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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서울 종로 원각사 자리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 일제강점기.
원각사의 창건과정을 기록한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주변에 연못이 파져 있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국보들은 조선시대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고전은 현재와 다른 당대 문화유적의 이면을 잘 보여준다.
조선 전기 기록에 쓰여진 경복궁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성현(1439~1504)이 쓴 <용재총화>에 그 위용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용재총화>에 의하면, 성종 8년(1477)에 유구국 사신이 방문해 임금이 경회루 밑에서 접견했다. 사신이
"경회루 돌기둥에 종횡으로 그림을 새겨서 날아오르는 용의 그림자가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로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며 감탄했다.
당시 경회루 기둥에는 꿈틀대며 날아가는 용이 조각돼 있었던 것이다. 이후 벼락을 맞아 아름다운 기둥이 큰 피해를 입는다. 인종 1년(1545) 벼락이 쳐 경회루의 8기둥이 모두 부서졌으며 서쪽의 한 기둥이 더욱 심하게 부러졌다고 실록은 서술한다.
사진2. 일제강점기 경복궁 경회루.
돌기둥이 사각 또는 원형이지만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용이 조각돼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고전은 전한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경회루 돌기둥의 용문양 상상도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유구국 사신이 통사에 데 말하기를 "귀국에 와서 세가지 장관을 보았소 첫째가 경회루 돌기둥에 종횡으로 그림을 새겨서 나는 용의 그림자가 푸른 물결 붉은 연꽃사이에 보였다 안보였다 하니 이것이 한가지 장관이요--(중략)하였다
결국, 경회루는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타버린다. 고종 4년(1867) 재건됐지만 기둥은 공기를 줄이기 위해 오늘날 볼 수 있는 기둥은 사각형과 원형으로 단순하게 만들어졌다.
경복궁(사적 제117호)은 서울은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한국인은 말할것도 없고 외국인들도 가장 빈번하게 찾는 명소이다. 중국인 관광객 중에서는 경복궁을 베이징의 자금성과 비교하면서 규모가 작다고 얘기한다고 한다.
절대왕권을 휘둘렀던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신권이 강했던 조선은 궁궐 등 왕과 관련된 건축물을 크게 짓지 않았다. 정조대의 학자 정동유(1744~1808)의 <주영편>은 건물을 너무 작게 지은 데 대한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국상이 나서 장례를 치를 때마다 흥인문(동대문)을 통해 드나 드는 데 큰 수레는 지붕이 걸려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드시 문 밑의 땅을 파서 움푹하게 하였다가 장례가 끝난 뒤에 다시 메워야 했다.
이는 고려시대 때도 다르지 않아 강종(고려 제22대 왕, 1152~1213) 원년 금나라 책봉사가 상아로 꾸민 수레를 선물하였다. 하지만 수레의 높이가 19척이고 개성의 광화문 높이가 15척에 불과해 성문 문지방 아래 땅을 파고 수레지붕을 떼어낸 뒤에야 끌고 들어 갈 수 있었다."
<주영편>은 그런데는 뜻밖의 이유가 있다고 소개한다. <주영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건물을 크게 지으면 양(陽)이 넘쳐 손해를 보고 쇠퇴한다고 믿었다. 나라에서 대궐이든 민가든 집을 높게 짓지 못하도록 해 음양의 조화를 꾀하였다."
풍수를 맹신해 불편함을 무릎쓰고 궁궐을 작게 지었던 것이다.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숭례문의 화재 진화 중 떨어져 부서진 숭례문 현판을 살펴보고 있다
불타기 전의 숭례문 현판과 다시 복원된 현판
'국보 제1호' 숭례문 현판을 누가 썼느냐를 놓고 오랫동안 소모적 논쟁이 진행됐다. 화재나 천재지변 등으로 건물은 훼손될 수 있고 건물에 달려있는 글씨도 새로 쓰기 마련인데 말이다. 여하튼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이라는 설과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이라는 설, 조선 전기의 명필 안평대군이라는 설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에 대해 <주영편>은 중종 때의 명신 죽당 유진동(1497~1561)이 숭례문 글씨의 주인공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집안에 죽당이 '숭례문'이라는 세 글자를 쓴 종이가 수백 장이나 전해 오는 데 숭례문 편액을 연습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숙종 때 후손 유혁연이 (숭례문) 문루를 수리하려고 편액을 떼어내니 뒷면에
"가정(명나라 제11대 세종의 연호, 1522~1566) 모년 죽당이 쓰다"라고 씌어 있어 더욱 확실하다고 했다.
개국 초기에 문루가 세워졌음을 감안할 때 애초에는 양녕대군이 썼으며 화재로 손상된 것을 훗날 유진동이 고쳐 쓴 것으로 짐작된다.
유리곽 속의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제2호)
서울 한복판 종로2가 탑골공원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제2호)가 우뚝 서 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조선 제7대왕 세조가 1465년(세조 11년) 숙부인 효령대군에게 명해 원각사를 짓고 탑을 세웠다. 탑은 건국 초 조선왕실의 원찰이었던 개성 경천사 탑을 모방했던 것이다.
원각사와 원각사탑은 외국에서 구경올 정도로 명물이었다. 서얼 출신 문인인 어숙권이 쓴 <패관잡기>는 "멀리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이 참배하러 왔다"고 전했다.
<패관잡기>는 원래 원각사에는 석탑 외에도 대리석으로 된 대불입상이 있었다고 말한다.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하고 서 있는 부처를 만들어 모셨다. 어떤 일본 사신이 이를 보고 '모든 부처는 앉아 있는데 원각사 부처는 걸어다니는 형상이니 절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연산군 때 절이 허물어지고 부처는 밖으로 내쫓기어 서너 군데 절을 돌아다니니 걸어 다닌다는 말이 과연 맞았다."
사진3. 19세기말 20세기초 숭례문.
우리나라는 건물과 대문을 너무 적게 지어 국장이라도 치르려면 수레가 지나가지 못해 땅을 파고 메우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원각사는 세워진지 불과 30여년만에 폐사된다. 잘 알려진 대로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원각사에 기생들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을 설치했고 중종반정 이후에는 공신들이 절터에 집을 지어 원각사의 흔적은 영원히 사라졌다. 대불도 여러 사찰을 전전하다가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촬영한 대원각사비(원각사의 창건과정을 기록한 비석·보물 제3호) 사진을 보면 원각사지에 언제 파졌는지 알수 없지만 연못이 있고 아이들이 그속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나 현재나 우리 문화재에 대해 유독 집착이 강하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고 간 한국문화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려불화는 '한국 미술사의 정수'이자 '동양 회화사의 군계일학'이라고 칭송된다.
1978년 '고려불화특별전'이 열렸던 일본 나라현에 있는 사설 미술관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
전 세계에 160여 점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려불화는 청자와 더불어 고려 문화의 독보적 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부끄럽게도 1978년 일본 나라현에 있는 사설 미술관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이 '고려불화 특별전'을 열기전까지는 고려불화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고려불화가 모조리 일본으로 반출되고 한반도에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실학자 한치윤(1765∼1814)의 역사서 <해동역사>가 놀랍게도 고려불화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해동역사는 "<화감(중국 원나라때 발간된 그림평론서)>은 '외국의 그림 가운데에는 고려에서 그린 관음상이 매우 정교하다. 그 원류는 당나라 울지을승(尉遲乙僧·서역 풍의 작풍을 대표하는 작가)의 붓놀림에서 나왔으며 점차 발전시켜 섬세하고 아름다운 데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불경도 집요하게 탐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앙엽기>에 따르면, 일본은 진귀한 특산물을 바치거나 포로가 된 우리 백성을 풀어주면서 불경을 달라고 간청했다. 심지어 정체불명의 국가를 사칭해 불경을 받아가려고 하기도 했다.
<지봉유설>에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고 전해지는 김해 김수로왕릉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무수한 무덤들을 도굴해 보물을 훔쳐갔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임진왜란 때도 여러 곳의 왕릉을 팠다.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은 "김해의 수로왕릉도 임진왜란 때 도굴 당했다"고 말한다.
무덤을 파는 데 조선인들을 동원했다. 이수광은 인부들에게 전해 들었는지 무덤 내부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무덤을 팠더니 그 속이 매우 넓었으며 머리뼈는 물론 손발이나 정강이뼈가 매우 컸다. 널옆에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의 시신이 있었는데 모습이 마치 산사람 같았고 나이는 20세쯤 돼 보였다. 이것을 무덤 밖에 내다 놓았더니 즉시 삭아서 없어졌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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