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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삶기 7_4_2 형제 사랑의 성경적 원리_ 진실한 사랑
세상에는 모든 종교가 사랑, 자비, 인애 등을 이야기합니다.
단어가 다를 뿐이지, 그 의미는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종교인들 중에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이태석 신부님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었죠
그곳에서 신부님은 총과 칼을 들고 노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쳐
서로 화합하고 즐겁게 사는 법을 알게 하고,
학교를 지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마을의 유일한 의사로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단에서는 이태석 신부님을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님은 2010년 49살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올해 선종 10주기를 맞아 놀라운 일이 전해졌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보살피던 수단의 아이들 중 45명이
남수단에서 의과대학을 다니거나 의사가운을 입었다고 합니다.
또 불교의 유명한 스님 중에 성철스님이라고 계십니다.
이분의 일화는 많이 유명합니다.
다른 스님들은 나일론 양말을 신어서 정결했는데
성철 스님의 양말은 3년 이상 천을 기운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신도 중에 한 분이 나일론 양말을 사다드렸는데
스님은 행자에게 도끼를 갖고 오라해서 찍어버렸다고 합니다.
또, 어느 신도가 아들이 무슨 시험에 합격했다고 라도 시계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2,3백 만원 하는 최고급 시계입니다.
신도가 가자마자 행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기, 라도 시계라는 거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갖고 싶어하는 시계라는 것을 나도 알지."
라면서 나무토막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돌을 쳐 산산 조각이 나게 부숴 버렸습니다.
산 중 중이 무슨 시계가 필요하노?
공부하는 놈이라면 한 순간이라도 시계 볼 여유가 어데 있겠노?라고 했습니다.
팔순이 되어 해인사 백련암에 있을 때였습니다.
매우 유명한 모 재벌 부부가 3천배를 하다가 스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들은 스님을 뵙자마자 미안하여 어쩔 줄 몰랐다고 합니다.
자신들은 따뜻한 겨울 옷을 입고 있는데
스님은 몇십년 됐다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재벌 부부는 가슴이 아파 충심으로 말했습니다.
큰 스님 당장 따뜻한 털 내의를 사오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스님이 별 말씀을 하지 않았어요.
호의를 받으면서 거절을 한 거죠
그래서 다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을 내리시면 저희는 환희심을 내어 보시하고 싶습니다~
스님이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부부는 당황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씀이
나는 아무 것도 필요없는 사람인기라. 하루 두 끼의 무염식으로 좌선하며 정진하는 내가 달리 무엇이 필요하겠노? 그러나 한 가지 청이 있다.
큰 스님 청이 무엇이옵니까?
처사가 경영하는 회사원들, 특히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환희심을 가지고 털내의를 선물해 주그래이.
자신의 욕망으로 죄업이 운무같이 쌓인 사람이 부처님 전에 불공 몇 번하고 스님들에게 공양한다고 해서 지옥고를 어찌 면하겠노. 중생을 위해 대자비심을 일으켜 실천하는 사람이 참 불자요, 먼 미래에 부처를 이루는 기처가 되는 것인기라. 알겠노? 내 청은 바로 그것인기라."
제가 타종교의 사랑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은혜를 받으시는 분은 없으시죠?
우리 개신교에도 사랑의 실천자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아마도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이시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은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또 하늘의 저주로 생각되었던 나병(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소였던
여수애양원교회 제2대 목사로 모임해서 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고
일제에 항거하다가 옥고를 치르시고
625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항하다 애양원 환자들과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는 테레사 수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세르비아 출신이면서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소외받은채 죽어가던 사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 마더 테레사 보다 18년이나 앞서
서럽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졌던 백의의 천사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엘리자베스 셰핑, 한국 이름은 서서평입니다.
독일 출신의 간호사인데 1912년 개신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건너와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병자와 여성들을 돌보았습니다.
저도 이 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2017년에 이분의 다큐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가 나온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32세의 나이로 한국에 와서
고아 14명을 자녀로 삼고, 오갈 곳 없는 과부 38명과 한집에 머물렀습니다.
54세의 젊은 나이에 영양실조로 삶을 마감하고
그 자신의 몸을 의학연구용 시신으로 기증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 땅을 위해 내어주고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남루한 방에 남은 것이라곤
낡은 옷가지 몇 개와 반쪽이 된 담요, 동년 일곱전, 그리고 강냉이 두 홉 뿐이었다고 합니다.
말 그래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계속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좀 달라집니다.
이 땅에서는 사랑은 감정적인 것, 설레이는 것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낭만적이고 몽실몽실 핑크빛이 아닙니다.
저를 따라 해보실래요?
사랑은 치열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원리, 기준입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치열하게 살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는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4:2에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오래참음, 겸손, 온유, 용납 이런 것들이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랑은 어떤 남녀간의 또는 부모와 자녀간의
예쁘니까, 사랑해야 되니까
이런 것이 아니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참음과 용납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사랑은 진실한 사랑입니다.
3:18은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18절 말씀에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는 말 앞서 있는
‘우리’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각각 불러서 하나가 되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평화의 띠로 하나가 되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령 안에서 과거에, 이미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하나인 사람입니다.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한 번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봅시다.
당신과 내가 이미 주안에서 하나입니다.
영상을 보고 계신 분들도 옆에 계신 분들에게 말씀하십시오.
하나 된다는 것의 의미는
먼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어요
원래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존재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로, 한 가족으로 부르셨어요
그다음에 사람과 사람을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이 현장에 계신 분들이 하나가 아니라,
영상으로 시청하고 있는 유림가족들이 하나입니다.
나아가서, 전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입니다.
주님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되기를 바라십니다.
자,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당신과 내가 이미 주안에서 하나입니다~ 라는 말을 시킬 때
매우 겸연쩍으시죠
사실 제가 시키니까 하긴 했는데
내 마음에는 별로 그렇게 동의가 안 되는데 자꾸 시키니까 하시는 분들이 있을 거에요
물론 이에 대해 격하게 공감하시는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이 사람이 지난 주에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어떤 일이 있는지
어떤 삶의 스토리를 가졌는지 잘 몰라요
그런데 잘 모르는데, 교회에 오면 사랑합니다라고 시키니깐
형제님 자매님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게 어떻게 보면 위선이라고 보입니다.
위선이죠, 위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부르셨다면
하나로 부르신 그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죠?
하나됨의 비밀이 무엇인지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서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주일에 와서 예배드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교회를 정했다는 것은
그 교회에 속한 사람들과
우리가, 각자가, 또 여러 사람이
서로의 공유면적, 서로의 경험치 이런 것들을 늘려가고 확장해 가면서
이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규모가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경험하는 것은
지하철과 같은, 영화관과 같은 것을 경험합니다.
같은 곳으로 가는 목적도 같고, 같은 것을 보는 것도 같지만,
옆 사람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전락해도 신앙생활이야~라고 하고 있느니 문제가 됩니다.
요즘에는 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대형교회에서 가서 말 그대로 예배만 드리고 어떤 교제도 없이 나와 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축도 전에 나가버립니다.
마지막에 찬양하기 전에 일어서서 인사하라고 하니까
그것도 싫어서 설교 후 기도 할 때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왜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로 부르셨는데
그 하나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전혀 울림이 없는데요
어떻게 해야 해요?
성경은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과거에 이미 하나로 불러주셨으니
현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와 삶의 모든 것을 드려서 힘써 지켜야 합니다.
생각, 마음, 뜻, 힘을 쓰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됨입니다.
그 어떤 프로젝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됨입니다.
교회가 분열되었다?
말이 안 됩니다.
주님은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고, 그 일에 우리를 부르셨어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고민하셔야 합니다.
하나됨을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을 때 내 몸을 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시간과 재정과 몸과 생각과 뜻을 넣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됨이 중요할까요?
언젠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데
그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됨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것
우리 가운데 서로 하나되는 것
그래서 차별과 구분과 장벽과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을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가 되려고 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이 바로 진실함입니다.
사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사람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진실한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 손에 잡힐 수 있는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바꾼다면
투명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투명성이란 겉과 속이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다른 숨은 목적을 가지고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진실한 사랑, 투명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유익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내가 사랑한다는 것 그것 자체로서의 성취가 되어서 사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아마 대부분의 경우일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칭찬해주니까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어떤 경우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 싶어서 사랑의 행위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대상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
이것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진실함은 이런 것들과는 반대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명예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런 진실함은 어떤 면에서 조작하는 것과 대척점에 놓여 있습니다.
조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방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보이고
자기 속을 다 내 보이지도 않는 것이죠
마치 뭔가를 조작할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액면 그대로 와 닿지 않고
저 말의 진의가 뭘까?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상대방이 투명하지 않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서로 대화할 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저렇게 받아들일테니
그 다음에 나는 이렇게 되받아치고라는 식으로 미리 계산한 다음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조작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우리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투명하지도, 진실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경험하잖아요
투명하지 않는 사람,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사람이 주변에 있잖아요.
이 사람은 풍이 좀 쎄네~
이 사람 말은 반은 흘려듣고 반만 들어야 해~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어제는, 낯선 분이 한 분 예배당을 찾아왔어요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결론은 구걸이에요.
돈 좀 달라는 것이죠.
그런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많이 힘들어요
거절을 할 수가 없거든요.
저도 힘든데 저보다 힘든 사람이 찾아오면 있는 거 다 나눠줄 수밖에 없어요.
상대방이 진실해 보이지 않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기도 하고
거짓말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가 없거든요.
4만 2천원만 도와달래요~
왜 하필 4만 2천원이냐고 물었더니, 버스비랑 주민등록증 발급비용이랑
뭐랑 죽 사먹는 거랑 해서 그 돈이 필요하다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현금을 잘 갖고 다니지 않는데,
지갑에 딱 4만원이 있어서 그 돈을 다 드렸어요.
그 사람의 말이 진실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차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선을 행하고도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니
제가 할 도리만 할 뿐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다 보니
사람들은 제게 좋은 이야기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로 투명하게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이 사람 이야기는 내가 좀 감해서 들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 관계에서 진실한 사랑이 오고갈 수 없습니다.
속 마음을 열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가슴을 열어 보이는 것이 투명성이 아닙니다.
투명성을 발휘할 때는 성숙이 필요합니다.
성숙하다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척도 중에 하나가 바로 투명성입니다.
성숙하면 속이 훤하게 들여다 보여도 된다는 것입니다.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 다~ 좋은 게 아니에요
성숙하면 속이 다 들여다 보여도 좋아요
있는 그대로 다 보여도 되거든요
아마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셨을 것입니다.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요
무슨 말을 하면, 무슨 행동을 하면 그 표면적인 것이 그 의미 자체예요
우리 공동체에서는 이런 투명함이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지?
이렇게 두 번 세 번 생각하게 하는 공동체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왜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했지?
라는 것은 진실한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유림 가족 여러분
마음이 깨끗하고 겉과 속이 다를 필요가 없는 성숙함이 있을 때
우리는 진실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진실성은 공동체내에서 더 확산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에 가면,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교인들이 모두 그 말을 해석하느라 분주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뜻보다 목사님의 뜻을 분별하기가 더 어렵다고도 합니다.
공동체에 그런 분위기가 있으면 곤란합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고,
사랑이란 단어만 있을 뿐 오히려 사랑이 오용됩니다.
사랑은 진실하고 투명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배워야 할 사랑은 바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투명한 사랑입니다.
솔직한 사랑입니다.
정말 상대방을 위한 사랑
뒤에 뭔가 숨겨져 있지 않는 사랑
이런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