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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오월의 자취를 따라서
1.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광주사회
‘10월 유신’은 동북아국제질서와 남북관계의 변화라고 하는 긴장완화의 국제적 흐름과 상충되는 것이며 전후 세대의 성장에 따른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적 지향과 요구가 대세를 형성하는 시대적 조류를 역행하는 것이었다. 저항의 흐름은 정치적 측면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사회적 차원에서 민중생활권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각 부문으로 파급되었고 전국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광주에서도 여러 부면에서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지식인과 청년학생이 선도하였다. 유신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12월 5일 <함성>이라는 ‘유신’반대 유인물 살포 사건이 일어났다. 전남대학생이 중심이 된 이 사건은 사회적 파급은 적었지만 전국 최초로 시도된 유신반대운동이었다.
1974년 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운동이 있었는데 이로서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때 ‘기아임금으로 혹사당하는 근로대중과 봉건적 착취 아래 신음하는 농민 그리고 또 하나의 격리된 세계에서 확대되어 가는 판자촌-이것이 13년에 걸친 조국근대화의 업적인가? 이러한 수탈체제의 수호신은 바로 일인독재체제와 정보 폭압정치이다’라고 하였던 “민중․민족․민주선언”은 박정희 정부의 개발독재에 대한 원천적 부정이었다. 광주에서도 ‘민청학련’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참가자 수에 있어서도 서울 다음으로 많았으며 조직적 활력이 두드러졌다.
1975년 봄 이후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출감하면서 지역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학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이들은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한편 사회 각 부문운동에 투신하였다. 농민운동을 위하여 가톨릭농민회에서 일하기도 하고 노동운동을 맡는 그룹이 생겨났으며, ‘현대사회연구소’를 설립하여 사회운동권의 결집을 모색하였다. 이로부터 양심적 지식인․종교인과 청년운동세력은 노동계와 농촌사회단체 등과의 연대를 갖출 수 있는 틀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1976년 시작된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이 2년에 걸쳐 ‘피해조사 -진정건의- 기도회를 통한 선전과 농성’을 거치면서 승리할 수 있었음은 청년운동과 농민운동간의 연대의 성과였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대학 내에도 점차 사회과학 서적 등을 탐독하는 ‘의식화’ 동아리가 여럿 결성되었다. 헌책방 녹두서점은 민족경제론, 전환시대의 논리, 변혁시대의 한국사 등을 공급하였다.
1978년 6월 27일 “우리의 교육지표”가 발표되었다. 한국의 교육현실의 모순을 ‘부국강병 국가주의와 반민주 권위주의’에 있음을 고발한 “교육지표”는 현실 고발을 넘어 ‘인간화와 민주화 그리고 자주평화통일’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하였으며, 또한 민족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민주화의 과제를 넘어 교육문제를 전면화하였다. 교육지표 운동은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서울 등지의 민주화세력도 즉각 지지 호응하였다. 이때 광주의 청년 학생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긍지를 더욱 고취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후 광주 지역운동은 한층 고양되었다. 인간화와 민주화를 위한 실천이 뒤를 이었다. YWCA에서 결성된 <양서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일어난 ‘고등학생과 대학생에게 좋은 책을 읽히자’는 운동도 그 일환이었다. 당시 양심적 교사는 고등학생들이 양서조합을 찾을 수 있도록 지도하였으며, 현대사회문제연구소에서는 주로 대학생을 유도하였다. 이때 양서조합을 찾으면서 교내의 독서반에 참가한 적지 않은 고교생들은 암기식 입시교육의 허상을 보았으며 또한 사립학교 재단의 권위주의와 부조리에 눈을 뜨며 사회 모순을 자각하는 의식의 변모를 겪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대학문화운동에도 일정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계통의 학생들은 순수예술 중심의 문예활동을 비판하고 리얼리즘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민족문화운동을 펼치려는 의식적 자각을 보였다. 현실비판과 참여의 관점에서 ‘민족극’의 형식과 내용에 관심을 가졌으며 ‘서구문화가 급속도로 침투한 우리나라 상황 속에서 우리 민족의 몸짓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였다. ‘탈춤반’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마당극 ‘함평고구마’가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1980년 초에는 ‘대학생활의 한시성을 감안하여 졸업 후에도 계속 몸담을 문화운동을 해나가기 위한 극운동단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극단 ‘광대’가 탄생하였다. 이 극단은 1980년 3월 YWCA 무진관에서 무분별한 축산물 수입정책으로 인한 농촌의 돼지파동을 다룬 ‘돼지풀이’를 공연하였다.
2. 오월 전야 광주지역의 민주화 운동
1972년 10월 ‘유신’독재 성립 이후 민주화운동과 민중생활권쟁취운동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집약되었다. 이른바 ‘부마민중항쟁’이었다. 이때 권력 핵심부의 갈등이 증폭되고 박정희는 죽음을 맞았다. 그것은 민선․민간․민주정부가 수립의 전기였다. 그러나 최규하 정부와 계엄당국은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고자 하였다. 민주세력에게 정권을 이양하지 않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민주진영의 대안은 같지 않았다. 김영삼이 이끄는 신민당은 ‘先개헌 後선거’의 방침을 정하고 국회 내 개헌에 주력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개헌에서 선거에 이르는 약 3∼4개월 동안 최규하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러나 진보적 청년운동과 재야민주화세력은 ‘통대선거’ 반대는 같았지만 해결방식은 신민당과 차이가 있었다. 거국민주내각의 구성과 과도정부 구성을 제시한 것이다. 최규하의 퇴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은 11월 12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공동의장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명의로 천명되었다. 그리고 11월 24일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른바 ‘명동위장결혼’사건이었다.
이로부터 며칠 후인 11월 28일 광주에서도 기독교․가톨릭 등 종교계와 해직교수 청년단체 등 재야민주단체는 “민주주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자”라는 성명에서 국민연합의 방안을 주장하였다. 행동방침으로 ‘통대선거분쇄 시민대회 개최’가 제안되었다. 이때 광주의 민주화운동세력은 ‘우리 호남은 그 동안 많은 민주인사와 종교인, 청년학생들과 농민 근로자의 값진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주의를 밝히는 소중한 불씨를 죽이지 않고 지켜왔다’고 하여 지역의 민주역량에 자부하며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출하였다.
1980년 봄이 되자 구속 제적학생이 복학하면서 학원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서 학원자율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전남대에서는 ‘학원사찰 상담지도관실’의 폐쇄와 ‘어용교수의 퇴진’이 중점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조선대는 ‘족벌재단의 비리문제’가 중심과제였다. 학원자율화운동은 양심적 교수의 지원을 받으면서 일반 학생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3월과 4월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학원자율화운동을 통하여 학원자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사회 민주화를 달성하였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민주역량은 한층 신장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년학생운동세력은 당면과제를 학원문제에 국한하지 않았다. 학원자율화 과정에서 끊임없이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공개, 유신잔재 척결 등의 정치적 이슈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민생문제를 집중 부각하였다. 4월중 전남대에 배포된 ‘대학의 소리’ 제1호는 ‘노동3권 보장’ ‘재벌논리의 경제정책 지양과 민족경제의 건전한 건설을 위한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근본적 수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4월 19일 개최된 ‘4․19제전’ 이후에는 참석자 일동의 명의로 농업․농민문제의 해결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즉 ‘강제농정 중단, 무분별한 외국농산물 도입정책과 저농산물 가격정책 즉각 폐기, 농협임시조치법 즉각 폐지, 소작농 일소와 비생산적인 토지의 농민 환원, 재벌과 특권층의 대토지소유 및 토지투기 제도적 금지, 헌법에 의한 농민운동 보장’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민주농정의 전제조건으로 지방자치체를 전면적으로 실시하라’는 제안을 하였다.
4월 25일 전남대 총학생회는 ‘동원탄좌 광부들의 생존권에 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것과 이를 계기로 노동자 농민에 대한 구조적 수탈을 즉각 중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학생운동은 노동․농민운동과 원칙을 함께 한다’는 노농학 연대의 방침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청년학생운동의 노동자 농민의 생활상의 요구와 권리 제기에 대하여 양심적 교수․지식인과 기독교계에서도 인식을 같이 하며 전폭적으로 지지 성원하였다. 4월 25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는 성명서에서 ‘도탄에 빠져 있는 민생을 구하기 위하여 부의 집중을 부채질해온 재벌보호 중심의 독점경제정책을 즉각 철폐하고 국민경제를 시급히 재건하기를 촉구한다’고 주장하였으며, 5월 13일 전남대 교수평의회는 시국선언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포함한 민중들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소득균배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강조하였다.
5월 초순을 넘으면서 사태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신군부의 공세 징후가 분명해졌다. 신군부와의 정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월 7일 전남대 총학생회는 ‘사태는 심각하고 추세는 불확실하며 낙관은 요원하다’면서 5월 8일부터 지속적으로 민족민주화성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5월 8일 전남대 총학생회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 공동명의로 ‘제1시국선언문’을 채택하여 ‘5월 14일 이내 비상계엄 즉각 해제, 휴교령 거부, 대학인의 행동 통일’을 결의하였다. 마침내 도청 앞으로 진출하였다. 교수․지식인 등도 시위에 합세하였다. 서울 등에서는 5월 13일을 지나면서 자진해산 등의 길을 밟았으나 광주의 시내 집회는 5월 16일까지 계속되었다.
5월 15일 ‘유신잔당의 국권찬탈 음모를 분쇄하고자 우리 대학인의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반민주 반민족 세력과의 성전을 엄숙히 선포한다’는 ‘제2의 시국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여기에서 학생들은 농촌문제, 노동자문제, 학원문제, 계엄령, 군․경찰, 과도정부, 언론 등 7개 분야에 걸쳐 15개 강령을 채택하였다. ‘민중이 역사의 주인노릇을 하는 위대한 민중 시대’를 위한 기본 강령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민주학생세력은 노동자․농민 등 일반 대중의 생활상의 요구를 대변하였고 이들과 함께 한다는 각오를 밝혔으며, 광주 시민은 이에 호응하였다. 이미 시민 참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군부의 반격에 대비한 행동 방침에 대하여 시민과 학생간의 암묵적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러한 자체 역량과 준비가 있었기에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 시위와 기습적 가두 진출을 결행할 수 있었다.
3. 주민운동과 들불야학
도시는 자본․권력․지식의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작동하는 ‘중심’ 공간인 빌딩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공간의 주체인 자산가․관리직․전문지식인 등은 ‘중심부’ 시민이다. 한편 도시에는 거리와 공장과 상점을 터전으로 삼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노동자, 서비스업종사자, 단순사무직, 영세자영업자, 무직자 등이다. 도시의 중심에 들지 못하는 ‘주변부=변방 시민’ 즉 ‘기층민중’이다. 도시는 이들을 끌어들이며 확대 발전하는 공간에 다름 아니다. 광주도 다른 대도시와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였다.
기층민중의 생활과 동정은 거의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기왕의 다양하고 산발적인 저항의 형태가 동시에 분출하는 사건, 이른바 항쟁이 일어났을 때, 그러한 흐름을 누가 주도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현장의 다수는 기층민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광주5․18’의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광주5․18’을 특징짓는 수세적 저항시위의 공세적 전면항쟁으로의 전환, 나아가 무장의 선택과 항쟁의 지속, 그리고 최후의 결전에 이르는 고비 마다, 현장의 다수는 바로 기층 민중이었다. 기왕의 연구도 구속․피해자나 이른바 ‘시민군’의 다수가 기층 민중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문제는 기층민중의 조직화를 어느 수준에서 이해할 것인가? 여기에 광천동 들불야학이 있었다.
광천동은 ‘궁색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방을 얻을만한 돈이 없는 사람은 시장자리의 큰 방앗간 옆에다 천막을 짓고 살았으며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전세를 얻어 살았다’고 할 정도의 빈민구역이었다. 1969년 광주시는 10평형 시민아파트 175호를 지었는데 10여 년이 지나면서 보수가 되지 않고 빈민이 살던 곳이라 ‘이름만 아파트지 판자촌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파트는 ‘복도가 암굴처럼 어두웠고 내부 벽은 매우 더러웠으며 공동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어서 냄새와 메탄가스로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어린이들은 ‘놀이터가 없어서 부서진 리어카 위에서 난폭하게 놀던’ 상황이었다.
1977년 봄에 YWCA 전남협동개발단 간사 김영철이 시민아파트 A동 216호로 이사를 오면서 주민운동은 시작되었다. 그는 주민의 종교․학력․직업 및 소득을 조사하여 주민생활의 기초 사항을 파악한 후에 시민아파트개조사업과 신용협동조합운동, 청소년 교육운동을 추진하였다.
김영철은 유명무실한 ‘유진청년회’를 부활시키고 산하에 청소년부를 두고 ‘어린이주말학교’를 운영하였다. 또한 매일 ‘아파트대청소’를 하였고 나아가 ‘아파트 내부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염산과 하이타이로 공동화장실의 요석을 벗겨내고 변기와 타일을 새로 하얗게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놀라울 정도로 아파트환경이 개선되고 주민생활의 질서가 잡혀갔다.’ 주민총회는 ‘아파트 제값 받기’ 즉 ‘2백만 원 이하는 팔지 않는’ 결의까지 하였다.
김영철은 ‘주민과 조합원으로부터 불신을 받았던’ 광천 삼화신용협동조합을 인수, 운영하였다. 먼저 ‘어린이에게 빈 병을 모아오게 해서 노란 출자금 통장을 만들어 주었다.’ 신협에 대한 믿음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주민의 호응도 차츰 높아져서 조합원이 증가하고 예금이 불어나면서 자산도 늘어났다.
광천동의 지역개발주민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있을 즈음 광천동 천주교회에 ‘들불야학’이 생겼다. 1978년 7월부터 천주교 교리실에서 시작한 야학은 6개월 1학기, 3학기제로서 정원은 남녀를 합하여 50명이었다. 들불야학에서는 제1기 학기가 진행되던 1978년 겨울 ‘광주공단실태조사’를 실시하였다. 현장을 보다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인식하기 위함이었다.
야학에는 ‘가난으로 배움을 중단한 것을 아쉬워하는’ 근로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다음은 한 야학생의 증언이다. “1977년 나는 광주에 내려와 신흥금속에 취직하였다. 공원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지만 가정형편이 어렵다고 부모님을 원망하면 무엇 하나,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하였다. 내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기 위해 남의 책도 많이 빌려 보았다. 노력의 결과로 프레스반장도 하였지만 중학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나는 도면의 영어와 한문을 눈치로 대강 해석할 정도였으므로 정확하게 작업지시를 할 수 없었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강하였던 나는 반장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내가 살고 있는 광천동에 들불야학이 있다는 것을 알고 1979년도에 2기로 입학하였다.”
1979년 2월 제2기 학생을 모집할 때에는 장소가 비좁아 시민아파트에 방 2칸을 임대하였다. 야학교사-강학이라 하였다-로는 윤상원, 박관현, 박기순, 신영일 등이 참여하였으며 김영철은 토의진행법과 레크레이션을 지도하였다.
들불야학은 영어나 수학은 중등 과정을 그대로 이용하였지만, 다른 과목은 일반 학교와는 ‘다른 교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당시 광주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던 ‘진학을 위한 야학’과는 달리 ‘노동자의 의식화와 조직화’ 나아가서는 ‘민주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강학들은 ‘배울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을 되돌아보며 야학에 임하였다. 야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입장보다는 ‘함께 지내는’ 자세로 만났다. 1980년 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되었던 박관현은 ‘검정통고무신에 항상 똑같은 작업복을 입고… 거리감 없이 하나 되어’ 함께 어울렸다.
10․26 이후 들불야학은 상당한 곤란에 부딪쳤다. 경찰은 ‘운동권’으로 간주된 강학의 부모를 위협하여 야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부모가 시골에 있어 자취하거나 ‘운동권 명단에서 제외’된 강학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였지만 경찰의 감시와 통제는 점차 심해졌다. 야학에 들어오는 학생도 줄었다.
그러나 2년에 걸친 야학을 통하여 노동청년들은 엄청난 변모를 경험하였다. 즉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우리 노동자들이 어떠한 조건에게 일을 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야학이 위기에 처하자 ‘자치회’를 결성하여 자체적으로 야학을 꾸려가려고 노력하였다. 어떤 야학생은 작업장에서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다가 해고당하기도 하였다. 들불야학의 발전과 시련의 시기에 근로청소년의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야학도 서서히 성격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백제야학에 참여한 대학생은 이 부분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978년 10월 말 쯤 나는 친구의 권유로 야학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랑의 교실이라는 이 야학은 당시 들불야학과는 달리 상급학교로 진학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검정고시 준비를 시켜주는 곳이었다 … 1979년 가을 이 학교의 졸업생이었던 여자 형제가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손을 잘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현대문화연구소 YWCA YMCA JOC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노동야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우리 팀은 1980년 백제야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남동성당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자체 변화와 자각을 바탕으로 들불야학 팀은 5월 19일부터 범시민 민주투쟁위원회와 학생혁명위원회 명의로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로 시작하는 “투사회보”가 수차에 걸쳐 배포될 수 있었다. 이로부터 광주의 5․18은 국가폭력에 대한 수동적 대응을 넘어 ‘한국 사회의 모순구조-비인간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적극적 민중항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4. 윤상원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윤상원은 한동안 주택은행 봉천동 지점에서 근무하였다. 그때 신림동 봉천동의 야학 팀과 꾸준히 만나면서 전민노련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광천동에 들어갔다. 그는 시민아파트를 얻어 야학생과 같이 자취하였다.
그는 눈물이 많았다. 배우지 못함에 한을 느낀 야학생의 사정을 듣고 “OO이 학당에 나오게 된 동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울었다.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중학과정을 공부하는 야학에 나오게 되었을까? 이러한 개인적인 이 아픔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야학은 의의를 상실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책이 심하였다. 야학생의 수가 줄어들었을 때였다. “모두들 어려운 가운데 배우자고 찾아온 사람들인데 어쩌자고 이렇게 학생 수가 줄게 되었는가? 수업에 흥미가 없어서인가? 별로 배울 게 없어서인가? 강학들이 학생을 무시했기 때문인가? 개인적으로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인가?”
광주의 오월, 사람들이 눈물조차 말라 ‘우리 같이 죽자’ 하다가, ‘알 수 없는 사람, 아니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출현하였을 때 ‘또 다른 무섬증’이 엄습하고, 이때 나타난 ‘수습대책위원회’가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 무기를 어떻게 반납할 것인가?’ 하였을 때, 윤상원은 설파하였다. “우리 역사의 여정은 민주와 자주를 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몫을 다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5월이 역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5월은 수습인가 협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죽음을 넘어선 항쟁으로 가닥을 잡았고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출범하였다. 5월 24일이었다. 윤상원은 대변인이 되었고, 죽음으로 자신의 화두를 실천하였다.
5월 그 날, 도청에서 대변인 윤상원을 인터뷰하고 그의 ‘비장함’을 타전한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3년이 지나 윤상원의 집을 찾았다. ‘상원이는 죽지 않았다’하여 그대로 둔 공부방에 들어가 한참을 둘러보고 갔다. 참 쉽지 않는 일이다. 윤상원이 가고 집에 불이 나서 끄름이 잔뜩 낀 방은 한참 그대로 있었다. 요사이 들불야학을 하던 후배들이 힘을 모아 새 단장을 하고 기념관으로 꾸몄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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