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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보살도
1. 티베트에 도달한 불교
불교의 티베트 전래는 650년경에 죽은 송첸감포(Srongbtsansgampo)왕의 통치 기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티베트왕조의 확장은 새롭게 발견되고 새롭게 요구되는
문명을 장식하는데 필요한 재정을 조달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부(富)를 축적하였다.
티베트 군대가 점령한 나라들에는 이미 불교가 정착해 있었다. 그 불교는 뜻있는 전법승들과
함께 적응하고 문명화하는 힘을 지녔다. 송첸감포왕에게는, 초기 기록들을 통해 중국
공주만이 알려져 있지만 중국과 네팔의 공주였던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왕비들은 본국에서
불교의 문화유산과 불상을 가져왔다. 전설에 따르면 왕은 왕비들이 가져온 불상들을
안치하기 위해 라싸에 사찰들을 세웠다고 한다.
이들이 티베트 불교의 가장 오래된 사원이며 가장 초기의 불상들이다. 이것은 대대적인 불교
전파일 텐데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후대의 티베트 전설에서는 송첸감포왕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한다)을 불교로 개종한 열렬한 불교 포교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전파는 대단히 느린 과정을 거쳤다. 크베른(Kvaerne)은 당시의 문서들에
불교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며, 송첸감포왕이 죽자, 왕에게 신권(神權)을 부여하고 동물의
피를 제물로 바치는 불교 이전의 전통의례를 거행하면서 매장한 것 같다고 지적한다. 적어도
727년경에 인도를 여행한 중국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쪽에 있는 티베트라는 나라에는
사원이 없으며 붓다의 가르침도 알려지지 않았다”(Hoffmann 1975: 127).
불교는 티송데첸(Khrisrongldebrtsan, 742-797)왕의 통치기간에 공문서들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그의 재위 이전에 티베트인들이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티송테첸왕은 새로운 신앙의 열렬한 후원자였으며 그의 재위는 티베트에 불교를
결정적으로 소개한 것을 나타낸다.
티베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세명의 법왕들 가운데 두 번째이고,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전설에 따르면 티송데첸왕은 인도의 위대한 학자인 적호(寂護)를 티베트로
초대했다고 한다. 적호는 티베트의 삼예(bSamyas)에 최초의 사원을 지었다. 그렇지만
전설에서는 티베트의 토착신들이 적호가 사찰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적호는 왕에게 신통력으로 그 신들을 제압하고, 그들이 정법에 봉사하도록 하려면 밀교의
요가행자인 연화생(蓮華生, Padmasambhava)을 티베트로 초대해야 한다고 조언한 후
인도로 돌아갔다.
연화생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몇몇 학자들은 적호와 연화생이라는 대비되는 두 인물
속에서 위대한 학승과 싯다(siddha)의 모습을 찾아낸다. 이 둘은 당시 인도불교에
한창이던 성자의 전형이다. 싯다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있으며
신통력을 가진 방랑 탄트라 요가 수행자를 말한다.
싯다의 행위는 충격적이며 도덕폐기론자 같다. 그들은 남성인 경우도 있고 여성인 경우도
있으며, 모든 계율로부터 자유롭고, 붓다의 견지에서 중생의 이익을 위한 신통력을 지녔다.
승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싯다와 사찰 불교가 항상 부드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몇몇
티베트 부파들은 모델로서 한쪽을 더 찬양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쪽을 더 찬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적호는 사캬판디타(SaskyaPandita, 1182- 1251)와 총카파(Tsongkha pa, 1357-1419) 같은
위대한 학승이 했던 탄트라를 수행하였다. 연화생과 나로파(Naropa, 아마 956-1040) 같은
싯다들은 큰 사찰의 승려 대학에서 행해지던 교리 공부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닝마파(rNyingmapa)나 카규(bKa’brgyud)파와 싯다의 맥을 이은 같은 티베트 부파에서도
역시 위대한 학자들을 양성 하였다.
닝마파 학파의 창시자인 연화생은 약 14세기 이후부터 석가모니를 능가하는 완전히
초자연적인 존재, 제2의 붓다로 숭배된다. 그러나 연화생이 아주 예외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증거는 최초기 문헌에서도 거의 나타나지 않고, 몇몇 학자들은 그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래도 어쨌든 연화생의 활동 때문에 적호는 티베트로 돌아갈 수
있었고, 삼예사가 완성되어 처음으로 티베트 승려들이 양성되었다. 유명한 삼예사의 논쟁도
역시 티송데첸왕의 치세 기간에 있었다. 이 논쟁은 불도(佛道)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다음 절에서 다루겠다.
티송데첸왕은 승려의 신분을 자신의 신하와 다른 귀족들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려 놓았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승려들의
생활 유지를 위한 세금을 대중들에게 부가했다. 이러한 통치술의 대부분은 인도의 전례에
따른 것(중국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이 때문에 국법으로 승려를 공양해야 하는 불교를
믿지 않는 귀족이나 농민들과 승려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금강역사(金剛力士, Vajrap??i)보살의 화현이라는 세 번째 법왕 (法王) 랄파첸(Ral pacan,
815-838 재위)은 불교에 대해 광신적이라 고 할 만큼 대단히 열광하였다. 그는 불교에 대한
존경과 숭배의 상징 으로 여러 갈래의 끈으로 머리를 묶고 그 끈으로 다른 쪽 끝을 옷에 묶어
놓았다.
중앙아시아에서 티베트 군대가 패배에 직면했는데, 당시 불교 승려와 사찰들에 대한 광범위한
후원이 재정적 위기를 야기한 것 같다. 결국 랄파첸왕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두 명의
신하들이 그를 살해했다. 랄파첸의 형제인 랑달마(gLangdarma)가 그의 살해를 묵인 하였든
하지않았든, 랑달마는 왕위를 계승했다(838년).
후대 불교 부파에서는 랑달마가 사원들을 폐쇄시키고 그 재산을 몰수하는 등 불교를
박해했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심각한 재정위기에 직면한 랑달마가 사찰들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축소시켰을 수도 있다. 풍부한 지원을 받던 승려들은 이것을 박해에 버금가는
일이라고 받아들였음에 틀림없 다.
랑달마는 펠기도제(dPalgyirdorje)라는 승려이자 요가 수행자에게 살해당했다. 그들은
자비의 방편으로 정법을 수호하고 왕이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르는 것을 막기로 결심했다
(842년). 랑달마가 죽으면서 중앙 티베트에서 사원불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은 또한
티베트 제국의 멸망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티베트에서의 제1기 전법시대로
알려진 기간이 끝난다.
그러나 티베트에서 서서히 사원제도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서부지역의 왕이 티베트
제2기 전법시대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후에 예셰외(Yeshes’od)로 알려진 왕이자 동시에
승려였다. 왕은 사원들을 건립하였으며, 불교를 연구하고 불경을 번역하는 승려들을
양성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인도로 보냈다.
예셰외왕은 인도의 위대한 학자를 초대하려고 했는데, 특히 아티샤 성자를 초대하고
싶어했다. 왕이자 승려인 그는 이슬람교도인 터키족에게 붙잡혀 감금되었을 때 조카인
장춥외 (Byangchub’od)에게 자신의 석방을 위해 마련한 몸값을 티베트의 불교 부흥을
위해 아티샤를 초청하는 데 쓰라고 하였다.
결국 예셰외는 정법을 위한 순교자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로 인해서 아티샤
(Ati?a, 982-1054)는 수년간 티베트에 머물면서 불교를 가르치고 경전을 번역하고 학문·
계율에 기반을 둔 불교를 확립하였으며 엄격한 사원 전통에 근거한 탄트라 수행을
합법화하였다.
아티샤는 티베트 재가 신자로 수제자인 돔퇸(Bromston)을 위해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
Bodhipathaprad?pa)』이라는 짧은 저작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논서에서 많은 스승들로부터
전수받은 모든 불교 수행들을 계율에 기반을 둔 차제법으로 통합하였으며, 탄트라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를 완성하는 체계를 창안했다. 이 논서는 티베트의 종교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티샤가 활동하던 시기에 티베트인들도 역시 학파를 세우고 있었다. 재가신자인 번역가
마르파(Mar pa, 1012-96)는 여러 차례 인도를 여행하였고 여러 가지 밀교의 교리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제자 밀라레파(Mi la ras pa, 1040-1123)는 유명한 재가 요가
수행자이며 시인이다.
승려 제자로는 감포파(sGampopa, 1079-1153)가 있고, 그는 카규(bKa’brgyud)학파의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밀교의 전임자가 재가자인 덕택에, 카규학파는 특히 이후에 여러 학파로
분열된 사찰의 부파로 발전했다. 이 카규학파의 분파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학파는 카르마파
(Karmapa)이고, 이 학파는 다시 적모파(赤帽派)와 흑모파(黑帽派)로 나누어졌다. 카르마파는
정법이 환생을 통해서 이어진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제2대 흑모파의 스승이 1283년에 죽었을 때, 어떤 아이를 그의 환생으로 간주하여 다시 한번
스승의 종교적·행정적 지위를 누리도록 훈련시켰다. 이 ‘환생한 라마’는 그후 다른 학파들
(달라이 라마가 가장 잘 알려진 경우이다)에서도 채택했다. 이것이 티베트와 몽골 불교의 한
특징이 되었다.
치적으로 티베트왕조의 몰락 이후 거의 무정부 상태에서 권력은 어떤 형태로든 안정성을 줄
수 있는 사찰들로 점차 집중되었다. 심지어 몽골군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티베트는 ‘왕자이며
승원장’인 인물이 이 끌었고, 때로 지방의 왕들을 연합시켰다. 티베트는 몽골군에 일찌감치
항복했다. 종교, 특히 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칭기즈칸의 손자인 고단(Godan)왕자는
전(全)티베트에서 가장 성스러운 존재로 칭해지던 수도승, 즉 사캬파의 사캬판디타인 퀸가겔첸(Kundga’rgyalmtshan, 1182-1251)을 자신의 숙영지로 초대하였다(1244).
퀸가겔첸에게 감화된 고단왕자는 그의 후원자가 되었고, 몽골로 돌아가면서 사캬파가
티베트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도록 하였다. 사캬판디타 다음에 조카인 팍파(Phgspa, 1235-80)가
그를 계승했다.
팍파는 몽골 황제로 중국을 통치한 쿠빌라이 칸의 스승이다. 강력한 쿠빌라이 칸은 밀교의
입문식후에 공양물로서 팍파에게 티베트를 선물로 주었다(Kapstein 2006: 112). 이 시기에
사캬파는 티베트를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골과 중국에서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불행하게도 티베트의 라마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거만한 중국인들에 의해
비난받았다. 몽골 통치자들과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서 티베트 라마들은 중국에서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사캬의 영향력은 몽골 제국(원나라)의 몰락과 함께 쇠퇴하였다. 티베트
내에서 전쟁을 통해서 사캬는 점차적으로 다른 ‘왕족의 사원’ 학파, 특히 팍모두파
(Phagmogrupa)라는 후에 카르마카규가 추종한 카규학파에게 정치적 통치권 (그렇지만
정신적인 영향력은 있었다)을 넘겨주었다.
티베트 불교의 이전 학파들은 중국의 관습을 따르면서 (카르마파 흑모파임에도 불구하고) 보통
‘적모파’로 불렸다. 이것은 가장 최근의 티베트 학파인 총카파의 황모파(黃帽派), 즉 게룩파와
대비된다. 특히 아티샤가 인도의 원전들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것처럼 총카파도 인도 원전들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는 금욕적인 사찰 생활과 폭넓은 교육을 강조하였다.
총카파는 1409년에 라싸 근처에 최초의 게룩파 사원인 가덴 (dGa’ldan)사(寺)를 설립하였다. 또
다른 위대한 두 개의 사원 대학인 데풍(Bras spung)사와 세라(Sera)사도 각각 1416년과
1419년에 역시 라싸 근처에 세워졌다. 총카파의 제자 가운데 게뒨둡(dGe ’dungrub) 은 라싸에서
남서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타시륀포(bKrashislhunpo) 사를 설립하였다.
게뒨둡의 사후에 게뒨갸초로 환생하였다. 그리고 게뒨갸초는 죽은 뒤에 쇠남갸초(bSod nams
rgya mtsho, 1543-88)로 환생하였다. 쇠남갸초는 몽골에 불교를 다시 소개하였으며, 몽골의
왕인 알탄 칸(AltanKhan)은 쇠남갸초의 학식과 영성(靈性)에 깊이 감명 받아서 그를 ‘대해
(大海, 몽골어로는 달라이 dalai)’라고 칭하였다.
스승을 뜻하는 라마(blama)를 더해서 이전의 두 환생자에게도 각각 ‘달라이라마’라는 칭호가
주어졌고, 쇠남갸초는 제3대 달라이라마가 되었다. 쇠남갸초의 환생인 제4대 달라이라마가
알탄칸의 위대한 손자로서 몽골 가정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게룩파에 대한 몽골의 지원은 확고
해졌다. 그 당시 많은 위대한 게룩파 스승들은 민족적으로 몽골족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정치적으로는 상황이 악화되었다. 게룩파 사찰들의 힘이 커지자 특히 카르마파
카규같은 다른 정치권과의 종교적·정치적 적대 관계가 야기되었다. 이는 지리적으로 라싸와
게룩파가 지배하고 있던 티베트 중부와 카르마파를 지지하고 라싸의 야심과 주장에 대해
분개하던 왕이 다스리는 티베트 남부 창(gTsang)사이의 오랜 적대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때로 달라이라마와 카르마파 교주들이 잠재적인 위험 상황을 화해시키려고 중재를
시도했지만 무장한 군대와 다른 사찰과 동맹을 맺은 승려들의 전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정부 상태는 17세기 중반에 몽골의 구시칸
(GushriKhan)이 티베트 남부 창 지방의 왕을 전쟁에서 제거하고 티베트 정치적 통치권을
제5대 달라이라마에게 이양하면서 일단락되었기 때문이다.
제5대 달라이라마인 아왕롭상갸초(Ngagdbangblobzangrgyamtsho, 1617-82)에게는 학식과
더불어 정치적 재능도 있었다. 이때부터 달라이라마들이 강건해지면서 그들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티베트 국민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