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6회 가고시마·미야자키②
순수한 신심으로
대복운의 미야자키를!
배가 나아가면 물결이 인다
1977년 12월, 이케다 선생님은 미야자키를 방문해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2일, 선생님은 미야자키지부 결성 19주년을 축하하는 기념간부회에서 먼저 ‘기원’의 자세를 말했다.
“어본존에게 창제하는 우리 불법자(佛法者)의 궁극은 내 몸에 불계라는 최고의 경애를 용현하는 데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불도(佛道)라는 ‘외길’을 향해 몸을 던지는 신념이 강한 한 사람 한사람이기 바랍니다.”
“자신의 주체성에 살고 자립성을 관철하는 것은 인생만반에 걸친 중요한 법칙입니다. 하물며 신앙의 세계에서 주체성의 견지는 자기를 장엄하게 장식하는 최고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불퇴의 일념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본존에게 기원하는 실천은 모두 자기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주체로 한 강성한 기원이 있어야 의정불이(依正不二)의 원리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벗의 가슴에 울려 퍼졌다.
계속해서 참석자와 함께 창제를 시작해 깊이 기원한 뒤, 선생님은 다시 이야기를 진행했다.
“미야자키의 여러분은 다시 한번 초창기 신심의 원점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다기지게 때로는 정신없이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해 온 저 순수한 신심을 불러일으켜 대복운에 감싸이는 미야자키를 건설하기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신심에서 솟아나는 구도심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창립 50주년의 때에는 성대하게 모두 모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염원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선생님은 더욱 힘주어 말했다.
“배가 나아가면 물결이 입니다. 광선유포의 앞길에 풍파가 이는 것도 성훈에 비추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삼장사마(三障四魔)의 폭풍우도 자신의 성장의 도약대로 삼아 인간혁명을 위한 선지식으로 해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윽고 후세 사람들이 ‘저 사람이 있어서 지금의 인간혁명을 한 모습이 있다.’ ‘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일가화락(一家和樂)할 수 있었다.’고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존경하고 추선회향(追善回向)의 제목을 부를 수 있는 공덕선근의 존재가 되기 바랍니다.”
모두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끝으로 선생님은 이렇게 강조했다.
“어쨌든 우리 동지는 우주 근원의 법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로 생생세세(生生世世) 이어지는 세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궁극의 투쟁이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훼예포폄(毁譽褒貶)도 마음속에서 초월해 유유한 신심의 경애로 인생을 총마무리하기 바랍니다.”
<기고> 스승은 ‘우리 마음의 태양’
하야시다 노부유키 미야자키총현장 / 사사키 지호 미야자키총현 부인부장
미야자키는 동쪽으로 구로시오해류가 밀려오는 태평양과 맞닿아 예로부터 ‘해가 뜨는 지방’이라 하여 ‘휴가(日向) 지방’으로 불렸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태양’이라고 하면 미야자키가 생각납니다.” “묘법이라는 ‘절대 승리의 태양’을 갖춘 지용보살이 결코 질 리가 없습니다.” 하고 희망을 보내주셨습니다.
어떠한 깊은 어둠도 태양이 뜨면 모든 것에 빛이 쏟아져 밝아집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격려의 태양빛을 보내주시는 스승의 존재야말로 ‘우리 마음의 태양’입니다.
사회와 지역 그리고 전 세계에 정의와 희망의 길을 제시해주시는 스승께 감사드립니다.
제1차 종문사건이 표면으로 드러난 1977년 12월, 선생님은 광포를 파괴하려 한 악승에게서 동지를 지키고자 미야자키현을 방문하셨습니다. 소설 《신·인간혁명》 제27권 ‘정의’에 그때의 진심이 씌어있습니다. “내가 방패가 되겠다. 정면에 서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회원은 내가 끝까지 지키겠다!”
이듬해 1978년 8월에도 미야자키현을 방문하신 선생님께서는 무더위가 한창인 11일, ‘자유근행회’를 열어주셨습니다.
오후 1시 전부터 열린 근행회는 처음에 1회만 개최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방문 소식을 들은 동지가 야마자키현 각지에서 끊임없이 즐겁게 모여 2회 근행회, 3회 근행회, 4회 근행회로 이어지고, 5회 근행회가 끝났을 때 창밖은 어둑어둑했습니다.
훗날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이분들이 보살이다. 이분들이야말로 부처다. 나는 회원님들과 공전(共戰)의 악수를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회원님들에게 승자의 보관(寶冠)을 바치는 심정으로 거듭 격려했다.”(‘수필 신·인간혁명’)
이날 스승 곁으로 달려온 보우(寶友)는 1만 명이 넘었습니다.
선생님의 깊은 자애에 모두 ‘생애 선생님과 함께, 광포를 위해 끝까지 살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장소가 바뀌어도 어떤 고난의 벽이 가로막아도 우리는 밝고 명랑하게 앞으로도 사제공전(師弟共戰)의 마음이 빛나는 ‘태양의 미야자키’를 목표로 전진하겠습니다.
성실한 행동
이틀 뒤 12월 4일, 선생님은 휴가시(市) 휴가본산(本山)에 있는 조센사의 본당 신축낙성입불식에 참석했다. 당시 제1차 종문사건이 표면으로 드러나자 각지에서 종문의 일부 승려가 비열하게 학회비판을 반복했다.
제27권 ‘정의’에는 “이번에 미야자키를 방문하면서 닛타쓰 법주와 흉금을 터놓고 거듭 대화해, 종문을 외호하려는 학회의 깊은 정성을 알리고 학회에 반감을 품은 승려들의 회원에 대한 무도한 처사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는 심정을 밝혔다.
스승은 영법구주(永法久住)를 위해, 동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승속화합(僧俗和合)을 위해 노력하고 성심성의를 다했다.
당시 미야자키현 부인부장인 하야시다 에미코 씨(미야자키총현 부인부 총주사)는 “소설에서 이케다 선생님의 진심을 다시 한번 알게 되면서 스승의 깊은 마음에 감동해 가슴이 벅찼습니다.” 하고 말했다.
미야자키에서 선생님을 맞이한 동지들은 환희에 넘쳤다. 선생님 또한 늘 그랬듯이 웃으며 한 사람 한사람을 거듭 격려했다.
“선생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희의 힘을 북돋는 행동을 관철하셨습니다. 종문사건으로 거듭 마음고생을 하고 계신다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의연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학회원을 지키고자 필사적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사악한 종문 승려들에게 몹시 화가 났습니다.” 하고 회상한 하야시다 씨는 예의를 갖추는 선생님에게 거만한 태도로 행동하는 종문 승려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하야시다 씨는 이렇게 서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2일에 열린 기념간부회의 지도는 미야자키 동지가 고난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포석이었습니다. 초창기의 순수한 신심, 어떤 훼예포폄도 초월한 의연한 신심을 우리 미야자키 멤버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결의합니다.”
오로지 회원을 위해
‘정의’에는 12월 4일 밤, 신이치가 미야자키의 숙소에서 후세를 위해 종문사건의 진실과 자신의 심정을 써서 남기는 장면이 나온다.
“펜을 손에 들자, 괴로움을 견뎌온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종문문제 일어나다. 송곳으로 찌르듯, 마음이 쓰라리게 아프다.’ – 이렇게 쓰자, 신이치의 가슴에 끓어오르는 분노와 격정이 솟구쳤다.
‘광선유포를 위해 승속일치로 전진하자는 우리의 주장을 어째서 짓밟고 부당하게 공격하는가.’
그리고 ‘대절복을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삼류강적과 맞서 싸우다 지쳐버린 불자(佛子)’에게 왜 이런 박해가 되풀이 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솔직한 심정을 썼다.
‘존귀하고 사랑하는 불자의 슬픔과 분노, 외로움과 고통을 듣고 창자가 끊어질 듯이 슬픈 나날이다. 이 불씨는 오이타에서 일어났다.’
신이치는 이어서 후쿠이와 효고 그리고 지바 등에서 다기진 동지를 박해하는 악승의 출현에 분노를 나타내고, 제700원기(遠忌) 법요의 성공을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기원한다.’고 썼다.”
야마구치 히로시 씨(규슈 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때 쓰신 문장의 원고를 엄중하게 보관하고 훗날 규슈의 대표 간부에게 주셨습니다. 훗날 선생님의 마음을 알고 승려들의 행동에 분노가 끓어오름과 동시에 정면으로 맞서 학회원을 지킨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1977년 당시 미야자키현 청년부장인 야마구치 씨는 연일 조센사에서 입불식 운영에 관해 협의했다. 그때, 승려는 “이케다 씨가 오면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손도 흔들지 말라.”고 말했다. 운영상 야마구치 씨가 기념촬영을 할 때 줄을 세우는 방식을 정해야 했지만 “재가인 너는 지휘하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다.
“오만한 승려들을 보니 정말 싫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오만한 종문 승려들도 성실하게 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학회원을 지키고 광선유포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니 지금 돌이켜봐도 가슴이 뜨거워집니다.”(야마구치 씨)
제26권 ‘법기’, 제27권 ‘정의’에서 이때의 미야자키 지도를 언급했다.
‘소중한 불자를 단호히 지킨다!’ 이러한 스승의 격려는 이듬해 1978년에도 거듭됐다.
무더위가 한창인 8월, 선생님은 미야자키로 날아가 대표와 간담하고, 미야자키지부 결성 20주년을 기념하는 간부회 등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11일에는 미야자키현 각지에서 모인 동지를 격려하고자 자유근행회에 참석하고 원래 1회만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참석자가 끊이지 않아 2회, 3회로 이어졌다. 선생님은 그때마다 땀에 젖은 셔츠를 갈아입었다. 결국 자유근행회는 다섯 차례를 헤아렸다.
선생님은 근행회 때마다 혼신의 힘을 쏟아 붓듯이 말했다.
“미야자키의 동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위대한 신심의 증명자가 되어 주십시오.” “나날이 끊임없는 활동 속에 무한한 불성이 훈발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어디까지나 일생성불을 위한 용기 있는 신심을 하기 바랍니다.”(제1회 근행회)
“신심의 후박(厚薄)에 따라 인생의 결산도 정해집니다. 소중한 인생을 총마무리할 때가 되어 후회를 남기지 않는 불도수행을 하기 바랍니다.”(제2회 근행회)
“나중에 되돌아보면 모두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신심입니다.” “신심을 근본으로 한 추억이 깊은 역사를 구축하기 바랍니다.”(제3회 근행회)
“자신이 사는 가정과 지역을 떠나 어딘가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관념론입니다. 가정과 지역이야말로 본유상주(本有常住)의 적광토라고 가슴에 새기고 어본존에게 칭찬받는 인생이기 바랍니다.”(제4회 근행회)
“순조로운 때나 그렇지 않을 때도 확고부동한 신심의 자세를 관철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자입니다.” “자신이 정한 신념의 길을 당당하게 꿋꿋이 살아가는 용자이기 바랍니다.”(제5회 근행회)
이튿날, 선생님은 미야자키 시내를 출발해 다카오카초, 노지리초, 다카하루초, 미야코노조시를 거쳐 가고시마에 있는 규슈연수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많은 동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차를 멈추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야마구치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몇 년 뒤, 선생님께 그 당시 연수원으로 가는 도중에 동지들을 격러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가 만난 사람이 몇 명쯤 될까요?” 하고 묻고 기념품을 주며 한 사람 한사람에게 직접 전달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연수원에서 보낸 나날
1978년 5월, 선생님은 규슈연수원에서 연수를 위해 각지에서 모인 벗에게 어서를 강의하는 등 전력투구하는 나날을 보냈다.(제27권 ‘격투’)
우토 가즈하루 씨(가고시마신세기현 부현장)는 당시 남자부 행사진행요원으로 연수원에서 임무를 섰다. 그때 들은 선생님 강의는 처음 듣는 불법의 심원한 생명론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생명에 새겨지는 듯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하고 회상했다.
선생님이 규슈연수원을 방문할 때마다 우토 씨도 행사진행요원으로서 달려갔다. 그때마다 ‘불법즉사회’ ‘지역공헌’ ‘복운 있는 인생을’ 등 지침이 되는 지도를 들었다.
우토 씨는 “특히 ‘남자는 50대가 승부다.’ ‘사회에서 승리자가 되어라.’는 지도가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스승의 말을 가슴에 품고 종합병원의 임상병리사 기사장으로 활약하며 사단법인 가고시마현 임상병리사협회 회장도 역임했다. 그의 분투가 인정받아 후생노동대신 표창도 받았다. 쉰 살에 조제약국을 차려 현재 네 군데의 점포를 두었다.
우토 씨는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격려가 있었기에 계속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지역광포를 추진하고 생애 불퇴전의 길을 끝까지 걷겠습니다.”
모두가 생기발랄하게 활동하도록
창의적인 방안을 모색하자
가고시마회관으로
‘격투’에는 5월 16일에 스승이 펼친 격려행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신이치는 연수원을 떠나 가고시마회관으로 갔다. 차를 타고 1시간 반 정도를 가면서 신이치는 가고시마현장 도시야스 신키치와 대화하며 가고시마 창가학회의 미래를 전망했다.
신이치는 항상 모든 이가 희망을 느낄 수 있는 목표를 세워 즐겁게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가고시마현총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광선유포의 리더가 지녀야 할 자세를 말했다.
“조직의 중심자가 늘 명심해야 할 점은 ‘모두가 즐겁고 활기차게 활동에 힘쓸 수 있도록 창의적인 방안을 거듭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이나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보아도, 해마다 여러 가지를 개량해서 진화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똑같이만 하면 된다고 한다면, 그 조직은 시대에 뒤떨어진 흑백텔레비전과도 같습니다. 좌담회 등의 일상적인 전통행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위에 희망을 만드는 큰 행사를 마련한다면 모두가 즐겁게 마음껏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조직의 총합력도 강해집니다.”
“학회에서 추진하는 활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심을 활성화합니다. 또 그러한 활동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각자가 자신의 성장과 경애혁명 그리고 공덕을 실감하기 위한 행사입니다.”
차 안은 ‘이동하는 연수회’가 되었다.
오후 4시, 가고시마회관에 도착한 신이치는 회관 내부를 둘러보고 가고시마현 간부들과 근행을 했다. 그리고 지도회를 열어 가고시마에 거는 기대를 말했다.
“규슈는 일본열도를 이루는 4개의 큰 섬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고, 가고시마현은 그 남단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고시마 여러분은 ‘언제나 우리 지역에서 광선유포의 새로운 조류를 일으켜, 전국을 뒤덮자!’는 결의와 긍지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일본 제일’의 광선유포를 달성하자는 일념으로 온 힘을 다해 학회활동에 힘쓴다면, 그것이 인(因)이 되어 생활적인 측면에서도 틀림없이 전국 제일의 공덕과 복운이 넘치게 됩니다. 그것이 불법(佛法)의 법리입니다.
하지만 그럭저럭 신심하면 된다는 자세라면 그럭저럭한 공덕밖에 받지 못합니다. ‘불법은 체(體)’ ‘세간은 그림자’이므로, 신심의 일념과 실천은 그대로 자신의 생활에 투영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디까지나 신심을 근본으로 광선유포를 향해 끝까지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가고시마회관을 나선 신이치는 가고시마현 부인부장의 집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부인부장의 가족과 소카대학교 출신 청년부원들을 만나 성원을 보냈다.
미야와키 도쿠코 씨(가고시마총현 부인부 총주사)는 그날의 감동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규슈연수원에서 이케다 선생님을 만나면 자주 ‘가정방문을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바쁜 와중에도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미야와키 씨의 집에 도착한 선생님은 미야와키 씨 가족과 함께 제목삼창을 했다. 그리고 “여러분의 제목에 이끌려 찾아왔습니다.” 하고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먼저 미야와키 씨의 친정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가고시마현 사람들의 특성 등을 이야기한 뒤, 야마구치현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근왕(勤王)의 지사(志士)’라고 말했다.
미야와키 씨는 “평소에는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하고 간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어서 가족을 계속 격려했다. 미야와키 씨의 남편에게는 평소에 미야와키 씨를 전면적으로 지원해주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또 선생님을 만나려고 가고시마회관에 모인 소카대학교 출신 청년부를 미야와키 씨 부부에게 양해를 구해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 사회에서 활약하기를 기대하며 세심하게 조언했다.
미야와키 씨는 감개무량해 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저희 집을 떠나실 때는 밖은 이미 어두워졌습니다. 선생님의 진심에 감사함과 동시에 한 사람 한사람을 온 힘을 다해 격려하는 리더의 자세를 배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정의의 길을
용감하게, 당당하게 나아갑시다!
규슈에서 평화의 여정을
1979년 2월, 이케다 선생님은 인도를 공식 방문했다. 세 번째 인도 방문은 ‘일곱 개의 종’의 대미를 장식함과 동시에 21세기를 향해 새롭게 출발하는 더욱 의의 깊은 세계 여정이었다.
제29권 ‘청신’에는 인도로 출발하기 직선에 규슈로 간 이유를 밝혔다.
“신이치는 기념할 만한 이 인도방문에 걸맞은 출발지를 어디로 해야 할지를 생각하자, 규슈가 바로 떠올랐다. 니치렌 대성인의 유명(遺命)인 ‘불법서환(佛法西還)’을 서원(誓願)한 은사 도다 조세이가 동양광포를 의탁한 땅이 규슈이기 때문이다.”
1월 31일에 규슈연수원에 도착한 선생님은 이튿날인 2월 1일, 규슈기념간부회에 참석했다. ‘청신’에서는 간부회의 모습도 언급했다.
신이치는 강당 앞쪽으로 입장해 그대로 참석자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강당 뒤쪽에 앉아 참석자를 지켜보듯 시선을 보냈다.
간부회 도중에 신이치는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 말을 건넸다. 미야자키현의 후지네 유키였다.
후지네는 남편을 여읜 뒤에도 신이치의 격려로 분기해 지역지도장으로서 힘쓰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신이치는 광포를 위해 무엇이든 하자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후지네를 칭찬하고, 역직이 바뀌어도 신심의 자세가 바뀌면 안 된다고 말했다.
신이치가 지도할 차례가 되었다. 신이치는 불법자의 자세를 이렇게 말했다.
“니치렌 대성인의 지혜는 평등대혜(平等大慧)이므로,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이롭게 합니다.
이러한 대성인의 생명인 어본존을 신수하는 불자인 우리의 인생은 전 인류가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행동하는 하루하루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본의 광선유포를 위해, 더 나아가 세계광포를 위해 꿋꿋이 달리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또 어떤 나라 사람이라도, 어떤 민족의 사람이라도, 어떤 환경에 놓인 사람이라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나 자신이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의 심부름꾼으로서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을 넓히는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누구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고 또 모든 회원을 신심 면에서 잘 이끌어주기 바랍니다. 우리가 평등대혜인 부처의 지혜를 용현시켜 실천하는 곳에 세계평화로 가는 대도(大道)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어디까지나 신심 제일로 사이좋게 전진해야 합니다. 그것이 화합의 축도입니다. 사이좋은 조직은 사람들에게 활기를 줍니다. 힘을 솟게 하는 원천입니다. 세상은 질투와 증오, 불신이 소용돌이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뢰와 존경 그리고 격려가 가득한 화기애애한 인간조직을 만들어, 그 아름다운 연대를 사회에 넓히지 않겠습니까!”
결의에 넘진 박수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신이치의 지도가 끝난 뒤 모두 함께 ‘동양광포의 노래’를 합창했다. 그리고 중대한 사명을 안고 떠나는 인도 방문단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합창단이 인도의 국가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신이치는 다시 멤버들에게 말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정의’의 길을, ‘신념’의 길을, ‘혼의 자유’의 길을, ‘인류평화’의 길을 용감하게, 당당하게 나아갑시다!”
그리고 이틀 뒤 2월 3일, 신이치는 가고시마공항에서 신시대를 여는 세계평화의 여정을 향해 출발했다.
공전보(16-2) 제16회 가고시마·미야자키.hwp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