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기도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olldirdir@empas.com

초발심이 바로 정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불법을 배워볼까? 절에 가볼까? 불상에 절을 해볼까... 등등의 마음이 바로 위 없는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바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다만 그 깨달음을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위대한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 바른 생각, 바른 판단, 바른 정진 등 팔정도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불교에서는 설명합니다. (사진: 보광사 초파일 준비)
불교에서는 기도라는 말 대신 귀의라는 말을 씁니다. 불법승의 삼보,

그러니까 부처님, 불법, 승단의 세가지 보배에 의지하고 기댄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부처님은 열반하셨으니까, 다시 말해서 돌아가셨으니까 오늘날 육신으로서의 부처님 대신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전, 부처님의 모습을 상형한 불상 혹은 불화,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단-스님 혹은 불자들의 집단에 귀의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귀의한다는 의지를 담은 귀의문이라 할까요? 삼귀의가 있습니다. 단순한 내용에 단조로운 운율로 부르는 노래형식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사진 ; 파주 보광사)
부처님과 가르침은 충분히 이해가 갈 것입니다마는 스님들이라는 말에는 약간 거부반응을 일으킬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래 샹가라는 인도어를 번역하면서 스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샹가는 승단이라는 뜻입니다. 스님들을 포함한 불자들의 집단 역시 승단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어떤 것을 이루어 주세요. 이러이러한 것을 주세요.. 등등의 기도는 교리상에서

설명된 바가 없습니다. 다만 대승교단 혹은 승단에서 어렵고 고통 받는 대중들에게 쉽게 부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현실적 가피라는 것을 제시하기는 합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월적인 자기해탈인데, 그것을 근기가 낮은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부처님의 힘이 대중에게 미쳐서 현실적으로 이익을 준다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부자가 된다. 오래 살고 싶다, 극락에 가고 싶다 등의 현실적인 욕구는 부처님에 귀의하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라는 관념입니다.
교리상으로는 그렇지만 대중은 스스로 원하는 바를 구체화하기 쑥스럽지요.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의지를 하도록 설정한 여러 불 보살들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절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빌기도 하고, 스스로 다짐을 하는 기회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이를테면 부자가 되게 해 주세요는 세지보살에게, 오래 살게 하고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는 관음보살에게, 극락에 가고 싶어요는 아미타불에게, 지옥에 가기 싫어요는 지장보살에게 비는 등등입니다. (사진: 낙산사 해수관음)
구체적인 귀의의 형식은 없지만 대승불교의 전개과정에서 정토교 등에서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열 번만 외면 극락에 간다거나, 물에 빠져도 나찰이라는 사람 잡아먹는 귀신의 먹이가 되지 않는다거나 등등의 세간적 실지 즉 현실적 이익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리나 교단발전사, 혹은 영험록 등을 보시면서 스스로 귀의할 불 보살, 혹은 고승을 선택하셔서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를 앞에 붙여서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원효대사... 등을 지성으로 염원하시면 불교에서는 반드시 영험을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사진: 초파일 관정 보광사)
짐작을 하시겠지만 불교는 현실적으로 이익을 준다기 보다는 초월적인 인식, 자신과 중생을 고난에서 이끌 수 있는 위 없는 지혜 혹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 것이 이루어진다면 현실적인 것은 글쎄,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중이 매우 작은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