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1. ‘정치철학’은 왜 필요하고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정치철학자 데이비드 밀러는 『정치철학』이라는 정치철학 입문서를 통해 ‘정치철학’의 기본적 원리와 정치철학이 다루고 있는 핵심적 이슈를 안내한다. 그는 정치철학이란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본성 원인 및 그 효과에 관한 탐구”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우리가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규칙과 관행 및 제도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고 본다. 누군가는 현실적 정치가들은 ‘정치철학’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철학’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의심하지만, ‘정치철학’은 좋은 정치에 대한 판단을 위한 중요한 기준과 준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더 중요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정치’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논증을 거치지 않은 정치적 선택은 결국 선동과 포퓰리즘적 정치의 손쉬운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 중세까지의 ‘정치’의 관심은 지도자의 자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엘리트와 평민들의 계급적 구분이 명확하던 시절, 정치권력은 소수에게 주어졌으며 그러한 권리는 당연하게 여겨져왔기 때문에,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떤 도덕적 자질과 정치적 능력을 가져야 하는가가 중요했다. 하지만 근대의 경제사회적 변화는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었고 정치철학의 초점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사상은 어느 시대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 있는가 하면, 시대적 변화 속에서 개념과 의미가 달라지는 중요성의 변화를 겪게 된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제기된 정치철학의 문제는 ‘정치권력’의 소재에 관한 문제였다.
3. 정치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평민들의 사회경제적 성장에 따라 부각되었다. 왕과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정치권력에 대한 독점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고 정치권력의 확산에 대한 자연스런 논의가 시작되었다. ‘자연권’사상과 ‘인권’에 대한 논의는 전통적인 엘리트들의 권한을 축소시켰고 일시적으로 최고 통치자들을 중심으로 한 절대국가 체제로 이어졌다. 최고 통치자와 평민들의 제휴를 통한 국가체제의 완성이다. 이렇게 형성된 국가체제 속에서 권력은 절대적이었고 개별적 존재를 압도하는 힘이었다. 홉스와 헤겔의 정치이론 속에서 국가의 정치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계몽사상과 인권의 확산 속에서 권력은 평민들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도출되었고 그러한 변화는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4. 지금 민주주의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최고의 정치체제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도 대중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끊임없이 공격받았고 의심의 대상이었다. 대중은 정치적 판단을 위한 자질과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정책’을 통해 권력을 활용한다. 이때 필요한 정치적 판단은 사실적 정보에 대한 숙지, 정책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이해력, 정책과 관련된 도덕적 원칙의 고려가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이 대중들에게 부족하다는 논리로 특정 엘리트들에게 집중된 정치체제를 주장한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슘페터는 이런 이유로 민주주의를 의심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오래 전 플라톤의 ‘철인정치’에서 그 싹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철학은 이러한 정치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대중의 능력과 자질에 대한 정당성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하여 현재의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민주주의란 전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문제가 아니라, 민중 전체에게 국가적 사안에 대한 최종적 권위를 부여하려는 지속적인 싸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4. 대중에게 권력을 부여한 민주주의에서 최종적 결정은 ‘다수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다수자-소수자’ 문제가 발생한다. 다수결이 필요한 문제는 대부분 논쟁적인 주제들이다. 이때 소수자들은 주제에 대하여 열성적이거나 지속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이 주축이 된다. 다수자들은 오히려 그런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정책적 결정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소수자’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일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성소수자’들의 요구에 대한 부정적 태도로 인해 그들의 주장은 채택되지 않고 견해를 발표할 공적인 공간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행동한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상황을 일방적인 ‘다수결’의 원칙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치철학의 방향이다.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과 견해를 제시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며 충분한 토론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구에 대한 최종적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공적인 담론장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소수자에 대한 고려는 공동체를 살아가는 같은 시민에 대한 존중이며, 또한 나또한 다른 영역에서 ‘소수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한 결정이다.
5. 정치철학에 다루는 또 다른 중요 주제는 ‘자유’에 관한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자유는 대단히 복합적이고 미묘한 문제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최소한의 보호 이외에는 국가가 개인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범위와 능력의 차이가 명확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유’의 절대적인 주장은 결국 불평등과 차별로 이루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19세기 ‘자유’에 관한 바이블로 여겨지는 <자유론>에서 밀은 ‘자기관계’적 행동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위해’를 가하는 행동이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위해’라는 개념을 물리적 폭력이나 직접적인 상해에 국한시킨다면 현재 발생하고 있는 타인에 대한 다양한 위험성은 제지할 수 없게 된다. 가령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나 행동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하거나, 타인을 모욕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단순한 ‘불쾌감’을 넘는 행동이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제한을 둘러싼 민감성을 두고 여전히 논쟁 중인 것이다. ‘위해’의 개념을 넓게 해석하는 서구적 관점의 확산은 모욕과 증오를 위해적 행위로 보는 반면 관습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러한 행위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6.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기관계적 행위에는 결코 개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밀의 단순한 원리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분명해졌다. 즉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행동이 지니는 가치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과할 수 있는 비용과 비교하고, 나아가 그런 비용을 회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숙고하여 좀 더 복잡한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치철학은 정치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야 할 행동의 방향을 고민하는 것이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자유’만을 주장하고, 자신이 지닌 ‘권리’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판단을 위해서도 정치철학적 사유는 필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적 대응을 벗어나 최소한 타인의 행동에 대한 수용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기준을 수립하고 그러한 논리를 통해 행동하게 만드는 방향을 제공하는 것이다. ‘논증’은 자신의 주장과 대립되는 주장을 상호비교하고, 자신의 주장을 객관적인 사례나 근거를 통해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 사고의 방법이 혼란스럽게 터져 나오는 정치적 혼란과 논쟁적 주장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결국 감정적 선동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타인이 만들어낸 주장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자율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어떤 생각이든 자신만의 필터링을 통해 다시 정리되어야 한다. 정치철학은 필터링의 과정에서 필요한 논거를 제시해준다. 올바른 행동은 치열한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