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만남과 헤어짐이 있는 풍경 / 박선애
추석 명절에 고향 방문을 자제하라는 방송이 날마다 나와도 어머니는 그 대상에서 당신의 자식들은 제외시킨다.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에서 오지 않기 때문에 괜찮지 않겠냐고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기다리셨다. 손자들까지야 못 왔어도 자식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는 어머니는 흡족해하셨다. 열엿새 날 이른 저녁을 먹고 언니, 오빠, 우리 가족이 함께 출발했다. 뜰에 서서 걱정 말고 어서 가라고 손을 젓는 어머니를 두고 가려니 안타깝다. 북적거리던 집안이 텅 비면 얼마나 허전할까, 생각하니 차로 가던 발길이 다시 어머니 쪽으로 향한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돌아서지만 몇 발자국 가다가 또다시 가서 등 한 번 두드려 주며 잘 챙겨서 드시라고 하는데 결국에는 눈물이 찔끔 나온다.
늘 집이 그리워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던 내 고등학교 시절, 2학기 중간에 집에 올 수 있는 기회는 추석뿐이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면서부터 집에 올 날을 기다렸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밤에 연탄 창고와 화장실이 있는 대문 옆 작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빠지지 않는 일과였다. 거기에서 가느스름하던 초승달이 날마다 조금씩 살쪄 가는 것을 보면서 어서 빨리 둥글게 되기만 기다렸다.
드디어 추석 연휴 하루 전, 오전 수업을 하지만 진도와 완도가 고향인 학생들은 특별히 2교시 끝나면 가게 해줬다. 한 시라도 빨리 가려고 아침에 나올 때 준비해 온 터라 하숙집에는 들를 필요 없이 대인동 공용 버스 터미널로 갔다. 그곳은 고향에 오고 가는 사람들로 빈틈없이 차 있었다. 여기저기 구불구불 이어지는 긴 줄 중에서 진도 가는 버스 타는 줄을 겨우 찾아 끝에 섰다. 먼저 차를 타려고 밀치고, 비좁은 곳을 지나가려다 부딪치고, 떠들고 다투는 혼란과 무질서의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고향에 가는 들뜨고 기쁜 마음이 이 모든 것들을 견딜 만하게 했다.
세 시간쯤 기다려 겨우 버스를 탈 차례가 되었다. 그렇다고 집에 바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때는 진도 대교가 없어서 해남 옥동항과 진도 벽파항 사이를 철선이 버스를 실어 날랐다. 평소에는 몇 분 기다리면 되는데 명절이라 옥동항이 한창 남은 곳에서부터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집에 빨리 가서 가족들을 보고 싶은데 철선 2척은 평상시 그 속도로 느리게 오가고 있으니 속이 다 탔다.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하더니 나중에는 안 되겠다고 내려서 배에 타라고 했다. 벽파항에 내리니 이미 밤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배에서 우리 동네 언니들을 만나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같이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하지만 배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태워 줄 만큼 택시가 많이 있을 리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걸어가기로 했다. 교복에 학생용 단화를 신은 나는 그나마 걸을 만한 복장이지만 그 언니들은 직장에 다니다 고향에 온다고 잔뜩 멋을 내 입은 옷에 굽 높은 구두 차림으로 20킬로미터 가까이 되는 길을 어떻게 걸으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나가는 경운기를 잠시 얻어 타기도 했지만 대부분을 걸어서 오일시장이 열리는 우리 면의 중심지까지 왔다. 거기에서 겨우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니 새벽 2시였다. 휴대 전화는커녕 유선 전화도 동네 가겟집에 하나 있던 시절, 차례 음식 장만에 지친 종갓집 며느리, 우리 어머니는 눕지도 못하고 딸자식 걱정으로 대문간만 바라보며 애태우고 계셨다.
특별히 즐거운 일을 하지 않아도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은 따뜻하고 좋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만나 그동안 못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밤에 동네 남녀 친구들 모두 모여서 노는 것도 재미 있었다. 이삼 일은 금방 지나가고 다시 가야할 날이 되면 멀리 있는 학교에 간 것이 후회스럽고 집을 떠나기 싫어 마음이 어수선했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나오고 말아 마음 여린 아버지를 속상하게 했다. 올 때와는 달리 광주 가는 길이 참 멀게 느껴지고 우울했다. 지금도 가끔 달을 보면 추석을 기다리던 그 때가 떠오른다.
이제는 그때처럼 추석이 기다려지는 나이도 지났다. 오히려 맏며느리의 무게 때문에 부담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더구나 작년부터는 아버지가 언제 오냐고 묻지도, 기다려 주지도 않아서 더 슬픈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90평생에 처음으로 혼자서 쓸쓸히 사는 어머니가 기뻐하고 형제자매가 만나 같이 지낼 수 있어서 좋다. 그러다 또 각자의 자리를 찾아 헤어져야 해서 아쉽다. 어렸을 때는 부모 곁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하는 나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면 이제는 큰 집에 혼자 남겨지는 조그맣게 말라버린 어머니가 애처로워 눈물이 난다.
첫댓글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아쉬워하게 되는 건가봐요. 고향집을 그리워하며 추석을 기다리는 심정이 잘 느껴집니다.
고향에 가는 기쁘고 들뜬 마음, 잘 읽었습니다. 조그맣게 애처로운 어머니 모습도 그려집니다.
고운 글 고맙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 주시고 격려해 주시니 힘이 됩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읽기만 하고 댓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데, 일일이 써주시는 정성스런 그 마음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