 청와대를 둘러보았다. 결코 높지않고 흡사 경복궁을 지키는듯한 북악이 어여쁜 누이와도 같았다.
택시를 타고 사직터널을 지나 백련사가 있는 산길로 올랐다. 옛날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던 투견장이 사직공원에 있었다. 독립문으로 내려가던 길가에는 대신고등학교가 있었고 그곳에서 배구시합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악을 오르면서는 오른쪽에 보이던 엎드린 바위를 볼 수가 없었다. 난립으로 지어댄 빌딩들이 시야를 막았다.
백련사입구에 있는 가정집을 개조해서 영업하는 백숙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그 양에 질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먹는 자세때문에 약 세시간을 고생했다.
동창 J는 마을버스를 운전한다. 한달수입이 이백이 조금 안되는데 근무시간이 하루에 열시간이 넘어 몹시 고되단다. 제수씨가 교회에 너무 열심이고 남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몇억을 날렸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제 경력을 더 쌓으면 일반 시내버스를 운전하게되고 그러면 다소 시간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C는 해태라는 회사의 기획실에 근무를 하다가 IMF때 회사가 분해되는 바람에 오히려 기업합병과 회계법인쪽으로 길을 뚫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해왔단다. 한국에서의 사업이야기를 물었더니 친구는 찜질방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누가 처음에 이억을 투자해서 재미를 보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오억을 들여서 처음사람을 제압했다. 그 후에는 단위가 십억 나중에는 백억으로 올라가 평범한 업자들은 다 망했단다.
한국에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맛이나 무지막지한 자본 아니면 남들이 없는 기술이 없는 한 망한다고 보면 된단다.
경복궁을 돌아나오면서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삼청공원입구, 정독도서관, 북촌입구, 민속박물관, 현대미술관등을 지났다. 부처님오신날이라 연등제를 한다고 부산이었다. 친구들은 청계천에 들려서 구경을 하라고 권했지만 이미 내려오기 시작한 피곤기에 서울역을 돌아서 집으로 왔다.
어디를 가나 젊은 사람들이 넘친다. 고령화시대로 급격히 가고있다면 그 노인들은 다 어디로 갔나? 종로이가를 걷다가 옛날 YMCA건물이 그대로 있어 반가왔다. 그 현판과 모양새가 초라한 것이 시대에 밀려난 나 자신을 보는듯 애처로왔다.
사십년의 세월이 구수한 냄새나던 청진동골목을 잃어버리게 했다면 앞으로 사십년동안은 또 무엇을 잃을까? 그래도 남산은 여전하다. 흡사 세월의 홍수를 수없이 겪어도 한 도시의 지조를 지키는듯한 늙은 장수라고 할까? 혹시 남산골에는 아직 딸긱발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언젠가 이문열은 우리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고향에 돌아왔고 분명 그 고향을 만난다. 오히려 어렸을 때는 내면에 갇혀서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다. 이제는 허리를 펴고 넓게 바라본다.
아 갑자기 허기가 진다.
누군가 나를 부른다.
날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