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덮밥
신순호
스미하와 함께 마트에 온 은경이는 혹시나 엄마를 만나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 보았습니다. 엄마는 식품부에서 반찬 만드는 일을 한다고 했으니 아마 매장에서는 부딪히지 않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반찬코너는 멀찍이 돌아서 생활용품쪽만 보고 있었습니다. BTS의 팬이면서 한국물건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스미하가 한국마트에 가고 싶다며 몇번을 졸라 하는 수 없이 같이 온 은경이었습니다.
“야, 저거 맛있겠다. 한번 먹어보자.”
은경이가 말릴새도 없이 스미하는 불고기를 시식하는 식품코너로 달려갔습니다.
“맛있는 불고기가 오늘 스페셜 세일 합니다. 불고기 이즈 어 스페셜 디스카운트 온 세일 ”
시식코너의 아줌마가 큰 소리로 손님들의 관심을 끌면서 즉석에서 굽고 있는 불고기 냄새가 솔솔 콧구멍을 간지럽혔습니다. 은경이는 하는 수 없이 시식하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그때 시식코너 아줌마가 몸을 돌리면서 은경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맙소사, 몸을 완전히 덮을 것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사 모자를 쓰고 입에 투명마스크를 한 시식코너 아줌마는 바로 은경이의 엄마였던 것입니다. 은경이는 순간 땅으로 꺼져 버리고 싶을만큼 창피했습니다. 엄마에게 들킨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은경이는 슬며시 지나쳐 다른 코너로 일단 피한 후 식품코너를 슬쩍 훔쳐 보았습니다.
“아줌마, 이거 신선한 고기에요?”
“네. 오늘 아침에 들어온 걸로 양념한 거에요. 오늘 특별세일이니까 들여가세요.”
그 손님은 정갈하게 정돈된 반찬 팩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더니 맨 아래에서 하나를 들었다가 다시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만지는 사이 반찬 팩하나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그만 뚜껑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손님, 그렇게 헤집어 놓으시면… “
“뭐라구요? 이 아줌마가. 여기 매니저 어딨어?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손님한테 눈을 똑바로 뜨고 짜증을 내?”
“손님 그게 아니구요.”
은경이는 귀를 막고 심정으로 마침 곁으로 온 스미하를 데리고 빠르게 마트를 나왔습니다. 말도 안되는 행패를 부리는 그 아줌마가 너무 싫었고, 죄를 지은것도 없이 쩔쩔 매는 엄마도 싫었습니다. 또한 엄마를 모른체 한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집에 돌아온 은경이는 계속 마트에서 본 엄마의 모습이 머리에 떠나지 않아 심난했습니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조금 있으면 엄마가 오실 시간인데 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저녁준비를 해야하는 엄마를 위해 오늘은 대신 저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교적 만들기 쉬운 카레덮밥을 하기로 하고 레시피와 엄마가 요리할때 봤던 것들을 기억해 봤습니다. 먼저 냉장고에서 감자와 양파를 꺼내 먹기 좋은 크기로 깍둑썰기를 했습니다. 양파를 좋아하지 않는 은경이는 골라서 빼려는 심산도 있어서 양파를 좀 더 크게 썰었습니다. 그리고 요리의 빛깔을 예쁘게 내주는 당근도 잘게 썰어 함께 담아 놓았습니다. 칼질할때 칼에 베이지 않도록 왼손을 오그린채 곧추 세우라는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며서 은경이는 조심스럽게 칼을 다루었습니다. 돼지 고기는 냉동고에서 미리 꺼내어 살짝 해동을 한 다음 당근보다 약간 작게 썰어서 찬물에 담궈 핏물을 뺐습니다. 고기를 좋아하는 은경이는 큼직한 고기를 먹고 싶었지만 엄마가 요새 이빨이 아파서 잘 씹지 못하기 때문에 잘게 썰었습니다. 이제 재료가 다 준비되자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먼저 고기와 양파를 볶은 다음 감자, 당근을 넣고 서로 잘 섞으면서 볶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박자박 재료들이 잠길만큼 물을 붓고 푹 익도록 끓여주었습니다. 엄마를 위해 정성들여 카레덮밥을 준비하면서 은경이는 계속 아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모른체 한걸 엄마가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친구 앞에서 엄마가 그런 일 하는건 보이기 싫어… 휴, 그래도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고생하는데 엄마를 창피하게 생각하는건 정말 말도 안되는 짓이잖아. 아이 참, 엄마는 왜 의사나 변호사같은 전문직이 아니고 하필 마트에서 사람들에게 반찬사라고 외치는 일을 할까. 아니 그냥 사람들 눈에 안띠는 사무직도 많잖아.’
냄비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야채들이 마치 은경이를 비난하며 와글와글하는것 같았습니다. 감자 하나를 꺼내서 씹어보니 잘 익은 것이 이제 카레가루를 넣어주면 될 것 같았습니다. 은경이는 카레를 물에 잘 풀어서 죽처럼 걸죽하게 만들어 냄비안에 살살 저으면서 부어주었습니다. 금세 구수한 카레냄새가 온 부엌에 퍼지면서 냄비속 재료들도 노랗게 물들어 갔습니다. 은경이는 수저를 정갈하게 놓고 김치, 장아찌 같은 기본 반찬에 오목한 접시를 식탁에 배열해 놓은채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엄마가 돌아오셨습니다.
“어머, 이게 무슨 냄새야? 카레했니?”
“응, 카레가 먹고 싶어서.”
“에구, 힘들었을텐데. 엄마한테 해달라고 하지.”
“아니야, 오늘은 숙제도 없어서 시간이 있었어.”
“그래, 수고했어. 어디보자…아휴 맛나게 보이네.”
엄마와 은경이는 마주앉아 따뜻한 카레덮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엄마는 배가 많이 고프셨는지 밥을 한 번 더 덜어서 카레에 비벼 드셨습니다. 식사 후 설겆이는 엄마가 하고 은경이는 후식으로 사과를 깍았습니다.
“엄마, 나 사실은 오늘 엄마 일하는 마트에 갔었어.”
“그래? 나도 긴가 민가 했는데 맞구나. 그런데 왜 엄마 안보고 그냥 갔어?”
은경이는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나왔습니다. 엄마가 창피해서 모른 체 한게 너무 미안하고 속상했습니다. 엄마는 짐작한 듯 가만히 있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엄마가 어릴 때 집이 어려워져서 외할머니가 시장 길바닥에서 찐 옥수수 파는 행상일을 잠깐 하셨어. 하필 학교를 가려면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서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올 때면 다른길로 돌아가거나 애들이 볼까봐 못본척 후딱 지나가곤 했지. 그런데 어느날 같이 걸어오던 친구가 찐 옥수수를 사 먹겠다고 외할머니한테 가는거야. 집에도 놀러온 적이 있어서 외할머니 얼굴을 아는데 말야. 난 어쩔줄 몰라서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나를 본 외할머니가 갑자기 일어나서 어디로 가버리시더라구. 그 옆 좌판에서 나물 파는 아줌마가 대신 팔아주셨어. 그리고 저녁 때 외할머니는 내일부턴 시장길로 다니지 말고 다른 길로 다니라고 하시더라구. 친구들이 보고 골리면 어떻게 하냐구. 난 내 마음속을 들킨 것 같아서 그날 엄청 울었지. “
“엄마, 미안해… 나도 아까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아냐, 엄마도 어릴 때 그랬었다니까. 하지만 엄마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우리가 생활하는거니까 너는 엄마가 하는 일을 부끄러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엄만 영어도 잘 못하고 학교도 여기서 나오지 않았잖아. 정말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일자리를 가져서 너무 좋거든. 그리고 열심히 하면 6개월뒤 정규직도 될 수 있대. 그럼 지금보다 대우도 더 좋아질거야. “
“난 그래도 모르는 사람들이 엄마한테 막 ‘아줌마’ 그러면서 함부로 부르는건 싫어.”
“그래, 이해해. 처음엔 나도 낯설고 이상했어. 그런데 은경아, 엄마는 지금 일이 재미있어. 내가 만든 반찬을 손님들이 맛있게 먹고 다시 찾는 것도 기쁘고, 열심히 팔아서 매상이 많이 오르면 막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한것 같아서 좋아. 은경아 너가 불편하면 앞으로도 엄마 아는 체 말고 그냥 가. 어차피 엄만 바쁘니까 괜찮아. 알았지?”
“내가 못되 먹었지?”
“응, 엄마도 너 만할땐 참 못된 딸이었어. 그러니까 너는 내 딸이 확실해.”
울다가 엄마말에 한바탕 웃어 버린 은경이는 아까의 무례한 손님이야기는 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엄마도 그 손님이 왔을때 은경이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엄마는 정말 그 일이 재미있고 보람있어 하시는구나. 내가 정말 잘못 한 것 같아. 다음엔 스미하랑 같이 가서 그 맛있는 불고기 엄마가 만든거라고 해야겠어.’
‘그때 엄마가 먼저 피하지 않았으면 나도 은경이처럼 모른체 했겠지? 그날 엄마 마음이 지금 나 같을까…’
은경이와 엄마가 각자의 엄마 생각을 하는 사이 밤은 새록새록 깊어갔습니다.
(2020년 2월 21일 벤쿠버 조선일보에 발표)
첫댓글 "냄비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야채들이 마치 은경이를 비난하며 와글와글하는 것 같았습니다."라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동화를 그동안 벤쿠버 동포들만 읽었다니 조금 질투가 나려고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이야기와 제 지인의 이야기를 섞어 보았어요. 엄마는 왜 전문직을 못 가지고 이런일을 해? 라면서 엄마를 원망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밉고 속상해서 엄마앞에서 엉엉 울었다는 지인의 딸이야기를 듣고 제 어릴적 경험과 오버랩 시켜봤어요. 저도 친정같은 이 곳에 마음놓고 글을 쓰게 되어서 너무 편안하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신순호동화작가님 너무 반갑습니다,엄마랑 은경이의 마음이 소통되는 글을 보니 눈물이 핑돌고 감동이에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같이 동화로 문협 회원이 된 것도 반갑고 감사합니다.월요일 줌 미팅 때 샘이 엄마라셨는데 저도 샘이 엄마입니다.저희 넷째가 Sam(Samuel)이에요.좋은 글 나눠줘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희 애가 아들이었으면 '샘' 이 될뻔했는데 딸이라 새미로 했어요. 샘물 할때 그 샘으로 태명을 지었었거든요.^^
동화로 등단하셨다니 반갑습니다. 함께 화이팅해요. 감사합니다.
네,그러신 것 같았어요.저희 막내 태명은 은샘이에요'은혜의 샘!'그리고 영어 이름도 사무엘이어서 애칭으로
샘이라고 불러요 네 함께 화이팅해요 저도 감사합니다.
이 동화는 이민 온 우리 1.5세, 2세 자녀들이 많이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일상에서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는 작가의 시선과 애정이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는 거란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굳이 이민 자녀가 아니어도 이런 갈등과 화해는 어디든 있는것 같아요. 다만 한국서는 생각도 안하던 일들을 이민와서 하게 되면서 아이들의 자존감이 상처를 입기도하더라구요. 정작 어른들은 살기 위해 뭐든 하겠다는 강인한 정신으로 버텨나가는데 말이죠. 대화가 많이 필요한것 같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