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밧#탐무즈#우상#변화
탐무즈월을 앞두고 Tammuz의 유래와 이 달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보다 자세하고 심도있는 다양한 내용은 <월간샤밧, 탐무즈>에 담겨 있습니다.
탐무즈-변화를 위한 시간
Tammuz—Time for Transformation
히브리 달력의 모든 달의 이름은 원래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에서 70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이러한 바빌로니아 이름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채택된 모든 바빌로니아 이름 중에서 탐무즈는 실제 바빌로니아의 신이자 우상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현자들은 왜 우상의 이름을 유대교의 거룩한 이름으로 채택하는 것을 허용했을까요?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심리적 동기는 단순하게 치유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역할이 우상을 훼손하는 것을 통하여 우상숭배를 퇴치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짧은 대답입니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우상숭배로 이어지는 부정적인 심리적 성향을 변화시켜 긍정적인 성향으로 바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현자들이 거짓 신 탐무즈의 이름을 선택한 것은 우상숭배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례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탐무즈 달은 정신의 변화 과정을 이해하고 실천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입니다.
탐무즈는 이 시기의 본질적 특성과 연결된, 자기 연민에 대한 인간의 경향과 비극에 대한 인간의 감각, 이 두 가지 감정 안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비극의 탄생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거짓 선지자였던 탐무즈는 어떤 왕에게 고문당해 죽었습니다. 고대 우상숭배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학자 중 한 명인 마이모니데스는 우리에게 탐무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Guide for the Perplexed 3:29.)
탐무즈는 거짓 선지자였으며 고문당해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죽던 날 밤 모든 신들이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러 왔다가 다음 날 아침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연극으로 만들어져 탐무즈는 비극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연극은 매우 인기가 많아서 성전이 서 있던 시대에도 예루샬라임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이 열렸고 예루샬라임의 여인들이 연극을 보고 울었다고 예언자 에스겔은 말합니다.
라시는 탐무즈가 아람어로 문자 그대로 "더위"를 의미하기 때문에 여름의 첫 번째 달의 이름이라고 설명합니다. (여름에 해당하는 석 달은 탐무즈, 아브, 엘룰. Tammuz, Av and Elul).
그는 또한 성전 안에, 또는 근처에 놓여 있던 탐무즈 우상은 납으로 만든 눈 가지고 있었는데, 우상의 눈 부위가 뜨거워지면 납으로 만든 눈물을 흘리며 이것이 얼굴로 흘러내렸다고 전해집니다.
예언자의 비극적인 이야기, 슬픔을 자극하는 연극, 눈물을 흘리는 우상 등은 모두 탐무즈를 둘러싼 연민과 비극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하지만 이 동정심은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얄팍한 감정 조작이었고, 무엇보다도 자기 연민의 감정을 완화하기 위해, 타인의 불행과 동일시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을 뿐입니다. 탐무즈의 비극은 자기 삶이 하나의 길고 비극적인 사건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공감되었습니다.
오늘날 우상숭배의 한 형태인 탐무즈는 오랫동안 잊혀진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 배경이 된 연민과 비극의 정서는 2,5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탐무즈는 신화는 그리스 비극의 시작이며, 오늘날까지 서구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서구 인문학 교육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탐무즈 컬트(비극 숭배의 전통)의 얄팍한 조작과 비극적으로 묘사되는 삶의 이야기는 대중적 스타의 현대적 인기(심지어 숭배)와 유사성이 매우 강합니다. 엘비스나 짐 모리슨, 리버 피닉스와 같은 대중 연예인의 비극적 삶에 대한 대중의 연민과 눈물은 탐무즈에 대한 연민과 눈물과 같습니다.
탐무즈 우상숭배의 전승과 비극을 인간의 보편적 정서로 여기는 서구의 전통이 이어져 현대의 우상 즉, 대중적 연예인에 대한 숭배로 이어지며, 대중 연예인의 삶에 담긴 비극과 탐무즈의 비극은 동일시됩니다. 탐무즈는 이렇듯 많은 사람에게 비극적 영웅 숭배를 계속하도록 하는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서양의 대표적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통해서 인간은 내면의 고통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감정의 순화)를 가져온다고 하였습니다.
비극적인 삶의 숭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절망과 비극적 삶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사람의 정신에 존재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삶을 비극으로 보는 관점, 즉 비극적 자아상을 조장하는 시각 때문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비극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의 동정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기대합니다. 이것이 이 충족되지 않을 때,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지고 자기 숭배에 빠져, 자기 정신세계 속에 탐무즈의 형태를 만들어 냅니다.
치유의 시선
삶을 비극으로 여기는 숭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단계는 인생의 진정한 슬픔과 고통에 대한 비극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현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듯이, 사람이 고통이나 슬픔을 경험하는 것은 영혼을 찾고 방향을 바꾸라는 하나님의 부름심입니다.
삶을 비극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의 친절(헤세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버려졌을 때만 취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라진다면 비극적인 것에 대한 숭배가 가능할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우상을 지칭하는 단어 중 하나는 "슬픔"입니다.
내재 된 삶에 대한 비극적 사고와 이로 인한 믿음의 상실이 우상숭배의 한 형태인 것을 인식한다면,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은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신명기 30:19.)
그러나 생명을 선택하려면 삶에서 선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단계를 더 잘 이해하려면 카발라에서 일 년 열두 달이 각각 특정 감각 또는 심리적 기능과 관련이 있다고 언급한 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탐무즈 달은 시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탐무즈 달은 가능한 가장 긍정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기에 일 년 중 가장 좋은 달입니다. 올바른 시각은 부정적인 것을 멀리하는 것과 긍정적으로 사물을 보는 훈련을 모두 포함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주로 시기심 때문입니다. 현자는 시기심은 욕망과 교만을 낳는다고 가르칩니다. (Ethics of the Fathers 4:21). 시기심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욕망에 대한 갈망을 키우게 됩니다. 결국 더 큰 욕망은 더 큰 질투로 이어지고, 악순환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런 잘못된 시각을 치유하려면 전문 안과 의사가 필요합니다. 토라 최초의 전문 안과 의사는 모쉐였으며, 그는 이타적인 자질과 모든 유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전체 유대인의 영적 시력을 치유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각을 치유한 사람은 자신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근세 유대인의 가장 위대했던 베르디체프의 랍비 레비 이츠학은 눈을 크게 뜨고 거리의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를 겸손하지 못하다고 비난했지만, 그는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의 담긴 의미는 기도로 하느님께 매달리는 그의 친절하고 격려가 담긴 시선이 사람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브레슬로브의 나크만 랍비는 "조금만 더 바라보면 악인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니, 네가 그의 자리를 살펴보아도 그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37:10).
유대인의 비극
탐무즈 17일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애도하는 3주간의 애도 기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국가적 애도 기간을 국가적 차원의 비극과 연관 짓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 그 자체보다는 유대 민족의 역사가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 국가가 이런 문화를 조성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비극의 영웅으로 인식하는 것은 결국 자기 연민과 자신감 상실로 이어지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연민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다른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기피하게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유대 민족은 역사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더 많은 고난과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역사는 결코 비극적이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역사는 고대로부터 부도덕한 독재자와 종교에 맞서, 희망과 신앙, 그리고 도덕적 정직성을 지켜온 역사입니다. 유대인의 역사는 궁극적인 anti-비극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육체적 존재를 성화시킬 가능성을 찾는 인류의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성전의 폐허를 걷다가 다가오는 유배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대부분의 현자는 울었지만, 랍비 아키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모쉐였던 랍비 아키바는 절제된 기쁨으로 재앙을 맞이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의 이유를 묻자, 그는 선지자들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많은 어려운 시기와 좋은 시기를 예언했고, 결국에는 참되고 완전한 구속이라는 궁극적인 선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제 부정적인 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았으니 좋은 것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랍비 아키바는 엄청난 역경 속에서도 선과 거룩함의 내재성에 대한 유대인의 믿음과 확신을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이러한 특성을 제자인 랍비 시몬 바르 요하이에게 물려주었고, 그는 자기의 저서 '조하르(문자 그대로 '광채')'에서 신비로운 유대교 전통을 확립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올바른 시각으로 보는 능력은 유대인, 특히 카발라와 하시딕의 저서를 통해 전승됐습니다.
이번 탐무즈 달은 모든 거룩한 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그게 바라보는 데 헌신하는 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시야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참되고 완전한 구속의 시대를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공로를 세울 것입니다.
자료: Rabbi Yitzchak Ginsburgh / Rabbi Goldberg / Chabad.org
그림: Sefra Lightstone / Yitzchak Ginsburgh
글: <월간샤밧>
Tip: 한 달이 30일인 경우(시반월), 그 달의 마지막 날과 다음 달의 첫날이 모두 다음 달의 로쉬 호데쉬가 됩니다. 따라서 탐무즈 로쉬 호데쉬는 7월 7일, 8일 이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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