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목수 체험기
2023년 4월 24일부터 봉평고등학교에서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목공반을 개설했다. 숲속공방 대표와 함께 10주 과정으로 목공 작품 하나를 만드는 교실이다. 지역 주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서 아내와 함께 신청했다. 열심히 배워서 예쁜 우체통을 완성하고 아내 작품까지 집과 성전 문을 장식했더니 보기에 좋다고 한다. 우편물이 도착하면 딱히 둘 장소가 마땅치 않았던 터라 우체통 제작 및 설치는 실제적으로도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목공 작업을 시작했던 때는 34년 전 경기도 양평군 양동중앙교회에서의 첫 목회 때부터다. 양동(楊東面)은 강원도 횡성과 인접한 경기도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몇 개의 재를 넘어야 할 만큼 요새처럼 자리 잡은 양평의 오지 마을이었고, 마을까지 연결된 비포장도로에는 먼지가 풀풀 날리던 산간 마을이었다. 예배당을 보수할 일이 생기면 딱히 전문 업자가 오기 힘든 지역적 한계도 있지만 실제는 가난한 산골 교회로는 재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여건이 더 컸다. 그래서 전기, 수도, 보일러, 목공 등 다방면에 걸쳐 직접 몸으로 때워야 해결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목공 작업은 비용절감 때문에 주로 버려진 폐목을 갈고 다듬어 쓸 만한 물건으로 재활용하였다. 그 후로 나무를 다루는 취미가 생겼다. 이런 나를 보신 어머니는 대목수였던 내 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공구 때문에 작은 물건 하나 만들라치면 두세 배의 땀을 흘려야 했다. 그래도 주로 성전에 필요한 것들을 제작하였으니까 사명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기쁘게 감당했었다.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는 목공작업의 특성에 비하면 정교하지도 않고 섬세하지도 못해서 사실 자랑할 만한 것들은 별로 없었다. 임지를 옮길 때 그냥 두고 왔기 때문에 후임자는 미련 없이 처분하여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그 후 부임하는 교회마다 건축했고 그때 생겨난 폐목들은 본의 아니게 내 목공 작업을 꾸준하게 잇는 끈이 되었다. 그런데 전문적으로 할 일이 아니다 보니 공구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터라 마치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사용하는 것처럼 불편함과 고단함은 여전했다. 그랬던 내 목공 이력이다 보니 이번에 장비를 잘 갖춘 봉평고 목공반에서의 우체통 제작 과정은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전문 목수에게 목공의 기초 상식을 배우면서 매주 완성되어 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렇게 10주 과정은 지루하지 않게 지나갔고 마침내 완성된 우체통을 보면서 마음 뿌듯했다. 누가 뭐라해도 이것은 내게 최고의 작품이고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무는 태어나서 한줌의 재로 산화하기까지 남을 위하여 온전히 자기의 삶을 바치는 일생을 산다. 산에 있는 나무는 좋은 공기를 내뿜고 농장에 있는 나무는 풍성한 열매를 맺어 인간을 유익하게 한다. 다 쓰다 버려진 나무는 땔감으로 사용되고, 타다 남은 숯(炭)은 공기정화, 토양 개량, 냄새흡수 등에 사용된다. 그것마저 다 타고 남은 찌꺼기 재(灰)는 거름과 섞어서 지력(地力)이 약해진 땅을 회복시킨다. 나무는 우리의 일상에 활용도가 만점이다. 이 나무의 활용도를 높이는 사람이 목수다. 그의 손끝에서 나무는 필요에 따라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형태가 달라지니 목수는 일상을 편리하게 해주는 장인(匠人)이다. 이런 장인은 나무를 보는 안목이 탁월해야 한다. 나무의 특성에 따라서 용도가 각각 다르기에 기둥, 가구, 도구로 사용될 재목들을 구분하여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해야 한다. 손재주가 좋은 목수는 예술품으로 잘 다듬어서 그 가치를 높이고 때로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품도 만든다. 특히 쓸모없다고 버려진 폐목들을 잘 활용하여 꼭 요긴한 물건으로 탈바꿈시키는 목수의 손은 꼭 마술사의 그것과 같다. 나무는 진정 좋은 목수를 만났을 때 전혀 다른 삶으로 새로움을 창출하는 신비함이 있다. 새로움을 뜻하는 한자 ‘新’이 담고 있는 뜻이기도 하다. 立(설 립), 木(나무 목), 斤(도끼 근)이 합쳐져 만들어낸 글자 ‘새로움’(新)은 서있는(立) 나무(木)를 도끼(斤)로 찍어 자르고 다듬어서 이전의 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 도끼를 잡고 이 과정을 거치는 사람이 바로 목수가 아니던가? 새로움이란 목수의 안목과 실력, 정성을 모아서 만들어낸 사랑의 걸작품인 것이다.
이런 목수의 모습에는 폐목처럼 버려진 죄인들을 변화시켜서 전혀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내신 예수님의 사역과 겹친다. 그래서일까? 주님의 공생애 시작 전 사생애는 아버지 요셉의 가업을 이어서 목수였는데(마 13:55; 막 6:3)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장차 인류를 새롭게 하실 전능자의 예지적 삶의 예표였음이 분명하다. 베드로를 비롯한 12명의 제자나 사도 바울은 모두 목수이신 예수님의 손에 깎여지고 잘 다듬어져 인류 역사의 큰 재목이 되었고 이후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런 면에서 목자(牧者)와 목수(木手)는 그 사역에 본질의 동질성이 있다. 목수였던 예수님이 목자로 사신 것처럼 이 땅의 모든 교회는 목장이고 목공방이다. 목장에서 목자에게 잘 길러진 양은 목공실에서 목수에게 잘 훈련받아 인류 구원의 완성을 이룰 대 역사의 주역이 된다. 이렇게 목자와 목수를 합친 사역이 목회요 그 중심에 목사(牧師)가 있다. 이번 목공반에서 목사에게 목수체험은 특별한 은혜가 있었다. 목수와 목자로 사신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선한목자는 동시에 좋은 목수가 되어야 하나님이 맡겨진 영혼 구원의 역사가 완성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또 장인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역대하 2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