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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44. [역경의 열매] 서종로 (1-15) 세살때 찾아온 소아마비와 평생의 고통 골수염
“하나님 아버지, 서종로 집사는 20년 이상 결핵성 골수염으로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깨끗이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만 이제 의사가 수술할 때에도 함께 하시고 그 손길을 붙잡아 주시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해주옵소서.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촛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히 여기심과 섭리하심으로 서 집사의 다리를 말끔히 낫게 해주옵소서.”
1970년대 중반 신림제일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갓 받고 나서의 일이다. 수술을 받기 전 찾아오신 장홍수 목사님이 내 다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다.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수술을 받고 입원실로 돌아와 깨어난 순간 이상한 감정이 온 몸을 휘감았다. 전에 느껴본 적이 없는 편안함이 밀려들면서 마치 꿈을 꾸는 듯 황홀했다. 수술을 받은 게 아니라 어디 천국 같은 곳을 여행하고 온 느낌이었다.
더욱 이상한 일은 그 뒤에 있었다. 매일 고름이 쏟아지던 다리에서 고름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열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고름은커녕 물도 나오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끈질기게 괴롭히던 골수염이 사라졌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지져주신 것이라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목사님이 기도하실 때 다리가 찌릿찌릿했던 것 같았다. 아내의 말대로 그때 성령의 불이 내 다리뼈 속을 지나갔던 것일까. 말로만 들었던 기적이 내게 일어났단 말인가. 어쨌든 그 길로 나는 죽음과도 같던 골수염에서 해방됐다.
파란만장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내 인생을 회고해볼 때 이 말이 너무나 적합하다는 생각을 한다. 참으로 곡절과 시련이 많고 변화가 심한 인생이었다.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부자유자가 되었고, 이어서 결핵성 골수염에 걸려 거의 인생의 절반을 참담하게 병과 싸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면서 잘못된 남자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도 숱하게 저질렀다.
하지만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면서 아내로부터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 받고, 목사님의 기도로 불치병이었던 골수염도 깨끗이 치유되는 은혜를 경험했다. 그에 이어 많은 축복을 받았다. 사업이 번창해 물질의 축복도 받았고 자녀들의 축복, 건강의 축복, 평화로운 가정의 축복도 받았다. 그러면서 복을 누리는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할 다양한 책임들도 해냈다. 장애인 돕기에서부터 선교와 섬김, 나눔 등을 실천하면서 분에 넘치는 직무들도 맡았다.
나는 1947년 전남 여천군 율촌면 조화리 득실마을에서 태어났다. 3남 3녀의 막내인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고난과 시련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그 유명한 여순반란사건의 후유증으로 젖먹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지독한 가난을 벗 삼아야 했다.
내가 세 살 때였다. 잘 놀던 아이가 자고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질 못하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가까운 곳에 병원이 없었고, 있었다 해도 갈 형편이 아니어서 양쪽 다리가 마비된 아이를 업고 어머니는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았다. 소아마비라는 걸 알게 된 어머니는 1년 넘게 매일 20㎞ 넘게 떨어진 한의원까지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무당집에 이름을 올려놓고 치성을 드렸다.
그러나 내 소아마비는 그런 걸로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다만 앉은뱅이 신세를 면하고 불편하게나마 걸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체장애인으로서 나의 험난한 운명은 시작됐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
* [역경의 열매] 서종로 (1) 세살때 찾아온 소아마비와 평생의 고통 골수염
* [역경의 열매] 서종로 (2) 골수서 고름 철철… “다리를 잘라야만 합니다”
* [역경의 열매] 서종로 (3) 애양원서의 6차례 수술 실패… 그러나 새 세상이
* [역경의 열매] 서종로 (4) 열번 찍어 넘어온 주님의 선물 ‘아내 전은경’
* [역경의 열매] 서종로 (5) 주님의 두가지 선물… 벽돌공장, 아내의 교회 출석
* [역경의 열매] 서종로 (6) ‘金벽돌’ 낳는 사업 호황… 그러나 술·도박병이
* [역경의 열매] 서종로 (7) 목사님 기도로 골수염 완치 “아, 이게 주님의 힘?”
* [역경의 열매] 서종로 (8) 기도로 무장한 아내의 남편 치유법 ‘허허실실’
* [역경의 열매] 서종로 (9) 불혹의 깨달음 “주님은 넋두리 기도도 들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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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서종로 (15·끝) 거듭난 삶의 소명 “섬김·나눔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서종로 장로=전남 여천 출생, 지체장애인 2급, 예성 장로부총회장, 예성 전국장로연합회 회장 등 역임, 현 희망선교회, 한국달리다굼장애인선교회, 들소리신문 이사장, 한국성결교연합회 평신도위원장, 성결대학교 이사, 동방주택 대표, 신림제일교회 시무장로
***[역경의 열매] 서종로 (2) 골수서 고름 철철… “다리를 잘라야만 합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으로 요약된다. 홀로 된 어머니가 밭뙈기 하나 없이 여섯 자식을 키우는 형편이야 오죽하겠는가. 우리 일곱 식구가 믿을 것은 갯벌밖에 없었다. 눈만 뜨면 전 가족이 갯벌로 나가 먹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걷어왔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머리에 이고 순천 시장에 내다 팔아 보리쌀을 사왔다.
희망이라곤 없는 생활이었다. 아니, 희망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그런 중 큰 누님이 동네 청년과 결혼하고, 형들 셋이 서울로 떠났다. 모두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뒤이어 내가 초등학교를 마치고서 우리 전 가족은 서울에서 다시 합쳤다.
세검정을 거쳐 자리를 잡은 신길동. 그곳에는 당시 전국에서 먹고 살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리가 처음 갔을 때 신길동은 논과 민둥산, 공동묘지 등으로 이뤄진 허허벌판이었다. 한겨울에도 자고나면 묏자리 몇 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 사는 집들이 생겨났다. 대책 없는 사람들에게 법이고 뭐고 생각할 계제가 못 되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을지로 입구의 중앙고등공민중학교라는 데를 들어갔다. 중학교에 들어갈 엄두도 낼 수 없던 차에 둘째 형이 그렇게 길을 열어줬다. 하지만 나는 거기조차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운명이었다.
어느 날 얼음판에서 넘어진 다음부터 몸에서 열이 나면서 전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여 지났을까, 그나마 힘을 쓰는 왼쪽 다리가 퉁퉁 부으면서 숨도 못 쉴 만큼 아팠다. 급기야 형에게 업혀 영등포시립병원이라는 곳으로 갔다. 결핵성 골수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결핵균에 의해 골수 속에 고름이 생기는 병으로, 계속 재발하기 때문에 뼛속에 깊이 균이 퍼지기 전에 다리를 자르는 게 상책이라는 의사의 말이었다. 할 수 없이 일주일 후 다리를 절단하기로 예약했다.
꼼짝없이 앉은뱅이가 돼야 했다. 소아마비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었던 건 왼쪽 다리 덕분이었는데, 그걸 자르게 됐으니 말이다. 어린 나이에도 왜 그리 서러운지 일주일 동안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기어코 그 날은 오고야 말았다. 나는 안 가겠다고 했다. 왼쪽 다리가 썩어 문드러지는 한이 있어도 자르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왼쪽 다리 무릎 바깥쪽에 박아둔 심지를 빼고 고름을 짜내고 새 심지를 만들어 뼛속에 박아 넣는 일을 반복하며 지냈다. 그런 생활이 1년을 넘어섰다. 움직이지 않고 빈둥거리다 보니 왼쪽 다리가 굳어갔다. 어렵사리 들어간 중학교도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이젠 다리를 자르지 않고도 꼼짝없이 앉은뱅이가 될 신세가 됐다. 겁이 났다.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 연습부터 했다. 이불을 높이 쌓아놓고 짚고 일어서다 방바닥에 나뒹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벽을 짚고 발걸음을 떼는 연습에 들어갔다. 죽기 살기로 몸부림을 친 끝에 몇 달 뒤 지팡이를 짚고 집 밖을 나설 수 있게 됐다.
골수염에 걸린 지 2년여 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큰 누님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기보다는 탁 트인 바다라도 바라보며 지내는 게 낫다는 가족들의 의견이었다. 고향에서도 만날 다리에 고름을 짜내는 무료한 일상을 반복하다 갯낚시에 도전했다. 1m 남짓의 낚싯대에 줄을 매 낚시와 추를 매달아 바닷물에 넣으면 희한하게도 망둥어라는 놈이 걸려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나름대로 진리 하나를 터득했다. 큰 놈을 낚기 위해선 큰 미끼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짜 큰 낚시는 한참 뒤 내 나이 서른 넘어서 이뤄졌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게 됐으니 말이다. 세상에서 ‘예수님 잡기’, 즉 예수님 믿고 하나님 자녀 되는 것보다 큰 게 어디에 있겠는가.
***[역경의 열매] 서종로 (3) 애양원서의 6차례 수술 실패… 그러나 새 세상이
고향에서 1년여 동안 머무르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이발소를 하다가 군에 입대한 형네 집을 돕기 위해서였다. 이발소에서 이런저런 잡일을 도왔다. 이발소는 기술자 일당을 주기에도 빠듯할 정도로 벌이가 시원찮았다. 그러니 형수나 나나 항상 끼니 때우기가 급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덧 나도 사춘기를 지나 청년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터졌다. 나의 마지막 울타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54회 생신 전날 화장실에 흥건히 각혈을 하시고는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 오랫동안 폐결핵을 앓으시면서 가족들에게 숨긴 것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나는 완전히 미쳤다. 장례차를 온 몸으로 가로막으며 몸부림을 쳤다. 주위에서 억지로 떼어놓으려 하면 머리로 장의차를 들이받았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도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 손이 피범벅이 되도록 벽을 마구 쥐어박았다. 왜 그랬을까? 어머니의 흔적을 그렇게 쳐부숨으로써 어머니까지 빼앗아간 세상을 부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우리 가족은 서서히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중심이 없어지자 우리 형제들은 마치 남이라도 된 듯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섰다. 나도 어디론가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중증 장애인인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세상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먹으면 죽는다는 약을 구해 먹었다. 하지만 자살은 미수에 그쳤다.
나는 우연하게 영등포 사창가로 흘러들었다. 저마다 몸뚱이 하나로 살아가는 곳이었다. 거기선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다. 고향이나 집안을 따지지도 않았다. 밤이 되면 술 냄새와 분 냄새가 진동했다. 거기서 잘 나가는 아가씨들은 저마다 자신을 지켜줄 젊은 남자, 이른바 기둥서방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아직 10대인 나는 칼을 한 자루 구해 다리에 차고서 절룩거리며 다녔다. 그리고 실제로 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장애인에다 악만 남은 나를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길진 않았지만 나는 참으로 위험한 세월을 보냈다.
그런 중 고향에서 사촌누나가 날 찾아왔다. 여수 애양원에서 무료로 수술을 해주는데, 내 다리를 맡겨보자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큰형수가 마련해준 돈으로 여수로 내려갔다. 들었던 대로 애양원에서는 무료 수술을 약속했다. 내 수술을 맡은 의사는 나보다 키가 배나 됨직한 미국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 예수 믿을 것을 권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무료로 수술을 받는 입장이기도 했지만 거기서 본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 감동을 받기도 해서였다.
애양원에서 진행된 수술 과정은 어떤 표현으로도 불가능한 극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마취에서부터 수술 이후의 회복과정까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무려 6번의 수술을 받으면서 내 몸과 정신은 있는 대로 황폐해졌다.
하지만 골수염은 끝내 낫지 않았다. 미국 의사까지 나섰으니 이번에는 나을지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실망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리는 비록 못 고쳤지만 애양원이라는 곳에서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애양원의 나환자촌은 어쩌면 천형의 유배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느낀 건 그게 아니었다. 몸은 비록 병들었어도 해맑은 영혼을 가진 분들이 서로 위하고 도와주면서 만드는 낙원이었다. 나는 거기서 가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나이 많은 할머니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멀리 두고 온 자식이나 손자를 생각하셨는지 몰랐다. 어쨌든 자연스럽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때까지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역경의 열매] 서종로 (4) 열번 찍어 넘어온 주님의 선물 ‘아내 전은경’
“전은경이 나와! 똑똑하고 거만한 여자 전은경이 나와 보라구!”
여수 애양원에서 6번의 대수술을 하고도 낫지 않는 다리를 끌고 서울로 올라온 나는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예전 작은 형 이발소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이발소에 취직해 있던 중 그녀를 만나 첫 눈에 반한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나는 결국 그녀가 사는 집으로 쳐들어갔다.
“무엇 때문에 잠자는 처녀를 불러내. 남녀가 조심스러운 것도 몰라? 소문나면 어쩔려구…”
같이 사는 할머니가 나와선 꾸중을 하셨다. 하지만 내게는 이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한 말이 있었다. 물론 전적으로 내가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아이 할머니도 척보면 몰라요? 전은경이와 결혼할 사이예요. 만난지도 오래됐고요.”
이런 식으로 나는 집요하게 그녀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나의 고백에 미동도 않던 그녀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녀의 처지가 나의 불쌍한 모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열 살도 되기 전에 부모를 모두 잃은 그녀는 철저한 외톨이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그녀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둘이 합쳐 살림을 차렸다. 쉽게 말해 혼전 동거를 시작한 것이다. 허름한 단칸방에 살림살이라고야 수저 두 벌과 냄비 하나,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우리 둘은 서로의 아픔을 서로 잘 알기에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갓 스무 살을 넘긴 나이에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서둘러 동거를 시작했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로선 그게 최선의 길이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끌어안고 지내던 우리는 서로를 알면서부터 떨어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결혼식을 한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아내 전은경 권사를 만난 걸 내 인생 최대의 축복이라 여긴다. 인간 말종이었던 나를 사람처럼 만들어준 이가 아내였다. 아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무던히 고생하고도 아내가 지금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내가 신앙을 갖고서 한참 뒤에서야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걸 알게 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동거를 시작한 우리 둘은 빨리 돈을 모아 직접 이발소를 운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1년쯤 뒤에 목표를 달성했다. 경기도 안양시 변두리의 한 이발소를 인수해 황금이발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런데 아내의 일손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아내는 첫 아이를 출산했다. 사내였다. 졸지에 나는 두 배의 일을 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 골수염이 악화돼 다리가 퉁퉁 부으며 견디기 힘든 통증이 밀려왔다. 일을 안 할 수도 없는 처지라 하루하루 근근이 버텼다. 아내는 주위에서 주워들은 풍문으로 온갖 처방을 다 했다. 고양이를 고아 먹이기도 하고, 뱀탕을 끓여 먹이기도 했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세월은 흘렀다. 아내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이번엔 딸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을 것 같아 다리가 엉망인 상태에서도 단출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973년 4월 20일이었다.
진통제에 의지해서 하루하루 버텨나가던 나는 드디어 결정타를 얻어맞았다. 정신없이 추석 대목을 넘기자마자 쓰러지고 만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국립의료원으로 실려가 보름여 동안 누워 있어야만 했다. 더 이상 이발소를 운영할 재간이 없었다.
만약 그때 내가 신앙을 가졌다면, 아마 하나님을 심하게 원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숙명이려니 하고 살았다. 내 인생을 총괄하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 또한 일련의 과정이었는데 말이다. 그때도 역시 나는 하나님의 길 위에 서 있었는데 말이다.
***[역경의 열매] 서종로 (5) 주님의 두가지 선물… 벽돌공장, 아내의 교회 출석
1975년 경기도 안양의 이발소 운영을 접고 서울 신림동으로 이사했다. 내가 이발소를 하는 동안 형들은 하나같이 신림동에서 벽돌공장을 차려 기반을 잡고 있었다. 나는 형들의 배려로 잠시 항아리 가게를 하다가 둘째 형의 벽돌공장 현장 책임자를 맡았다. 벽돌공장 일은 이발소 일보다 훨씬 쉬웠다.
그런데 그 일은 의외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거래처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점점 이상한 세계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발소에서는 손님들 머리만 깎아주면 됐지만, 벽돌 공장에선 건축 자재상이나 건축업자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술판과 화투판에 끼어들게 됐다. 그 중 화투판이 문제였다. 술이야 주량에 맞춰 적당히 마실 수 있었지만, 화투판의 매력은 나를 무섭게 빨려들게 했다.
나는 시간만 나면 그들이 벌이는 화투판, 즉 도박판으로 달려갔다. 예전에도 몇 번 ‘짓고땡’이란 걸 해본 적이 있지만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 거기다 나는 타고난 승부근성으로 제법 높은 승률을 유지했다. 얼마 안 지나서 나는 그들로부터 ‘꾼’으로 인정받았다.
내가 서서히 나쁜 습관을 익히는 사이 아내는 독자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항아리 가게를 처분한 얼마간의 돈으로 300여 평의 공터를 임대해 벽돌공장을 차린 것이다. 아내는 기술자를 고용해선 시멘트와 모래 섞는 일에서부터 물 뿌리는 일, 심지어 벽돌 싣고 내리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아내의 벽돌공장은 호황을 누렸다. 워낙 정성을 쏟아서인지 아니면 아내 말대로 하나님이 도우셔서인지 벽돌을 찍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아내 차례였다. 신림동으로 이사한 이듬해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아내는 교회에 빠져버렸다고 해야 할 정도로 지나치게 열심이었다. 주일예배에서부터 수요예배 금요예배에다 매일 새벽예배까지 빠지지 않았다. 거기다 벽돌공장 일을 하다가도 교회 일이 생기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갔다.
나로선 아내가 교회에 열심인 것도 못마땅했지만 더 신경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헌금 문제였다. 아내는 온갖 헌금에다 십일조까지 버는 돈의 거의 절반을 교회에 바치는 듯했다. 물론 자기가 버는 돈으로 자기가 헌금한다고 우기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지만 나는 심히 불만스러웠다.
나는 이에 대해 계속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아내는 눈도 꿈쩍 하지 않았다. 다른 부분에서는 웬만하면 내 입장을 수용하는 아내가 교회 문제만큼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다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아내와 언쟁을 하다 홧김에 성경책으로 차려놓은 밥상을 내려쳤는데 밥상이 엎어지면서 성경책은 온통 반찬국물을 뒤집어썼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죽여, 나 죽여! 나도 이렇게 살기 싫어. 그러니 어서 날 죽이란 말이야. 그래 나 교회 안 가. 당신이 날 죽이면 교회 안 가. 아니 교회 못 가. 그러니 어서 날 죽여! 나 죽기 전에는 교회 다니는 거 포기 안 해.…”
잘못 건드렸다 싶었다. 기질 상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죽기 살기로 덤비니 되레 내가 위축됐다. 그러면서 교회가 그렇게도 좋은가 싶었다. 울부짖는 아내를 보자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짧은 시간에 내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러다 얼마나 삶이 고달프고 남편이란 사람의 존재감이 없었으면 교회 다니는 재미에 빠졌을까 하는 생각으로 정리됐다.
“그만두자. 내가 잘못했다. 당신 맘대로 교회 다니고 헌금도 해. 나는 이제 상관치 않을 테니 당신 맘대로 해.”
나는 지기로 했다. 아니, 져야 했다. 이 싸움에서는 결코 내가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마음 같아선 좀 친절하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그런 식으로 백기를 들었다.
***[역경의 열매] 서종로 (6) ‘金벽돌’ 낳는 사업 호황… 그러나 술·도박병이
벽돌공장을 운영하는 아내는 교회 일에 열성이면서도 기가 차게 사업을 잘 했다. 벽돌이나 블록을 찍으면 찍는 대로 팔아치웠다. 인근의 다른 벽돌공장에서도 그런가 하면 그게 아니었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아내 공장의 벽돌만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아마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아내를 축복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렇게 1년 정도 일을 하고 나니 아내 손에는 200만원의 현금이 쥐어졌다. 그러자 내가 현장 책임자로 일하던 벽돌공장의 사장인 둘째 형도 나에게 200만원을 주었다. 여자가 그만큼 벌었는데, 남자인 나도 그 정도는 벌어줬을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400만원을 쥐고 아내는 당돌한 아이디어를 냈다. 형의 벽돌공장을 인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등으로 벽돌과 블록 수요가 점점 많아질 때인지라 공장을 내줄 리 만무했다. 아내는 단념하지 않고 계속 둘째 형을 졸라 결국 공장을 넘겨받았다. 당시 둘째 형은 벽돌공장 말고 건축사업으로도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던 터였다.
1978년 나와 아내는 율촌기업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벽돌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비로소 날개를 달았다. 잠재돼 있던 내 능력, 다시 말해 사업수완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사람 사귀고 다루는 일에 천부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주위로부터 사람을 끌어들이는 뭔가가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 스스로도 그런 쪽으로는 누구보다도 잘 할 자신이 있었다.
역시 사업은 번창했다. 거래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보니 율촌기업은 다른 어디보다도 잘 됐다. 그러면서 나의 못된 습성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술과 도박을 또 다시 시작한 것이다. 같은 술과 도박을 즐겨도 예전과 달랐다. 수시로 아가씨들이 있는 값비싼 술집을 드나들었고, 도박판도 소위 꾼들과 어울리는 큰 판을 다녔다. 거기다 이제는 다른 여자를 사귀는 외도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나는 그야말로 천방지축이었다.
가끔 나 스스로 너무한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까짓것 인생이 별건가. 메뚜기도 한 철인데’라며 자신을 위로하고는 용감무쌍하게 나쁜 짓을 저질렀다.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붙어 다닌 불행과 불운을 보상하고픈 심리의 발동이었는지 몰랐다. 특히 소아마비 장애인이 되고 골수염으로 계속 고통 받는 처지를 스스로 달래는 위안이었는지도 몰랐다. 어쨌건 나는 궤도를 너무 벗어났고, 그런 점에서 아무리 비난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었다. 아내가 그런 나의 행적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건만 무던하게 대해줬다. 가끔 금고에서 많은 돈이 없어진 걸 알고 야단을 치긴 했지만 지나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아는 아내는 진짜 성질을 부렸다 하면 대단했는데, 그런 면도 없어졌다. 더러 심하게 나올 듯하다 스스로 제지하는 모습도 보였다.
“당신, 나도 애들도 다 교회 나가는 것 두 눈으로 잘 보지? 당신도 각시와 새끼들 따라 교회 나가자고. 그럼 당신 잘못한 거 다 용서할 거니까.”
맞았다. 아내의 관용과 여유는 신앙에 있었다. 그러면서 아내의 속마음이 대충 읽혔다. ‘사람 힘으로는 당신 버릇 못 고친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야 당신이라는 사람 못된 짓 끊고 인간 대접 받고 살 수 있다.’
그래도 술과 도박에 여자까지 뒤엉킨 ‘서종로의 전성시대’는 위험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아내의 여유로운 대응도 안정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누가 이기자 해보자고. 기도하는 내가 이기나, 못된 짓 하는 당신이 이기나. 언젠가 예배당에 나와서 눈물콧물 흘리는 날이 올 거니까.’
***[역경의 열매] 서종로 (7) 목사님 기도로 골수염 완치 “아, 이게 주님의 힘?”
아내가 교회에 나가고 2년쯤 지났을 무렵 나는 아내를 따라 신림제일교회를 나가 등록했다. 내 마음을 바꾼 게 아니라 아내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였다. 전도를 한답시고 뛰어다니는 아내를 보면서 제 남편 하나도 전도하지 못한 여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해주려는 일종의 배려였다. 거기다 나 나름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교회만 나가면 무엇이든지 접어주겠다는 아내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가끔 생기는 찜찜한 일들을 좋게 넘기자는 얄팍한 속셈이었다.
그래서 나의 교회 발걸음은 선수끼리의 게임인지 몰랐다. 아내는 예수 쪽 선수로서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긴 채 태연하고, 나는 세상 쪽 선수로서 말썽 없이 세상 재미를 즐기는 게임 말이다. 실제로 나는 교회에 등록은 했어도 내 생활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내가 교회에 나가고 얼마나 지났을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집사가 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시켜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한 일이니 가만있을 수밖에…. 내가 교회에 나가면서 또 하나 변화가 있었다. 아내의 기도였다. 아내는 눈만 뜨면 하나님께 나의 고질병인 골수염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마치 시위라도 하듯이 “우리 애들 아버지 병 고쳐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입에 달고 있었다. 그냥 그러는 게 아니라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는 아내가 답답하고 한심해 보였다.
‘제기랄, 날마다 똑 같은 기도를 들으니 사람도 따분한데 하나님은 얼마나 지긋지긋하실까. 하나님도 좋은 소리를 들어야 기분이 좋을 텐데, 항상 징징 짜는 소리만 해대니….’
한데 이게 웬일인가. 아내의 기도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다리에 이상이 일어났다. 골수염이 갑자기 악화되는 것이었다. 아내의 기도 응답이라면 호전이 돼야 하는데,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던 다리가 갑자기 퉁퉁 부어오르면서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났다. 또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하나 싶으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열 번 넘게 수술을 받아도 낫지 않는 골수염 때문에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싫었다. 하지만 밀려드는 통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20년째 앓아온 골수염이니 어느 정도 참는 데 이력이 생길 만도 하건만 통증이 한 번 극성을 부리면 참기 어려웠다.
병원으로 갔다. 역시 수술 외에는 다른 치료법이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수술대에 올라야만 했다. 수술을 받는 당일 아내가 목사님의 기도를 받자고 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식으로 나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연재를 시작할 때 밝혔던 대로 장홍수 목사님의 기도를 받게 됐다. 그리고 골수염이 완치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내는 이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굳게 믿었다. 예리한 칼처럼 영혼도 쑤시고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서 쪼갤 수 있다는 바로 그 어떤 것이 내 다리의 골수 속도 찔렀다고 믿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나도 조금씩 아내의 믿음에 동조돼갔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하던 아내의 기도가 진짜 하나님을 감동시켜 나 같은 못된 사람도 봐주신 것으로 이해돼갔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는 도저히 달리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이제 제대로 살자. 하나님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아내를 봐서라도 이제 사람 같이 살자. 교회생활 충실히 하면서 끊을 건 끊고, 버릴 건 버리자.’
하지만 약발은 딱 6개월이었다. 이를 악물고 술과 도박을 끊었으나 6개월이 지나면서 나는 또다시 예전의 나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아, 하나님, 나 같은 놈은 영원히 구제불능인가요….’
***[역경의 열매] 서종로 (8) 기도로 무장한 아내의 남편 치유법 ‘허허실실’
“탑시다. 같이 갈 데가 있어요.”
“바쁜 사람 붙잡고 밑도 끝도 없이 시방 어딜 가자는 거여?”
“암말 말고 타기나 해요. 가보면 다 아니까.”
어느 날 아내가 공장 앞에 차를 세워놓고는 다짜고짜 차에 타라고 했다. 평소와 달리 아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할 수 없이 차에 타자 아내는 말없이 차를 몰았다. 그런데 설마 하는 사이에 차는 내가 우려하던 그 길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한 젊은 여자와 외도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나를 대동하고서 그 현장을 급습하고 있었다. 아내는 침착하게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그 여자는 집에 없었다. 아내는 방문을 열어젖혔다. 가끔씩 내가 와서 머물고 가던 그 방이었다.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다. 분통이 터지는가 하면 부끄럽고, 부끄러운가 하면 겁도 났다. 아내는 찬찬히 방 안을 훑어보면서 “모두 고급 가구들이네” 하는 말까지 했다.
나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이기도 했지만, 섣불리 한 마디 했다가 아내로부터 벼락을 맞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외출했던 그 여자가 들어왔다. 내가 찾아온 것으로 알고 웃으면서 들어오던 그녀는 아내를 보고는 돌처럼 굳어지며 파랗게 질렸다. 세 사람이 모여서는 안 되는 곳에서 묘하게 맞닥뜨렸다. 나는 슬슬 눈치를 보며 아내의 다음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아가씨, 내가 누군지 잘 알지?” “…”
“내가 왜 여기 온지도 잘 알고…” “…”
“두 사람 오래 된 거 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제 그만둘 때가 왔어. 아니라고 말 못하겠지. 나 여기서 미칠 수도 있고 숨이 넘어갈 수도 있어. 하지만 나도 참을 테니까 두 사람도 여기서 그만둬.”
아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 여자는 머리만 떨구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에도 그 자리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그러고는 나는 아내에게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사건은 정리되지 않았다. 그 이후에 그 여자가 아내를 찾아가 사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테니 나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아내에게 매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됐다. 이번에는 셋이 아니라 여섯이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내 누님, 그 여자와 그녀의 이모에 언니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아내는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번 단호하게 깨끗이 헤어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울며불며 용서해 달라는 말과 함께 절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한동안 실랑이가 이어지고는 결국 간통죄로 처벌해 달라는 말까지 나왔다. 내 누님도 무슨 마음에서인지 나와 그 여자를 간통죄로 감방에 집어넣자고 했다.
“나 고소 같은 건 안 해. 그런 거 안 할 테니 두 사람 지금부터 맘 놓고 같이 살아.” “…”
“그 대신 늙고 병들거나 이 여자가 괄시하거들랑 나와 새끼들 있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 소리 않고 받아줄 테니까.” “…”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나 역시 아내가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내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아내가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와 그 여자의 관계를 인정하겠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훗날 다시 돌아와도 받아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나는 그날부터 많은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젊은 여자와 멀리 가서 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걸로 나와 그 여자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아내의 작전이 들어맞았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 아내의 말과 행동이 나를 완전히 제압한 것이다. 그 길로 나는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서종로 (9) 불혹의 깨달음 “주님은 넋두리 기도도 들어주신다”
어느 덧 내 나이 불혹(不惑)이라고 하는 40줄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수없이 다짐했다. ‘그래, 지금부터는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고 정말 제대로, 사람답게 살아보자.’
지금까지의 모든 잘못은 오로지 내게 있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특히 아내에게는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나의 잘못을 덮어주려고 애쓰는 아내를 보면 거룩하고 존경스러운 마음과 함께 무서운 마음도 들었다. 아무리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됐다 할지라도 아내도 사람인데, 얼마나 내가 밉고 원망스러웠겠는가. 하지만 아내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면서 그런 마음을 다스려 나갔다.
한데 나란 사람은 정말 구제불능인가. 잘못도 알고 있고, 가야 할 목적지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여전히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다리 너머의 목적지만 바라보고 망설였다. 솔직히 자신도 없었다. 지난 경험으로 볼 때 내 힘으로 거듭난 생활을 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면서 슬슬 스스로 위로하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아침에 딴 사람이 되면 그게 사람인가. 에라 모르겠다. 시간이 가면 철도 들고 믿음도 생기겠지. 아이고 하나님! 나 좀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생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나름대로 노력을 하다보니 내 자신이 변하는 것 같았다. 나도 나이지만 무엇보다 내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어져 있었다. 처음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교회 출석에 힘을 쓰다 보니 이쪽 사람들, 그러니까 술 마시고 화투 치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술 담배를 줄였다. 그와 함께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있었다. 내가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내 기도는 격식을 갖추지 않고, 정리된 내용이지도 않았다. 그저 다급한 마음, 아쉬운 마음을 되는 대로 하나님께 알리는 식이었다.
“하나님, 제발 좀 봐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 힘으로 아무것도 안 되는 것 잘 아시잖아요.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저쪽으로 가야 합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과거로 확 돌아가 버릴까요? 에이 그럴 순 없죠. 하나님, 제발 좀 도와주세요. 저도 이제 집사람과 자식들 앞에서 체통을 세워야겠습니다.…”
어떨 땐 계속 ‘제발’ 소리만 반복했다. 내가 생각해도 기도라기보다는 푸념이나 넋두리 같았다. 하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푸념이건 넋두리건 하나님이 들으시고 효험만 생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아내가 결사적으로 기도한다는 것도 알았다. 아내는 분명히 나를 용서했고, 그랬다고 선언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 가득 밀려드는 절망과 배신감을 다스리기 위해 기도에 매달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의 푸념조 기도가 아니라 공격적이면서 확신에 찬 기도였다.
그런 걸 생각하면 가끔 쓴웃음이 나왔다. 징그럽게도 못되고 뺀질대는 사내의 넋두리 기도와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아주머니의 앙팡진 기도를 동시에 혹은 교대로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기분은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의문과 달리 한 가지 믿음이 마음속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든 하나님께서 들으신 바가 되고, 기도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랬다. 기도하는 사이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화투를 만지지 않게 됐다. 손발을 잘라도 끊을 수 없는 게 노름이라는데 나는 그걸 끊었다. 물론 사업상 고객이면서 친구들인 그들이 벌이는 판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같이 할 때도 있지만 노름판에 끼어들진 않았다. 나중엔 직접 하지 않더라도 거기서 노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아내의 말에 노름판 주변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서종로 (10) 세상에서 처음 만난 ‘하늘의 사람’ 故 장홍수 목사
믿음이 있든 없든 교회에 계속 나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서 어떤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리고 획기적인 변화는 아니었지만 이슬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내가 변한다고 느껴졌다.
그때 내게는 신앙적인 체험이 없었다.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수술한 뒤 골수염이 완치된 데 대해 아내가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흥분했지만 솔직히 나는 맨송맨송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커녕 성령이 계시다는 것도 모르는 나였다. 그래도 사람에 대해서는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 보여주는 인격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감응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돌아가신 장홍수 목사님의 인격은 내 감정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내가 장 목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아내의 얼굴을 보아서 교회에 발을 들어놓았을 때 나는 목사님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교회에 억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되도록 목사님과 마주치지 않고 싶었다.
그러나 목사님을 자꾸 접하면서 뭔가가 느껴졌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분은 자신의 일, 즉 예수를 알리는 일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다. 신앙적으로 무식한 내가 봐도 그분의 성함 앞에 붙는 ‘노아’와 너무 비슷한 것 같았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하나님도 죽일 수 없었던 단 한 명의 인간이면서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했던 인간 말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장 목사님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관찰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강단으로 오를 때의 발걸음과 눈빛에서부터 말씀을 전하는 자세, 헌금을 바치는 모습 등을 일일이 체크했다. 그렇게 한동안 장 목사님을 관찰하고서 그분에 대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성자였다. 목사님은 주변의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뿐이라는 듯한 거룩한 몸가짐을 항상 보여주셨다.
아무튼 장 목사님은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하늘의 사람’이었다. 자기를 비운 사람, 자기를 예수에게 정말로 바친 사람, 설교보다는 무언(無言)으로 사람을 바꾸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장 목사님을 만난 걸 큰 축복이라고 여긴다. 평신도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가. 목자를 제대로 만나는 게 아닌가. 예수를 보여주고 예수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목자를 만나는 것이 아닌가. 장 목사님은 내게 그렇게 해주셨다.
그랬다. 내가 죄악의 생활을 청산하고 믿음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내가 예수를 만났다고 선언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분의 도움이 컸다. 술 마시고 도박에 미치고 색정에 눈이 멀어 영적인 소경이나 다름없었던 나, 그래서 그냥 놔두었더라면 병들거나 거지가 되어 죽어도 할 말이 없었던 나를 진리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신 분이다. 나의 영적인 스승이다.
장 목사님을 생각하면 수많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내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장 목사님에 대해 너무 길게 이야기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책을 써도 몇 권을 쓸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그분의 소천 때의 일은 꼭 밝히고 싶다.
장 목사님은 8년간 폐암 투병을 하면서도 조금도 소홀함 없이 목회를 하시다가 2004년 4월 20일 수요일 밤 11시쯤에 주님 곁으로 가셨다. 임종 직전 교회를 대표해서 딱 한 사람만 병실에 들어오라고 해서 내가 들어갔을 때 목사님은 사모님을 부탁하신다는 말씀과 함께 절대로 중환자실로 옮기지 말고 일반 병실에서 예배드리다가 부름 받도록 해달라고 하셨다. 실제로 목사님은 그렇게 일반 병실에서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다가 숨을 거두셨다. 나는 과분하게 장례위원장을 맡아 사흘간의 모든 예식을 감당했다. ‘아, 노아 장홍수 목사님. 너무너무 목사님이 그립습니다.’
***[역경의 열매] 서종로 (11) 새성전 건축 에피소드 “하나님, 벽돌 값 주세요”
1987년 신림제일교회 새성전을 건축할 때의 일이다. 뜻하지 않게 신출내기 집사인 나도 건축위원에 들었다. 교회에선 벽돌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내가 건축 과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나는 일단 벽돌과 블록 70만장을 납품하고 500만원을 건축헌금으로 약정했다. 건축헌금을 제하고 내가 400만원 정도를 교회 건축위원회로부터 받아야 하는 셈이었다.
한데 건축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다. 워낙 준비가 덜 된 상태로 시작해서인지 재정적으로 계속 애를 먹었다. 내가 봐도 딱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더 사정이 딱한 쪽은 나 자신이었다. 교회건축에 물린 돈 때문에 공장을 제대로 돌리기 어렵게 된 것이다. 영세한 사업장이다 보니 자금이 어느 정도 회전돼야 하는데, 딱 멈춰서 버리니 어려움이 말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때는 다른 공사장에서도 애를 먹였다. 몇 차례 목사님을 찾아가 내 사정 이야기를 했지만 목사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기도해봅시다”라는 말씀만 계속 하셨다. 목사님의 형편도 딱하고, 소위 건축위원이랍시고 이름을 걸어놓은 내 형편도 딱했다. 건축위원이 담임목사에게 “벽돌 값 주시오, 벽돌 값 주시오”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혼자서 고민을 하다 한 번만 더 부탁을 해보고 안 되면 교회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목사님을 찾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예상대로 목사님은 많이 미안해하시면서 “기도해봅시다”라고 말씀하셨다. 목사님을 만나고 나오는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돈 때문에 교회를 떠나야 하다니…. 그런데 그때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목사님이 수십 번이나 “기도해봅시다”라고 했는데도 정작 나는 혼자서 한번도 기도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도 한번 기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벽돌 값 주세요. 돈이 없어 공장을 못 돌리게 됐습니다. 하나님, 벽돌 값 좀 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다른 말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벽돌 값 주세요’와 ‘아버지’라는 두 마디밖에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버지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않은 아버지라는 호칭이었다. 그 호칭을 지금 내가 부르면서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럴 때마다 가슴이 떨리면서 뜨거워지는 건 또 웬 일인지 몰랐다. 그런 가운데 어떤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귀로 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음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너는 네 아버지 집 짓는데 벽돌 좀 내놓고 벽돌 값 안 준다고 이 난리냐. 아비 집 짓는 데 쓴 벽돌 값 내라고 성화부리는 아들놈이 세상에 어디 있다더냐.”
내가 바라는 건 “그래 그동안 마음고생 했다. 이제 벽돌 값 주겠다”는 말이었는데, 전혀 엉뚱한 답이었다. 좌우간 그 음성 같은 무엇 때문에 생각이 온통 헝클어졌다. 그리곤 이내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여겨졌다. 아들이 아버지 집 지어놓고 벽돌 값 달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러면서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분이 계시다면 벽돌 값 같은 건 한 푼도 안 받아도 좋다는 것이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즉시 벽돌 값을 건축헌금으로 바친다는 내용을 적고는 봉투에 담아 목사님을 찾아가 두 손으로 내밀었다. 두 번 다시 벽돌 값을 입에 올리는 일이 없을 거라는 말도 했다. 목사님은 놀라서 두 눈이 둥그레지셔서 나를 바라봤다. 내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리곤 속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 아버지! 제게도 이제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은 제 아버지고,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역경의 열매] 서종로 (12) ‘벽돌 값’ 헌금 결정에 옛사람 가고 주님 선물이
후련했다. 편안했다. 기뻤다. 마치 오랫동안 갇혀 있던 감옥에서 해방된 기분인가 하면, 해묵은 빚을 다 갚고 홀가분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고 놀라워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도 옛사람의 흔적이 덕지덕지 남아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셨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의심을 하면 할수록 분명 그와 비슷한 음성 같은 것이 계속 들려왔고 그 음성은 내 의식을 완벽하게 거머잡았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증거가 있었다. 내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차고 올라오는 희열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어려웠다. 극심한 재정난으로 공장을 돌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전처럼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막연하지만 어떻게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더 강했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건 아내였다. 사실 아내는 내가 벽돌 값을 받으러 교회에 가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런 아내였기에 내가 벽돌 값을 헌금했다는 데 대해 목사님 못지않게 반가워했다.
“당신 잘했어. 참 잘했어. 당장 고생하는 거 조금만 참아. 당신 아버지가 다 해결해주실 거야. 당신 아버지가 전지전능하신 분이란 거 알지?”
역시 아내의 말이 맞았다. 아니, 아내의 믿음에 능력이 있었다. 재정난에 쩔쩔 매고 있는 중 평소 알고 지내던 건재상 사장에게서 뜻밖의 제안이 왔다. 자신이 시멘트와 자재를 공급할 테니 자기 회사에서 쓸 벽돌을 책임지고 생산해달라는 것이었다. 가격과 제반 조건도 만족스러웠다.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 생산시설에 비해 물량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그것도 해결됐다. 직원들이 새벽 4시부터 전깃불을 켜고 일을 시작해 밤늦게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 이틀은 몰라도 직원들이 계속 그렇게 일을 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왔다. 거짓말 같았다.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거기에다 좋은 일이 또 생겼다. 어떻게 하다가 주변 철거민들의 입주권 수속절차를 대신 해주게 됐는데, 쏠쏠한 수입을 올렸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 치기였다.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부동산중개인이 와서 2600만원을 줄 테니 우리 집을 팔라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집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기대 이상의 호조건이었다. 당장 계약을 하자고 하기에 그러자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제동을 걸었다. 예배가 더 중요한데 어떻게 예배를 빼먹고 집 매매계약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예배 끝나고 보자고 하고선 아내에게 끌려가다시피 해서 교회에 갔다. 예배를 드리는 내내 계약 생각뿐이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부리나케 부동산중개소로 달려갔지만 중개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내에게 원망을 쏟아냈지만 아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이번엔 다른 부동산중개인이 찾아왔다. 그도 우리 집을 사고 싶다면서 2900만원을 제시하고 당장 계약을 하자고 했다. 하룻밤 사이에 300만원을 더 받게 된 것이다. 아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봐요. 예배 잘 드리니 하나님이 예쁘게 봐주셔서 이렇게 복을 주시잖아요.”
사업이 불 일 듯했다. 1억5000만원짜리 단독주택을 구입하고, 부동산으로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다. 주위에선 운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내의 말대로 아버지께서 복을 내려주시는 거라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속에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감이 솔솔 솟아났다.
***[역경의 열매] 서종로 (13) 술은 되는데 담배가?… 헌금기도 끝에 금연 성공
“목사님, 저는 아직 신앙이 덜 여물었고, 더구나 장로가 무언지조차도 잘 모릅니다. 여러모로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좀 더 기다리겠습니다.”
“그냥 내 뜻에 따르세요. 아무 말 하지 말고 지금 날 따라오세요.”
1988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장홍수 목사님이 찾기에 갔더니 장로 피택을 받으라고 하셨다. 집사 임명을 받을 때처럼 당황스럽지는 않았지만 나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목사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더니 목사님께서는 어딘가로 가자고 하셨다.
목사님을 따라 간 곳은 영등포의 한 피아노 가게였다. 목사님은 이것저것 피아노를 살피시더니 피아노 한 대를 한참 쳐다보셨다. 눈치 빠른 가게 주인은 잽싸게 700만원짜린데 650만원까지 깎아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교회에 피아노가 한 대 필요한 것 같았다. 나는 그 피아노를 사서 교회에 헌납했다.
그리고 며칠 후 장로 피택 선거가 있었다. 나는 탈락선에서 겨우 1표를 더 얻어 턱걸이로 통과했다. 쑥스러우면서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왜 목사님이 굳이 나에게 피아노를 헌납토록 했는지 이해됐다. 목사님은 간접적으로 나의 득표 활동을 도와주신 것이었다. ‘서 집사를 장로로 만들면 앞으로 제대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교회에 알린 것이다. 거기다 당시 교회를 성심성의껏 섬기던 아내 전은경 집사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는 득표요인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음해 7월 2일 교회 창립주일에 장로 장립을 받았다. 나로선 장로가 됐다는 사실에 대한 의미가 남달랐다. 무엇보다 송구스러우면서도 과분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술 마시고 도박하고 온갖 추악한 짓에 정신 팔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교회 장로가 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크게 다가왔다. 아내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식들에게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했다. 아비는 온갖 나쁜 짓을 다하면서도 두 아이에게는 학원 한 번 다닐 수 없게 한 게 죄스러웠다. 다행히 두 아이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좋은 대학을 나와 훌륭한 사회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엔 아내의 처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이 있었다는 걸 잘 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으로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기 전에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담배 하나만 해도 그랬다. 교회를 본격적으로 나가면서 술은 충분히 절제할 수 있었지만 골수염 통증을 견디기 위해 한꺼번에 두 대, 세 대씩 연거푸 피워야 했던 담배는 아무리 결심을 해도 끊을 수 없었다. 기도를 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고, 주위에 금연한다고 선언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런 중 언뜻 머릿속으로 미리 금연 감사부터 하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은 못 끊었지만 끊었다 가정하고 감사헌금부터 하기로 했다. 속으로 최후의 수단이라는 생각으로 400만원을 정성껏 봉투에 담아 ‘아버지, 담배 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는 헌금함에 담았다. 그리고는 금연에 성공했다.
그랬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그토록 쉽지 않았다. 죄의 족쇄, 파멸의 족쇄로부터 풀려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다. 그때부터 나는 성경 한 구절을 가슴에 담고 수시로 입으로 표현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는 내 삶의 변화 그리고 내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기적들을 보면서 말씀의 진실과 능력을 수없이 확인하면서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된다. “아, 하나님 아버지, 저도 이제 이렇게 새 것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무이로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십니다.”
***[역경의 열매] 서종로 (14) IMF 위기의 역발상 “십일조·헌금을 더 열심히!”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 3:3∼4)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인생사에는 흥망이 있고 부침이 있다. 이게 하나님의 순리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랬다.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기적의 주인공처럼 부각된 적도 있었지만 누구 못지않은 시련의 계절을 보내기도 했다.
장로가 되고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공장을 하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면서 장소를 옮겨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사업이 영 안 되는 가운데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거액을 날렸다. 졸지에 잘 나가던 ‘사장님’이 실업자 신세까지 되고 말았다.
한데 그때 교회에서 ‘5000명을 주님께 인도’라는 표어를 내걸고 ‘예수 초청 큰잔치’를 하면서 내가 상황실장을 맡고 있었다. 매일 교회로 출근해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서 뭔가를 깨우쳤다. 내가 교회 일에 너무 소홀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열심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통 사업에만 매달려온 나 자신을 발견했다. 부끄러움에 회개했다.
그러다 몇 사람과 함께 공장을 다시 시작할 길이 열렸다. 당장 유일한 재산인 땅을 처분해야 하게 생겼다. 나는 하나님께 땅을 팔게 해주시면 십일조도 하고 감사헌금도 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게 “땅을 팔면 당장 쓸 데도 많을 텐데 정말 그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았다. 나는 당장 2000만원의 빚을 내 먼저 헌금을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전에는 외상으로도 안 사겠다고 하던 사람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십일조와 헌금을 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환해지는 것 느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IMF 위기’를 넘기고 우연히 건축사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미리 십일조 내는 생활에 재미를 붙였다. 2000년대를 맞으면서 나는 벽돌공장 운영을 아들에게 넘기고 건축사업을 시작했다. 나는 집 한 채를 짓는 공사를 시작할 때마다 500만원의 십일조를 미리 냈다.
한번은 1800만원을 십일조로 낸 적도 있었다. 목사님께서 나를 불러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수입을 올렸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 정도 남을 것 같아 미리 냈다고 하자 목사님은 즉석에서 형통을 위한 기도를 해주셨다.
그런 중에 언젠가부터 마음속으로 1억원 헌금의 생각이 생겨나더니 그게 부담감으로 발전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왜 이런 마음을 주시는 걸까? 교회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당장 내게 그럴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이유는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목사님께서 수양관 지을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의 필요가 생기셨고, 그러자 이 사람 저 사람 고르다가 나를 적임자로 정하셨다고 생각하자 신기하고 흥분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아시는 바’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나는 바로 교회에 1억원을 헌금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사모님이 나에게 혹시 목사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들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자 사모님은 목사님이 요즘 계속 1억원 헌금할 분을 찾으면서 기도하셨다고 전했다. 그리곤 사모님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목사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일을 겪은 뒤 나는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고 깨달았다. 영원히 살아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그분의 뜻과 그분의 행동양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전 8:17)
***[역경의 열매] 서종로 (15·끝) 거듭난 삶의 소명 “섬김·나눔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2005년 들어서 이상하게도 마음속 한 구석이 계속 묵직했다. 장홍수 목사님의 소천에 따른 후유증인가 싶어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알리시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 중에 하나님은 심한 책망을 쏟아놓으셨다. “네 이웃이 곁에서 굶어죽고 있는데 너희는 잘 먹고 잘 사느냐”는 또렷한 음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TV에서는 어렵게 살아가는 독거노인들에 관한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다음날 나는 교회로 장동신 목사님을 찾아가 쌀 나눔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2억원을 마련해 헌금하겠다는 말도 전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는 8월부터 ‘사랑의 쌀 나누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나눔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에 문제가 발생해 자주 삐걱거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질서가 잡혀갔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운동은 신림제일교회의 예수 사랑 실천의 한 축이 됐다. 무엇보다 이 운동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른다. 그리고 나아가 급식을 하지 못하는 초등학생들을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선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담아주신 것처럼 우리의 작은 그물에도 한 가득 물고기를 채워주셨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 하나 열심히 하는 게 있다.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인지 언제나 어렵게 생활하는 장애인들의 처지가 안타깝다. 무엇보다 교회와 성도들부터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꾸도록 하기 위해 힘을 쓴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1992년 경기도 안양의 희망선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며 장애인 사역을 시작했다. 2005년에는 한국달리다굼장애인선교회의 이사장을 맡아 이 사회를 향해 장애인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2급 장애인인 내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지정해주신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연재를 이어가면서 내가 하나님께 잘못한 데 대한 많은 고백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켕기는 게 있다면 그건 선교와 전도다. 나름대로 한다고 해왔지만 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주님의 지상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일종의 자책감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좀 더 분발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나름대로 선교와 전도에 대한 나름의 주관을 갖게 됐다. 요즘 기독교계에서는 갖가지 이름의 전도법이 유행하고 있지만 나로선 그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으로 전해지는 복음이 수십 수백 마디 말보다 믿지 않는 이들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다는 사실을 확인해왔다.
나는 가끔 교회들로부터 간증 요청을 받는다. 그러면 내 인생 이야기와 함께 예배와 헌금, 구제와 나눔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터득한 실질적인 전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 고맙게도 많은 이들이 호응한다.
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보면 감사한 중에도 두렵기도 하다. 오래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으니 꿈같기만 하다. 그러나 우뚝 서 있는 내 교회당의 십자가와 언제나 기쁨과 행복을 주는 가족과 믿음의 형제들이 내가 누리는 축복들이 엄연한 현실임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지금까지 걸어온 대로 땅 끝까지 함께 걸어가자는 주님의 음성도 듣는다. 그러면 나는 고백한다. “아! 거룩하신 주 하나님, 제 잔이 넘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