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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수도 페테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3명의 저명한 음악가가 차례로 태어납니다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가 그들이죠
라흐마니노프는 선배 음악가 차이코프스키가 '피아노협주곡 1번'의 작곡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인 1873년 페테로그라드 인근의 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유산을 탕진하는 아버지 대신 할머니와 함께 다닌 어린 시절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종소리에 빠져들기도 한 그는
페테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음악공부를 하며 주로 피아노 연주를 많이 합니다
24세 때 발표한 '교향곡 1번'에 대한 혹평과 스스로의 불만족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집니다
니콜라이 달 박사를 만나 건강을 회복하면서 4년후 '피아노협주곡 2번'을 성공적으로 발표하여 재기합니다
1차 러시아혁명이라 불리는 피의 일요일 사태가 일어나는 즈음 그는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지냅니다
36세에 발표한 '피아노협주곡 3번'은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 불릴 정도로 연주하기 어렵고 난해하기로 유명합니다 이 곡을 헌정받은 당대의 피아니스트 호프만조차 연주를 피할 정도라고 합니다
44세때인 1917년 2차 러시아혁명 즉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일어납니다
공산주의체제로 넘어간 조국에서는 더이상 자유로운 음악 활동이 힘들겠다고 생각한 그는 다음 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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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러시아혁명을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1856년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제국은 국가 근대화를 서두릅니다
4000만명 이상의 농노들을 해방시키고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하나 이들은 계속되는 생활고로 소작농이나 가난한 노동자로 전락합니다
빈곤함을 호소하는 크고 작은 시위가 계속되던 중 러일전쟁의 패배에 분노한 시민들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입니다 1905년 '피의 일요일'입니다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 폭동과 파업이 이어지고 1만명 이상이 살해 암살 등으로 계속 희생당하지만 결국 서서히 가라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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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또 다시 폭동이 시작됩니다
1차세계대전의 불리한 전세로 식량난에 허덕이던 페테로그라드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입니다 여기에는 정체불명의 라스푸틴 수도승에 대한 반감도 한몫합니다
결국 로마노프왕조가 물러나고 임시정부가 세워집니다 짜르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거죠 이를 '2월혁명'이라 부릅니다
이후에도 폭력과 혼란이 계속되던 중 레닌이 볼세비키파를 무장 봉기시켜 임시정부를 전복시킵니다
'러시아혁명' 10월 혁명 볼세비키혁명 또는 공산주의혁명이라 부르죠
이후 약 2년에 걸쳐 러시아 전역에서는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 제정주의자들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집니다 적백내전 또는 러시아내전이라 불립니다
1922년 소비에트연방(=소련)이 탄생합니다 피의 일요일 이후 17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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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라흐마니노프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주로 피아노 연주 활동을 하면서 간간히 작곡도 합니다 이때 작곡한 작품중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교향곡 3번' '피아노협주곡 4번'등이 있습니다
미국생활 내내 조국 러시아를 그리워 하나 스탈린이 있는 소련으로의 귀국은 거부하다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69세로 사망합니다
사망 한달 전에야 미국 이주 24년만에 미국 시민권이 나옵니다 본인이 신청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발급이 늦은 건지 몰라도 결국 미국 국적으로 사망한 셈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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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엄숙한 정서를 담았다고 평을 받습니다
2미터에 가까운 거구에 남보다 크고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휩쓸듯이 힘차게 연주하는 그의 기교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고 합니다
많은 작품과 함께 특히 4개의 피아노 협주곡이 모두 유명합니다 그의 음악은 영화에서도 자주 나옵니다
참조 : 두산백과 Wikipedia 나무위키
불과 9년후 또 다른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페테로그라드에서 태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