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은 이런 것 / 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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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이 뭔지, 에듀파인이 뭔지도 모르는 작은 학교의 신규는 당연하게도 동기들보다 많은 업무를 부여받은 채 하루 종일 씨름을 한다. 학교의 모든 구성원이 “모르면 얼마든지 물어봐” 하시며 따스하게 어깨를 두드리지만, 자고로 신규란 자기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법이다.
이세이, <<어린이라는 사회>>, 포레스트북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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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덕경>> 71장에 내가 좋아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참고로,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 구절은 5장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이다. 다음에, 이것과 많이들 떠올리는 “상선약수(上善若水)”(8장)의 관계도 살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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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不知, 上, 不知知, 病.(지부지, 상, 부지지, 병.)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最上이고,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이 병病이다.
김영, <<생태 위기 시대에 노자 읽기>, 청아출판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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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도 이와 비슷하게 말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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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현인이라고 세평을 듣고 있는 사람—인용자)도 나도 아름다움이나 선함을 사실상 모르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보다는 현명하다고.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모르면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보다 약간 우월한 것 같았습니다.
플라톤, 황문수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명>>, 문예출판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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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뭘 좀 알아야만 뭘 모르는지 안다.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면 다 아는 것처럼 군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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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보를 많이 모아 놓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있으니까 알려고 묻게 된다.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책이 책을 부른다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책으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모른다고 의식한 덕분에 받은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반대로 책을 읽지 않으면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니까 다 아는 것처럼 굴게 된다. 그래서 책도 질문도 필요 없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뭐 하러 눈과 머리 아프게 책을 읽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묻지도 않거니와 질문 받는 것도 싫어한다.
https://cafe.daum.net/ihun/jIQm/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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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노자나 소크라테스를 얘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초보자라면 누구나 겪기 마련인, 모르는 것조차 몰라서 쭈볏거리게 되는 곤경에 공감이 가서 이 책을 소개하려고 저 문장을 옮긴 것이다. 서론만 읽어도 단순히 교단 경험을 기록하는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래 대목을 만나고 나서 다음에 이어지는 얘기를 더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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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10여 년간 초등학생들과 투닥이며 그들의 서툴지만 기특한 성장을 함께해 왔고 그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아이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얼마나 치열하게 크고 있는지, 가정과는 다른 환경에서 어떤 일들을 겪으며 어떤 상처와 훈장을 삶에 새기는지 썼다. 그리고 어린이라는 사회에 불쑥불쑥 투척되는 ‘필요 이상의 사랑’이 그들의 성장을 어떤 식으로 방해하는지까지 말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글을 쓰는 동안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늘 생각했다. 그리고 몇천 가닥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한 끝에 비로소 어린이를 사랑하겠다는 굴침스러운 노력을 내려놓았다. 어떤 이에겐 충격적일지 모르나,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다고 믿을 뿐이다. 나는 교사의 존재 의의가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가정의 품으로부터 어쩌면 냉정할지도 모를 사회로 나아가는 그 길목에 서 있는 것 말이다. 아이가 앞으로 맞닥뜨릴 사회는 그의 모든 것을 수용해 주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그걸 알려주고 부족한 부분을 연습하도록 도울 것이다.
해가 갈수록 교육에 대한 희망을 잃고 있지만, 나는 커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여전히 이 일이 가치 있다고 믿는다. 학교는 사랑이 가득한 가정과 아이들이 훗날 살아갈 사회 사이의 완충 지대이자 세상을 대하는 법을 연습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따라서 어른들이 줄 수 있는 사랑은 아이들이 그 속에서 넘어지지 않게 업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넘어질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며, 일어서는 방법을 알려주고 한 발짝 멀리서 응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진심으로 믿을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아이들에게 무제한의 사랑을 주는 대신, 그들의 서툰 시도와 실패와 성공을 응원한다. 내리사랑의 콩깍지를 벗은 진짜 세상의 눈으로, 그러나 명백히 세상보다는 따뜻한 시선으로 말이다. 딱 이 정도의 온기 속에서 아이들은 오늘도 완전하지 않아 완벽한 그들의 세상을 분투하며 살아간다.
이세이, <<어린이라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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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어엿한 주체로 대접하는 이런 시각과 함께 이 책의 발랄한 문체도 독서를 즐겁고 유익하게 만든다. 곳곳에서 이런 대목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하나만 예로 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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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에 적응을 완료한 연우는 친구들과 즐겁게 지냈고, 공부엔 놀라우리만치 영 관심이 없었다. 특히 미술 시간엔 정확히 왼쪽 네 번째 발가락으로 그린 듯한 작품을 가져오곤 했는데, 웬만하면 칭찬 한마디쯤은 꼭 섞어 말하는 내 말문에 콘크리트 성벽을 쌓는 작품들이었다. 차마 어떤 부분을 칭찬해야 할지 몰라 “…연우야…, 음…” 하고 뜸을 들이고 있으면, 연우는 넉살 좋게 “선생님! 저 잘했죠! 히히”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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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돋보이는 건 학생에게 배운다는 점을 내세우는 데 있다. 이것도 옮기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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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의 글쓰기 과제를 보고 나는 그걸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학원에서 그림 그리기 대회를 했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리지만 참가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했다.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심장이 쫄깃했다.
나는 참가상이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열심히 한 것 같다.
내 친구는 2등으로 상품을 받게 됐다. 엄청 부러웠다.
그래도 내 그림이 나한텐 1등이다.
연우는 부족한 걸 알았고, 그래도 열심히 했다. 특출 난 성과는 없어도 스스로 만족했고, 잘한 친구를 담백하게 부러워했다. 그리고 자기 그림을 가장 예뻐했다.
그건 내가 갖고 싶어 하나 가져본 적 없는 마음이었고 삶에서 배워야 할 거의 모든 것이었다. 난 그 글을 시처럼 암송했다. 불안이 재채기처럼 솟구칠 때, 그 글과 ‘헤헷’ 하고 실없이 웃는 그 애의 표정을 같이 떠올리면 그냥, 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연우는 “오연우!” 하는 내 사자후를 몇 번 듣긴 했으나 큰 문제없이 다음 학년으로 진급했고,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사춘기빔을 정통으로 얻어 맞아버렸다. 나는 연우가 앞머리를 코까지 내리고 다닌다는 소식에 우하하 웃었고 마침내 첫 연애에 성공해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선 으캬캬 웃었다. 복도에서 연우를 만날 때마다 “연우야! 너 여자친구 생겼다며? 언제 100일이야?” 하고 신나게 놀려주었다.
인생을 어떻게 살면, 누군가가 날 떠올렸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씩 미소 짓게 할 수 있을까. 나는 해낸 적이 없으나 연우는 그랬다. 그래놓고 자기가 그런 줄도 모른다는 게 그 애의 진짜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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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의 연우가 어떤 아이였는지 알면 독서의 효과가 더 좋은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건 책을 읽어야 될 일이므로 내가 나설 계제는 아닌 듯하다.
타자는 나와 다른 존재다. 그러니 내가 그를 다 알 수 없다. 나와 같으려니 하고 겨우 짐작할 뿐이다. 어른은 과거에는 누구나 어린이었지만 그 시절의 일을 까맣게 잊어먹고 지금의 눈으로 옛날의 나와 지금의 어린이를 볼 뿐이다. 이러지 말고 나와 다른 존재면 무조건 선생으로 모시자. 그러면 배울 게 많아진다. 어린이도 자연도 당연히 내 선생이다.
필자의 솔직한 태도에도 호감이 갔다(이런 대목은 숱하게 많으므로 소개를 빼겠다.). 어린이를 주체로 대하고 자발성을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배우는 것도 이런 마음에서 나오는 결과다. 이렇게 학생과 관계를 맺으므로 지혜롭게 그들을 관찰하고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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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 어… 배가 아파요.”
이쯤 되니 그동안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살이 넘도록 자기가 원하는 바를 확실히 말하지 못하는 건, 아이가 말을 하기도 전에 어른들이 그 애의 욕구를 다 충족시켜 줘서가 아닐까 싶었던 거다. ‘맛있겠다’라고 하면 음식을 떠먹이고, ‘아프다’라고 하면 최고의 간호를 제공하고, 뭐가 부족하다고 하면 달라고 하기도 전에 몽땅 대령해 버리는, 뭐 그런 종류의 ‘센스’와 ‘헌신’으로 말이다.
(중략)
꾀병은 문제가 아니다. 애들은 그러면서 크니까. 그러나 나는 그때 지우와 대화하면서, ‘저 이러이러해요’라고 말한 후, 어른의 처치를 가만히 기다리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걸 자주 깨닫게 되었다. 그것마저도 가르쳐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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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감동적인 장면도 만나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드문 경험을 하게도 된다. 이것도 예를 한 가지만 들겠다. 졸업한 제자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의 심사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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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들은 그날, 내가 좋은 선생님이라고 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엉킨 건 그 말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좋은 선생님이었고, 언제부터 그저 그런 선생이 됐을까.
굳이 애써서 더 가르치고, 진심을 담아 잔소리하고, 서툴게 뭔가를 시도하고, 실패하고, 때론 야단치고 다독이면서 뭉텅이진 마음을 내어줬던 그 애들은 내 소멸된 열정의 목격자이자 증인이었다.
그래도 그 시간이 그렇게까지 쓸모없진 않았나 보다, 하고 나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남은 밤길을 마저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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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생님”이었다가 “그저 그런 선생”(내가 보기에는 이 말이 실상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이 책이 그 증거다.)이 돼 버린 과정은 직접 책에서 보기 바란다. 그런데 초반의 열정이 느슨해지는 건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 아닐까? 그 대신에 우리 이세이 선생님께는 경험으로 다져진 지혜와 통찰력이 생겼다고 위로 삼아 얘기해 주고 싶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가 아니라 ‘않았다’). 빨리 끝날까 싶어 되도록 아껴서 천천히 맛보려고 한다. 그만큼 재밌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다들 어린이인 적이 있으므로 읽으면서 내 과거도 돌아보며 독서의 즐거움도 누렸으면 좋겠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안 들려 적적해진 세상에서 그들을 제대로 맞이하는 연습 하는 마음으로 이 책과 만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