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축하할 일이 있거나 중요한 행사에 반드시 준비하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생일이나 축하 행사 때에 케이크가 떡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 떡을 먹어 본 외국 사람들은 누구나 매우 감탄합니다. 떡은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음식입니다. 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거기에 얽혀 있는 이야기도 참 많습니다.
먼저 신라시대 이야기부터 알아봅시다.
신라시대 떄 거문고를 잘 타기로 유명한 백결 선생이 있었습니다. 백결 선생은 경주 남산 밑에서 살던 가난한 선비였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옷을 무려 백 군데나 기워서 입었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옷을 백 번 기워 입었다고 해서 그를 '백결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백결 선생은 거문고 연주를 기가 막히게 잘했습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나 화난 일이 있을 때나 슬플 때나 그는 거문고를 연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다음 날이 설날이므로 집집마다 떡방아를 찧느라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러나 백결 선생의 집에는 떡을 만들 쌀이 없었습니다. 백결 선생의 아내는 다른 집 방아소리를 들으며 길게 탄식을 했습니다.
"아! 다른 집에서는 모두 곡식을 찧어 설을 쇨 준비를 하는구나. 그런데 우리집은 설날에도 떡 하나 만들 수 없으니..."
옆에서 아내의 탄식 소리를 들은 백결 선생 역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부인, 너무 속상해하지 맙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정해진 운명에 따르는 것입니다. 또한 가난한 것도 하늘이 정해주신 일이라오. 그렇지만 슬퍼하는 당신을 위해서 내가 거문고를 한번 타 보리다. 그만 속상해 하시오."
그렇게 말하고 백결 선생은 거문고를 탔습니다.
"쿵덕 쿵덕 쿵덕쿵"
백결 선생은 거문고로 흥겹게 떡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해 아내를 위로했답니다.
백결 선생이 연주했던 떡방아 찧는 장단의 거문고 연주는 그 이후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 때의 연주가 '방아타령'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백결 선생의 방아타령은 명절이면 떡을 만들어 먹고 흥겹게 노는 우리 풍속과 결합해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백결 선생의 거문고 솜씨는 점차 세상에 알려져, 마침내는 대궐 안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왕실에서는 백결 선생이 재주는 많지만 가난하다는 말을 듣고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결 선생은 선비는 가난한 대로 욕심 없이 사는 것도 좋은 일이라며 왕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아리 글, 정수영 그림, 밥 힘으로 살아온 우리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