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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9 cXik2 KI4 M? si=49 BWfHx9 KgZxurSF
질감이 거칠지만 탁월했던 인간본질 묘사만큼은 으뜸이어기에 10대 소년기에 접했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은 생각의 아름다움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생각의 안중에 깃들어 있는 고뇌하는 모습은 평화의 가교로 인식의 싹이 튼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들어 프랑스 조각가 로탱(1840-1917)은 전 세계사람들로부터 현대의 미겔란젤로라 칭송받으며 그의 비범한 천재성에서 우러나오는 조각의 거장으로서 존경을 받게 됩니다. 초상 조각가로서 유명했던 로댕은 13세에 미술학교에 입학 드로잉과 모형제작을 베우게 됩니다. 1880년 파리와 부뤼셀 살롱전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40세가 되어서 조각가로서 발자크상과, 입맞춤, 생각하는 사람 등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란 원의를 늘 품고 살던 이에게 어느 날 검은색 석고로 제작된 조각상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이 조각상을 산막으로 오르는 계단 끝 우측에 정좌시켜 놓고 그 아래에 줄 장미를 심어 두었습니다. 늘 방황을 경계하려는 소견이 만든 일입니다. 생각을 모아두면 형상이 잡히고 보편적인 견해를 통해 정화시켜 보면 삶의 중심이 보입니다. 방황을 몰아내는 힘은 바로 사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덕수궁 석조전 전시회에서 처음 대면하면서 얻은 생각의 기본이라면 이후 성장하면서 삼국시대에 제작된 반가유상을 접하고 성숙된 사유의 시간을 갖기 시작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불가에서는 참선을 수행 중 두 가지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불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룰 당시 양다리는 가부좌(跏趺坐) 중에 길상좌(吉祥坐)를 하고 손으로는 항마인(降魔印) 지었다는 영향에 힘입어 발전되어 온 자세입니다. 길상좌는 다른 말로 연화좌(蓮華坐)라 부르기도 하는데 먼저 왼발을 오른쪽 허벅지에 올린 후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려 두 발바닥이 위로 향하게 하고 왼손도 아래에 두고 오른손은 위에 놓습니다. 이때에 오른발은 불계(佛界)를 왼발은 중생계(衆生界)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른발이 왼발을 누름은 불계가 중생계를 포교하고 중생계도 성불하여 불계로 들어가니 불계와 중생계는 동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반가좌는 오른쪽 다리를 들어 왼쪽 다리 위에 얹고서 앉는 방법을 말합니다. 반가사유상은 인간의 번민과 깨달음의 경계를 상징하는 모습으로서 흡사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가 겹쳐진 상태에서 진행되어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의 끝을 알리는 환희의 순간이 표현된 것이 바로 반가사유상입니다.
반가사유상을 마주한 시기는 20대 초반이었습니다. 혹독한 사춘기를 넘기면서 아직도 잔존하던 사춘기 중심에 있던 념(念)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현재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생각을 잘 다듬어 기억할 것은 하고 버릴 것은 버려가며 성숙된 자아를 형성하여 마음속의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절박한 시기가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삼각산 일대에서 산악활동을 펼치던 장소를 벗어나 어느 날 도봉산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삼각산은 이동거리가 짧고 접근성이 좋은 반면 도봉산으로 가는 길은 동선이 길고 교통편이 제한적이었습니다.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좋았으나 열차시간과 역까지 기야하는 일이 번거롭고 열차시간을 맞추려면 시간에 제약을 받야 하는 것이 단점이었습니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방법이었습니다. 월남전을 겪은 후 사세가 점점 운수업에서 항공, 해운 등으로 한진에서 독점 운행하던 서울, 인천, 종로 5가에서 의정부 시외버스가 종로 5가 기독교방송국 앞에서 출발하여 이 버스를 타고 도봉동 육군공병대 창고가 있던 정류장에서 내려 도봉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길 따라 걸어 오르면 도봉산 수영장 앞을 지나 도봉산으로 올라가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이 길을 사람들은 천축사 가는 길이라 불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사울 문안에서 우이동방향 화계사와 도봉동 천축사에도 소풍을 왔던 산사였습니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외웠던 목필균의 천축사 가는 길이란 시를 외우며 천축사 가는 길을 걸으면 폭포가 흘러내리는 곳까지 단숨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도봉동이란 마을도 사실은 사하촌이었습니다. 쿤 절 아래 마을이 바로 도봉동이었습니다.
천축사 가는 길 -목필균
먼 산빛을 친구 삼아
도봉산에 오르면
천축사 가는 길은 열려있다
젊은 까치소리에 눈웃음치고
이름 모를 풀꽃에도 손길을 주며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걸으면
노래하듯 흘러내리는 맑은 물소리가
오히려 내 길을 재촉하니 재미있다
도봉산을 품어 안은
천축사 끝없는 도량을 향해
일상의 상염들을 날려 보내면
근심은 바람 되어 맴돌다 사라진다
티끌 같은 몸뚱이에 자리 잡는
바위만 한 욕심덩어리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되돌아보는 시간
천축사 가는 길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하다
천축사 가는 길에 녹아 있는 그런 정서를 느끼며 걷게 되는 길이 바로 도봉산을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던 도봉산장은 여관 수준보다는 높은 휴양성격이 호텔 같은 산장분위기였습니다. 바로 맞은편에 절이 있고 그 사잇길을 걸어 오르면 도봉산장 담장 끝에 아름다운 계곡을 만나게 됩니다. 우측으로 오르면 한옥으로 잘 건축된 별장이 나오고 그 앞에는 녹야원이라는 절 집이 있습니다. 앞서 지나온 삼거리에서 곧장 오르면 도봉서원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됩니다. 올망졸망 크고 작은 돌이 널려 있는 길 따라 계곡을 죄 측에 두고 걷다 보면 물 길이 좌우측으로 갈라지며 덩달아 산 길도 두 길로 바뀝니다. 우측으로 가면 선인봉으로 직접 갈 수 있고 만월암을 지나 망월사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자운봉 옆 협곡을 올라 포대능선이나 주봉지나 우이능선이나 오봉으로 다가설 수 있으며 또는 송추폭포를 경유 송추로 나갈 수 있습니다. 대신 좌측 길로 걸어 서서히 고도를 높이다 보면 천축사 경내에서 흘러나오는 폭포를 만나게 됩니다. 폭포를 지나 오른 후 우측 돌계단을 오르면서 바위를 왼쪽에 두고 돌아나가면 해자 같은 깊은 계곡 너머로 천축사 대웅전이 정면으로 보이고 그 뒤로 사람의 형상을 닮은 듯한 거대한 선인봉이 서 있어 장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만히 작은 길을 걸어 들어가면 큰 영웅을 모셨다는 대웅전이 나오고 대웅전 좌측으로 오르면 물 맛이 기가 막힌 샘이 있어 목을 축일 수 있으며 우측으로 나가면 그 유명한 무문관을 1964년 건축하여 수행결사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물, 이곳은 외부에서 문을 걸어 잠그면 외부와 모든 것을 단절하고 외부에서 반입해 주는 식사로 공양하고 의류를 교체하며 4년 또는 6년간 용맹정진 수도하는 곳입니다.
무문관 위로 선인봉으로 가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도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이야기대로 산빛을 친구 삼아 걷다 보면 천축사 가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고찰 천축사 당시 가람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습니다. 고즈넉한 산사였습니다. 조선의 개국을 이끌어 낸 태조 이성계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절로서 무문관을 만들어 수행결사를 진행하여 불교계와 일반대중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킨 산사는 깊은 역사를 증명하려는 듯 보인 것입니다. 이 길을 오고 가며 도봉산 곳곳에 놓여 있는 산사와 관련하여 산사배후에는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위의 모습이 불상과 흡사하며 좋은 샘물이 용출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말마다 오르는 선인봉의 모습이 대웅전 뒤 배경으로 다가오는 모습은 꼭 매일매일 떠오르는 일출처럼 알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을 불러일으켜주어 천축사 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절의 중심인 대웅전을 지나 채마밭 부근을 거쳐 비탈진 흙길을 오르다 보면 선인봉 훼이스 전면이 웅장하게 다가옵니다. 학업을 오전에 모두 끝내고 서둘러 서울도심을 출발하여 찬축사를 지나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켐프사이드에 윔퍼텐트를 설치하고 나면 오후 4시경, 이른 저녁을 챙긴 후 휴식 후 박쥐 길 암벽등반에 나섰습니다. 언더홀드를 이용하여 트레파스를 하다 보면 늘 박쥐들의 배설물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암벽등반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바위면에 또 다른 뚜껑 같은 넓은 바위면이 붙어 있는 형극인데 뚜껑바위 아래에 박쥐들이 살았습니다. 달라붙어 있는 너른 바위 모양도 박쥐날개를 닮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수평에서 사선으로 바뀌는 꼭짓점에서 몸의 균형을 이루며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어야 상단으로 안전하게 올라설 수 있지만 균형이 무너지면 진자형태로 추락하여 허리부상이나 다리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아주 까다로운 구간입니다. 어느 해 인가 꼭짓점 바위면이 깨져나가 코스는 더욱더 어려워졌습니다.
박쥐코스만 끝내면 바위틈에서 자라는 거대한 소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25m 슬랩을 오르면 너른 테라스가 나와 편히 쉬며 야경을 감상할 수 있고 수락산, 불암산, 남산, 삼각산도 지척으로 다가서는 곳입니다. 천축사도 산빛에 가득 쌓여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일행이 천축사를 지나 선인봉 아래 샘터 부근 켐프사이드에 도착하여 겜프를 설피하고 나면 잿빛 승복을 입은 수려한 학승 같은 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가와선 아무 말 없이 주변 바위에 앉아 암벽장비를 정리하고 챙겨 암벽을 오르는 우리를 유심히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불가에서는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을 선지식(善知識)인이라 하고 그릇된 길로 이끄는 사람을 악지식(惡知識)인이라 합니다. 선지식이라 함은 좋은 친구라는 의미도 갖고 있으며 불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훌륭한 지도자를 말합니다. 선지식인이 되려면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기 어려운 것을 줘라( 難與能與 ), 하기 어려운 것을 하라(難作能作), 참기 어려운 것을 참으며(難忍能忍), 비밀이 없도록 하고( 密事相告), 잘못은 덮어주고(遞相覆藏)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고( 遭苦不捨 ) 가난하고 천하다 경멸하지 마라( 貧賤不輕)
석가 부처께서도 선지식인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십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 속에서 삶의 나이테가 엮어져 가는 것입니다. 관찰자 같은 학승과의 인연이 만들어지고 그는 선지식인처럼 조용조용 다가섰다가 다시 조용한 걸음으로 종적을 감추다 다시 다가왔습니다. 때로는 책으로 안부를 묻고 인사를 하고 대화를 하기도 하며 인연은 너르고 깊게 만들어져 갔습니다. 그를 통해가 가부좌와 반가사유의 미소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미완의 염에 대하여도 따듯한 시선이라는 돌파구도 마련되는 시기가 그 무렵입니다. 출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도 그즈음이었지만.... 현실에 놓여 일들이 자꾸 발목을 잡았습니다. 일곱 형제 중 막내는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문안에서 전원으로 이사를 나와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 나가던 때였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어머님께서 늘 다니시던 배우개시장과 중부시장에서 장을 보시는 일과 형제들의 통학문제가 제일 문제였지만 막내가 그중에 문제라 학교를 전학을 추진했지만 친구들과 갑자기 헤어지는 것이 싫으니 4학년학기가 3개월 정도 남았으니 먼 거리를 통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승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님이 따라다니시다. 혼자도 잘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려 그렇게 다니다 어느 날
동생은 귀가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귀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학교에서 모임활동이 있어 평소보다 늦게 귀가하기 위하여 버스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어머니를 뵙게 됩니다. 당시 정류장 부근에 유명한 장미원이 있었습니다. 장미만 키우는 화원이었습니다. 만평 가까운 곳에 여러 종류의 장미꽃이 전원적인 마을입구에 펼쳐져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던 화원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서 계시던 어머님은 저를 보시자 반색하시며 막내가 지금까지 오지 않아 나오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근심이 가득하셨습니다. 저 역시 근심이 들며 무슨 영문일까? 안절부절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 시간 즈음 기다릴 무렵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이가 보였습니다. 피붙이는 아무래도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단박에 막내라 생각하고 달려갔습니다. 형을 발견한 막내는 울음부터 터트렸습니다. 사럽게 우는 동생을 달래며 책가방을 들어주고 손을 잡고 어머니 곁으로 데려갔습니다. 학교에 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동생은 차비를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걸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자책을 많이 하셨습니다. 비상금을 별도로 주어 이런 일을 대비시켜 주지 못한 점을 자책하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 막내를 설득하여 학교를 전학 시 켰습니다. 전학하고 새 학교에 잘 적응하던 막내는 학교에서 사고로 서울대 부속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계단 끝에 서 있는 막내를 같은 반 급우가 등뒤에서 놀래주려고 등을 쳤는데 막내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져 넘어져 굴렀다는 소식에 어머님이 달려가시고 아버님께서도 근무 중 달려가셨으며 막내는 열흘 입원하였다가 퇴원하여 시름을 놓았지만 이후 경기를 일으키며 악몽 같은 병을 갖게 됩니다. 장시간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하였지만 차도가 없어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 있던 베드로 정신병원에서 장기간 치료에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어머님과 아버님께서는 막내를 위하여 동분서주하시며 차료에 매달려셨지만 늘 낙담을 이어가시다 독일에서 선교사로 들어와 막내가 앓고 있는 환자들을 위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약을 생산하는 독일의 유명제약사의 협조를 받아 새문안교회 내에 장미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약을 공급하기 시작한 사실을 알게 되신 어머니는 막내를 데리고 방문하시어 회원이신 닥터를 만나 진료상담을 받으시고 한시름 놓게 되셨습니다. 중단했던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막내에게 다른 시련이 또 찾아옵니다. 국방의무를 끝내고 사회로 돌아온지 사흘이 지난날 학교동기들로부터 초대받아 명동에서 회식을 갖은 후 귀가하여 어머니로부터 놀라운 일에 대하여 설명을 듣게 됩니다. 막내는 약을 복용하면 극도로 예민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루 1회 하는 투약 시간을 오후시간에 잡아 복용하게 됩니다. 저녁식 후 복용 후 어머니를 찾았으나 안 계시자 이웃집 마실 가셨다고 판단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어머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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