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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대하여
바보새
사랑하는 벗들아, 나는 너희를 만나기를 참 바라고 기다렸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부르면 적지않이 놀랄 줄을 안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 너는 모르리라만은 나는 너희를 늘 지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너희들이 이 문화의 저자의 넓은 길거리를 아무 생각없이, 나비처럼 나풀거리고 참새처럼 재재거리며 지나다니는 동안에도 나는 끊임없이 한 모퉁이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바라고 있었다. 저 중에는 하나도 없을까? 길목이 메어 다니는 저 많은 사람 가운데 정말 하나라도 없을까? 단 한 사람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으로 지키었다. 내가 너희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소리가 이것인 줄을 안다면 어떠냐?
터지는 꽃봉 같은 너 보고 내가 취해
길가에 얼 빠진듯 해 가는 줄 모르노라
젊음아 네 더운 가슴 나를 열어주렴아
정말 내 생각에도 얼이 빠진 듯하다. 어리석기도 하다. 그러나 양을 치다가 갑자기 전장으로 붙들려오는 다윗 모양으로, 내 머리 위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썼어도 내 눈은 오히려 아침 이슬에 젖어 있고, 줄은 비록 굵어도 내 마음의 거문고에는 골짜기 백합의 향기로운 송이가 끼여있다. 물결에 떠내려가는 복숭아꽃 살구꽃의 떨어진 꽃잎 같은 너희 떼 중에도, 그래도 하나 둘쯤은 버티고 서는 바위 같은 혼이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위에 앉아, 우리가 저 말없는 친구들을 동무하여 사는 동안에, 구름 위에 솟은 바위로부터 내리부는 하늘바람에서 배운 곡조를 아뢰어, 이 동산의 구석구석으로 보내어, 거기 눕던 지친 혼들을 불러 새 싸움터로 내보낼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서 있는 늙은 버드나무 모양으로 이 흘러가는 문화의 흐름을 들여다보며 그 언덕 위에 서있다. 그러나 들여다보는 것은 사실은 내 그림자가 아니고 너희 모양이다. 그런 줄이나 알아라. 너희밖에 또 내 마음을 둘 곳이 어디냐? 그러나 내가 얼이 빠져 해가 저물도록 서면 섰지, 밤이 다 깊도록 기다리면 기다렸지, 결코 내가 너희께 가지는 않는다. 나는 자존심이 많은 사람이다. 자존심이라기보다도 부끄럼이 많다. 아니다, 부끄럼이 자존심이지 뭐냐? 부끄럼 다 팔아먹은 너희는 자존심도 없느니라. 하여간 너희가 나를 더럽다 보는 날까지는, 즉, 들 냄새를 싫어하는 때까지는 나는 가지 않는다. 흙 냄새를 향기롮다 맡으리만큼 너희는 코가 낮아지고, 눈서리에 찢긴 나무통 같은 나를 안으리만큼 너희 가슴이 넓어지지 않다면 나는 너희에게 결단코 가지 않는다. 너희 마음을 차지하잔, 차지함으로 기르잔 내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은 너희가 나를 불렀다. 너희도 모르게 불렀지. 그러나 너희와 나 사이에는 아지 못하는 손이 있어 줄을 매어 끄는 줄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너희를 알뜰히 생각하는 너희 동무가, 이미 이 들사람의 노래에 취한 이가 있어 이것을 한 것이다. 그의 생각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너희도 이 들사람의 벗이 되기를 바라서다. 그러고 보면 너희와 나의 만남은 아지 못하는 사랑으로 된 것이다. 그렇단다, 사랑은 아지 못하게 자라는 것이란다. 아는 사랑이 참 사랑이 아니란다. 아무도 사랑의 뿌리를 볼 수도 없고 그 손 끝을 만질 수도 없단다.
그러나 너희와 나는 만나기는 했으나 적어도 겉모양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어디까지나 들의 사람이요, 너희는 어디까지나 문화의 사람이다. 나는 꽃 중에서도 들국화를, 새 중에서도 기러기를, 나무 중에서도 전나무를 좋아하는데, 너희는 다듬은 화강암의 전당에, 문화의 장식 속에, 자연의 소리가 아니고 일부러 꾸며서 하는 노래에 취하고 있다. 너희는 여자 중에서도 처녀요, 나는 남자 중에서도 귀 밑에 흰 털이 날리는 사람이다. 너희를 한마디로 아름답다면, 나는 한마디로 추하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움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도리어 강한 대조에 있지 않느냐? 푸른 잎에 붉은 꽃, 시커먼 구름에 반짝이는 샛별 모양으로. 비극을 감격하지. 비극이 무엇이냐? 극단의 대조 아니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을 맞대 놓음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자는 것이 비극이다. 우리 마음은 하나됨을 얻은 때에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될 수 없는 것을 맞대 놓고 거기서 하나됨을 찾으려 하는 때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아름다움의 감정은 결국 불쌍히 여김의 감정, 곧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미(美)와 선(善)이, 또 선과 진(眞)이 딴 것이 아니다.
그럼 오늘 우리 이 장면도 비극이람 참 비극이다. 나는 마음이 슬프다. 나는 비참하고도 분한 생각을 품고 이 자리에 선다. 그러나 비극인 대신 그만큼 아름답다. 이 우뚝 솟은 봉우리처럼 서는 내 발 밑에 벌어지는 꽃밭같이 너희는 아름답지 않으냐? 그 꽃밭을 굽어보고 서는 이 나도 아름답지 않으냐? 서로서로는 저 때문만이 아니고 남 때문에 아름다워진다. 내가 분하다는 것은 왜 분한지 아느냐? 미워서가 아니다. 또 미움이 무언지 아느냐? 갚아지지 못한 사랑뿐이다. 향기로운 들국화를 그 발밑에 두고 키와 몸집이 너무 서로 어긋나 앉지도 못하고 떨기만 하는 늙은 소나무 모양으로 나는 너희와의 사이에 메꾸지 못하는 골짜기가 있으므로 분을 품고 슬픔을 발하는 것이다. 나는 밉게 생긴 늙은 솔인 양, 나의 슬픔을 이 맑고도 향기로운 가을바람에 부쳐 너희 위에 퍼부으리라. 그렇다, 퍼부을 것이다. 아낌없이 퍼부어 너희 가엾은 혼을 진동시키고야 말리라.
사랑하는 벗들아, 우리는 처음으로 만났다. 내가 너희보고 하고 싶은 말이 하나만이요 둘만이 있겠느냐? 이때껏 나 혼자서 쌓고 쌓은 것이 몇 날이면 끝이 나고 몇 해면 끝이 날 줄 아느냐? 그러나 내가 오늘 너희를 보고 있는 말을 다 할 수는 없다. 너희와 나 사이에는 막힌 것, 떨어진 것이 있다. 우리는 서로 무장을 하고 있다. 그 무장을 먼저 풀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나대로 내 체면을 보고, 너희는 또 너희대로 너희 모양사리를 지키면,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할 수 없는 적국 사이다. 서로 제 인격의 속알을 드러내 보이지 않기 위하여 갑옷과 총칼보다 더 어마어마한 경계로 몸을 두르고 있어 한 발걸음을 그 안에 들여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렇게 만나는 것은 은하수 양쪽의 견우 직녀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피차에 껍질을 벗어야 한다. 너희의 너희 이상으로 잘 뵈잔 모든 허영심의 화장을 긁어치워라. 내가 언젠가 누구를(그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보고 이런 소리로 빈정댄 일이 있다.
둥근 그대 얼굴 능라도 수박인가
붉고도 단 그 속을 쪼개서 날 줄거지
어쩌다 속은 안 주고 겉 핥으라 하는고
내가 너희께 노래 해준다면 너희는 어찌할 터이냐? 쓸 것을 가져오라면 무엇을 가져 오겠느냐? 모조지? 참지? 옥선지? 그건 그만두고 네 치마폭을 내민대도 싫다. 배꽃 동산이라니, 이 동산에서 짜내인 너희 배꽃 같은 치마위에 너희 노래로 점점이 무늬를 놓는다면 그도 예술품으로는 그럴 듯 할는지 몰라도 그것이 나의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바람에 나풀거리는 너희 치마폭이 아니다. 내가 쓴다면, 내 사는 골짜기의 긴긴 가을밤 울어 새는 저 슬픈 친구 모양으로 목구멍에서 뱉는 붉은 피를 잉크 삼아 쓸 터인데 그까짓 비단 치마가 다 무어냐? 헤쳐야지, 네 그 빌어 온 향으로 꾸민 옷을 헤쳐야지. 그리하여 뜨거운 피 뛰는 심장을 내놔야지. 그리하여 그 심장의 육비(肉碑)에 금강석 촉으로 폭폭 박히도록 써야지.
가리우고 꾸미는 옷을 벗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통할 수 있다. 서로 벗이 될 수 있다. 서로 말을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하여 나는 오늘 너에게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이냐?’ 를 말하려 한다. 그것은 옷은 결국 아름다움을 위해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옷 입는 목적을 물으면 만입이 한 입같이 추위 더위 막기 위해서라 하겠지만 그것은 빨간 거짓말이다. 사실은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다. 문화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의 말도 사람이 당초에 옷을 입게 된 것은 실용을 위해서보다는 장식의 목적으로 했다고 한다. 옷의 걱정이 아름다움을 위한 데 있는 것만은 다툴 수 없는 사실이다. 또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적어도 지금의 너희야, 그게 사실 아니냐? 그럼, 참이 드러나도록까지 네 옷을 벗기기 위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기로 하자.
너희만 아니라 사람이란 본래 아름다움을 찾는 물건이다. 그렇기에 너희 있는 집에도 진·선·미로 이름을 붙였지. 먹는 것에서나 입는 것에서나 사는 짐에서나 또 말에나 생각이나 행동에나 사람은 아름다움을 찾는다. 아름다움을 찾을 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그럼 아름다움이란 뭐냐? 아름답다는 것은 앎답다, 남이 알아줄 만큼 값이 있단 말이다. 어린이의 살림을 보면 그들이 목표는 실용에 있지 않고 전혀 아름다움에 있다. 소몰이 아이들이 소 잔등에서도 피리를 불고 나무꾼 아이들이 나뭇단에도 한 가치 꽃을 꺾어 꽂는 것은 얼마나 보기에도 갸륵한 것이냐? 너희가 옷고름 하나에도 마음을 쓰고 말 구절 하나에도 주의를 하는 것은 그와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다 좋은 일이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의 옛말 모양으로, 사람이란 잘못이라, 옳은 일 중에도 잘못이 들어 있다. 그리하여 생각 없이 본능 충동에만 따라 노는 동안에 옷만 잘못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온통이 껍데기를 씌우는 옷으로만 되어버리고 만다.
그럼 무엇이 아름다움이냐? 첫째 알아야 할 것은 아름다움은 하나를 나타냄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옷이 아름답다면 곧 그 옷감이 무언지 그 빛깔이 어떤지 그것부터 생각하지만 아름다움은 그 내용 되는 자료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 나타내는 방법에 있다. 조화에 있다. 조화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됨이다. 전체의 각 부분부분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울려 하나를 이루는 것이 곧 조화다. 조화의 화는 하나됨이다. 저고리와 치마가 따로 놀아서는 아니되고, 옷과 신발이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아니된다. 양복에 미투리를 신어도 보기 싫거니와 일하는 베잠방이에 구두를 신어도 보기 싫다. 그래 짚신엔 제날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말을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울림, 하나됨 중에서도 더구나 생각해야 할 것은 배경과의 어울림이다. 작은 아름다움보다 큰 아름다움이 정말 아름다움이요, 부분의 아름다움보다 전체의 어디랄 것 없이 아름다운 것이 참 아름다운 것인데 그것은 그 배경이 결정한다. 꽃병을 책상머리에 놓으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들 가운데내다 놓으면 보기가 싫고, 반대로 초초한 들국화 한 대를 병에 꽂아 책상머리에 놓아서는 그리 고운 줄을 모르겠으되, 그것을 온 세상이 다 찬서리의 습격을 받아 눈에 뵈는 것이 오직 쓸쓸한 것뿐일 때, 흐트러진 풀 속, 꾸부린 소나무 혹은 찡그린 바위틈에 그 청초한 한 송이가 외로이 서는 것을 보면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때 다알리아 모란 같은 것을 단으로 묶어준다 한들 어찌 바꾸겠나? 그러고 보면 들국화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 배경에 있다. 그 서는 동산, 그 가을, 그 하늘, 그 바람에 있다. 또 기러기를 그 깃이나 소리로 볼 때에는 아름답달 것이 별로 없지만, 그것을 푸르고 한없이 넓은 가을 하늘가에 날려놓고 그 한 소리 길게 뽑는 것을 들을 때는 공작이 봉황이 꾀꼬리가 떼로 몰려든다 해도 비길 바가 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기러기의 아름다움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오 그 사는 배경에 있다. 장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거든 장엄한 배경이 있어야 하고, 그윽한 아름다움을 보려면 그윽한 배경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도덕정신, 그보다도 무한에 대한 종교적 애탐이 없다면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 들국이 아름답고 기러기가 아름다웠던 것은 우리 속에 깊이 깃들어 있는 도덕성 종교성 때문이다. 하나란 곧 그것이다. 남들이 무슨 옷을 입었나, 무슨 양산을 들고 무슨 가방을 팔에 걸었나 그것에만 정신을 쓰는 이 사람들아, 그렇지 않은가? 너희는 거울 앞이나 쇼윈도우 앞에만 서려 하지만 말고 천지 앞에 하나님 앞에 서보려 하면 어떠냐?
사랑하는 벗들아, 옷만 아니라 인생 그것이 곧 한 개 예술 아니냐?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조각을 새기는 동안에 그것들이 도리어 우리 혼의 얼굴을 그려내고 써내고 아로새겨 내고 있지 않느냐? 그것들도 아름다워야지만 이것도, 이것도가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하지 않느냐? 그렇기에 우리 혼도 아름답기 위하여 위대한 배경을 요구한다.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만 보아서는 그 참 값을 알 수 없고, 반드시 그 사회적 역사적 우주적 배경 속에 놓고 보아야 한다. 사실 전체를 내놓고 저만이라는 개체는 없다. 개체는 전체의 한 예술적 표현이다. 사람을 그 가정에 놓고, 그 사회에 놓고, 그 시대에 놓고, 영원 무한에 놓고 봄을 따라 그 값이 점점 더 커감을 느끼게 된다.
정몽주를 한 개 먹고 자는 낱 사람으로 볼 때는 그 무슨 생각을 했거나 무슨 말을 했거나 반드시 크다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되, 그를 고려 오백여 년 역사라는 큰 배경 속에 놓고 볼 때, 그 큼을 알게 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하는 노래는 반드시 정몽주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니다. 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다. 사실 술 파는 계집도「열 네 번 죽어도 나 못 놓겠네」하고 부르지 않더냐? 그러나 그 계집들이 불러서 어디 아름다움을 느끼느냐? 아름답기보다는 더럽지. 같은「님」이라도 그 계집들의 님은 들창 속에서 보는 님이요, 정몽주의 님은 고려 오백여 년 역사의 높은 봉, 그 밑에 설레는 혁명의 물결을 배경으로 세워놓고 보는 님이다. 그보다도 하늘 땅 사이, 영원의 흐름가에 세워놓고 보는 영원의 님이다.
그러므로 그 노래가 그때만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시대의 모든 마음을 울리지 않고는 마지않는 비장하고도 거룩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럼 고려 일대의 역사 없이는 정몽주의 인격의 아름다움은 모르는 것이다. 반대로 전체의 배경은 산 혼이 없이는 그 뜻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조 오백 년 역사가 길다면 길고 더럽다면 참 더러운 역사지만 성삼문이라는 한 인격을 거기 점 찍어놓고 보면 그 더러운 것이 도리어 눈물겨운 시가 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이렇게 품격이 높은 시가 어디 있느냐? 개량 양산도를 무슨 자랑이나 되는 양 부르는 너희의 소위 상아탑 속에서는 꿈도 못 꾸는 높음이다. 상아탑이냐? 개뼈다귀 탑이지. 이 노래는 이조 오백 년의 풀무간에서만 울려낼 수 있다. 서양 문화의 얻어온 찌꺼기로 소꼽을 노는 부엌간에서는 결코 나오지 못한다. 높은 산지대에 올라가면 거기 피는 꽃이란 각별히도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움을 평지에서 볼 욕심에 떠가지고 내려오면 그만 몇 날이 못 가서 죽어버리고 만다. 그럼 높은 산 식물의 아름다움이란 몇 천 자 이상의 높음과, 그 강한 햇빛과, 그 날카로운 공기와, 그 한없이 넓은 하늘이 합하여 지어낸 것이지, 결코 그 풀씨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인격의 아름다움도 그 사는 자연,사회,역사,정신적 체계를 배경으로 삼고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곧 제 한 몸을 제소유로만 알 것 아니라, 커다란 사회적 역사적 배경 속에 자기 자신을 놓는 사람인 담에야 위대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배경 중에 가장 큰 것은 사회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정말 큰 배경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온 우주를 배경으로 삼아야 정말 아름다운 살림이다. 배경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그 배경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배경 속에 녹아버림이다. 잊어버림이다. 하나에다 자기를 비춰버림이다. 둘을 한 개 산 전체로 살려내어 그 산 하나 속에 자기를 다시 발견함이다. 사람은 우주를 배경으로 삼지 않고 위대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고 아름다울 수도 없다.
너희는「들의 백합화를 보라!」하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지. 그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느냐? 그 말의 뜻을 아느냐? 많은 목사들이 그것은 먹을 것 걱정, 입을 것 걱정 하지 말란 말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 하여 천백 년 되풀이, 틀에 박힌 설교를 하는 것을 너희가 못 들었을 리는 없지. 그러나 그 말은 그렇게 옅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시인이다. 시를 하자 해서가 아니라 참이 시기 때문이다. 참 사람은 자연히 시인이다. 시란 곧 참이다. 참의 말이 시다. 그가「들의 백합화를 보라!」하실 때는 그 말씀의 중심점이 들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들이란 말로 온 우주를 대표하신 것이다. 그 백합이란 우리 이 고장의 백합같이 고운 것도 못되는, 코스모스 비슷한 변변치 않은 풀꽃이다. 그런데 그 꽃이 한때 천하에 그 영화를 자랑하던 솔로몬의 옷보다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왜 그러냐? 그 들 때문이다. 솔로몬의 영화는 사람들의 보기에 놀라운 듯하지만 그것은 그 궁궐 속에서나 볼 것이지, 푸른 하늘을 병풍으로 삼고 넓은 들을 돗자리로 삼는 대자연의 전당에 나가 서면 도리어 한 송이 코스모스에 대해 낯이 없다. 코스모스가 제 생활의 배경을 잃고 솔로몬의 궁궐에 들어가면 보잘 것이 없는 듯할지 모르지만 제 자라나는 대자연의 동산에 놓고 본다면 솔로몬의 영화란 게 다 무어냐?
사랑하는 벗들아, 너희도 솔로문이지. 너희도 솔로몬의 황후가 돼봤으면 하는 것이 너희 꿈의 절정이지. 너희 사는 이 집도 자랑의 궁전이지. 가엾어라! 이 속에서 꾸미는 너희 단장과 다듬는 너희 목청이 아름다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대우주의 전당에 내다 놓을 때 그것이 무엇이냐? 네가 참말 아름답고 싶으냐? 아름답고 싶거든 산 위에 서야 하고, 바다 위에 서야 하고, 하늘가에 서야 한다. 현실의 평지를 높이 떠난 이상의 높은 봉에 설 때, 그리하여 햇빛이 그 강한 광선으로 너희 두 뺨에 키스할 때, 그때는 너희가 분을 발랐거나 못 발랐거나 연지를 찍었거나 못 찍었거나 그것이 문제도 아니된다. 70 인생의, 그것도 반도 못되는 소위 청춘의 시절이라는 좁은 시냇가를 내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무한의 바닷가에 설 때, 그때는 그 우렁찬 물결 소리 앞에서는, 너희가 늦은 봄 짙은 숲 사이에서 발악을 하는 암꾀꼬리 모양으로 목청을 가다듬어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억만 년이나 살듯 문화주택을 지어 단 꿈에 취해보자던 이 땅을 박차고 너희가 정말 영원 무한한 정신의 우주에 머리를 하늘가에 대고 높이 선다면 그런다면 그때 해 달이 너희 귀고리가 되고, 수없는 별들이 너희 머리에 보석이 되고, 흐르는 구름이 너희 어깨에 숄을 던지는데, 옷은 무슨 옷이 걱정이 되며 단장은 무슨 단장이 문제가 된단 말이냐? 이 배꽃 가지 속에 한철 봄날 옅은 꿈을 맺어보자는 가엾은 처녀들아, 네가 위대하고 싶거든 위대한 배경을 가져라. 모든 가까운 경치를 무시하라, 무한을 배경으로 하여라. 발 앞의 꽃밭을 짓밟으면서야 저 하늘의 구름 꽃송이를 만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벗들아, 아름다움은 또 너희 마음에 있는 줄을 알아야한다. 배경을 밖에 찾는 한은 너희는 헤매고 헤매다가 거친 들에 보기 싫은 구걸을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실은 너희 안에 있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너희 맘씨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했지만 나타내는 것은 결국 너희 마음밖에 되는 것 없다. 너희 혼의 자기실현이다. 하늘가에 선다 하여도 하늘을 빌어 쓸 뿐이요 바닷가에 선다해도 바다를 빌어 쓸 뿐이다. 나타나는 것은 물건이 아니요 너희 맘씨, 너희 혼이다. 위대한 혼, 그것은 자기를 위해 위대한 우주를 찾아내고, 아름다운 혼, 그것은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 아름다운 배경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심정을 그럼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나? 심정은 감응(感應)하는 것이요, 감화(感化)하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아름다운 심정이 되고 싶을 진대 아름다운 혼과 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짝하여 놀고, 짝하여 일하고, 짝하여 생각하고, 짝하여 살아야 할 것이다. 난초를 짝하면 향기로와지고, 썩은 생선을 짝하면 냄새가 난다. 혼은 그 짝하는 것에 따라 자란다. 너희는 그럼 누구를 짝하느냐? 위대한 심정이란 곧 고상한 심정이다. 고상이란 곧 영원한 무한이다. 재주에 있지 않고 기술에 있지 않다. 이 문화의 전당 안에서 너희 사모하는 짝은 누구이냐? 괴테냐? 괴테보다는 차라리 톨스토이가 나을 것이다. 바이런이냐? 하니네냐? 그렇지 않음 워즈워드냐? 테니슨이냐? 브라우닝이냐? 베토벤이냐? 단테냐? 그보다도 간디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너희가 정말 아름답고 위대한 혼이 되고자 허거든 짝할 이는 오직 한 분「그이」뿐이니라.
「그이」라는데 너희가 왜 이상한 눈을 하느냐? 그것도 모르느냐? 참 사람이라면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 아니냐? 자기 스스로는 이름도 없이 그저 사람의 아들이노라 했고, 남에겐 하나님의 하나신 아들이란 일컬음을 듣는 그이 하나뿐 아니냐? 아, 이제야 너희가 빙긋 웃는 것은 알아들었단 말이냐? 너희는 그리 둔한 심정의 소유자가 아니로구나. 너희에게 아름다워질 가능성이 있구나. 그렇지, 아무렴 그렇지, 너희가 여왕이 돼야지.
예수를 짝하여서 아름다워지지 않은 인격 없다. 들어보려느냐? 갈릴리 바다에 어부였던 베드로를 못 들었느냐? 세관에 앉았던 마태를 못 들었느냐? 그보다도 일곱 귀신이 그 속에서 나갔다는 막달라 마리아를 모르느냐? 그 마리아가 어떻게 아름다워진 이야기를 너희는 못 들었느냐? 향 기름을 아낌없이 깨쳐 사랑하는 님의 몸에 바르고 제 눈물로 그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던 그 마음씨의 아름다움을 너희는 모르느냐? 왜 그랬는지 아느냐? 베드로도, 요한도, 그밖에 어느 제자도 다 모르는, 말하지 않는 그 님이 죽기로 결심한 그 눈치를 그만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 장사할 준비를 저도 말없이 한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님도 그것을 알아주셨다. 괴테가 이런 시나 소설을 쓴 일이 있다더냐? 요새 사르트르라든가, 카뮈라든가, 그건 말도 말아라. 그렇기 때문에 그 님이 죽은 가운데서 영광의 몸으로 살아났을 때 그 아름다움, 그 영원한 영광의 몸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그였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만으로 알 수 있다. 마리아의 그전의 그 더러움은 어디로 갔고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왔느냐? 얼마나 많은 심령이 이 예수라는 놀라운 혼의 광채에 접하여 그 흙같이 흐렸던 것이 수정처럼 뚫려 비치게 되었는지 너희는 아느냐? 저는 그 자신이 아름다움 자체기 때문에 남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다. 너희가 아름답고자 하느냐? 옷에 맘을 썩이고 화장에 정신을 쓰기보다는 이 영원의 젊은이에게 약혼을 청하여라. 너희가 너희 몸 걱정, 마음 걱정을 말고 빛나신 그이에게만 맘이 홀려 너희 혼을 들어 그에게 바치기로 결심한다면, 너희는 그 순간부터 전에 없던 허다한 아름다움이 너희 자신에게서 방사선처럼 쏟아져나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는 또 그 혼의 아름다움을 어디서 길렀는지 아느냐? 내가 너희를 위하여 간단히 설명하리라. 첫째 일함에서다. 그는 서른이 될 때까지 손수 일하였다. 그것이 그의 혼의 아름다움을 닦아냈다. 세상에서는 예수라면 귀공자같이 얼굴이 희고 손결이 고운, 거의 여자 같은 인물을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저희의 생각이 귀하고 높다면 일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 잘못 때문이다. 사실의 예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노동자였다. 귀족이 아니다. 그리하여 노동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겸손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온유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죄인의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을 특히 위로하고 동정해 줄 수가 있었다.
그다음 그는 자연을 퍽 가까이하였다. 위에서 말한 백합화 시도 유명하지만 그밖에도 4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놀라운 자연시인이었다. 자연은 큰 것이요 맑은 것이요 신비로운 것이다. 그는 자연 속에서 그 크고 깊고 맑고 그윽한 것을 벗하고 배우고 맛보며 살았다. 사람에 피곤하면 산으로 가고 세상에서 쫓기면 바다로 갔다. 낮에는 사람들을 가르치며 고쳐주느라고 바빠도 밤이면 자기 혼을 기르기 위해 골짜기, 시냇가, 별 밑에서 명상하고 기도했다. 그는 그 속에서 숨쉬고 울고 부르짖으며 자랐다. 그러므로 그에게 크고 넓고 깊고 맑고 그윽함이 있다. 참됨이 있고 사랑스럼이 있다. 자연이란 곧 하늘 아버지의 집 살림 아닌가?
그 다음 그는 성경을 가까이 하였다. 자연이 눈에 볼 수 있는 물질로서 하나님의 위대와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면, 그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것은 사람의 마음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리하여서 된 것이 성경이란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편에서 하면 그 뜻의 계시오, 사람 편에서 하면 아름다운 혼들의 하나님 뜻의 체험이다. 예수는 어려서부터 사람이 그것 없이는 되지 않을 줄을 알아 늘 가까이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하여 거룩한 아름다움, 영광의 아름다움을 얻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오늘날 이 영원의 젊은이를 너희 혼의 짝으로 택함에 있어서도 이 세 가지를 내놓고는 할 수 없다. 일을 하는 것, 자연을 사랑하는 것, 성경을 배우는 것, 사랑하는 벗들아, 내가 왜 너희들을 보고 듣기 싫은 말을 하느냐? 너희를 미워하여서 하는 것이 아닌 줄을 너희도 알지. 너희 얼굴에서 화장을 긁느라고 하는 말이지. 너희 몸에 휘감은 옷을 찢느라고 하는 말이지. 너희 생각에는 아름다운 듯 뵈는 그것이 영원한 참에서 볼 때는 추하고 보기 싫기 때문에. 사랑하는 벗들아, 너희 이름이 무어냐? 너희 이름이「한」아니냐? 배꽃 동산의 처녀가 아니라, 무궁화동산의 동산지기지. 이 동산을 지키라, 가꾸어라, 이 동산의 여왕이 되어라. 하나님이 너희를 이 생명의 큰 행렬의 지나가는 큰길에 앉히신 것 아니냐? 너희 몸집도 미끈하게, 너희 살갗도 곱게, 너희 얼굴도 의젓하게, 눈은 샛별 같고 입은 열리려는 연꽃 같고 말소리를 들을 땐 시냇가에 서는 것 같고, 걸어가는 것을 볼 젠 하늘가에 흐르는 구름을 우러르는 것 같고,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창조의 아침부터 너희 이름을 여왕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지금의 너희 모양은 무어냐? 그 얼굴에 바른 것이 또 무엇이냐? 그것이 아름다우냐? 보기 싫어, 더러워, 누가 너희더러 그것이 아름다움이라 하더냐? 누가 너희더러 타고난 살갗 내놓고 남이 입고 떨어진 것을 가져다 몸에 감으라고 하더냐? 누가 너희더러 타고난 목청이 나쁘다 하더냐? 그리고 길거리 계집의 노랫가락을 배우라 하더냐? 너희 얼굴이 무엇이 부족하냐? 그 얼굴 하나 아로새기기에 영원의 작업실에서 십억 년의 세월이 든 것인데, 이제 그것이 부족한 듯하여 거기 돌가루, 기름찌끼로 덧붙질하는 거냐? 너희 마음, 너희 마음대로 키울 생각 왜 못해보고 남의 하는 꼴 흉내 내려느냐? 배움이라고? 그것이 어찌 배움이냐? 너희의 스승이 누구냐? 스승은 하나밖에 없다고 벌써 언제부터 가르쳐 준 것 아니냐?
그러므로 더럽다는 것이다. 덧붙이면 덧붙일수록 더럽고, 흉내내면 흉내 낼수록 더 보기 싫다. 제 것을 내놓고 무엇이 아름다우냐? 스스로야말로 아름다운 것 아니냐? 너희 가슴 속에, 너희 살 속에 너희 눈동자 속에, 너희 음성 속에, 너희 자신 속에 넣어준 아름다움을 왜 잊었느냐? 왜 다 팔아먹고 빼앗겼느냐? 그리고 거지가 되었느냐? 너희가 속았구나, 미쳤구나. 너희도 정신이 들면 너희 몸에 두른 것이 누더기임을 알 것이다. 너희 눈엔 좋다지만 내 눈엔 뚫려 뵈는 것을 어찌하느냐? 비단 치마 밑에 살이 썩었구나. 너희는 저 유명한 로댕의 조각「갈보였던 여자」를 아느냐? 서양문화라면 무엇을 팔아서라도 사자는 너희가 그것을 몰라서는 아니되지. 나는 너를 볼 때마다 그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한국」아, 네가 젊었노라지만 어디가 젊었느냐? 너는 아름다우노라지만 무엇이 아름다우냐? 네가 처녀라지만 어디가 처녀냐? 중국·일본·러시아·미국이 네 역사를 말하지 않느냐? 오늘은 여기 팔고 내일은 저기 팔기에 네가 늙었지, 늙어빠졌지, 네게 어디 순결이 있느냐? 어디 참 사랑이 있느냐? 어디 참 살림이 있느냐? 인생을 놀아먹은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것 밖에는 없는 단 하나의 보배를 잊어먹고 팔아먹었기 때문에, 갈보 노릇을 했기 때문에, 네게서 모든 아름다움이 다 빠져나가고, 네가 네 추함을 가리우고 꾸미려하면 할수록 점점 더 더럽고 보기 싫은 것이 된다. 나는 그것을 보기에 못 견디어 하는 마음이다.
내 사랑아, 그래도 내 사랑 아니냐? 버릴 수는 없는 너 아니냐? 아름다우려거든 마음을 아름답게 하여라. 본래 착하던 네 마음 아니냐? 원래 슬기있던 너 아니냐? 근본이 깹들성 있던 너 아니냐? 처음엔 용맹할 줄도 알고, 느낌도 많던 너 아니냐? 그런데 네가 왜 그렇게 속이 좁아졌느냐? 왜 그렇게 모질어졌느냐? 왜 그렇게 비루해지고, 둔해지고, 옅어지고, 얼빠졌느냐? 네 마음이 다부지지 못함이 크게 걱정이다. 깊지 못하고 정성스럽지 못함, 이것이 참 큰 걱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너를 꾀고 건드리고 속이어, 네 옷을 다 빼앗고 네 꽃바구니를 다 도둑하고, 너를 구렁에 넘어뜨리고 욕보인 것이다. 네가 네 노릇을 못한 것이 죄이니라. 너를 잃어버린 것이 모든 불행의 근본이니라. 너는 너대로 네 힘으로 살자는 마음을 먹어라. 그 마음이 바로서면 모든 잃어진 아름다움이 다 회복될 것이다.
내 사랑아. 네가 우느냐? 이제 네 마음이 슬프냐? 눈물이 나느냐? 울어야지. 울어서 목청을 맑혀야지. 눈물을 흘려 그 보기 싫은 분성적이 다 씻겨 나가야지. 발을 구르고 몸부림을 해야지. 그리하여 그 부끄럼의 옷이 다 떨어져 나가야지.
내 사랑아, 그러나 네가 늙은 것을 어찌하느냐? 더러움이 묻은 것이 아니라 네 살 속에 박힌 것을 어찌하느냐? 이 답답한 음란에 늙어빠진 가엾은 형상아, 네가 아름다움을 찾기 위하여 어디로 가려느냐? 아름다움은 그만두고 그 늙은 추함을 감추기 위하여 어디로, 그래 어디로 가려느냐? 갈 곳이 있느냐? 서양식 교육에? 정치에? 문화에? 아니 될 말이다. 땅에 들어가도 땅이 그 더러움을 받지 않을 것이요 물에 들어가도 물이 그 추한 것을 받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어찌하려느냐? 이 무자비한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 너는 장차 어쩌려느냐?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갈 곳은 오직 한곳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쓰레기와 찌꺼기를 다 받는 바다보다도 넓은 가슴. 모든 더러움, 모든 죄악을 다 태우고 녹여버리는 땅 속보다 더 뜨거운 마음 속. 버릴 생각도 씻을 생각도 다 내버리고, 그대로를 안고, 두 눈을 딱 감고, 감는다기보다는 차라리 번히 뜬 채로 저 영원한 님의 가슴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내가 뭐라더냐? 영원의 젊은이에게 약혼을 하라 했지. 그만이 네 잃어진 젊음을 회복해 줄 수 있고, 네 없어진 아름다움을 다시 창조해 줄 수 있다. 씻어도 씻어도 희게 할 수는 없는 타고난 까마귀가 저녁 영광 속으로 사뭇 날아들면 그 그대로가 영광의 사자 아니더냐? 너도 그렇다. 영광의 님 품 속으로 사뭇 날아들어! 너를 보지 말고 그만보고, 너를 생각말고 다만 그만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공경하고 그를 위해 애타는 마음을 가져! 그 속에 죽어버려, 녹아버려, 타버릴 생각을 해! 그러면 그가 너를 그냥 두시지 않는다. 녹여버리지, 자기 영광의 성명 속에 녹여버리지. 그 성명의 불도가니에 녹아버린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움을 너는 이미 보지 않았느냐?
내 사랑아, 마음을 아름답게 가져야지. 어떤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냐? 무한을 안은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지. 어떤 마음이 무한한 마음이냐? 참된 마음이지. 허영심이 가장 적고 추한 마음이다. 네 마음 속에서 허영심을 버려라.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대통령의 짝이냐? 어리석은 사람, 대통령의 짝보다도 그 어머니가 더 위대하지 않느냐? 네 속에서 세상을 다스릴 임금이 나온다면 어떠냐? 너는 마리아 될 생각은 없고 클레오파트라가 될 생각만이냐? 이 가엾은, 스스로 업신여길 여왕!
너는 영원의 젊은이, 영광의 님을 사랑하여 하늘가에 서라. 서서 바라라. 그러면 새 시대의 주인이 네 허리에서 번개처럼 방사되어 나올 것이다.
이제부터 네 이름을 마리아라 불러라. (1949년 이화여자대학 강연)
성서연구 1949.12월, 19호 (인간혁명, 1961년 일우사)
저작집30; 1-117
전집20; 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