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답사기
步見會 5월행사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보견회 - 5월행사는 경기도 수원에 있는 수원화성에서 가졌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 애로가 있을 것 같아 비교적 걷는 시간을 줄이고 열차타기로 대신
하였다. 수원역에서 오전 11시에 만난 회원들 시내버스로 먼저 찾은 곳은 장안문이다.
아무래도 점심을 먹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식당부터 찾았다.
전복을 넣은 갈비탕으로 보신하였다. 맛도 영양도---. 대낮부터 소주도 금방금방 병이
비어나간다. 오늘 점심은 k회원이 전부 계산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회비는 고스란히 저축이 된다. 멀리 장거리여행시 버스비용에 대비해서--
식사후 예정대로 장안문(長安門)에서 답사는 시작되었다. 마침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
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몇년전 논어반에서 성곽길 전체를 돌면서 해설을 들은 일이
있어서 참고가 되었다. 해설을 시작하는 시간까지 15분가량 휴식시간을 가졌다.
아이쓰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토의시간을 가졌다. H 삼수회회장이 정조대왕에 대한
견해 즉 학자로서의 위대한 업적을 논하니 다음 K 두목회회장의 반론이 있었다.
물론 학자적인 높은 지식과 업적도 좋지만 왕으로서의 강력한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논지로--
장안문에서 북동적대,북동포루를 거쳐 화홍문과 동북각루 즉 방화수류정까지 가면서 해 설을 들었다. 방화수류정에 올라 마지막 해설을 듣고, 해설사와 헤어져 우리끼리 동북포
루,동암문을 거쳐 동장대 즉 연무대까지 걸었다.
연무대에서 열차를 타고 화성행궁까지 가려고 표를 샀다.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다.
더운 날씨에도 관광객이 무척 많았다. 학생들도 많고, 어버이날을 앞두고 카네이션을 단
경노노인들도 많이 보였다. 시간이 남아 국궁 활쏘기 체험을 해보았다. 한사람이 10발씩
쏘는데 미리 요령을 듣고 해보지만 마음 먹은대로 잘 되지 않는다.
화성열차를 타고 동암문,동북포루,북암문,화홍문,북동포루,북동적대 그리고 장안문 지
나서 북서적대 북서포루 서북공심돈,화서문을 지나 오르막길을 따라 팔달산으로 향한다.
팔달산 중턱에 열차는 멈춘다. 종점이다. 열차를 타고 오면서 어린애들 처럼 좋아한다.
친구들과 같이 하니 재미가 있지,이런 체험도 혼자서라면 쑥스러워 어떻게 하겠냐며--
종점에서 계단길 250m에 서장대가 있다. 아랫길로 가면 화성행궁이다. 탐험심 많은 몇몇
이 서장대까지 갔다 오잔다. 마침 날씨가 비교적 선선해 땀을 흘리지 않고 오를 수 있었
다. 서장대의 서노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급히 내려오니 일부회원들은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화성행궁에 입장하니 운좋게도 문화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설명판만
보고 대충대충 사진만 찍고 가는 것과 해설사를 따라가면서 설명을 듣는 것은 천지차다.
문화해설사로부터 40여분간 구석구석 행궁내외를 다니면서 설명을 들었다. 정조대왕과
혜경궁홍씨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반복된다. 행궁 탐방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5시가 훌
쩍 넘고 있었다. 각자 저녁 약속시간이 있어서 이곳에서 오늘 일정을 모두 마치고 헤어
졌다. 수원화성 성곽 설명과 행궁 처소별 설명을 사진과 함께 아래에 붙인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화성은 현재 사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하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화성의 규모는 성의 둘레 5.7km(미복원 포함),면적은 130ha로
동쪽 지형은 낮은 구릉을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48개의 시설물로
성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 당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북수문(화홍문)을 통
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팔달문과 장안문,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연결
하는 도로망이 현재의 수원시내 주요 간선도로로 유지되는 등 200년 된 성곽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점이 자랑스럽다 하겠다.
성곽의 축성 동기가 정치군사적 목적 외에 효사상이 내재되어 문화적 가치와 함께 정신적 철학
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일본,중국에서 볼 수 없는 평산성의 성곽으로 군사
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하고 시설의 기능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면이
뛰어나 동양성곽의 백미로 꼽힌다.
수원화성은 조선조 22대 정조대왕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장조로 추존)가 당쟁으로 인하여 뒤주
속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것을 항상 슬피 생각하여 오다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즉위
하자 아버지의 고혼을 위로키 위해 양주땅 배봉산으로부터 유해를 수원 남쪽 화산으로 천봉하
고 부근에 용주사를 세워 부왕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화산 아래에 있던 관청과 민가를 팔달산
아래로 모두 이전시키고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킨 것이 현재의 수원이다.
정조 18년 1월부터 20년 9월까지 2년9개월에 걸쳐 화려하고도 웅대한 성곽을 축성한 것이다.
화성은 실학자로 불리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의 기본지침으로 삼아 영의정 채제공
이 성역을 주관하고 화성유수 조심태 드이 전략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벽돌을 병용한 것,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주조 뿐만 아니
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또한 용재를 규격화 하고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화성 성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근에 축조한 성으로 성곽에는 동서남북으로 관문이 있는데
북쪽에는 장안문,남쪽에는 팔달문,서쪽에는 화서문,동쪽에는 창룡문이 있으며, 각 문의 사이
에는 적정을 관찰하는 공심돈을 만들었고 서장대,동장대의 2곳을 만들어 군사를 훈련시키고
통신시설인 봉돈을 비롯,각 5개씩 포루(砲樓)와 포루(鋪樓),2개의 노대(弩臺),4개의 각루,
성안에 흐르는 수원천 위에 북수문(화홍문),남수문(유실) 등이 축조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로 세워진 성곽이다.
먼저 수원화성의 건축용어 몇가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옹성(甕城)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을 쌓은 성이다. 옹성은 말하자면 2중방호이다. 팔달문과 장안문은 정면에 옹호문을 둔 것이 특징이다. 화서문
이나 창룡문은 옹호 한쪽에 문을 두고 있다.
치(雉)/치성(雉城) 제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는 꿩에 비유해서 치성이라 명명했다.일정한 거리
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 나오도록 한 구조물로서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적대(敵臺)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성 따위에 높게 세워둔 누대이다.
화성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 치성 위에 세웠다.
돈대(墩臺) 평지보다 조금 높직하면서 두드러진 평평한 땅을 돈지라 한다.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으로 쌓아올려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
대이다. 원형과 방형 두가지가 있는데 수원성곽에는 서북,남,동북 3곳에 돈대를 설치하고 공심
돈(空心墩)이라 불렀다. 속이 텅 비어있는 돈대란 의미로. 현재 서북공심돈만 남았다.
정약용이 서양 중세봉건제후의 성을 본뜬 것으로 안에서 총,포를 쏠 수 있게 벽을 이삼층으로
쌓아올린 성곽구조물의 하나이다.
장대(將臺)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올라서서 지휘하도록, 성(城), 보(堡), 둔(屯), 수(戍) 따
위의 높은 곳에 돌로 쌓은 대이다. 화성에는 팔달산 가장 높은 곳에 서장대 그리고 동북공심돈
아래 넓은 곳에 동장대(연무대라고도 함) 두곳이 있다. 연무대에는 군사훈련을 하며 현재는
국궁활쏘기 체험장이 있다.
봉돈(烽墩) 봉화연기를 피우는 돈대라는 의미이다. 경복궁 맞은편 남산에 봉돈이 있듯 수원
화성행궁에서 잘 보이는 성곽에 봉돈을 설치하여 봉수꾼이 화성행궁과 주변을 정찰하여 낮에
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포루(砲樓)와 포루(鋪樓) 발음이 같아서 혼동하기 쉽다.포루(砲樓)는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쌓은 루대를 말한다. 화성에는 5개의 포루(砲樓)가 있다. 또 포루(鋪樓)는 치성위에 설치한 누
각이다. 역시 5개가 있다.
암문(暗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게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애 쌓아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하도록 하였다.
각루(角樓) 높은 위치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을 말허며 수원화성에는 총4개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도 한다.
수원화성돌아보기
장안문(長安門)-성의 북쪽문으로 팔달문과 규모와 형태가 비슷하나 4대문 중 북쪽대문으로
정문이라 할 수 있다. 국보 1호인 숭례문보다 큰 문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이다.
공포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바깥은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다. 6.25 전란으로 반파된 것을
박정희대통령 시절 복원되었다.
정조대왕의 평가/H회원에 이어 반론을 펴는 K회원
장안문 안내판
장안문
옹성의 통로 용도(甬道)/대포용과 총구자리
장안문은 수원성의 북문으로 서울을 향하고 있다. 돌로 높이 쌓은 육축(陸築) 중앙에 홍예문을
내고 육축 위에는 2층의 누각을 세우고 앞쪽에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다.문의 좌우에는 높은 위
치에서 적을 공격할 목적으로 성벽보다 돌출된 적대(敵臺)가 있다.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공포를 결구한 우진각 지붕의 2층 목조건물이다.반원형
의 옹성은 성문과 달리 벽돌로 쌓았으며 아치의 상부에는 오성지(五星池)라는 구멍이 5개 뚫린
일종의 물탱크가 있는데 이는 적이 불을 지를 때를 대비하여 만든 것이다. 문루에는 대부분
간단하고 튼튼한 익공식 구조를 하는데 수원성의 경우는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을 다포식으
로 하여 장중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북서적대 북동적대/북동포루
적대(敵臺)란 성의 좌우에 설치되어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적대는 성문 좌우 옆에 있는 치성 위에 세운 시설로서 4대문 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 설치
하였다. 장안문 서쪽에 위치한 북서적대의 높이는 성벽과 같은데 밖으로 3개의 현안을 뚫고
벽돌로 쌓은 담장마다 총구멍을 만들었다. 총구도 원거리용,근거리용 등 총구 거치각도를 달리
하고 있다.포루는 대포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세운 누대로 화성의 5개 포루 중 동북쪽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에 북동포루가 위치한다.
북동적대
북동치/홍이포
인조 때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의 홍이포 공격을 받고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홍이포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유럽식 대포로 사거리 700m의 위력적인 화기. 영조때 만들기 시작했다.
북동포루를 설명하는 해설사
화홍문(華虹門)/북수문(北水門)
수원화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의 북쪽에 세운 수문을 말하며 편액은 화홍문(華虹門)이
라 하였다. 7칸의 홍예문을 두었고 팔작지붕이다. 무지개를 상징하는 7개의 수문을 두었다.
다양한 기능과 멋진 외관까지 함께 갖춘 북수문은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당대의 대표적인 시
설물이었다. 당시 수원천의 물길을 성안으로 내어 수도를 옮기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한양의 청계천처럼. 7개의 홍예문 가운데 맨 중간 문이 더 크다. 이는 홍수 때
물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며 접문이 달려있다. 바닥에는 돌을 깔아 파이지 않게 설계하였다.
홍예문 양쪽에 서 있는 이무기는 원래 왕이 있는 방향으로 서 있게 마련인데 하나는 북동,
다른 하나는 서북쪽으로 앉아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짓이었다고 한다.
위치수정 작업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화홍문(북수문)
북수문 안내판/위치가 잘못된 이무기 석상
화홍문을 배경으로
북암문(北暗門)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출입구를 내어 사람
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물자도 조달하기 위하여 설치된 문으로 화성에는 5개의 암문이
설치되어 있다. 암문 주변에는 전돌로 둥글게 성벽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하단부는 화강암
상단부는 벽돌로 쌓는데,윗부분 둥근 벽돌은 적의 침략시 이를 무너뜨려 방호벽(방카)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북암문은 동북포루와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사이에 있으며 화성에서 유일하게
벽돌로 좌우 성벽을 쌓았다.
북암문
방화수류정(訪花水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높은 위치에 누각 형태의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곳을 말하며 수원화성에는 총 4개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한다. 동북각루는 4개의 각루 중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지게 설계되어 전체 시설물
중 가장 화려한 건축물로 꼽힌다. 방화수류정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꽃을 좇고 버드나무를 따라
가는 아름다운 정자라는 뜻이다. 뛰어난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용연,화홍문과 더불어
화성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특히 벽면 십자가 무늬는 조선시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방화수류정 정자는 온돌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닥 아래에 화로를 넣어 바닥
을 덥힌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창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떼어놓은 상태이다.
이 건물은 굉흡이라는 스님이 도편수로 공사를 맡아 지었는데 동원 누각 10채를 짓는 비용이
들었다고 정조로부터 꾸중을 들었으나 다 짓고나서 보니 너무나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표창을
받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연못은 사각이 아닌 원형 연못인 것이
특징이다. 연못은 천지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각진 것인데 임금을 뜻하는 원형으로 지은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뜻을 내포한다고 한다.
건축미를 자랑하는 방화수류정
태극문양의 문이 있으며 조선시대 건축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십자무늬
오방색기 검정은 북쪽을 의미/멀리 동북포루가 보인다.
흰색기는 서쪽(화서문),적색은 남쪽(팔달문),청색은 동쪽(청룡문),중앙은 황색이다.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원형으로 만들었다는 연못이 봄철 꽃들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동북포루(東北鋪樓) 포루는 성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이며 군사대기소
와 같은 곳이다. 수건을 동여맨 모습과 같다 하여 일명 각건대라 한다. 아랫쪽은 돌로 쌓고
중간부분부터 벽돌로 축조하였다.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문루를 만들고 좌우에는 활
을 쏘는 구멍도 만들었다.
동북포루
동장대(東將臺)/연무대(鍊武帶)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사방 100리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수원화성의 군사지휘본부이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와 함께 두곳의 장대가 있다. 동장대는 1795년 8월에 완성하여 무
예를 수련하였기에 연무대란 별칭이 붙었다. 이곳은 지형이 높진 않지만 사방이 트여있고 등성
이가 높이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보기에 좋은 군사요충지이다. 동장대는 주
로 칼,활의 훈련을 하던 곳으로 지휘대인 연무대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어머니 혜경궁 회
갑연을 이곳에서 열었다. 동북포루에서 동암문을 지나 동북공심돈 가기전에 위치한다. 넓직한
연병장에 지금은 국궁 활쏘기 체험장이 있고 이곳에서 화성열차가 출발 또는 도착하는 시발점
이자 종점으로 관광객이 붐빈다.
연무대(동장대)
연무대 가지전에 지났던 동암문/ 동북공심돈이 보인다.
국궁 활쏘기 체험장
거리는 145m와 30m가 있는데 체험은 30m를 표적으로 한다.
명궁수 N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으로
동북공심돈은 수원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중국 요동지방에 있는 평돈을 모
방하여 벽돌로 동그랗게 돈대를 쌓아 만들었다. 공심돈이란 속이 텅 비어 있는 돈대란 의미이
다.
동북공심돈과 내부계단
동북노대(東北弩)와 창룡문(蒼龍門)
동북노대는 창룡문과 동북공심돈의 중간에 동북방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반달 모습의 담장
으로 보호하고 있다.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것으로서
화성의 노대는 서노대와 동북노대의 2기가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다.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고 하
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동북노대
동북노대 안
동북노대/안내판
창룡문
창룡문에서 바라본 동북공심돈/창룡문 성곽
화성열차
3시25분발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1시간이나 시간이 남아 국궁 활쏘기도 하고 혼자서 연무대를
지나 동북공심돈 안을 구경하고 동북노대를 거쳐 창룡문까지 다녀왔다. 창룡문에서 신호등을
건너면 바로 연무대 화성열차 출발지이다. 시간이 되어 일행은 어린애마냥 좋아하면서 열차를
타고 시내를 성곽터를 따라 서서히 달린다. 타고 오면서 방송해설로 장안문까지의 시설물들을
다시보고 듣는 복습하는 시간이 되었다. 장안문 다음부터는 새로운 이름이 나온다.
열차는 북서적대,북서포루,북포루,서북공심돈,화서문,서북각루,서일치에서 팔달산 중턱으로
오른다. 정조대왕동상이 보이고 조금 후 종점인 서장대 밑 승차장에 도착했다. 서장대 오르는
계단길로 250m를 올라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와 서노대를 구경하고 화성행궁으로 하산했
다. 화성열차와 화성행궁의 사진내용을 살펴본다.
화성열차
서북공심동/화서문
서일치/정조대왕 동상
서장대(西將臺)와 서노대(西弩臺)
수원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는 일명 화성장대라고도 하며 2층구조로 되어있다. 2층에
오르면 사방 100리가 보인다. 성안에서 군사를 한눈에 보고 지휘할 수 있다.
서장대 옆 서노대가 높이 서 있다. 서노대는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것으로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수 있으며 정8각형 평면의 기와 벽돌로 쌓았다.
서장대(화성장대)
서장대에서 본 수원시내
서노대
서노대내부/서노대에서 본 서장대
성곽돌기를 마치고 행궁을 보기 위해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조선행궁 건축의 백미
수원화성행궁
1789년(정조13년) 수원 신읍치 건설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한 행궁으로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1796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성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되었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재
의 융릉)을 3차례 참배하였으며 이 기간 중 화성행궁에서 유숙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봉수당,
복내당,유여택,신풍루,우화관,득중정 등 600여칸으로 정궁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행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으며 정조대왕께서 모친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을 열었던
궁이기도 하다. 낙남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설물들은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정책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지만 1980년대 복원추진위원회의 복원운동 결과 1996년부터 복원공사가 시
작되어 마침내 화성행궁 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3월 일반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화성행궁 조감도
화성행궁 전경
행군 제1문 신풍루
두번째 문 좌익문
중양문/가운데가 어도
세번째 문 중양문
소원빌기 느티나무
가운데가 어도(외에 세자,유수도가 좌우에)/110년된 신풍초등학교가 바로 울타리를 곁에두고 있다.
봉수당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현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다.
행궁내 건물과 편액들
낙남헌
화령전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혀성을 본받기 위해 순조1년(1801)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華寧殿)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
한각을 비롯,이안청,재실,전사청,향대청,제기고,외삼문,내삼문과 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
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직접 저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니기도 하였다.
궁궐에 지어진 다른 영전 들과는 달리, 수원에 세워진 화령전은 대칭에 의한 격식과 기능에 따
른 영역의 구분이 확보된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몇채의 사라진 건물을 제외하면 비교적
좋은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운한각
정조 어진
화령전 외삼문 전경
화재예방용 드무와 삼발이 달린 정(鼎)
이안청/어진을 싣고 가는 가마
우물(어정)
팔달산 오르는 길에 아름답게 핀 봄꽃들
정조대왕 좌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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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저 말로만 듣던 수원 화성 잘 봅니다. 유네스코 지정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