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최근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교과서에 '독도표기'를 하겠다고 나섰다. 이러한 일본의 공격적 대응은 미국에 의존하는 한편, 일본에게 일제 식민지에 대한 과거사면죄부를 주는 자주적이지 못하고 허약한 이명박정부의 사대주의성에 있다 할 것이다. 주변 강대국에게 빌미는 주는 요인은 자주적이지 못한 나머지,정치경제군사를 위임하려하거나 절대 의존하려는데서 기인한다. 미국에게 경제주권을 이양하는 차원의 FTA를 실현시키기위해서 검역주권을 내세우며 안전한 소고기를 먹겠다는 국민들을 몽둥이로 패는 이명박정부를 미국과 일본, 북한 그리고 중국이 본다면 어찌 하겠는가? 대한민국을 웃습게 볼 수 밖에 없으며, 이명박정부에 대해 무시하며 함부로 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을 사살하고,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미국이 재협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국민을 무시하는 대통령과 정부, 과연 정부와 국가의 존재가치가 있겠는가! 피눈물흘리는 것은 국민들일 수 밖에 없다.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대통령과 권력이 국민을 이겨본 역사는 없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며 교과서에 독도소유권을 표기하겠다고 하는데, 이 독도문제는 지난 정권이 굴욕적 한일회담을 통하여 일본에 양도하지 않았다면 명확한 역사적 근거자료를 전제로 국제재판소에서 승소판결을 확실히 받는게 해결방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일관계는 한일간의 역사인식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해소해야 한다. 역사전개과정에서 어떻게 악연을 맺었는지를 공유하고,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피해배상을 했을 때 해결될 수 있고, 21세기 한일관계가 동반자적 관계로 나갈 수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과거사에 대한 상호 사죄와 피해배상을 통하여 화해협력관계를 지향하여 '아시아연합'시대를 열어야 하며,아시아 경제협력체제를 구성하여 미국과 유럽연합의 경제독점을 차단하고 전 인류적인 차원에서 정치경제문화적인 평화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러한 취지에서 한일악연해소와 한일관계개선차원에서 역사관련자료를 게재한다.[윤복현 편집부 기자] 일본열도 역사(객관적 사료들을 전제로 한.일 사학자들의 역사논쟁이 필요하다)
▲ 임승국 해설의 [한단고기-고구려 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왜'는 지금의 일본열도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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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의 위치 : "왜는 회계군(중국 절강성 지명,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본거지)의 동쪽 동아현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일본 큐우슈우 남쪽 난세이 제도에 딸린 오끼나와 섬 남단)에 이르른다. 또 다시 1,000리를 건너서 네시마에 이르른다. 네시마는 도시마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은 여왕가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구야한국으로 가고자하는 자는 쯔시마(쓰시마),가라산(가야산),지가도(후꾸오까의 역사적인 명소)로부터 말로호자(말로국으로 본래 읍루인들이 모여 살던 곳-대진본기 참조)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한국의 땅이다." [한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임승국,'한단고기 P267
칠지도 명문 왜곡
백제시대의 철제(鐵製) 칼. 육차모라고도 한다. 칼날 수가 총 7개로, 곧은 칼날 양쪽에 작은 칼날이 각각 3개씩 더 붙어있다. 한국에는 실물과 문헌이 전해지지 않으나 일본의 《일본서기》에 그 이름이 보이고,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그 실물이 전해진다. 이 칼의 몸체에 상감되어 있는 명문의 내용이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과 표기된 제작연대를 고려할 때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에 하사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 백제왕(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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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석상신궁(石上神宮)에는 백제왕이 왜왕(倭王)에게 보낸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명문(銘文) 중 일부가 예리한 도구에 의하여 글자가 손상되어 있다. 이는 칠지도(七支刀)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방해가 되자 일본인 누군가가 칠지도(七支刀)를 훼손하여 일본의 역사왜곡을 감춘 것이다.
일본인이 신궁(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한 칠지도(七支刀)를 왜 훼손하였는지 알기 위하여 칠지도(七支刀)에 적혀 있는 명문을 살펴본다.
「태화 4년(A.D 230년) 5월 16일 정오에 여러번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여러 병란을 물리칠 수 있으므로, 마땅히 후왕들에게 줌이 마땅하다. 이전에는 이런 칼이 없었는데, (온조)백제왕에게 (칠지도 모양과 유사한) 진기한 칼이 생겼기에, 성음(구태백제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왜왕을 위하여 (칠지도를) 만들었으니 그 뜻을 후세까지 알려라. 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 )辟百兵宜( )供侯王( )( )( )( )作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 )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 )안의 글자는 후에 학자들이 보충한 것이다.
칠지도(七支刀)에 관한 내용이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 52년조에 나온다.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일본서기년도 A.D 252년 실제년도 A.D 230년) 秋 9월 丁卯朔 丙子(10일) 구저(久저)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왔다. 칠지도(七支刀) 1구, 칠자경(七子鏡) 1면 등 각종의 중보(重寶)를 바쳤다. 이어 말하여 "신의 나라의 서쪽에 강이 있습니다. 수원은 곡나(谷那)의 철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먼 곳은 7일을 가도 이르지 못합니다. 그 물을 마시고 그 산에서 제철(製鐵)하여 길이 성조(聖朝)에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손자인 침류왕에게 일러 "지금 내가 통하고 있는 귀국(貴國)은 하늘이 열어주신 바이다. 이로써 천은(天恩)을 내리시고, 해서(海西)를 떼어서 나에게 주셨다. 이 때문에 국기가 영원히 단단하다. 너도 마땅히 화호(和好)를 거두고, 토산물을 모아서 봉헌(奉獻)하기를 끊이지 않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매년 계속하여 조공(朝貢)하였다. 久저等從千熊長彦詣之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仍啓曰臣國以西有水源出自谷那鐵山其邈七日行之不及當飮是水便取是鐵山以永奉聖朝乃渭孫枕流王曰今我所通海東貴國是天所啓是以垂天恩割海西而賜我由是國基永固汝當善脩和好聚斂土物奉貢不絶雖死何恨自是後每年相續朝貢焉」
[註:"그리고 손자 침류왕에게 일러" 이전 문구는 일부 왜곡한 것이고, 이후 문구는 후에 가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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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설 일본서기를 보면 일본의 역사는 B.C 667년부터 시작되고 있고, 그 이전은 신대(神代)로 적혀 있다. B.C 667년 이전에도 일본열도에 토착왜나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韓)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B.C 667년 이전이 신대(神代)로 적혀 있는 것은 일본서기가 만주에서 이주한 부여 무리들의 역사를 적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본서기에는 중기왕검조선 때 만주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몰래 이주한 섬야노(陝野奴) 무리에 관한 역사나 그 뒤 이주한 진.변한계(辰.弁韓系), 백제계(百濟系) 등 이주민들의 역사만 적혀 있고, 토착왜(土着倭)나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韓) 이주민들의 역사는 적혀 있지 않다.
▲ 단군3조선 중 한반도지역에 해당하는 마한-당시 일본열도는 마한에 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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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토착왜(土着倭), 마한계(馬汗系) 소국 시기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岐島), 구주(九州)에는 원래 토착민인 왜(倭)가 살고 있었는데, 왕검조선 때는 마한(馬汗)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마도, 일기도, 구주는 왕검조선 때 한반도 지역에 해당하는 마한(馬汗)의 관경에 속하였다. 왕검조선 때는 각 한(汗)간의 관할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지역의 진한(辰汗)이나 산동지역의 번한(番汗)의 관경에 속한 지역에 살던 무리들은 함부로 마한(馬汗)의 관경에 속한 대마도, 일기도, 구주 등지로 이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기왕검조선 때 송화강 유역에 살던 섬야노(陝野奴)가 무리를 이끌고 마한(馬汗) 몰래 구주로 이주하여 천왕(天王)을 칭하였다가 B.C 723년에 왕검조선의 사벌단제가 보낸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에 의하여 토벌되었다. 「가륵단제 무신년(B.C 2173년) 두지주(斗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송화강 유역 만주 동부 지방)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그 후손에 섬야노(陝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대마도.일기도.구주 지칭)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했다.」 「사벌단제 무오년(B.C 723년)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熊襲:고대에 구주 熊本에 근거지를 둔 나라)을 평정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위 섬야노가 소잔명존(素잔鳴尊)으로, 언파불합이 언파렴무노초즙불합존(彦波렴武노草葺不合尊)으로 각 적혀 있고, 소잔명존이 부모 2신 또는 여러 신들에 의하여 천원(天原:소잔명존이 이주했던 구주 熊本 방면 지칭)에서 쫓겨 난 후 위원중국(葦原中國:本州의 山口縣.島根縣.廣島縣 방면. 왕검조선 때 本州에 있는 위원중국은 馬汗의 관경에 속하지 않았다.)으로 가지 못하고 근국(根國:이주하기 전에 살던 나라)으로 갔다고 적혀 있다. 「부모 2신이 소잔명존에게 "너는 심히 무도하다 천하를 다스릴 임금이 될 수 없다. 마땅히 근국으로 가라" 하고 축출하였다. 故其父母二神勅素잔鳴尊汝甚無道不可以君臨宇宙固當遠適之於根國矣遂逐之」日本書紀神代 上 第5段 「이때 소잔명존이..중략..하늘나라로 올라갔다..중략..이에 일신은 소잔명존이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於時素잔鳴尊..乃昇詣之於天也..於是日神方知素잔鳴尊固無惡意」日本書紀神代 上 第6段 「여러 신들이 죄를 소잔명존에게 돌리고..중략..그리고 추방하였다. 諸神歸罪過於素잔鳴尊..已而竟逐降焉」日本書紀神代 上 第7段 「여러 신들이 소잔명존을 책하여 "그대의 소행은 심히 무례하다. 고로 천상(구주를 하늘나라로 비유한 것)에는 살지 못한다. 또 위원중국(본주의 山口縣 등지)에 있어서도 안된다. 속히 저근국(이주하기 전에 살던 나라)으로 가라" 하고 다같이 소잔명존을 쫓아 보냈다. 旣而諸神0素잔鳴尊曰汝所行甚無賴故不可住於天上亦不可居於葦原中國宜急適於底根之國乃共逐降去」日本書紀神代 上 第7段 구주에서 쫓겨난 소잔명존은 일신(日神:태양신을 말하나 이 문구에서는 햇님의 아들을 칭한 왕검조선의 단제)을 만난 후 일시 근국(根國:구주로 이주하기 전에 살던 곳)인 신라국 소시모리(曾尸茂梨:송화강 유역이 아니고 소잔명존이 이주하여 일시 거주한 경상도 지역, 고대에는 새로 이주한 곳에 근국의 지명을 많이 사용하였다.)에 있다가 本州의 출운(出雲:山口縣에 있는 지명으로 위원중국에 속한 지역)으로 건너갔다. 「이때 소잔명존은 아들 오십맹신을 데리고 신라국에 내려서 소시모리라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 땅은 내가 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며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가 출운의 파천 상류에 있는 조상봉으로 갔다. 是時素잔鳴尊帥其子五十猛神降到於新羅國曾尸茂梨之處乃興言曰此地吾不欲居遂以埴土作舟乘之東渡到出雲國파川上所在鳥上之峯」日本書紀神代 上 第8段 위 신라국은 일본서기 중애천황기(仲哀天皇紀) 8년 9월조에 나오는 고금신라(고衾新羅) 및 출운풍토기(出雲風土記) 국인신화(國引神話)에 나오는 고금시라기(고衾志羅紀)와 같은 곳으로, 후에 신라가 건국된 지금의 경상도 동쪽 지방을 지칭한 것이다. 이때 소잔명존이 本州의 출운(出雲)으로 이주한 것은 왕검조선 때 대마도, 일기도, 구주만 마한(馬汗)의 관경에 속하였고, 本州의 위원중국(葦原中國)은 마한(馬汗)의 관경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세 가공(架空) 시조(始祖) 신무천황(神武天皇)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의하면 섬야노(陝野奴) 무리는 몰래 삼도(三島)로 이주하였다가 왕검조선의 사벌단제가 보낸 언파불합에 의하여 쫓겨났고, 일본서기 신대 상 제8단에 의하면 소잔명존은 천원(天原)에서 쫓겨난 후 무리를 데리고 本州의 위원중국(葦原中國)으로 이주하였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의하면 바다의 도적들이 다시 삼도를 혼란스럽게 하다가 B.C 667년에 매륵단제가 보낸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반命)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36세 매륵단제(買勒檀帝) 갑인년(B.C 667년)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반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위 협야후 배반명은 일본서기에 일본국의 시조(始祖)로 적혀 있는 협야존(狹野尊)이다. 일본서기 신무천황기(神武天皇紀)에는 이때 협야존이 삼도(三島) 외에 本州의 위원중국(葦原中國)도 평정하였다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 숭신천황기(崇神天皇紀)에는 10세 숭신천황 때부터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도 신무천황이 일본국의 시조로 적혀 있는 것은, 우리의 고기(古記)에 협야후 배반명이 B.C 667년에 삼도(三島)를 평정하였다는 내용이 나오자 일본서기 저자가 이를 근거로 하여 협야후 배반명을 가공 시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2세에서 9세까지 가공천황(架空天皇) 일본서기에는 10세 숭신천황 때부터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일본서기 저자가 변한계 나라 때부터 일본국의 시작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숭신천황 이전이 왜 천황시대로 적혀 있을까? 이는 일본서기 저자가 가공 시조인 신무천황 이후 변한계 나라가 시작된 숭신천황 이전의 천황 공백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무천황부터 숭신천황 사이에 2세 수정천황(綏靖天皇), 3세 안녕천황(安寧天皇), 4세 의덕천황(懿德天皇), 5세 효소천황(孝昭天皇), 6세 효안천황(孝安天皇), 7세 효령천황(孝靈天皇), 8세 효원천황(孝元天皇), 9세 개화천황(開化天皇) 등 8명의 가공천황을 또 만들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2-9세 가공천황의 본기에는 세자책봉, 천황의 즉위와 사망 사실만 짤막하게 적혀 있다. 3. 진한계(辰韓系), 변한계(弁韓系) 소국 시기 10세 숭신천황(崇神天皇:B.C 97년 즉위) B.C 194년 이후에 진한계(辰韓系)와 변한계(弁韓系) 이주민들이 만주의 선진 농업기술과 문명을 가지고 일본열도로 이주함으로써 일본열도에는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진한계(辰韓系)는 本州의 출운(出雲), 파마(播磨), 단마(但馬) 등지로 이주하였고, 변한계(弁韓系)는 九州, 뇌호내해(瀨戶內海) 등지로 이주하였는데, 九州로 이주한 변한계 이주민들이 나라 체계를 갖춘 시기는 숭신천황(崇神天皇) 때이다. 일본서기 숭신천황기(崇神天皇紀) 12년 3월조를 보면 "전략..이 때문에 칭송하여 어조국천황(御肇國天皇)이라 한다(御肇國이란 나라를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신무천황은 조작되었다는 설이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처럼 일본서기 저자도 숭신천황 때에 (변한계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일부 인정하고 있다. 숭신천황기 7년 11월조를 보면 숭신천황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외에 대물주신(大物主神)과 왜대국혼신(倭大國魂神) 및 따로 수많은 신(神)들에게 제사지낸 후부터 역병이 비로소 그치고 내외가 점차 가라앉았으며 오곡이 잘 익고 백성이 넉넉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는 변한계인 숭신천황이 변한계의 신(神) 천조대신(天照大神) 외에 진한계(辰韓系)의 신(神) 대물주신(大物主神)과 토착민의 신(神) 왜대국혼신(倭大國魂神)을 함께 섬기고부터 즉 변한계, 진한계, 토착왜가 화합하고부터 나라가 안정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보면 진한계나 토착왜 일부는 숭신천황 7년 이전부터 이미 변한계에게 복속하고 있었다. 환단고기에는 이 무렵 구주로 이주한 무리들이 세운 소국 중 변한계(弁韓系)가 세운 구야한국(九邪韓國)이 제일 컸으며, 이 구야한국을 낙동강 유역에 위치한 구야본국(九邪本國)에서 온 사람이 다스렸다고 적혀 있다. 이는 이 시기 구주의 지배세력이 낙동강 유역에 근국(根國)을 둔 변한계라는 뜻이다. 숭신천황 10년(B.C 88년) 9월, 10월에 숭신천황은 주변 지역을 평정하기 위하여 대언명(大彦命)을 북륙(北陸)에, 무순천별(武淳川別)을 동해(東海)에, 길비진언(吉備津彦)을 서도(西道)에, 단파도주명(丹波道主命)을 단파(丹波)에 각 보내었다. 위 문구를 언뜻 보면 구주왜(九州倭) 숭신천황이 마치 대화(大和) 지역에 있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공황후(神功皇后) 이전 구주왜(九州倭) 천황들과 응신천황(應神天皇) 이후 대화왜(大和倭) 천황들은 서로 다른 천황가(天皇家)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신공황후 이전 구주왜 천황들과 응신천황 이후 대화왜 천황들을 동일한 천황가로 만들기 위하여 신공황후 이전 구주왜 천황들이 마치 대화 지역에 있었던 것처럼 일본서기를 왜곡하였다. 11세 수인천황(垂仁天皇:B.C 29년 즉위) 수인천황(垂仁天皇) 2년(B.C 28년)에는 의부가라왕자(意富加羅王子) 아라사(阿羅斯)가 혈문(穴門)에 있던 이도도비고왕(伊都都比古王)을 섬기지 않고 출운(出雲)을 경유하여 수인천황을 찾아 왔다. 동 3년에는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칼, 창, 일경 등 중보(重寶)를 소지하고 귀화하여 파마국(播磨國), 근강국(近江國), 약협국(若狹國)을 거쳐 단마국(但馬國)에 거주지를 정하였다. 동 25년(B.C 5년)에는 이세국(伊勢國)에 신궁(神宮)을 세웠고, 동 39년에는 칼 1,000구를 만들어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두었다. 동 88년에는 담로도(淡路島)에 신궁(神宮)을 세웠다. 천신숭배족인 부여 무리에게는 신궁이 있는 곳이 무리들의 중심지이므로, 이세, 대화, 담로도 등지에 신궁을 세웠다는 것은 이 시기 이세, 대화, 담로도 등지에 변한계 무리들이 대량으로 이주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야마대연맹 시기 12세 경행천황(景行天皇:A.D 71년 즉위) 경행천황기(景行天皇紀)는 2, 3, 4, 12, 13, 18, 19, 20, 25, 27, 28, 40, 51, 52, 53, 54, 55, 56, 57, 58, 60년조가 적혀 있고, 29년부터 50년까지 사이에 약 20년의 공백기가 있다. 경행천황 4년에 천황이 일대궁(日代宮)에 머물었다. 동 12년에 일향국(日向國)에 행궁(行宮)을 지었다. 동 19년에 천황이 일향국(日向國)에서 돌아왔다. 위 일향국(日向國)은 일명 이도국(伊都國)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도국(伊都國)이라는 말은 이(伊)가 부여(夫餘)를, 도(都)가 천제(天帝)의 아들이 있는 곳(天子所居)을 뜻하므로, 이도국은 부여 이주민 무리들의 도읍지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위 일향국은 부여 이주민들의 천신숭배사상에 따라 천신(天神)에 대한 제사(祭祀)를 주관하면서 구주에 살던 부여 무리들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 시기 도읍지 명칭이 일대궁(日代宮), 일향국(日向國)이라는 것은 구주왜(九州倭)의 중심지가 구주의 동쪽 해뜨는 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동 27년(A.D 97년)에는 일본무존(日本武尊)이 웅습(熊襲)을 토벌하여 서주(西州)를 평정하였다. 이때부터 A.D 103년 사이에 구주의 가야계 주도로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이 세워졌다. 동 40년(A.D 110년)에는 일본무존(日本武尊)을 보내어 本州의 준하(駿河), 갑비(甲斐), 미장(尾張), 신농(信濃), 월국(越國) 등지의 가이(가夷)를 정벌하였다. 앞에 나온 내용을 보면 변한계(弁韓系)는 수인천황 때 이세(伊勢), 대화(大和), 담로도(淡路島) 등지로 진출한데 이어 경행천황(景行天皇) 때 다시 준하(駿河), 갑비(甲斐), 미장(尾張), 신농(信濃), 월국(越國) 등지로 진출하였다. 이 무렵 진한계도 本州의 출운(出雲), 파마(播磨), 단마(但馬) 등지로 진출해 있었으므로, 경행천황 때는 이미 本州의 반 이상이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의 세력권에 들어 있었다. 경행천황기(景行天皇紀)에는 경행천황이 60년간 재위하다 A.D 130년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중간의 공백기 약 20년을 빼면 경행천황이 실제로 재위한 기간은 약 40년 가량이다. 따라서 경행천황은 A.D 110년경에 죽었다. 뒤에 나오지만 경행천황 다음 성무천황(成務天皇)이 즉위한 해는 A.D 155년경이므로, 경행천황이 죽은 때로부터 성무천황이 즉위한 때까지 그 사이에 약 40여 년간의 천황공백기가 있었다. 이 공백기는 일본무존계(日本武尊系)가 통치한 시기이다. 경행천황(景行天皇) 다음 다음 천황인 중애천황(仲哀天皇) 원년 11월조를 보면 "짐은 아직 약관이 되기 전에 부왕(父王)이 붕(崩)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이 붕(崩)은 왕이 죽었을 때 사용된 글자로써 중애천황이 일본무존을 부왕(父王)이라 부르고 있고, 중애천황이 천황으로 즉위한 A.D 165년경에 중애천황의 나이가 36세인 것을 보면, 경행천황기에 일본무존이 경행천황 43년에 죽었다는 문구에도 불구하고 일본무존은 A.D 130년 이후까지 생존하면서 왕(王)으로 있었다. 일본무존 통치시기 경행천황(景行天皇)과 성무천황(成務天皇) 사이에는 일본무존(日本武尊)이 통치한 약 40여 년간의 통치기간이 있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천황가(天皇家)의 연속성을 가장(假裝)하기 위하여 성무천황(成務天皇)을 경행천황(景行天皇) 바로 다음 천황으로 적고, 경행천황과 성무천황 사이 존재한 일본무존(日本武尊)의 통치사실을 일본서기에 적지 않았다. 13세 성무천황(成務天皇) 성무천황기(成務天皇紀)는 1, 2, 3, 4, 5, 48, 60년조가 적혀 있다. 성무천황 48년은 실제로 재위 6년이고, 성무천황 60년은 실제로 재위 7년이므로, 성무천황의 실제 재위기간은 7년이다. 성무천황기에는 성무천황이 경행천황의 제4자라고 적혀 있으나, 성무천황이 일본무존의 아들인 중애천황을 태자로 삼은 것을 보면, 성무천황은 경행천황의 아들이 아니고 일본무존계(日本武尊系)이다. 성무천황과 그 뒤 중애천황 사이에는 몇 년간의 천황공백기가 있었다. 성무천황기를 보면, 중애천황은 성무천황 48년에 태자가 되었고 그때 중애천황의 나이가 31세였다. 따라서 계산상으로는 그 다음해 성무천황 60년에는 중애천황의 나이가 32살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해 중애천황이 천황으로 즉위할 때는 중애천황의 나이가 33살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애천황기에는 중애천황이 천황으로 즉위할 때 나이가 36세라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성무천황이 사망하고부터 중애천황이 즉위하기까지 3년간의 천황공백기가 있었다. 성무천황의 재위시기를 알기 위하여 위지(魏志)에 의하여 재위시기가 들어나는 중애천황의 재위시기에서 성무천황의 재위시기를 역산(逆算)해본다. 성무 1년(A.D 155년)-성무 2년(A.D 156년)..중략..성무 5년(A.D 159년)-성무 48년(실제 성무6년:A.D 160년)-성무 60년(실제 성무 7년:A.D 161년)..3년 공백기(A.D 162-164년)..중애 원년(A.D 165년). 이를 보면 성무천황의 재위기간은 A.D 155년부터 A.D 161년까지이다. 14세 중애천황(仲哀天皇) 중애천황기(仲哀天皇紀)는 1, 2, 8, 9년조가 적혀 있다. 중애천황 재위 8년은 실제로는 재위 3년이고, 중애천황 재위 9년은 가공년도이다. 일본서기에는 중애천황이 재위 8년 9월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중애천황의 실제 재위기간은 3년이다. 중애천황 원년이 몇 년도인지 살펴본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중애천황을 암살한 후 환령간(桓靈間)에 대란(大亂)이 일어났다고 적혀 있다. 환령간은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재위시기를 말하므로, 대란은 환제 말부터 시작하여 영제 초까지 수년 간에 걸쳐서 일어났다. 즉 이 대란은 환제(桓帝) 말인 A.D 167년경에 시작되어 비미호(卑彌乎)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이라 칭한 A.D 173년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서기를 분석하면 중애천황의 실제 재위기간은 3년이고, 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중애천황은 환제 말인 A.D 167년경에 죽었으므로, 중애천황 원년은 A.D 165년경이다. 중애천황 2년(실제년도 A.D 166년) 정월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을 황후로 하였다. 같은 해 3월 웅습(熊襲)을 쳤으나 특별한 전과가 없었다. 중애천황 8년(실제 재위 3년, 실제년도 A.D 167년) 9월 천황이 웅습을 칠 것을 의논하자 황후가 신탁을 빙자하여 고금신라(고衾新羅)를 치자고 권하였으나 중애천황이 이를 믿지 않고 웅습을 쳤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고사기(古事記)에는 이때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을 암살한 것으로 암시되어 있다. 「천황이 축자(筑紫)의 향추궁(香추宮)에 와서 웅습국(熊曾國)을 토벌할 때, 천황은 신(神)을 불러모으기 위해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건내숙니(建內宿니) 대신은 신탁(神託)을 받는 정원에서 신에게 기원하였다. 황후는 신의 응답을 받아 "서쪽에 나라가 있다. 금과 은을 비롯하여 눈부신 진귀한 보물이 그 나라에 많다. 나는 이제 그 나라를 복속시켜 주겠다"라고 말하자 그것을 들은 천황은 대답하여 "내가 높은 곳에 올라 서쪽을 보니 국토는 보이지 않고 다만 대해(大海)가 있을 뿐입니다. 신께서 지금 거짓을 말씀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고 거문고를 타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다. 신이 크게 노하여 "이 천하는 그대가 통치해야 할 나라가 아니다 그대는 황천국(黃泉國)의 길로 향하라"라고 말하였다. 이것을 들은 건내숙니(建內宿니) 대신은 "황공합니다. 천황 폐하시여 전처럼 그 거문고를 연주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천황이 다시 그 거문고를 안고 적당히 연주하였다. 잠시 후 거문고 소리가 들리지 않으므로 불을 들고 들어가 보니 천황은 이미 죽어 있었다.」 중애천황기에는 중애천황이 재위 9년(가공년도) 2월에 죽었다고 적혀 있고, 한편으로는 일서(一書)를 인용하여 중애천황이 웅습(熊襲)을 정벌할 때 즉 재위 8년(실제로는 재위 3년, 실제년도 A.D 167년) 9월에 죽었다고 적혀 있다. 「중애천황 9년(가공연도) 2월 천황이 몸이 갑자기 아프더니 죽었다. 그 때 나이 52세였다. 즉 신(神)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一書에 천황이 친히 웅습(熊襲)을 쳤는데 적의 화살에 맞아서 붕(崩)하였다고 하였다)」日本書紀仲哀天皇紀 9年條 일본서기에는 중애천황이 웅습(熊襲)을 칠 때인 재위 8년 9월에 죽었다고 적혀 있으나 실제로는 재위 3년 9월에 죽었다. 그런데도 중애천황이 재위 9년 2월에 죽은 것처럼 적혀 있는 것은, 중애천황기에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의 아이인 응신(應神)을 재위 9년 12월에 낳았다고 왜곡해 놓은 것이 탄로 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중애천황기를 적을 때 처음에는 중애천황이 재위 8년 9월에 죽었다고 적고, 덧붙여 A.D 247년에 멸망한 가야계 왕조인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A.D 390년에 세워진 백제계 왕조인 응신조(應神朝)가 동일한 천황가(天皇家)인 것처럼 왜곡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가 중애천황 9년 12월에 중애천황의 아이인 응신을 낳았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나 이렇게 적어 놓고 뒤에 보니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이 죽은지 15개월 후에 응신을 낳았다는 모순이 발견되었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가 허리에 돌을 감아 10달이 되어도 아이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왜곡하였으나, 이것도 설득력이 없자 아예 중애천황의 사망시기를 재위 8년 9월에서 재위 9년 2월로 왜곡하였다. 뒤에 나오지만 응신천황(應神天皇)은 A.D 390년에 즉위한 대화왜(大和倭) 천황이고 신공황후는 A.D 247년에 죽은 구주왜(九州倭) 섭정왕이므로 서로 다른 천황가(天皇家)이고 존재시기도 140여년 차이가 난다. 신공황후(神功皇后) 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기장족희(氣長足姬)로 적혀 있고 삼국지와 삼국사기에는 비미호(卑彌乎)로 적혀 있다. 산해경(山海經)을 보면 부여 무리들이 기장을 먹고산다고 적혀 있는데, "氣長足姬"는 "기장을 먹는 곳에서 온 황후"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일부 사학자들은 위 "氣長"을 경남 기장으로 보고 신공황후가 기장에서 살다가 구주로 건너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공황후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세오녀의 딸로 추정되므로, 신공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거주한 영일군 동해면 일월리에서 살다가 부모와 같이 동해(東海)를 건너 구주로 갔다. 따라서 기장족희(氣長足姬)는 기장에 살던 여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일부 사학자들은 세오녀(細烏女)와 신공황후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정시 8년(A.D 247년)에 죽었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100세에 죽었으므로, 신공의 출생년도는 A.D 148년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연오랑과 세오녀는 부부지간으로 A.D 15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왕과 왕비가 되었는데, 이때 신공의 나이는 불과 11세였다. 따라서 신공은 연오랑의 부인이 아니고 연오랑과 세오녀 사이에서 난 딸로 추정된다. 비미호(卑彌乎)의 일본 발음은 "히미코"인데 "히(日)"는 천제(天帝)를 뜻하고 "미코"는 여자라는 말이므로, 비미호는 해와 달을 모시는 신녀(神女)라는 뜻이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신공황후가 신녀(神女)라고 적혀 있다. 「같이 한 여자를 왕으로 세우니 이름이 비미호이다. 귀신을 섬기며 능히 무리를 현혹케 하였다. 共立一女子爲王名曰卑彌呼事鬼道能惑衆」 일본과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김해 김씨 족보에 김수로왕의 둘째딸 묘견(妙見)이 신녀(神女)로 적혀 있고, 묘견이 구름을 타고 떠났다고 적혀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신공황후가 바로 묘견공주(妙見公主)라고 주장하였다. 비미호(卑彌乎)는 영일만 지역의 신관(神官) 집안 출신이고, 묘견(妙見) 공주는 김해 김수로왕의 둘째딸이므로 살았는 지역과 신분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 묘견을 모신 八代神社는 구주 八代에 있고 신공황후를 모신 住吉神社는 구주 福岡市에 있으므로, 묘견과 신공은 동일인물이 아니다.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연오랑과 세오녀에 관한 내용을 살펴본다.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 4년 정유(A.D 157년)에 동해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채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 한다) 하나가 있어 태우고는 일본으로 갔다..중략..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겨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는 역시 그 바위에 오르니 바위가 또 전처럼 싣고 갔다..중략..이때 신라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있었는데 이제 일본(日本)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니 연오랑이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도착하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짐(朕)의 비(妃)가 짜놓은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 하고는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와 아뢰자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되었다.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아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의 이름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三國遺事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4년(A.D 157년) 봄 2월 감물(甘勿), 마산(馬山) 2현을 설치하였다.」三國史記 新羅本紀 「임정현(臨汀縣)은 본래 근오지현(斤烏支縣)인데,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이다. 지금의 영일현(迎日縣)이다.」三國史記 雜志 제3 地理 「도기야(都祈野) 일월지(日月池)는 영일군 동해면 일월리이다.」輿地勝覽 삼국유사와 여지승람에 의하면 연오랑과 세오녀가 살던 곳은 영일군 동해면 일월리이다. 이곳은 전에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불렀고, 그 전에는 임정현(臨汀縣) 또는 근오지현(斤烏支縣)이라고 불렀다. 세오녀 일가는 신라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4년에 일월리 옆에 위치한 마산리에 마산현(馬山縣)을 설치하자 살 곳을 잃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세오녀(細烏女)가 살던 근오지(斤烏支)의 뜻을 풀이하면, 근(斤)은 크다 또는 위대하다는 뜻이고, 오(烏)는 까마귀로서 천제(天帝)를 상징하며, 지(支)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즉 근오지는 위대한 천제의 아들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만주에서 영일군 동해면 일월리로 이주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자칭 천제의 아들을 칭하였다. 앞에 나온 삼국유사 문구에 해와 달의 정기가 근오지(斤烏支)에 있었다는 말은, 해와 달에게 제사를 지낸 신관(神官)이 영일군 동해면 일월리에 있었다는 뜻이다. 또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갔다는 말은 해와 달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관(神官)인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말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다음해인 A.D 158년 7월 13일에 개기일식(皆旣日蝕)이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 해와 달이 빛을 잃자 신라 조정에서 사신을 일본으로 보내어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가져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신공황후는 남편인 중애천황에게 신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가 중애천황이 거절한다고 남편을 암살할 정도로 신라에 대하여 아주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보아 신공의 부모인 연오랑과 세오녀가 신라 사신에게 비단을 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중애천황 8년(실제 3년, 실제년도 A.D 167년) 가을 9월 군신에 조(詔)하여 웅습(熊襲)을 칠 것을 의논하라 하였다. 그때 신(神)이 있어 황후에게 당부하기를 "천황은 어찌하여 웅습이 불복하는 것을 걱정하는가. 이는 려육(려肉)의 공국(空國)입니다. 거병(擧兵)하여 토벌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이 나라보다 훨씬 나은 보물이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처녀의 눈썹 같고 진국(津國)을 향하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눈이 부시는 금, 은, 채색(彩色)이 많이 있습니다. 이 나라를 고금신라(고衾新羅)라 합니다."」日本書紀 신공황후는 중애천황이 신라를 치자는 신공황후의 말을 듣지 않자 중애천황을 암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신공황후의 섭정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는 비미호(卑彌乎)가 자위왕(自爲王)이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신공황후가 중애천황을 암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신공황후가 스스로 왕이 된 후 대란이 일어나 수년간 서로 싸우다가 같이 신공황후를 섭정왕으로 세웠다. 「其國本亦以男子爲王住七八十年倭國亂相攻伐歷年乃共立女子爲王名曰卑彌呼」三國志魏志 倭人傳 일본서기 신공황후본기에는 신공황후가 정식으로 섭정왕이 된 시기가 A.D 201년으로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비미호가 신라 아달라이사금에게 사신을 보내어 여왕이라 칭한 해는 A.D 173년이다. 앞에 나온 내용을 정리하면 신공은 A.D 157년에 부모인 연오랑, 세오녀와 같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중애천황 2년(A.D 166년)에 중애천황의 제3비(妃)가 되었고, 중애천황 3년(실제연도 A.D 167년)에 중애천황을 암살한 후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이때 내란이 일어나 수년간 서로 싸운 끝에 신공황후가 승리하여 A.D 173년에 정식으로 섭정왕이 되었다. 백제에 복속 일본열도왜는 백제가 건국된 A.D 205년에서 왜가 구태백제와 같이 신라를 공격한 A.D 208년 사이 어느 해부터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일본서기 흠명천황기를 보면 임나의 왜가 백제의 초고왕, 구수왕 때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고 적혀 있다. 「흠명천황 2년(A.D 141년) 가을 7월 전략..왕은 임나의 한지(汗岐)들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이 당시의 한지(汗岐)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자제(子弟)로 알고 그대는 나를 부형(父兄)으로 알았다. 후략」 위 문구에는 임나에 속한 왜(倭)가 백제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긴 내용만 나온다. 이 시기 대마도는 야마대연맹에 소속되어 있었고, 야마대연맹에 소속된 대마도의 왜(倭)가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것은 야마대연맹이 백제를 종주국으로 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칠지도 명문(銘文)에는 왜왕이 백제의 후왕(侯王)으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왜(倭)가 백제의 보좌(補佐)였다고 적혀 있다. 신공황후기에 의하면 일본열도왜는 신공황후 때부터 백제가 교류하였다. 「신공황후 46년(일본서기년도는 A.D 246년이나 실제년도는 A.D 205-208년경) 사마숙니(斯摩宿示爾)를 탁순국(卓淳國)에 보냈다. 탁순왕 말금한지(末錦旱岐)는 사마숙니(斯摩宿니)에게 고하여 갑자년 7월 중순에 백제인(百濟人) 구저(久저),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의 3인이 우리 땅에 와서 "백제왕은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국(貴國)이 있다는 것을 듣고 신(臣)들을 보내 그 귀국에 가게 하였습니다. 고로 길을 찾아서 그 나라에 가고자 합니다"..중략..그래서 사마숙니(斯摩宿니)는 겸인(겸人) 이파이(爾波移)와 탁순인(卓淳人) 과고(過古) 둘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王)을 위로하게 하였다. 백제의 초고왕은 기뻐하고 후대하였다.」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의 연도는 실제년도와 일치하는 부분, 실제년도보다 22년이 늦어져 있는 부분, 실제년도보다 28년 또는 120년이 앞당겨져 있는 부분, 실제년도와 관계없이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로 늦추어져 있는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위 신공황후기 46년조는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과 교류한 사실이 없는 것처럼 왜곡하기 위하여 실제년도와 관계없이 백제관련 기사를 모두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에 적어 놓은 것이다. 「신공황후 49년(일본서기년도는 A.D 249년이나 실제년도는 A.D 208년경) 전략..모두 탁순(卓淳)에 모여 신라를 쳐서 파하고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록國), 아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沈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그 왕인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사를 끌고 와 모였다. 후략」 신공황후 49년에 일본열도왜와 백제가 같이 군사활동을 벌여 빼앗은 땅을 백제가 모두 차지하였다는 것은 일본열도왜가 백제의 후국(侯國)이었기 때문이다. A.D 230년에 신공황후는 백제로부터 칠지도 등 각종의 중보(重寶)를 받았다. 「신공황후 52년(일본서기년도는 A.D 252년이나 실제년도는 A.D 230년) 백제가 칠지도(七支刀)..중략..등 각종의 중보(重寶)를 바쳤다.」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에는 백제왕이 칠지도를 만들어 왜 후왕(侯王)에게 하사(下賜)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신공황후기에는 거꾸로 백제왕이 신공황후에게 바친 것으로 적혀 있다. 야마대연맹의 위나라 복속 위지(魏志)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경초(景初) 2년(A.D 238년)에 구태백제의 적국인 위나라와 교류하였고, 2년 뒤인 정시(正始) 원년(A.D 240년)에 위나라로부터 조서(詔書)와 인수(印綬)를 받고 정시 8년(A.D 247년)까지 위나라에 복속하였다. 신공황후가 당시 구태백제의 적국인 위나라에 복속한 것은 위나라의 힘을 빌어 구태백제의 세력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신공황후 39년(일본서기에는 A.D 239년조에 적혀 있으나 위지에 A.D 238년조에 적혀 있다) 이 해는 태세(太歲) 기미(己未)이다. 위지(魏志)에 말하였다. 명제(明帝) 경초(景初) 3년 6월에 왜의 여왕이 대부(大夫) 난두미(難斗米) 등을 보내어 군(郡)에 와서 천자를 알현할 것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태수 등하(鄧夏)는 관리를 딸려서 경도(京都)로 보냈다.」 「신공황후 40년(A.D 240년) 위지에 말하였다 정시(正始) 원년에 건충교위(建忠校尉) 제휴(梯携) 등을 보내어 조서(詔書)와 인수(印綬)를 가지고 왜국에 가게 하였다.」 「신공황후 43년(A.D 243년) 위지에 말하였다. 정시 4년에 왜왕이 다시 사자인 대부(大夫) 이성자액야약(伊聲者掖耶約) 등 8인을 보내 헌상 하였다.」 일본열도왜와 위나라간의 사신교류 등을 적은 부분은 일본서기년도와 위지년도가 대체로 일치한다. 이는 위지 왜전을 발췌하여 일본서기 해당년도에 적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서기에 왜(倭)와 위(魏)나라가 교류한 내용이 왜 적혀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신공황후 시기 한반도 세력과 일본열도왜와의 관계를 살펴본다. 한국의 신지들과 위나라간의 전쟁 A.D 205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왕 구태는 무리를 이끌고 공손강이 지금의 황해도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건국한 후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하고, 이어서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가야 일부 지역을 복속시켰다. 이때 건국된 구태백제는 공손씨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그 후 A.D 238년에 위나라의 사마선왕이 요동의 공손씨(公孫氏)를 정벌하면서 대방군(帶方郡)에도 몰래 태수를 보내어 대방군을 접수하자 한국의 신지(臣智)들은 처음에는 구태백제의 동맹세력인 요동의 공손씨가 보낸 관리인 줄 알고 인수(印綬)를 받으며 좋아했으나, 위나라가 대방군 북쪽에 나라군(樂浪郡)을 설치하는 것을 보고, 대방군을 접수한 사람들이 공손씨의 관리가 아니고 공손씨를 정벌한 위나라의 관리임을 알자 이에 반발하여 위2군(魏二郡)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 때 구태백제는 구태백제의 동맹세력인 대방군 지역의 한국 신지들을, 고주몽고구려는 고주몽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어 있던 대방군 북쪽과 강원도 동예 지역의 한국 신지들을 각 지원하였고, 야마대연맹의 신공황후는 위나라의 이간전술에 말려들어 종주국인 구태백제를 배반하고 경초(景初) 2년(A.D 238년)에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를 위나라의 대방군에 보내어 조공하고, 정시 원년(A.D 240년)에 위나라로부터 인수를 받는 등 위나라의 동맹세력이 되었다. 위나라와 한국의 신지들간의 전쟁은 경초 2년(A.D 238년)부터 정시(正始) 7년(A.D 24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전쟁은 초기에는 구태백제와 고주몽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한국의 신지들이 우세하였으나, A.D 246년에 관구검(관丘儉)의 공격이 있은 후부터 위나라가 우세해져서, 한나해(韓那奚) 등 수십국이 위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위나라가 승리하였다. 신공황후 사망 후 야마대 연맹 와해 한국의 신지(臣智)들과 위나라간의 전쟁이 끝난 후 구태백제는 A.D 247년에 구노국(狗奴國)의 비미궁호소(卑彌弓呼素)를 시켜 구태백제를 배반한 신공황후를 공격하여 죽였다. 「正始八年(A.D 247年) 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宮呼素不和遣倭載斯烏越等詣設相功擊狀遣塞曹椽 史張政等因詔書黃幢拜假難升米爲檄告喩之卑彌呼以死」三國志 魏志 倭人傳 위 구노국(狗奴國)은 김해 방면의 구야한국인(九邪韓國人)들이 구주로 이주하여 세운 구야한국(九邪韓國)을 삼국지를 지은 진수가 멸시하여 부른 명칭이다. 신공황후 때는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의 세력권이 對馬島, 九州, 四國과 本州의 반 이상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야마대연맹의 세력권에 들어 있던 구노국(狗奴國)이 신공황후와 싸운 것을 보면 구노국은 신공황후가 구태백제를 배반하고 위나라에 복속한 경초 2년(A.D 238년)부터 신공황후와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 A.D 247년에 구노국은 신공황후를 공격하여 죽인 후 야마대연맹왕으로 구노국계 남자왕을 세웠다. 이에 신공황후계가 반발하여 천여 명이 죽는 대란이 일어났고, 이 대란은 비미호의 종녀(宗女) 일여(壹女)를 왕으로 복립(復立)한 후 수습되었으나, 이 내란으로 야마대연맹은 와해되었다. 「卑彌呼以死..更立男王國中不服更相誅殺千餘人復立卑彌呼宗女臺女(壹女?)年十三世爲王國中遂定」魏志倭人傳 5. 야마대연맹 와해 후부터 응신조 탄생 시까지 신공황후가 사망한 A.D 247년에 일어난 내란으로 야마대연맹이 와해되자 구태백제는 일본열도를 통치함에 있어 백제왕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연맹왕(聯盟王) 통치체제를 버리고 소국분립(小國分立) 통치체제로 일본열도를 직할통치하였다. 이 소국분립 통치체제는 A.D 390년에 백제가 대화 지역에 응신조(應神朝)를 세울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 시기 백제는 일본열도에 있는 수십 개의 백제계 소국에 각 담로왕(담魯王)을 보내었다. 그 때문에 일본서기에는 이 시기에 일본천황에 관한 역사가 적혀 있지 않고 백제왕에 관한 역사 즉 백제 근구수왕, 근초고왕, 침류왕의 즉위와 사망에 관한 사실이 연도가 120년 인상된 채 신공황후기에 짜깁기 되어 있다. 이는 A.D 247년 신공황후 사망후부터 A.D 390년 응신천황 즉위 시까지 천황공백기를 감추고 천황의 연속성을 가장하기 위하여 응신천황의 즉위시기를 연도를 120년 앞당겨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적어 놓았기 때문에 신공황후 사망 후부터 응신천황 즉위 사이에 일어난 사실도 연도를 120년 인상하여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공황후 55년(A.D 255년) (근)초고왕 사망(A.D 375년)하다.」[참고:255=375-120.] 「신공황후 56년(A.D 256년) (근)구수왕 즉위(A.D 375년)하다.」[참고: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달리 전 왕이 죽은 다음 해를 다음 왕의 즉위 년도로 보기 때문에 256년으로 적혀 있다.] 「신공황후 64년(A.D 264년) (근)구수왕 사망(A.D 384년)하다.」 「신공황후 65년(A.D 265년) 침류왕 사망(A.D 385년)하다. 왕자 아화(阿花)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辰斯)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 6. 응신조 시기 16세 응신천황(應神天皇) 응신조(應神朝)는 대화(大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이다. 백제는 A.D 247년에 야마대연맹이 와해된 후 백제왕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연맹왕 통치체제를 버리고 소국분립(小國分立) 통치체제로 일본열도를 직할통치하다가 A.D 386년에 고주몽고구려의 태자가 된 담덕(談德)이 온 힘을 집중하여 백제 공격을 준비하자 이에 다급해진 구태백제는 고주몽고구려 방어에 일본열도왜를 이용하기 위하여 A.D 390년에 대화(大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소국연맹체인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 일본서기에는 응신천황이 A.D 270년에 즉위한 것처럼 적혀 있으나, 응신천황기 3년조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기(辰斯王紀) 8년(A.D 392년)조 사실이므로, 응신천황이 즉위한 해는 A.D 390년이다. 「응신천황 3년(일본서기년도 A.D 272년 실제년도 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紀角宿니), 우전시대숙니(羽田矢代宿니), 석천숙니(石川宿니), 목도숙니(木도宿니)를 보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紀角宿니)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이 시기 백제가 응신조(應神朝)를 九州에 세우지 않고 대화 지역에 세운 것은 구태백제가 야마대연맹을 복속시킨 후 백제계 이주민들이 이주 여지가 거의 없는 九州보다 이주 여지가 많은 本州의 이세, 대화 등지로 대량 이주함으로써 이세, 대화 등지가 백제계 이주민들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응신조는 건국 후부터 구태백제를 보좌(補佐)하였는데, 구태백제는 A.D 391년에 응신조 왜 무력을 배경으로 신라를 위협하여 신라왕자 미해(美海)를 인질로 받아 신라를 복속시켰다. 그 후 A.D 399년에 응신조 왜는 구태백제를 보좌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가 다음해 A.D 400년에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고, 그 때부터 A.D 479년까지 대마도에 세워진 임나연정의 통제를 받았다. 7. 임나연정 시기 A.D 400년에 광개토왕은 대마도(對馬島)를 점령한 후, 이어서 대화왜(伊), 구주왜(倭) 무리들로부터 항복을 받고, 10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정(聯政)을 설치하여 그 치소(治所)를 대마도에 두었는데 이를 임나연정이라 한다. 이 임나연정은 A.D 479년까지 존속하였다. 위 임나연정의 임무는 한반도, 대마도, 일본열도를 군사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고, 임나연정 시기 구주왜와 대화왜는 임나연정왕(任那聯政王)에게 복속하였다. 송서(宋書)에 의하면 임나연정의 초대 왕은 찬(讚)이다. 그 뒤 임나연정왕 진(珍)은 송으로부터 안동장군왜국왕(安東將軍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A.D 443년에 임나연정왕 제(濟)는 송으로부터 안동장군왜국왕(安東將軍倭國王) 작호를 받았고, A.D 451년에 다시 송으로부터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왜국왕(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A.D 462년에 임나연정에 내분이 일어나 반고주몽고구려계가 승리하였다. 이때부터 임나연정은 고주몽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독립세력으로 변하였고, 고주몽고구려는 임나연정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 해 왕세자 흥(興)이 송(宋)으로부터 안동장군왜국왕(安東將軍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았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연정에 내분이 일어난 연도가 A.D 464년으로 적혀 있고, 사신을 보낸 상대국이 오국(吳國)으로 적혀 있다. 이 시기는 양자강하류에 송(宋)이 건국되어 있을 시기이고, 송서(宋書)에 왜왕 흥(興)이 송(宋)에 사신을 보낸 연도가 A.D 462년으로 적혀 있으므로, 임나연정에 내분이 일어나 제(濟)가 퇴진하고 왕세자 흥(興)이 즉위한 연도는 A.D 462년이다. 이 시기 일본서기 연도는 실제보다 2년 늦어져 있다. 일본서기에는 A.D 465년에 기소궁숙니(紀小弓宿니) 등이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기소궁숙니 등이 모두 죽었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가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간 사실이 A.D 463년조에 적혀 있다. 이때도 일본서기년도와 실제년도간에 2년 차이가 난다. A.D 478년에 임나연정왕 무(武)가 송(宋)에 사신을 보내어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7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작호를 내려 달라고 요청하여 송으로부터 백제를 빼고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작호를 받았다. A.D 479년에 축자(筑紫)의 안치신(安致臣), 마사신(馬飼臣) 등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고주몽고구려를 쳤으나 고주몽고구려 수군에게 패배하였다. 송서(宋書)에는 이때 고주몽고구려 수군(水軍)과 싸운 주역이 무(武)로 적혀 있다. 이때 축자(筑紫)의 안치신(安致臣) 등이 임나연정왕 무(武)의 지휘 아래 있었다는 것은 A.D 479년까지 구주왜가 임나연정에 복속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임나연정은 이 전쟁에 패배한 후 와해되었다. A.D 502년에 양(梁)나라가 건국되었을 때 무(武)는 양나라로부터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는 작호(爵號)를 받았다. 무(武)는 임나연정의 마지막 왕이므로, 양서(梁書) 문구를 언뜻 보면 임나연정이 A.D 502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무(武)가 A.D 502년에 양나라로부터 정동장군 작호를 받은 것은 임나연정이 A.D 502년까지 존속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와해된 후 A.D 487년에 대마도가 백제에 점령당하였는데, 그 후 A.D 501년에 일어난 백제왕실의 내분으로 백제가 대마도를 돌볼 틈이 없자 무(武)는 그 틈을 타서 A.D 502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정동장군 작호를 받은 것이다. 8. 임나연정 와해 후 A.D 479년에 임나연정이 와해된 후부터 대마도왜(對馬島倭), 구주왜(九州倭), 대화왜(大和倭)는 각 독립세력이 되었다. A.D 487년에 대마도(對馬島)의 기생반숙니(紀生磐宿彌)가 고주몽고구려와 통교하여 삼한(三韓)의 왕이 되어 백제의 동로(東路)를 막으려 하다가 패배하여 대마도는 백제에 점령당하였다. 9. 인현조부터 일본국 건국 시까지 A.D 487년에 대마도를 점령한 백제는 다시 구주왜와 대화왜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대화 지역에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인 인현조(仁賢朝)를 세웠다. 이 인현조도 응신조(應神朝)처럼 백제를 보좌하였다. A.D 501년에 대화왜가 무령왕(武寧王)을 지원하여 동성왕(東城王)을 몰아낸 후부터 대화왜와 백제와의 관계가 역전되어 대화왜는 종전까지 종주국으로 섬기던 백제를 노골적으로 무시하였고, 백제는 대화왜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A.D 527년에 계체천황(繼體天皇)이 모야신(毛野臣)을 임나(任那)에 보내어 신라에 패한 바 있는 남가라(南加羅)와 록기탄(록己呑)을 회복하여 임나(任那)에 합치고자 하였으나, 구주왜 축자국조반정(筑紫國造磐井)의 방해로 중단하였다. 이는 신라가 구태백제의 세력권에 들어 있던 대마도 내 소국인 남가라, 록기탄을 점령하자 시류(時流)에 민감한 구주왜가 구태백제의 후국(侯國)인 대화왜(大和倭)에서 이탈하여 신라 편에 붙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구주왜는 A.D 522년경부터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백제가 일본열도왜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한 후부터 구주왜가 백제나 대화왜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A.D 528년 11월에 계체천황(繼體天皇)은 장군 물부추록화(物部추鹿火)를 보내어 반정(磐井)을 토벌하였다. 이 토벌이 성공한 후 계체천황(繼體天皇)은 추록화(추鹿火)에게 독자적으로 축자(筑紫) 서쪽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 구주왜 정부는 대화왜 정부와 별도로 수(隨), 당(唐)에 사신을 보내었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A.D 552년에 백제를 통하여 불교가 전해졌다. A.D 554년에 흠명천황(欽明天皇)이 백제를 지원하기 위하여 대화왜(大和倭) 군사를 한반도로 보냈으나 신라에 패배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 대화왜(大和倭) 군사가 가라(加良)로 적혀 있다. A.D 587년에 불교가 수용되었다. A.D 603年에 12계(階)의 관위(冠位)를 만들었고, A.D 604년에 쇼오토쿠 태자가 17조 헌법을 만들었다. A.D 607년에 대화왜는 수(隋)에 사신을 보내었고, 같은 해 구주왜도 수(隋)에 사신을 보내었다. 구당서(舊唐書) 일본전(日本傳)에는 왜국전(倭國傳)과 일본전(日本傳)이 동시에 수록되어 있고 "日本國은 倭國의 別種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수나라가 일본열도왜를 구주왜와 대화왜로 구분하고 있다는 뜻이다. 수서(隋書) 왜국전(倭國傳)을 보면, A.D 607년에 왜왕(倭王) 다리사북고(多利思北孤)가 수황제(隨皇帝)에게 보낸 국서 내용에 "日出處의 천자가 日沒處의 천자에게 서신을 보내노니..후략"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구주왜왕(九州倭王)이 천자(天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이 시기 구주왜(九州倭)가 대화왜(大和倭)로부터 독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수서 왜국전에는 왜왕(倭王)의 후궁(後宮)이 6-7백명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구주왜왕의 세력이 강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A.D 646년에 대화왜는 대화개신(大化改新)을 하여 중국의 정치 및 경제체제를 도입하였다. 이 대화개신 이후 대화왜(大和倭)는 점차 중앙집권체제로 변하였다. 구주왜는 A.D 648년(貞觀 22年)에 당에 사신을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당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중지되었다. 이는 구주왜의 세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 - 타 오르는 "불(부여)"을 상징하는 백제왕관(무녕왕릉 출토) |
10. 일본국 건국 후 A.D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A.D 662년에 대화왜가 보낸 백제부흥군마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백제관리와 지배층이 일본열도로 대량 이주하였다. A.D 670년에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었다. A.D 698년부터 구주왜의 연호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로 보아 일본국이 일본열도 전지역을 장악한 시기는 A.D 698년경이다. A.D 710년에 나라(奈良)에 대규모인 인위적인 수도를 만들었다. A.D 712년에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하고, A.D 7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였다. |
첫댓글 역사에 관심 많은 문우님들
시간 나실때 열독해보세요
역사를 아는 민족이
문화 민족입니다
틈틈히 시간 내셔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ㅎ
아예~~
짬짬히 읽어 볼게요
짬짬이 읽을 수록
우리역사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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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숭신천황(崇神天皇:B.C 97년 즉위)
B.C 194년 이후에 진한계(辰韓系)와 변한계(弁韓系) 이주민들이 만주의 선진 농업기술과 문명을 가지고 일본열도로 이주함으로써 일본열도에는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진한계(辰韓系)는 本州의 출운(出雲), 파마(播磨), 단마(但馬) 등지로 이주하였고, 변한계(弁韓系)는 九州, 뇌호내해(瀨戶內海) 등지로 이주하였는데, 九州로 이주한 변한계 이주민들이 나라 체계를 갖춘 시기는 숭신천황(崇神天皇) 때이다.
A.D 670년에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었다. A.D 698년부터 구주왜의 연호 사용이 중단되었다. 이로 보아 일본국이 일본열도 전지역을 장악한 시기는 A.D 698년경이다.
A.D 710년에 나라(奈良)에 대규모인 인위적인 수도를 만들었다.
A.D 712년에 고사기(古事記)를 편찬하고, A.D 7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였다.
지금 시간이 나서
쭉 읽어보니
좋은 역사 자료이네요
이런 자료들을
어디서 수집하셨는지
산악대장님 멋지십니다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 같은 건 어찌 생각도 못해 볼
방대한 역사자료입니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공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즐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