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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設 허준(許浚) 第98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七年戰爭 中에서 第二
의원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병 모든 상처를 고루 모두 들여다보고 매만지고 싶어하는 허준의 소망은 현실로 닥쳤다.
이 나라 역사상 가장 참담하고 잔혹한 전쟁이 임진왜란이라는 이름으로 닥친 것이다.
"난리가 났다!"
"왜군이 쳐들어온다!"
난리나면 이 나라에서는 대륙세인 중국으로부터의 침입과 해양세인 왜로부터의 침략밖에 없다.
특히 그 왜는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하는 조상 대대의 기억이 있다. 여말 선초 일본남방과 대마도를 본거지로 한 왜구들의 그 엄청난 분탕질 ...
척박한 화산도에 칩거해 사는 왜족은 바다 건너 조선땅 특히 삼남의 비옥한 들에 추수철이 되면 거의 어김없이 적게는 10여 척 1백 명 미만의 해적 규모로, 많게는 2백 명을 태운 대형선박 5백 척이라는 일대 전쟁의 규모로 몰려와 곡식과 가축을 빼앗고 여자를 끌고 가고 조선의 남아라면 임부의 뱃속에 든 태아까지도 서슴없이 죽이는 만행을 거침없이 저질렀다.
비단 삼남에서만 있었던 사실이 아니다.
영, 호남과 충청도의 곡창지역은 물론 여경의 지호지간인 강화도를 위시, 황해 넓은 들과 평안도 ·함경도 저 북쪽 오지에 이르기까진 짓밟지 않은 곳이 없도록 조선에 있어 왜는 천적이었다.
고려 패망의 양대 원인의 하나로 일컫는 이 왜구의 발호는 조선 개국 후 태종이 지휘한 세종 원년의 대마도 정벌로 징치(懲治)되어 국교를 터주는 형국으로 점차 가라앉았으나 그 왜를 야만으로 보며 문약에 흐른 조선의 평화가 2백 년이 흐른 지금 그 왜가 이번에는 본격적인 조선 침략에 나선것이다.
군대는 백 년 동안 한번도 사용 아니할 수 있으나 단 하루라 할지라도 이를 갖추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그래서 10만양병론을 주창하던 율곡 이이도 세상을 뜬 지 8년, 그 율곡을 서당이다 동당이다 좌우에서 헐뜯고 마침내 조정에서 내쳐 그 말년을 유폐된 고향땅에서 피를 토하고 죽게 했던 조선이 당쟁 속에 있을 때 왜국은 60여 주로 나뉘어 군웅할거하던 자체 상쟁의 시기를 거쳐 무력으로 국권을 틀어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팽창한 힘으로 조선과 명을 정벌하리라는 야망을 품고 이에 그 현지 염탐의 역을 띤 왜승 현소가 사신이라는 미명으로 조선땅을 다녀간 지가 3년 전 ...
이에 물색 모른 조선 조정은 일본 사신 현소가 찾아온 데 대한 답례를 겸하여 조선의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왜국의 정정을 살필 겸 도일했다가 돌아온 지 1년여 ...
그러나 왜의 실체를 간파하는 안목에서 서와 동으로 당파를 달리하는 황윤길과 김성일은 왜는 쳐들어온다 아니다로 주장이 엇갈리니 국론조차 통일돼 있지 못했다.
그 조선을 향해 왜군이 호호탕탕 바다를 건너 상륙한 것은 4월 14일. 정명가도 -명나라를 정벌코자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왜를 미개족으로 보고 명에게 사대하는 조선에게 있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조건으로 왜는 선전포고를 대신했다.
국내 통일전쟁에서 연마되고 연마된 왜군 15만, 게다가 최신병기인 조총으로 무장된 그 왜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당일로 부산포가 함락되고 다음날 동래성 공략에선 부사 송상현이 장렬한 전투 끝에 전사, 마침내 7년 임진왜란의 서막은 오른 것이다. 즉일로 다시 왜군은 삼로로 나뉘어 한양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 1군은 고니시로 부산, 밀양, 대구, 상주, 문경을 거쳐 충주를 지향하고 가토가 이끄는 2군은 울산, 영천을 꿰어 충주에서 1군과 합류를 꾀하고 구로다, 시마즈, 고바야가와 등과 3군을 이룬 떼거리는 김해를 짓밟고 추풍령으로 치닫고 구키 등이 지휘하는 9천여의 수군도 남해, 서해를 돌아 한양으로 한양으로 배를 저어 달리니 그 가는 육지와 바다에서 미처 준비가 없는 조선 군사는 달구지가 뛰닫는 연못가에 모기떼 흩어지듯 할 뿐이었다.
"왜군이 침입했다!"
"전쟁이 났다!"
그 급보가 서울 조정에 당도한 것이 4월 18일. 조정은 놀라 나자빠졌고 이제야 동인, 서인 할것 없이 벌집을 쑤신 듯이 소연했다.
발칵 뒤집힌 것은 조정뿐이 아니었다. 동래군 다대포의 매봉을 기점으로 양산, 언양, 경주, 영천, 신녕, 의홍, 의성, 안동, 예안, 영주, 봉화, 풍기를 두려뺀 왜군의 예봉은 다시 단양, 청풍, 충주로 방향을 잡으니 상기의 지명과 함께 음성, 죽산, 용인에서 광주 천림산으로 통한 후 한양 남산까지 이르는 직선봉 40곳과 간봉 1백 3곳을 꿰어 호응하는 산봉우리마다 연일연야 다섯 개씩의 불기둥들이 잇따라 솟아오른다.
봉은 어두운 밤에 홰에 불을 켜서 신호하는 것이요 수는 낮에 연기를 피워올려 서로를 부르는 신혼데 그 각 봉수마다 설치된 다섯 개씩의 봉수는 평시에도 하나를 켜 고장의 이상없음을 알리는 것이고 적정이 경계태세일 때는 둘을 켜며 적이 보이면 셋, 국경이 침범되면 넷을, 그리고 다섯은 적과의 접전 중이라는 가장 긴급한 신호다. 그 각 고장의 봉수들이 연일연야 다섯 가닥의 불길과 다섯 가닥의 연기를 피워 올리는 걸 보면 이미 조선 천지는 온통 벌집을 쑤신 듯 소란했다.
궁금한 것은 적세는 얼마며 어디쯤 왔으며 아군의 대처는 어떠한가였으나 노상엔 그 상대로 역참과 역참을 꿰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양으로 뛰닫는 그 소란한 말발굽소리와 무인지경으로 밀려올라오는 뺏고 죽이고 불지르는 왜군의 소문만 휩쓸 뿐이었다.
동래 한양 간만이 아니다. 전라도 쪽 또한 순천 방답진을 기점으로 장흥, 강진, 영암, 해남, 진도, 무안, 나주, 함평을 연결한 불길이 다시 영광, 부안, 옥구, 임피를 거쳐 은진, 공주, 천안, 아산, 직산, 음성, 수원, 남양으로 돌아 김포, 통진, 강화의 여러 봉수에 호응한 후 양천 개화산에 이르기까지 봉과 수가 밤도 낮도 없이 하늘을 그을리며 타오를 뿐이었다.
"짐을 싸야 하올지?"
한양의 생업은 중단되고 있었다.
전쟁의 상황을 오로지 봉수대에 타오르는 홰의 숫자로밖에 짐작해볼 길 없는 백성들은 연일연야 타오르는 남산의 다섯 개의 불꽃과 연기를 보며 일변 피난짐을 싸고 삼삼오오 몰려선 채 조정에 드나든 관리들의 집 문전에 찾아들어 서성댔다.
그 관리의 입을 통하여 혹시나 상황 판단에 도움이 될 조그만 정보라도 얻어들을까 해서였다.
허준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직임은 의원이되 상감이 계시는 대궐 안을 출입하는 내의다. 대궐 밖 어설프게 직책만 높은 관리보다 상황을 더 자세히 알리라 여기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짐을 싸서 어디로 가잔 얘기요?"
아내의 말뜻도 알고 집 안팎에 몰려든 인근 사람들의 초조한 눈초리도 알건만 허준 또한 명쾌한 대답을 해줄 수가 없어 되물었다.
"어디로 가잔 뜻이 아니오라 왜적이 문경 새재를 넘었다는 소문이 있사옵고 그렇다면."
"다들 무어라 하더이까?"
"만일 이대로 왜적을 중간에서 막지 못한다면 도성 안으로 피해야 무사하리하 그런 말을 합니다."
"도성 안으로?"
"그래도 대궐이 있는 도성이니 성벽도 제일 튼튼하고 서울만은 군사들이 엄히 지킬 터이라 도성 안이 제일 안전하리라고들 ..."
허준은 묵묵했다.
어제 동서붕당 서로가 책임을 전가하고 지탄하는 노성과 고함이 터지던 빈청(궐 안 대신들의 대기소)에서 보고 들었던 양상을 떠올렸으나 허준의 마음은 편치가 못했다.
그건 낙관론에 매달리기에는 짓쳐들어오고 있는 적세를 단 한번 어디서 분명히 꺾었노라는 한 가닥의 승전보가 아직 조정에 도달해 있지 않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
어제 퇴궐하기 전 이동형을 만났다. 신임 도제조 유전이 지병이 재발, 갑자기 직임을 고사하고 사임하고 임시로 내의원 업무를 이동형이 관장하게 되자 때가 때인지라 어의 양예수를 비롯, 이공기 그리고 기축옥사 이후 한직으로 밀려났던 정작도 돌아온 자리에서 이동형이 들려준 얘기, 왕실과 조정의 한가닥 기대는 온통 신립에게 걸려 있다 했다.
그 신립이라면 조선 사람들은 안다. 일찍이 22살의 나이에 무과급제 특히 그가 용명을 드날린 것은 온성 부사로 있을 제 오랑캐 니탕개란 자가 함경도의 변경을 분탕질하기 수년이 되건만 싸우러 나간족족 우리 쪽 무장이 패전해온다는 걸 듣자 자원 출전한 신립은 단 일전으로 니탕개를 두만강 너머로 패주시킴은 물론 끝내 추격하여 마침내 니탕개의 목을 베어 말머리에 달고 돌아오니 그의 무위는 조선 팔도에 떨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립에게 딸이 있음을 듣자 이에 감동한 선조가 사랑하던 제 4왕자 신성군과 혼인시켜 사돈을 맺었으며 그 신립이 지금은 한성부 판윤으로서 도성을 지키는 중책을 맡아 있다가 이제 전란을 맞아 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왜군을 치러 갔고 지금 그 신립이 충주 달천강가에 배수진을 치고 왜적자의 필사의 일전을 벼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무력이 아무리 용맹하다 할지라도 조총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왜적을 상대로 조선의 희망대로 다시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지
그 소식을 전하던 이동형도 허준도 안타까운 한숨만 새나왔다. 집 안팎을 둘러싼 마을 사람과 환자로서 가족으로 안면이 친숙해진 사람들에게 허준이 애써 도순변사 신립 장군의 소식을 알려주고 입궐한 그날밤 과연 허준의 불안은 최악의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왕실과 온 조정이 학수고대하는 승전보 대신 임금의 사돈 그 도순변사 신립은 달천강변, 나라의 운명을 건 그 필사의 배수진에서 패퇴,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 장렬한 전사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신립이 전사하고 그 군사가 패퇴했다면 적이 서울까지 이르는 길목을 지킬 더 이상의 군사가 조선에는 없다.
충주에서 서울까지 287리 ...
왜군의 선두를 이룬 기마 군단이 달려서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몽진."
다음 순간 조정의 이구동성은 이 한마디였다.
아니 대신들의 그 피난 도주의 의견의 일치 이전에 이 급보는 고관들의 채비를 메고 따라나와 있던 집안것들의 달음박질에 의하여 북촌 양반골로 전파되었다.
"신립 장군이 죽고 충주가 무너졌다!"
"임금이 몽진한다!"
이제야 한양은 싸놓았던 피난짐을 이고 지고
일대 공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공황은 내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내의원의 혼란은 시시각각 더해 갔다.
4월 스무아흐레,
15만 왜군이 조선에 상륙하여 15일째
그 충주 달천강변에서 쌍방 2만 6천여의 병력이 맞붙은 전투에서 조총과 왜도를 든 왜군이 1만 8천5백, 도순변사 신립이 휘동하는 기병을 앞세운 조선의 군세는 8천 ...
그 양군이 1진 2진 3진으로 격돌하기 세 차례 ...
조총을 앞세운 왜군의 화력 앞에 배수의 각오도 헛되어 조선군은 섬멸의 타격을 입는다.
그 패전에 대소 장수들 또한 적진에 돌입 전사하고, 신립 또한 강물에 몸을 던져 시신조차 간 곳을 모르는 참패로 끝난 것이다.
조정은 경악했다. 사태는 절망이었다. 이에 영의정 이산해의 발의로 몽진을 서두르는 중에 뒤늦게 수도의 결사 방어를 주창하고 나선 건 사헌부와 사간원이었다.
그 옥당의 선비들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전력이나 전술보다 대의명분을 내세워 결사대 모집을 외치며 그 전사로서 삼의사의 의원도 포함시킨 것이다. 충주에서의 패전은 처참했다. 도성으로 돌아오는 기백명 패잔병의 대오도 남지 않은 이름 그대로의 옥쇄였다.
훈련받은 군사들의 싸움이 그러했거늘 이제 서울을 지키자며 목청을 높이는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신들은 그 싸울 병력으로 도성 안 각 관아의 서리들과 삼의사의 의원들 그리고 대의에 호소해 초모 가능한 백성들의 민병을 들었다.
삼로를 이룬 적의 선봉이 호왈 10만이라 일컫지만 실제는 3만, 그러나 기마가 주력을 이룬 그 3만은 280리 한양까지의 거리는 하룻길이면 와닿는 지척이었다.
죽기는 쉽되 막을 승산이라고는
애초부터 강구된 것이 아닌 의분과 명분뿐이었다.
"그래도 싸워야 한다!"
"싸우자!"
의분이 치솟는 대로 처음에는 사기들이 드높았다.
"우리도 나가 싸우자. "
그러나 백성들이 호응한 이 의기와 용기를 무너뜨린 건 조정 내부로부터의 혼란이었다.
적의 선봉 3만에 대적할 숫자도 한양은 젖먹이까지 포함하여 인구가 7천. 그 누구의 눈에도 싸워 이길 수 없는 그 사실 앞에 충주에서의 참패의 실상을 남보다 더 자세히 아는 조정 벼슬 높은 자들이 먼저 팔다리를 떨고 있었다.
특히 전 이조판서 유흥은 그 상징적 인물이었다.
주전파의 요구로 다시 몽진 결의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수도 사수를 위한 명령이 시행되자 몰려드는 백성들과 함께 싸워 죽으리라는 광경은 보이지 않고 도성 안에 일어난 현상은 미투리와 말의 품귀현상이었다.
그리고 대궐 밖 북으로 가는 길모퉁이와 골목마다에서 말을 데린 하인풍의 사내들이 밤낮없이 대기하는 광경이 벌어지니 특히 조정 신하들의 주된 출입문인 선인문 밖은 매어둔 말울음소리와 견마잡이 하인들의 떠드는 소리로 밤낮으로 소란했다.
"서울을 지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쌀 한 됫박 값이면 감지덕지 삼아올리던 미투리값이
쌀 한 말 값을 줘도 살 수 없는 희귀품이 되어버리자 서울에 남아 필사의 결전을 각오하던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랫것들 발엔 짚세기면 족했고 왕골과 모시 노 따위로 삼은 미투리는 돈냥깨나 있고 행세깨나 하는 이들이 찾는 것이다.
백성들은 서울을 사수한다는 조정의 약속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소를 올려 백성들의 의심을 대변해 나선 것이 유홍이었다.
"한창 위급한 격서가 왔다갔다 하는 터에 내 한몸 바쳐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는 하지 않고 조정 높은 관품을 지닌 자들로부터 대궐에 직을 가진 자들일수록 다투어 미투리를 사 챙기니 이는 임금을 따라 도망치려는 행위가 자명합니다. 이에 삼가 아뢰옵건대 사대부들의 이 작태를 묵인한다면 이는 나라의 위기는 백성에게 떠맡기고 저들은 싸움에서 도피하는 형국이라 벼슬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히 막으소서."
기개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유흥이 그 망국행위를 저지른 자를 거명하자 거론당한 자가 이번엔 그 유흥이야말로 이미 여러 날 전에 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 피난시킨 사실을 증거로 대어 반박하였다.
이에 동서 양파에 속한 그 쌍방의 비행의 폭로 속에서 백성과 함께 적을 맞이해 싸우자는 것은 겉으로 낸 핑계요 발설자인 유홍뿐이 아니라 좌찬성 최황을 비롯, 열 스물이 넘는 고관대작들이 뒷구멍으로는 언제든지 저 한몸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울을 지키려 떨쳐일어났던 백성들은 침을 뱉고 돌아섰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흩어지는 백성들을 막아 수도 사수의 민병을 만들려 조정이 사대문을 막고 호통쳐도 이미 이반한 민심은 잡아지지 않았다.
현직 이조판서 이원익이 일가와 가복들 속에서 10여 명을 모으고 체찰사 유성룡이 군관과 병졸들 80여 명을 모았으나 그건 유성룡의 개인적인 덕망에 의해서이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에 모여든 의병들이 아니었다. 흩어진 건 백성들뿐이 아니었다.
궐내 각사의 관원들도 급속도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서울을 지킨다면 더더구나요 어가가 몽진한대도 함부로 부서나 임금 곁을 떠날 수 없는 관원들조차 관복을 벗어던지고 백성의 모습으로 변복하여 제 한몸 가족들의 손을 끌고 사대문이 메어지도록 한양을 빠져나간다는 말을 전해 들은 임금 선조는 병조판서 김응남에게 생살여탈권을 지닌 표신을 주어 사태에 대처케 했으나 그 병조판서가 목이 쉬도록 군졸을 불러모으건만 단 한 사람도 귀기울여 주는 이가 없었다.
병조판서는 모병을 위한 피맺힌 절규가 마침내 통곡으로 바뀌자 병조 좌랑 이홍로가 대신 표신을 목에 걸고 서울의 경비를 맡을 사위영을 뛰어다닌 끝에야 그 텅빈 성루 위에 남아 있던 딱 한 사람 위장 성수익이 따라나섰을 뿐이었다.
서울을 향해 적의 3만 선봉이 치달아오는 시각, 한양 사수의 결의에 찬 조선 군사는 그렇게 세 사람뿐이었다.
이제야 임금의 몽진은 필지의 사실이었다. 달리 더 버틸 어떤 방책도 남아 있지 못했다.
그 4월 28일, 한양은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장대처럼 내리퍼붓는 빗줄기였다.
왜군의 말발굽소리와 피바람 일으키는 칼날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한양성내는 자꾸만 인적이 뜸해지고 있었다.
내노라, 육간대청에 아랫것들을 부리던 안팎 주인들의 호령소리가 찌릉거리던 대갓집 울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주인들은 떠난 지 오래.
집 지킨다는 명색으로 하인배들만 호롱불을 밝혀놓고 악에 받친 눈을 치뜨고 다가오는 난리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사가만이 아니었다.
한 나라의 체통과 법을 상징하던 대궐 또한
그 서슬 푸른 위엄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관아마다 켜져 있어야 할 불빛들이 반도 켜져 있지 못했다.
이제야 한양은 적의 말발굽소리도 들리기 전에 무너지고 있었다. 높이 40자 둘레 1만 4천5백보 이수로 40여 리에 이르는 우람한 도성의 성벽도 위병이 없고서는 한낱 촌가의 싸리울타리만도 못한 죽은 성일뿐, 그 지키는 이 없는 성채에 난 사대문은 활짝 열려진 채였다.
성문뿐이 아닌 궁궐도 지엄한 경비라는 이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이제나저제나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그 주인을 모시고 피난길을 떠날 채비로 기다리고 있던 하인배와 붙이들은 점차 거리에 인적이 끊기고 주인들은 나타나지 않자 위병들이 사라진 그 대궐문을 하나둘 숨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칼날이 떨어질까 오금이 저리고 조심스럽던 것은 처음 몇 사람일 뿐이었다.
내수사 별좌 김공량이 스스로 내수사의 종 중기운 쓰고 활 잘 쏘는 자 2백여 명을 모아 대궐 호위에 임하고 있었으나 그 숫자만으로 대궐이 지켜질 리 없었다.
한눈에 내시로 보이는 자가 변복을 한 채 보따리 하나씩을 감춰 대궐담을 기어오르다가 담 너머로 뛰어내렸다.
그 담 밑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삼삼오오 서로 부르고 찾으며 총총히 몰려오는 것은 궁녀들이었다.
"임금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생각한 붙이와 하인배들은 이제야 거침없이 궁정을 달려 각전과 각궁으로 내 집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임금이 있고선 군사들의 호위도 없이 대궐이 이토록 텅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인정전 마당은 하인배들이 틀고 온 말과 저희끼리 부르고 찾는 소리로 저자바닥처럼 소란했다.
그러나 이때 임금 선조는 궁 안에 있었다.
궐내까지 침입한 그 민초들의 소란한 소리를 한귀로 들으면서 근정전 북편 사정전에서 몽진에 앞서 마지막 국사를 치르고 있었다.
국난을 당하여 우선 국기인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말에 따라 광해군을 세자로 정했다.
차서로 보아 임해군이 형이지만 그의 품성이 아우만 못하다 하여 광해로 세자를 책봉했으나 그 현장은 일국의 위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광경이었다.
왜군이 충주를 떠난 지 하루. 적이 당장이라도 덮칠지 모른다는 초조하고 긴박한 정황 속에서 문무백관이 다 모이지 못한 중에 인장도 교서도 없이 광해군은 세자가 되었고 그밖에 임금은 비우게 될 서울을 맡을 유도대장으로 이양원을 정하고 어가의 몽진에 호종할 각 분담 부서를 정하며 대신들의 인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 그 시각 궐내에서 오직 한 군데, 임금의 몽진에 앞서 불을 뿜듯한 눈빛으로 격론을 벌이는 곳이 있었다. 내의원이었다.
삼사의 관원과 의원들 중 거의가 행방을 감추어 마지막 남은 30여 명이 초저녁 어전회의에 참석한 어의 양예수를 기다리는 중에 전란에 즈음하여 내의원 의원이 다해야 할 소임에 대하여 이견이 생긴 것이다.
집중 공격을 받는 것은 허준이었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