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꿈을 꾸는 엄마
진선이
어른이 되면 꿈을 가질 수 없는 걸까?
어느 날 문득 오십이 된 나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넌 꿈이 뭐야?” 순간 멈칫하며 멍을 때렸다. 어린 시절 가장 많이 듣던 말이었는데 이 나이에 되물으니 낯설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어른들은 어린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수도 없이 질문을 퍼부어 대던 때가 있었다.
‘꿈이라…… !’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어린 시절 꿈을 물을 때마다 새로운 꿈으로 바꿔가며, 말하는 대로 될 거라며 믿던 순진한 때 그땐 꿈이 넘치고 넘쳤다. 언제부터인가 꿈을 묻는 사람도 관심을 두고 말을 건네는 것도 사라졌다. 꿈을 잊고 오십까지 살았다. 꿈이란 것이 미래 보장형이 아니기에 어린 나이에 꿈을 확신하고 스스로 꾸기란 쉽지 않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어른들 칭찬의 말은 아이를 자라고 꿈꾸게 했다. 그 시절 어른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할 때였다. 하늘에 별이 되어 버린 엄마 아빠에게 부끄러운 딸이 되기 싫었다. 부모 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세상의 색안경에 맑고 밝은 빛으로 바뀌어 주고 싶었다.
칭찬은 무한한 꿈을 가진 아이를 자라고 꿈꾸게 했다. 말의 진의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래 잘한다는 말에 가수를 꿈꾸었고, 공부 잘하고 아이들 잘 가르친다는 칭찬에 선생님을 꿈꾸었다. 말도 잘하고 남들 앞에 서는 것도, 잘하니 아나운서를 해도 잘하겠다, 하셨다. TV에서 본 아나운서는 멋진 여성처럼 보였다. 남자에게 꿇리지 않는 당당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이렇듯 말의 힘은 강력했고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았다. 뭐든 잘한다는 말을 듣고 자라며 진짜 내가 똑똑하고 잘난 줄 알았다. 시골 마을 세상은 나에게 너무 좁았다. 더 큰 세상 넘어 너머에 있는 곳이 궁금했다. 어른들의 말을 믿고 우물 안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탈출 후 알게 되었다. 난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꿈을 꾸던 10대의 시절을 지나 시골 마을을 뒤로 하고 가슴에 가수의 꿈을 품고 도시로 향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에 이끌러 가수를 꿈꾸던 철없던 20대였다. 넓은 세상에 나와보니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많고 많았으며 손을 뻗는다고 딸 수 있는 별이 아니었다.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백그라운드가 든든한 것도 아니었다. 스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언감생심 잔재주만으로 날고뛰는 사람들 앞에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꿈 주변만 서성거렸다.
직업과 꿈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가수의 꿈은 내 현실과 맞지 않았다. 가수의 꿈을 접으며, 내가 갈 수 없는 길이었기에 내 길이 아니었기에 듣고 즐기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여전히 노래 부른 것을 좋아해 감정이 휘몰아칠 때면 내 안의 나를 주체 못 하고 튀어나올 때가 있다. 마이크 잡고 싶은 충동으로 가슴이 울렁일 때 노래가 부르고 싶을 때면 노래방을 찾아 끼를 발산하곤 한다. 비록 꿈꾸던 가수는 못 되었지만 힘들 때 음악은 삶의 동반자처럼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 안에서 기쁨, 슬픔, 사랑, 행복을 찾았다. 내 꿈은 삶에 희석이 되어가며 꿈의 존재는 점점 잊혀 갔다. 그렇게 시간은 물 흐르듯 흐르고 흘렀다. 그리고 나이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마음에 거센 태풍이 일어나 높은 파도를 일으키며 가슴을 세차게 휘몰아치고 지나갔다.
희미해져 가는 꺼져가는 나를 거센 파도는 그냥 두지 않았다. 불혹에 나이가 되었을 때 내 안에 잠재워 두었던 파도가 마음을 뚫고 불쑥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다시 꿈이 살아 꿈틀거리게 했다. 솟아오른 꿈의 불씨를 부여잡고 싶었다. 삶이란 내가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기에 당김에 불쏘시개가 필요했다. 마음 갖는다고 꿈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린 나이가 되고 보니 뭘 몰랐던 어린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주변 사람에게 꿈을 말하기 시작했다. 말을 뱉어야 뭐든 시작할 것 같았다. “글을 써서 책을 낼 거야.” 말로 먼저 뱉으면 꿈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뭐라도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현실은 다시 나를 주저앉혔다. 마음과 다르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과 마음만 있을 뿐 나를 드러낼 용기와 자신을 그땐 갖지 못했다. 나는 다시 마음에 빗장을 걸었다. 그렇게 시간은 또 물처럼 흘러 십 년이 지났다.
오십 앞에 섰다. 거센 파도가 더 세게 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아, 나 이렇게 늙고 싶지 않은데…” 마음으로만 품고 그렇게 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흘러, 오십이 되고 보니 이제 더 이상 뒷걸음질 치고 싶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삶인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날 위한 삶이어야 했다. 하고 싶은 것 하며 나답게 살고 싶어졌다. 나이 먹으면 조금은 뻔뻔해지고 용감해 지나 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무서워 나를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어 버렸던 나를 다시 소환했다.
오십이 된 후 잊었던 하고 싶은 꿈을 다시 찾았다. 걸어 온 길을 뒤 돌아보니 꿈 많던 소녀는 없고 아내와 엄마라는 자리만 있었다. 나는 어디로 간 걸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괜찮지 않은 건 아니다. 단지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 말고 내 이름을 찾고 싶은 것뿐이다. 꿈 많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해보고 싶은 것을 하며 석양에 무르익어 가고 싶었다. 젊었을 때는 가슴 뛰는 꿈을 좇았다면 오십이 된 나이에는 삶의 방향은 무엇이 되는 것 보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가 더 중요했다.
지금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가? 언제 나의 존재를 느낄까? 일 외에 주어진 시간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나에 대한, 질문의 물음표가 많아졌다. 나를 느끼고 내가 나를 위해 쓰는 시간,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 내가 나를 만나러 가는 시간. 이십사 시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생각의 심연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생각에 날개가 펼쳐지고 그것을 맛보는 시간. 완전 달콤하고 행복 그 자체이다. 지금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존재한다. 난 그 시간을 너무 사랑한다.
혼자 있는 걸 고독이라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기를 좋아하는 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감정이 있어 서로 부딪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상처를 입고 입힌다. 어쩜 그것이 싫어 많은 사람을 사귀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상처가 많아 더 많은 상처를 남기기 싫어 사람을 피해 도망친 곳이 책 읽기와 글이다.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받아주는 책이 좋았다. 독서하며 나를 찾고 마음을 달래는 시간이 있어 살아남았고 살아 올 수 있었다. 책장에 한 권 두 권 쌓여 가는 책을 보며 희열과 뿌듯함도 느낀다.
책을 읽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글로 생각을 옮긴다. 글의 생각에 날개를 달며 흐뭇해하는 나를 바라볼 때 행복함이 찾아왔다. 처음 쓴 글은 블로그에 일기처럼 쓰는 낙서장에 불과했다. 글을 쓰고 나면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에 뭉쳐 있던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점점 글을 쓰는 매력에 빠지며 글로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잘 쓰고 못 쓰는 건 두 번째 문제였다. 내 안에 내가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 우선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고 글을 쓰며 울고 울었다. 내 안에 숨어있던 아파했던 내면 아이가 조금씩 감정을 드러내며 글이라는 약을 바르며 치유되고 있었다. 난 지금 나를 위한 글을 쓰며 작가라는 꿈을 꾸고 있다.
십 년이 흐른 뒤 육십의 나를 생각해 본다.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