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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시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말한다. 사계절을 말한다. 인생의 나이로 본다면 봄은 어린아이들의 마음바탕과 같다. 봄이 되면 밭을 갈고 씨를 심듯이 어린아이가 태어나는 길로 그 마음바탕에 무엇인가 갈고 심어야 하는 건데 보통 보면 갈고 심을 줄을 모르고 그냥 방치해두고 있다.
그래서 보면 밭이란 밭은 갈고 심지 않아도 은연중에 잡초 또는 가시풀이 나기 마련이다. 이런 일반 자연적인 것을 볼 때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아도 무엇인가 마음바탕에 떨어져서 뭐가 나오게 된다. 잘못된 생각들이, 죄 짓는 생각들이 나오게 된다. 어른들은 이런 점을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걸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단순히 잘 먹이고 잘 입히고 그냥 세상교육을 잘 시키면 훌륭하게 되는 줄로 알고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아무리 세상에서 유명하고 높은 자리에 앉아있어도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들어가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으냐? 그들이 공부를 못해서 그런 거냐? 사람이 안 된 상태에서 일반지식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얼마든지 해치게 된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그 방법이 세상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주먹질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법을 이용을 해서 해친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이 법이 나빠서 그런 거냐?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안 됐다. 왜 사람이 안 됐을까? 세상의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람이 안 됐을까? 심지어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그 마음바탕에 뭐가 떨어지지를 않아서 그런 거냐? 뭐를 심지를 않아서 그런 거냐? 진리지식,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지를 않아서 그렇다. 진리지식은 사람을 만들게 하는 생명의 씨앗인데 그게 없어서 사람이 되어지지를 않아서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배우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가치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차원이 돼 있으니 이 차원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건데, 각 사람마다 마음이 있고 양심이 있는지라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본다면 자기 차원의 정도를 느낄 수가 있다.
사회가 어지럽고, 가정이 어지럽고, 국가가 어지럽고, 세계가 어지러운 이유가 어디 있느냐? 교훈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릴 때부터 사람의 마음바탕에 진리지식을 심어주지를 않았다. 이걸 알아야 한다. 애당초 진리지식을 마음바탕에 심어주었다면 현재의 우리 모두가 각자 상태가 이러지는 않을 거다. 우리가 세상에서 부자로 살자고 하는 소원 목적을 가질 필요는 없으나 세상에서 부자로 살고 가난하게 살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 됨됨이를 볼 수가 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뭘 가르치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가르쳐라. 계명을 가르쳐라. 왜 이 말씀을 하실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어떻게 성장이 돼야 바로 성장이 되는 것을 몰라서 이 말씀을 하신 거냐? 다 알고 우리를 위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게 안 믿어진다. 안 믿어지는 이게 불신이라. 교회에 다니면서 이 지식이 우선적으로 들어가지를 않고 안 믿어지는 이게 불신이라. 이것이 안 믿어진다는 그 면만 볼 때 이건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이 그 면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게 불신이라.
구약성경에 보면 아기를 낳으면 며칠 만에 하나님 앞에 할례를 하라고 하느냐?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하라고 했다. 그 할례가 뭘 의미하는 거냐? 그 안에 들어있는 사상과 정신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칩니다’ 하는 뜻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겠습니다. 내 마음대로 기르지 않겠습니다’ 하는 것이 그 안에 들어있다. 영적 이스라엘이요,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는 게 당연한 거다. ‘할례를 행하라’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씀이냐, 인간을 위해서 하는 말씀이냐? 인간 나를 위해서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 들리는 게 문제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지 않아도 세상에서 공부 잘할 수도 있고, 세상에서 유명하게 살 수도 있고, 세상에서 높임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거다. 그렇게 해서 아무리 잘 먹어봐야 하루 세 끼밖에 더 먹겠느냐? 그런가 하면 아무리 부자로 살아도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사람도 봤다. 세상에서 부자로 산다고 해서 오래 오래 살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으라는 법도 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죽을 때까지 쇠고랑을 차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공부를 하나도 안했는데도 농사를 지으며 편안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럴까?
아이를 낳자마자 그 마음바탕에 진리지식을 심어야 한다. 이게 신앙의 부모다. 신앙의 자녀들은 반드시 그렇게 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속화되고 타락이 되어서 주일날도 세상에서 요구하는 대로 다 따라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걸 모르실까?
진리지식이 없어서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는 채 고집을 부리며 세상을 원망하고, 그런 마음상태로 살아가다가 어떤 환난 고통을 겪을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사회적 국가적으로나 어떤 환난을 겪을지? 환난을 겪다가 겪다가 견디다 못해서 쓰러질 런지? 또는 미혹을 받고 유혹을 받아서 어떤 죄를 짓는 주동자가 되어서 일생을 비참하게 마칠지? 이건 모를 일이다. 진리지식으로 잘 가르쳐도 비뚤어지게 나가는 판에 기독교 일반적 종교적으로 자녀들을 교육을 시킨다면 바로 자란다고 장담을 할 수 있느냐? 세상 쪽으로 갈 런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 쪽으로는 가깝게는 못 가는 거다. 방향이 정 반대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날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의 마음 밭에 어떤 지식을 심어주어야 될지? 이 면에 대해서 무식한 상태다. 성경에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를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들을 볼 수가 있다. 물론 일반세상에서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들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탈된 훌륭한 것이다.
세상에서 훌륭한 것과,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것과는 근원적으로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면이다. 하나님 앞에서 신령천국에서 훌륭한 것은 불타질 세상에서 훌륭한 것과는 질이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부모가 참 많다. 마음바탕에 진리지식을 심어주지도 않으면서, 진리지식을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에서 훌륭하게 키우고 싶다고? 어디 한 번 키워봐라. 얼마나 잘 키우겠느냐? 진리지식이 들어가지 않으면 가치판단 평가성이 바로 나오지 않는데, 인간 속에 들어있는 지식 자체가 비뚤어져 있는데 무엇을 훌륭하다고 하는 거냐?
자식의 교육을 세상에서 찾으니 자식을 키우기가 힘든 거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키워봐라. 왜 사람노릇을 못하겠느냐? 왜 인간노릇을 못하겠느냐? 하나만 낳아서 제 마음대로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하는데 그게 훌륭하게 될지 안 될지, 자라다가 병들어서 죽을지, 자라다가 사고로 죽을지, 자라다가 어떤 죄를 지어서 병들어서 죽을지 어떻게 아느냐? 자기 속에서 나온 자식이라도 제 말을 듣더냐? 그러면서도 훌륭하게 키우고 싶다고? 왜 그렇게 어리석을까?
하나만 낳아 키우는 것도 힘들다고? 장가를 가지 말지. 가놓고 왜 그러느냐? 둘을 낳으려니까 억장이 무너지느냐? 셋을 낳으려니 앞이 캄캄하냐? 아예 가지를 말지. 이치를 생각을 해봐라. 한자 중에 네모(口-입구)는 방인데, 이 방 안 안에 열십자를 넣으면 밭전(田)이 되는데, 이 밭전(田) 아래에 힘력(力)자를 넣으면 사내남(男)이 된다. 그러니까 남자는 열심히 일을 해서 열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도 못 키워서 징징거린다면 이게 참 비극이다.
부모가 예수를 잘 믿고, 마음바탕이 바르고, 지혜지식적으로 자식들을 잘 키운다면 그 자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혜지식적으로 자라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이기고 살아갈 수가 있다. 그래서 가난한 집의 자식이나 부모형제들이 없는 자식들 중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대학을 가기도 한다. 그런 면을 보면 이건 부모가 그 자식을 기른 게 아니라 자식이 나름대로 사회에 적응해서 싸워서 이겨나가는 것이다. 그 열심 그 부지런함으로 사람이 바로 됐다면 세상에서 성공할 율이 많다. 사람이 부지런하지, 착실하지, 건강하지, 왜 못 살겠느냐?
세상에서 훌륭하게 된 사람들 중에는 천국을 염려 걱정해서 훌륭하게 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염려 걱정해서 세상에서 훌륭하게 된 사람이 많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도 세상에서 훌륭하게 된 인물이 많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분들이 세상에서 훌륭하게 된 것은 그들의 소원 목적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염려 걱정을 하다보니, 진실하게 살다보니 하나님께서 방편을 그렇게 쓴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정말 신앙 양심적으로 바로 살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볼 때도 쓸 만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면 세상에서 그 사람을 높이 올려준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려고 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이 이 사람을 보니 믿을 만하니까 높이 올려서 쓰는 거다. 이건 세상에게 잘 보여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는 것은 간사다.
그리고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세상에게 잘 보이려고 간사성을 떠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 ‘세상에서 잘 되고’ 하는 그 잘 되는 것을 천국까지 끌고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즉 예수를 믿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부귀영광에 굴려지는 그 좋은 면을 천국에까지 가서 그렇게 누리려고 한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정신은 물질적 육의 생각, 육의 정신, 육의 사상이라.
이런 사람은 예수 믿고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도 가난한 것처럼 생각을 한다. 이것도 육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걸 육의 생각인줄을 모른다.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면 예수를 안 믿었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하고, 예수를 믿으면서 부자가 되면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도 부자인 것으로 생각을 한다. 이게 다 육의 생각이다.
성경에 보면 모세나 다니엘이나 요셉이나 그 외에도 신실한 믿음의 선진들이 많이 있는데 이분들의 소원 목적이 이 현실세상의 성공 출세를 바라보고 간 것은 아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왕이 되어서 누리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바라보며 자기 백성들과 같이 고난을 받는 것을 더 기쁘게 여겼다고 했다. 다른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나 선지 사도들의 신앙이 다 그랬다.
그러면 이분들의 신령한 천국정신 사상이 어디서 나왔느냐? 요셉의 신앙, 모세의 신앙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씨앗을 누구로부터 받았느냐? 누구에게 길림을 받았느냐?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으로부터 받았다. 실모인 어머니 요게벳에게서 받았다. 그러니까 요게벳은 어머니로서 신앙심이 큰 어머니다. 이 신앙심으로 모세의 마음 밭에 진리정신을 심었다.
공주가 어린 모세를 데려다가 모세의 유모를 들인다고 한 것이 실모인 요게벳을 들였다. 그래서 어린 모세는 진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냥 아기에게 젖을 먹인다고만 생각을 말고 이게 뭘 의미할까? 어머니의 마음바탕에 들어있는 진리의 씨앗이 젖줄로 통해서 모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거다.
이 모세가 조금 더 자라니 애굽의 많은 선생들이 모세에게 1 대 1로 달라붙어서 수학 과학 지리 등 여러 가지 애굽의 학문을 가르쳤다. 앞으로 애굽의 왕이 될 모세로 키웠다. 그러면 이건 또 무슨 말이냐? 애굽의 공부를 시킨다고 하는 것은 모세에게 애굽사상, 애굽정신을 집어넣어서 완전히 애굽사람으로 만들려는 사건이다. 그런데 모세가 애굽족화 돼 버렸느냐? 안 됐다. 어려서부터 애굽의 문물을 배웠지만 모세는 진리지식이 우선 첫째로 꼽힌다. 모세의 속에는 어릴 때부터 실모로부터 받은 진리지식이 자기의 주격적 지식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애굽의 지식을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이거는 전부가 선악과 따먹고 나온 지식이요, 일반지식이요, 세상지식이요, 써먹는 지식이요, 인격이 없는 지식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밖의 사람들이 말을 하고, 생활을 하고, 소원 목적하는 것을 보면 진리지식은 하나도 없다. 다 선악과 따먹고 나온 타락적 지식뿐이다. 그래서 세상에 살아오면서 터득한 경험적 지식은 들어있지만 진리지식은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다니는 거다.
그림자라고 말을 했으니 그림자 공부를 해 보자. 그림자가 왜 생기느냐? 빛 때문에 생긴다. 달빛 아래서 걸을 때 달을 내 앞에 두고 걸을 때와, 내 뒤에 두고 걸을 때 그림자의 방향이 바꾸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지식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우리가 모든 사물을 볼 때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면 이치가 나오게 돼 있다. 변할 수 없는 이치가 있다. 아주 큰 걸 발견할 수가 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이치를 많이 깨닫는 지름길로 가는 것인데, 그림자로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이치가 뭘까? 그림자는 땅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사람이 팔짝 뛴다고 해도 그림자는 땅에 붙어있다. 세상은 그림자와 같은 거다. 땅에서 떨어지지를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합쳐지면 그림자도 합쳐진다. 그런데 두 사람이 떨어지면 합쳐졌던 그림자가 떨어지면서 내 그림자는 나를 따라온다. 내 그림자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는다. 자기 그림자는 반드시 자기 발바닥에 붙어있다. 그리고 빛이 옆에서 비취면 그림자는 길어지고 빛이 올라갈수록 그림자는 짧아진다.
그리고 나를 비추는 빛의 위치에 따라 내 그림자는 빛의 뒤쪽으로 그 위치가 바뀐다. 그림자는 반드시 빛의 뒤쪽으로 가게 돼 있다.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네가 밝게 살고 싶으냐? 네가 세상의 인도를 안 받고 빛의 인도를 받고 싶으냐? 너만 빛 쪽으로 돌아서면 된다. 그러면 빛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다. 네가 빛을 등지고 가면, 하나님을 뒤로 두고 세상을 네 앞에 두고 가면 너는 세상이라고 하는 그림자를 보고 가게 된다.
그리고 그림자는 생명이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생명이 없다. 그러니 자기가 그림자를 따라가겠느냐, 빛을 따라가겠느냐? 세상을 따라가겠느냐, 하나님을 따라가겠느냐? 오늘날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림자를 자꾸 따라간다. 그러면 그 그림자가 잡혀지느냐 하면 그림자는 절대로 잡혀지지를 않는다. 세상은 잡히지를 않는다. 잡은 것 같으나 또 놓게 된다. 사람의 주머니 속에 돈이 들어있으면 그 사람의 그림자 속에도 돈이 들어있느냐? 돈이 들어있는 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왔으면 그림자의 주머니도 튀어나오겠지만 그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이 잡혀지느냐? 잡혀지지를 않는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만이 생긴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안 나온다. 숨어버린다. 분별이 안 된다. 빛 앞에서는 자기와 그림자가 분별이 된다. 분별을 할 수 있다. 어두우면 그림자는 숨어버린다. 빛이 없으면 숨어버린다. 하나님을 모르면 빛인지 그림자인지 모른다. 혼돈이 돼버린다.
그림자는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반드시 자기를 따라다닌다. 그림자는 잡지를 못하고, 생명이 없고, 땅에 붙어있다. 자기 그림자나 남의 그림자나 자기 손에 안 잡힌다. 그러니 그림자를 잡을 거냐, 하나님을 잡을 거냐? 이건 이치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안에는 정신이 들어있고 사상이 들어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림자를 잡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가?
미련한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세상에서 그림자를 잡으라고 한다. 그러면 그림자가 잡히느냐? 잡히지 않는다. 빛을 등지고 가면 그림자는 항상 자기 앞서서 간다. 그림자가 자기를 인도한다. 이렇게 되면 항상 그림자를 따라다니게 된다. 그러니 그 인생이 밝겠느냐? 시커먼 그림자를 따라다니면 뭐가 기쁘고 즐겁고 환하고 쾌활한 것이 있겠느냐? 빛을 따라가야 쾌활하고 사람이 밝고 한 거다.
지렁이는 눈이 없다. 왜 눈이 없는 거냐? 땅속에서 사니까 눈이 필요가 없다. 땅을 향해 살면 눈이 필요가 없는 사람과 같다. 우리는 땅 위에서 사는 거다. 사람은 땅 위에서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어린 사무엘의 마음 밭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줬다. 그리고 다니엘의 마음 밭에 예레미야의 신앙의 씨앗이 심겨졌다. 어머니 젖줄을 타고 천국의 신앙사상이 마음 밭에 박혔다. 이분들의 어머니들은 이들을 세상의 성공 출세를 바라보고 기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세속화된 교회의 인도자들은, 어머니들은 세상에서 축복을 많이 받아서 훌륭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교육을 시키고 있다. 이건 그 사상이 신앙지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주시는 교육의 순서는 첫째는 진리지식이다. 인간의 영은 인간의 핵심 주체로서 진리지식, 생명의 말씀을 먹도록 지어졌다. 영과 육으로 결합된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타락이 되어서 영이 죽었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었던 영이 예수님의 구속으로 거듭나서 중생이 되었다. 그리고 영이 중생된 사람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육신이 변화 부활을 입게 되는데, 세상에 있을 때 진리지식을 받아서 영이 성장이 된 영능의 실력대로 신령천국에서 영원히 누리게 된다. 실력적으로 누리게 된다. 이를 위해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진리지식의 교육이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견적인 일반계시를 볼 수가 있다. 말하자면 세상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세상에서 높은 대우를 받더라. 마찬가지로 진리지식의 영능이 풍부한 사람은 신령천국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높임을 받고 대우를 받는다. 신령천국에서는 세상에서의 훌륭한 것은 알아주지를 않는다. 신령한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해 버린다는 것은 세상의 명예 영광성은 알아주지를 않는다는 뜻이 들어있다.
생각을 해봐라. 물질적인 지식이 신령천국에서 뭐가 필요하겠느냐? 필요가 없다. 참 사람으로 되어지지 않는 지식을 어디에 써먹겠느냐?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천국처럼 발달이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믿는 사람들에게 첫째는 진리지식이다. 두 번째는 일반지식이다.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일반지식은 신앙에 보조지식으로 쓰여지는 것이다. 일반지식은 언젠가는 버리고 갈 임시적인 지식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일반지식을 하나님의 지식보다 더 알아준다.
일반지식은 육적인 지식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이 생활면에 편리하게 쓸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일반지식이 자기의 첫째 지식이 되면 사람이 문제가 돼버린다. 사람이 만들어지지를 않는다. 예수를 믿어도 이런 사람에게는 진리지식은 하나의 종교적 지식에 불과한 거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일반지식이 그 사람의 주격이 되고, 예수님을 믿는 진리지식은 보조지식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세상에서 자기의 마음이 평안해지는 하나의 수양이요 교양을 쌓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이 주격적 지식이고 세상지식은 활용적 지식이다. 세상지식은 이 세상에서 생활면에, 살아가는 면에 필요한 지식이다. 진리지식은 신령천국에까지 가는 지식이라서 이 지식을 가지고 물질세계를 보면 물질세계는 영원히 가는 것이 아니니 내가 임시성적으로 가지고 활용을 하다가 버리고 갈 지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람은 진리지식에 입각해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써먹게 되는데, 사람이 바로 되는 면으로 교훈 면으로 물질을 쓰게 된다. 그런데 세상이 그런가? 세상은 쌓아놓고 남에게 안 주려고 하고, 또 남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것도 빼앗으려고 한다.
사람이 생각을, 사고방식을 순간적으로 잘못하면 인간 자기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가 돼버린다. 그러다가 인간 자기는 멸망을 받게 된다. 어리석음으로 멸망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을 하게 되면, 이게 영의 생각인데, 영의 생각을 하면 사람이 생명적으로 들어간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물질에 대한, 돈에 대한, 부자에 대한 생각을 자꾸 하면 사람이 말라붙는다. 머리가 아프다. 그 자는 속에 병이 들었다. 첫째는 정신적으로 병이 들었다.
사람 속에 신령한 지식이 들어있으면 그 사람의 모든 정신 사상 마음이 가볍고 쾌활하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닥치는 사건 환경이 어려운 것 같으나 실은 그런 게 다 자기의 신앙실력을 키워주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그런데 세상을 목적적으로 하는 사람은 작은 사건만 닥쳐도 힘이 들고, 그러니 자살도 하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첫째는 진리지식, 두 번째는 일반지식,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육신, 신체, 몸뚱아리다. 사람은 영이 주격이다. 사람의 몸 신체는 영에 소유격이다. 육신은 의의 병기로 쓰여질 몸이다. 그래서 육신의 건강을 도모해야 한다. 몸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영을 위해서 자기 몸을 중요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자기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 자기 몸이라고 해서 함부로 써도 괜찮겠지? 천만에. 자기는 은연중에 다른 사람과 연관이 돼 있는 거다. 하다못해 자기 몸이 아프면 다른 사람이 물 한 그릇이라도 갖다 주지 않더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셈이 된다.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형제를 위한 몸이다. 부모를 위한 몸이다. 이웃을 위한 못이다. 이웃을 위해서 자기 몸을 잘 간수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유익을 주기 위해서라도 그 말이다.
내 몸은 영을 위해 쓰여질 기관인데, 이 몸을 악의 병기로 쓸 수도 있고 의의 병기로 쓸 수도 있다. 진리지식이 바로 들어가면 자기의 몸은 하나님 앞에 의의 병기로 쓰여진다. 이런 사람이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 같으나 이 사람은 그 몸을 의의 병기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지식이 주격이 안 되고 일반지식이 주격이 돼버리면 이 사람이 활동을 하면 그 몸은 악의 병기가 돼버린다. 이렇게 사는 것은 도적질하고 그러지 않아도 악하게 쓰여지는 거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데로 쓰여지는 거다. 그래서 육신이 멸망을 받는 자가 많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고민을 하는 자가 많고, 또 자기 몸을 제 마음대로 못해서 몸에 병을 만드는 자도 많다.
신앙의 어머니들은 자식의 교육에 있어서 제일 먼저 영을 위한 진리지식을 중요시 여기고, 그 다음에는 일반지식이다. 일반지식은 보조지식으로서 영을 위한 이용물이다. 그 다음은 몸, 신체, 육체다. 그런데 세상의 어머니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어디에 두느냐? 첫째는 일반지식, 두 번째는 몸 신체, 그 다음에 진리지식은 없다. 그러니 부모들의 사고방식이 마치 머리가 없는 사람과 같다.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하냐?
구약성경에 보면 이방인들이 두 손을 앞으로 내민 몰렉 신을 만들어서 어린아이를 그 위에 올려놓고 밑에서는 불을 때서 산 아이를 불태워 우상의 제물로 드린다. 이걸 계시의 눈으로 교육적으로 보면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을 세상이라고 하는 우상 앞에 제물로 바치고 있구나. 불타질 세상에게 제물로 바치고 있구나. 그런데 부모들은 그걸 모른다. 얼마나 미련한가? 성경이라야 이런 것도 볼 수가 있다. 그 정신 사상을 성경이 아니면 보지를 못하는 거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진리지식이 주격적 지식으로 첫째 지식이 되어야 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