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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 시 120:1-7, 눅 12:1-12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작품 가운데 ‘폐문’이라는 글이 있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어떤 세 사람이 문도 잠기고 거울도 없는 기괴한 방에 갇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마치 고문을 당하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된다. 밀폐된 방에 갇혀 시간이 흐르다보니 원망과 불평도 늘어만 간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해 보았지만, 그 모든 수고는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원망과 불평은 그대로 쌓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닫혔던 문이 갑자기 할짝 열리면서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진다. 어디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제는 그들 스스로가 감옥에 갇혀 있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대로 그곳에 남기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갇혀 있을 때에는 갇혀 있는 것이 괴로웠다. 그런데 정작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나니까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진 것이다. 나가면 이제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스스로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 밀폐된 세계를 다시 선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심리적 병리현상이다. ‘밀폐공포’라는 것이 있다. 갇힐까 염려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좀 넓게 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이 좁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갇히고 밀폐된 다음에는 그곳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여기는 너무 좁다하며 산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집에서 보다 넓은 집을 가져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넓은 집, 더 큰 땅을 원한다. 이것이 밀폐공포에 젖어 사는 생리이다. 그런가하면 반대로 ‘광장공포’가 있다. ‘아고라포비아’라고 하는 이 공포증은 넓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중국 영화에 나오는 궁궐이나 외국 궁전을 보면 왕궁 안의 침실은 참으로 넓다. 그런데 잠을 자는 공간을 보면 침대 위에는 지붕처럼 무엇을 씌워놓아서 공간을 좁게 만들었다. 넓으면 잠이 안오고 불안하니까요.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들 자유니 뭐니 하며 크고 넓게 살고자 하지만, 커지고 넓어지는 것처럼 불안한 것이 없다. 이것이 더 무섭다. 어딘가에 내던져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이것이 광장공포이다. 또한 사람에게는 ‘동물공포’가 있다.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서 매사에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런 두려움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동물이 되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이밖에도 여러가지 공포증이 있다. 예를 들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또 하나 뺄 수 없는 것은 ‘마이크로포비아’라고 하는, 세균에 대한 공포증이다. 시시때때로 손을 씻고, 그릇도 깨끗하게... 온갖 것들을 세균없이 깨끗하게 하느라고 애쓴다. 이것 역시 공포증의 하나이다. 대게 이런 쪽으로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 일찍 죽는다.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다. 아이들보고도 무조건 ‘손을 닦아라, 더럽다’ 하고 쉴새없이 닦달한다.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뱃속에 깨끗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더럽다 더럽다 말이 많다. 따지고 보면 더럽다는 개념에 문제가 있다. 이렇듯 결백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다. 세균과, 더러움과, 불결함에 대한 이같은 공포증도 하나의 큰 문제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두려움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자. 이것은 무지와 무능에서 오는 것이다. 사실은 다 몰라서 그렇다. 좀더 깊이 알면 문제가 없는데,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모르기 때문이며, 그것을 감달할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또한 두려움은 불확실성 때문에 생겨난다. 도대체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정치, 경제, 대자연, 공해... 앞으로 또 무슨 사건이 터질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두려워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알기 때문에 두렵기도 하다. 아예 아무 생각도 못하는 멍청한 사람에게는 아무 두려움도 없다. 그런데 겨우 조금 아는 것, 이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 공포를 준다. 다시 말하자면 합리적 이해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당위성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렸다. 그런데 씨를 심어놓고도 그 싹이 나지 아니할까 두려워할 때가 있다. ‘종자를 뿌렸는데 싹이 안나면 어떻게 하나? 가을에 추수를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안달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엇을 심어놓고 나서 그 싹이 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안날까 하는 걱정이 아니라 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합리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때때로 우리는 선한 일을 하고나서 그에 상응하는 선한 보상이 없으면 불평을 한다. 그리고 미리 ‘선한 결과가 따라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하고 무서운 것은 미래에 대한 결정적 공포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 죄지은 사람은 무사하지 못하다. 죄값은 사망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난다. 심은대로 거둔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심판의 그날이 오면 어떡하나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가 더 큰 것이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다 처리되지 못한 과거도 중요하지만,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결정적 공포가 우리 마음을 항상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개를 자세히 관찰해 본 일이 있나? 진돗개를 키우는 목사님의 집을 간 적이 있다. 짖는 것을 보면 무척 사납게 짖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개는 아무나 보고 다 짖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 더 요란스럽게 짖고, 어떤 사람은 바로 앞을 지나가도 짖지 않는다. 참 영리하다. 교인들이 수없이 오고 가지만 절대로 짖지 않는다. 혹 어린아이들을 물지는 않을까 염려도 했었지만 역시나 어린아이들을 보고 물기는커녕 짖지도 않는다. 그렇게 영리하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을 보면 아주 정신없이 짖어댄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어떤 심리학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렇다. 무엇인가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그 두려운 마음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린다고 한다. 그 진동이 개의 촉각에 전달되어서 개가 짖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모습을 보고 짖는 것이 아니라, 촉감에 의해서 알고 짖는 것이다. 깜깜한 밤이라 누가 누군지 구별을 못해도 그 존재는 벌써 촉각으로 전달이 된다는 것이다. 참 놀라운 얘기이다. 그렇다. 죄지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으로 벌벌 떨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 그의 정신도, 그의 몸도 다 약해지고 병들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두려움에 떤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병리현상이며, 또한 이것은 오늘날 일어나는 병적 사건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두려움 뒤에는 병적 사건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렇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는지 몰라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드시 있을 일이다. 이것에 대한 이성적 추리와 양심이 비판이 있다. 자기 자신이 벌써 자기를 심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은 절대로 무사할 수가 없다. 그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반드시 있을 일과, 그것에 대한 지식과, 미리 내려진 판단이 두려움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죽음이라든가 늙는다든가 병든다든가 하는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별히 죄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을 일이지 없을 수는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수용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려운 일이지만 갈보리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살기 바란다. 그것이 믿음이다.
오늘 분문은 말한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그렇다. 그 말씀대로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다. 알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언젠가는 알려져야 한다.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백일하에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자세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드러나면 어떡하나? 알려지면 어떡하나‘ 이런 것은 다 소용없다. 돈을 벌면 뭐하나?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나? 돈이 좋은 침대를 사줄 수는 있다. 그러나 돈이 단잠을 잘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돈이 좋은 약을 사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돈이 건강을 보증해 주지는 못한다. 돈으로 책을 살 수는 있어도, 돈이 좋은 머리를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 때로는 돈이 많은 친구와 나를 위로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정한 행복은 돈이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한 무슨 행복이 있겠나? 언젠가는 다 알려지고 나아가 자랑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가? 열려진다 하니까 자살하는 사람 참 많다. 그동안 속으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인가?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라. 대단히 중요한 심리학적 소재가 담겨 있다. 예수님을 수천명이 따랐다. 수많은 무리가 따랐다고 성서는 말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숫자를 ‘수만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의 수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는 제일 많은 숫자이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모였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예수님의 인기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큰 권세 때문에 수만명이 그 좁은 도시에 모였다. 어디를 보아도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굉장한 인기 속에서 예수님과 사람들의 중간 위치에 있는 제자들은 기분이 좋아져서 마치 자기들이 영광을 누리는 것처럼 신이 났다. 아닌게 아니라 사람들은 제자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아주 민첩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인기라는 것은 좋지만 이것 때문에 행여 미치지는 말아라.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제자는 제자이고, 죄인은 죄인이다. 너희들이 이렇게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선망을 받고,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이것이 진짜인 줄로 착각하지 말아라. 여기서 위선자가 되지 말아라’ 하고 알려주시는 교훈이다.
보라. 세상에 위선자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다. 가령 여러분이 본래 아무것도 모르고 별것도 아닌 사람인데, 약간의 재주를 가지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것이 발휘되었다고 하자.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처음으로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아니오, 나는 천재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자꾸만 ‘당신은 천재입니다. 천재예요’ 하고 말하면 ‘정말 내가 천재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모든 사라들이 나보고 천재라고 하는데, 비록 나 자신이 천재가 아닌 것을 안다고 해도 ‘천재’라는 말을 그대로 접수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동안 착각하며 지내다가 누군가가 자기보고 ‘무식한 놈’이라고 한마디 하면 죽자사자 싸우려 들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여러분, 온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존경해도 나와 나됨은 내가 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절대로 위선에 빠지지 말아라. 형식주의에 빠지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고 가르쳐 주시고 계신다. 사실 수만명이 모여 옹위할 때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빠지는 멍청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이다. 온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런 것은 절대로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신다. 사실은 사실대로, 있는 것은 있는대로, 없는 것은 없는대로, 죄인은 죄인대로 어차피 다 들어날 일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하시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이 가진 두려움은 아주 별스런 두려움이었다. 허세적인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두려움은 많다. 가만히 보면 젊을 땐 얼굴이 팽팽했는데 세월이 흘러 조금 주름살이 생기니까 그것을 안타까워 하고 싫어한다. 주름살 하나 생긴 것 가지고 울고불고 야단이다. 이런 두려움은 어리석은 것이다. 늙을 때가 되었으니까 늙는 것이고, 죽을 때가 되었으니까 죽는 것이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는 유독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두려움이 있었다.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며 언제나 노심초사하였다. 자기의 체면과 인기, 이런 것들이 혹시라도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공포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위선으로 가장한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위선은 위선이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라고 말씀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항상 광명한데서 노출된 자기 모습으로 사는 것이 진실이다. 남이야 보든 말든, 남이야 뭐라고 평가하든 그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드러낸 것같이, 벌거벗은 것같이 자기 진실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성서는 ‘심은대로 거두리라’라고 말한다. 부정을 저지른 사람은 결국 가야할 길이 따로 있다. 사람들은 죽음은 두려워하면서고 지옥은 두려운줄 모른다. 사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나 말거나 간에 무서운 것은 지옥이다. 여러분, 현재의 일을 두려워하고 있나?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미래이다. 영원한 생명이 문제이다. 영원한 세계,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말을 히브리 사람들은 ‘이르아’라고 하고, 헬라 사람들은 ‘포보스’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을 살펴보면 두려움은 두가지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사악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의심과 불신의 산물이요, 절망과 포악함의 상징이다. 이런 감정들을 통틀어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는데, ‘공포’라는 개념으로 흔히 말한다. 또 하나는 ‘경외’이다. 경외감을 담은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경건’이라고도 말한다. 믿음과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다. 때로는 사랑이 있음으로 조심스럽고 두려움이 생길 때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두려움을 경건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라. 사악한 공포감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은 우리로 진실과 거룩함과 사랑을 이루게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인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특별히 체면이 손상된다거나 또는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나? 그것은 범죄와 위선과 외식이다. 죄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죄보다 더 중요한 것, 죄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죄는 교만의 죄이다. 두려워할 줄 모르는 죄, 이것은 완전히 끝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과 위선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순교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끝가지 굽히지 않은 이유로 순교당할 처지에 놓였다. 형을 언도하는 재판장이 ‘저 놈을 당장 화형에 처하라’라고 엄히 명령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이렇게 조언을 하였다. ‘저 사람을 화형에 처하면 예수 이름으로 순교당한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유배를 보내라. 평생 섬에서 외로이 살다가 죽도록 해주지.’ ‘그러면 오히려 기도할 시간이 많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놈을 몽둥이로 훔씬 두들겨라.’ ‘그렇게하면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매를 맞았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저 놈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단 말이냐?’ 옆에서 조언하던 사람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돈을 많이 주어서 석방시켜 보십시오. 향락을 즐기게 해보십시오. 자연 타락할 것입니다. 저놈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오로지 죄밖에는 없습니다.’ 그렇다 흔히들 죄를 무서워할 줄 모르고 실패와 질병만을 무서워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불신앙과 교만을 두려워해야 한다. 혹시라도 교만해 질까, 혹시라도 바리새주의에 빠질까 하는 두려움이 무엇보다도 앞서야 한다. 여러분, 사건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해야 할 자를 두려워하라. 운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미래를 두려워할 것도 없다.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루마니아의 공산치하에서 기독교가 박해를 박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 범브란트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다,. 그 목사님은 옥중에서 그토록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성서를 꾸준히 읽었다. 찬찬히 말슴을 읽어가면서 묵상을 하는데 유독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문득 ‘어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서에 몇마디나 나오는지 한번 세어보자’라고 목사님은 그 구절이 나올 때마다 따로 표시를 하면서 성서를 읽었다. 그랬더니 공교롭게도 그 단어가 성서에 365회 언급되어 있는 것이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사건을 무서워하지 마라. 오로지 하나님만을 무서워하라. 종교 개혁자인 존 낙스의 무덤에는 이런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 결코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하는 일이 없는 자가 여기 잠들다.’ 얼마나 멋있는 묘비명인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 41:10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러분,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하나님 아닌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거기에 진정한 신앙적 용기가 있는 것이다. (1997-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