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날 설날..
오랫만에 고향을 찾았다.
충북 옥천군 청성면 고당리 179번지는 내가 태어난 곳이다.
고당리라는 이름은 주민등록 등본을 발급받으면서 알게된 이름이고
어렸을때는 "월고지" "월구지"라고 불렀다.
이곳 고당리는 "월고지"와 "강촌" "높은벼루"라는 마을이 합쳐서 고당리라 부른다.
"월고지"는 임진왜란 당시 강릉 유씨 유득승이란 분이 전란을 피해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이후 금녕김씨 김우익이란 분이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후 1700년께 여양 진씨 진도천 어르신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높은벼루"에는 여양진씨 집성촌이 형성되었고.
"강촌"에는 강씨들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고당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들을 합쳐서 한 마을로 이름 지으면서
고현(高峴)의 고(高)자와 원당(元堂)의 당(堂)자를 한자씩 취하여 고당리라 하였다.
고현(高峴)은 “높은베루”를 한자로 쓰면서 높을 고(高), 고개 현(峴), “높은 고개”라는 뜻으로
고현이라 하였는데 원뜻은 “벼루”란 옛말로 “벼랑” “언덕”이란 말이 되므로 “높은 벼랑”이란 뜻이다.
이곳 지형을 볼 때 “높은 벼랑(베랑)”이란 말은 옛 조상들의 아주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원당(元堂)은 원래 “월고지”를 한자로 쓴 것인데 “고지”는 옛말로 “집”이란 말이므로
“원래의 집”이란 뜻이 되겠다. “원래”를 발음할 때 “월”로 발음이 되므로 발음대로 쓰면
“월고지”가 되며 월곶(月串) >월고지 >월꼬지 >월꾸지로 음운변화 되었다.
예전에 이곳에 조부모님이 사시다가 심천면 길현리 당재마을로 이사했는데
이사시기는 알수 없지만 어렸을때 이곳에 놀러왔던 기억이 새롭다.
이곳 "월고지" 사람들은 예전에 약 8km떨어진 심천장으로 장을 보러
다니시곤 하였는데..
어린시절 자란 곳에서 이곳까지가 4km가 넘으니
난 초등학교도 들어가기전 4km를 걸어서 이곳에 놀러왔던 것이다.
주황색지붕이 있던곳이 조부모님이 살으셨던 곳 인듯 싶다.
어설픈 기억속으로만 생각나는 곳이다.
고당리의 또다른 곳 "높은벼루"
이곳은 여양진씨의 집성촌이다.
이 고현마을 주변으로 여양진씨 조상님들의 산소가 밀집해 있다.
이곳이 바로 여양진씨가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예전에 이곳을 북망산이라 불리웠던 기억이 난다.
이 주변의 묘지들은 대부분 여양진씨 집안들이다..
세거비 앞에서 바라본 금강휴게소..
좌측에 보이는 도로가 예전의 경부고속도로이고
우측으로 나있는 도로가 현재의 도로이다.
과거 우산리에서 옥천으로 가기위해서는 저 구 교량밑의
철교를 건너야 했는데 어린시절 교량 및 철교를 걷는
마음졸임이 생각나게 된다.
어린시절부터 중학교까지 보낸 이곳 당재..
이곳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길현리인데
이곳도 당재(당현), 뒤꾸리(후곡), 길가막골(길동) 을 합쳐서 길현리라 부른다.
이곳에서 초등학교 까지는 약 5km,
중학교까지는 약 8km를 걸어다닌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여러가구가 살아 학생들도 많았는데
그때 사시던 분들이 지금은 3집밖에 안 계신다.
가끔 놀려갔던 동이면 우산리 외가동네.
초등학생 시절 무슨 용기로 우측의 산길을
경운기를 몰고 당재에서 이곳까지 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불가이다..
우측의 묘지위에서 비료포대를 엉덩이에 깔고
썰매를 타던 기억도 이제 추억으로 남는다..
일년에 한두번 아버지와 조부모, 외조부모 산소를 찾다보면
반백년인 지금 그시절이 아련히 떠올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누군가가 나도 저렇게 되었을때 추억속에 그리워할까 하는 마음이 말이다.
고속도로로 접어들기 전 금강휴게소 주변에 위치한
옥천 옻산업특구..
다음 기회에는 이길을 걸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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