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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시 _도망칠 길 없는 존재의 감금과 분열의 노래
◈ 저자 : 이상(李箱)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백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 조부, 조모, 백부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보성고보 시절에는 교내 미술 전람회에서 우등상을 받았으며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총독부 기사 시절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잡지 『조선』에 발표하였고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였다. 폐결핵으로 총독부 기사직을 사임한 뒤 「오감도」, 「건축무한 육면각체」, 「지도의 암실」 등 시와 소설의 창작에 매진하는 한편, 카페 '제비', '69' 등을 경영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박태원, 정지용, 김기림 등과 '구인회' 활동을 하였으며 「날개」를 쓴 뒤 동경으로 갔다가 1937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레몬 향기를 맡고 싶소"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만 26세 7개월에 요절했다.
◈ 해설자 : 김승희(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논문 「이상 시에 나타난 '거울'의 상징과 구조」로 석사 학위를, 「이상 시 연구 - 말하는 주체의 양상과 기호성의 의미 작용」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되었고, 1994년 《동아일보》에 단편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이 당선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와 어바인 캠퍼스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시집으로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냄비는 둥둥』 등이 있고, 창작집으로 『산타페로 가는 사람』 등이 있다. 연구서로 『현대 시 텍스트 읽기』, 『이상 시 연구』 등이 있다.
1. 「오감도」, 까마귀가 내려다본 무서운 인간 실존
한국 현대 시 80년의 시 중에서 가장 문제적인 시를 뽑는다면 단연 이상의 「오감도(烏瞰圖)」일 것이다. 「오감도」는 원래 30회 연재를 목표로 하였는데 《조선중앙일보》에 연재(1934년 7월 24일~8월 8일)를 시작할 당시 독자 항의가 빗발쳤고 결국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시 「오감도」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형태적 측면과 그로테스크한 내용으로 당대 한국 시의 관습에서 볼 때 파격적이었고 제목부터가 문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오감도 시제1호(時弟一號)」
한국어는 음성언어이기 때문에 띄어쓰기는 가장 기초적인 어문법의 규약이며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을 때에는 읽기에 혼란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의미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그러한 어문법의 기초적인 규약을 위반한다는 것은 세상의 상징적 권력에 대한 시인의 반항과 불순종, 미학적 자유에의 갈망을 암시한다.
「오감도」의 연재는 김기림, 정지용의 추천으로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었던 이태준에게 발탁되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용만이 쓴 『구인회 만들 무렵』을 보면 정지용이 상허(尙虛) 이태준에게 "여보, 상허! 그러지 말고 이상의 시를 내주시오. 제일 내가 이상이한테 졸려 죽겠으니 말이요. 그러지 말구, 새로운 경향의 시니 한번 시험조로 내보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고 "지용은 내친 걸음이라 어린애같이 졸랐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것이 시 「오감도」가 신문에 실리게 된 발단이 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시가 신문사에 들어가자마자 문선부(文選部)에서부터 말썽이 일어났다고 한다. 「오감도」라는 말은 사전에도 없으니 오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학예부장의 설명으로 조판되어 교정부에 넘어가자 다시 그곳에서도 말썽이 터졌다. 물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일어나 학예부장 이태준은 사표를 호주머니에 늘 넣고 다닐 정도로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무슨 개수작이냐", "무슨 미친놈의 잠꼬대냐" 같은 독자 투서는 급증했고 독자 항의문 중에는 "이상이를 죽여야 해"라는 극단적인 비난도 있었다고 하니 당시에 「오감도」에 대한 독자들의 미적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이상은 이런 저항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의 자만심을 높이 치켜들고 발표하지도 못한 '작자의 말'을 썼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지고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 빠지게 놀고만 지냈던 일도 좀 뉘우쳐 봐야 아니 하느냐. 여남은 개쯤 써 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2천 점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를 딱 꺼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냥 두니 서운하다······.
이렇게 자신은 남들보다 '십수 년을 앞서 있다는 것', '시 몇 편 써낸 날탕패들과는 다른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드러낸다. "십구 세기는 될 수 있으면 봉쇄하여 버리오"라고 말했던 이상의 모더니즘을 당대의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고 그들의 분노는 '모더니스트 이상'이 보여 준 새로운 미학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새로운 미학이라기보다는 반(反)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감도」라는 제목은 사전에는 없는, 시인이 만든 신조어로서 건축 용어인 '조감도(鳥瞰圖)'의 '새 조(鳥)'자에서 눈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가운데 한 획을 빼고 '까마귀 오(烏)'자를 만들어 제목을 삼은 것이다. 조감도란 '투시도와 한 가지로 위로부터 수직으로 내려다 보이는 물체를 그린 그림이나 지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오감도」란 제목은 비유적으로 '까마귀가 위로부터 수직으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본 그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선 형태적 측면에서 이 시는 파격적인 충격을 준다. '오감도'라는 신조어나 '시제1호'라는 표제도 상당히 낯설다. 이어령에 의하면 시제1호, 시제2호, 시제3호······ 이런 식으로 표제를 다는 것은 쉬르레알리즘(Surrealism, 초현실주의)의 영향이라고 한다. "곧 의미 있는 표제를 달면 독자가 어떤 선입견을 가져 시적인 다양한 의미를 한정시켜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렇게 무의미한 표제를 단 것은 시의 총체적 의미를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의도로 본다"는 것이다.1) 이승훈, 『이상 시 전집』 18면, 주해 부분에서 재인용.)
시란 산문과 달리 낭송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 이 시를 읽어 보면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중략)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와 같이 같은 구문의 반복이 13번이나 계속 되기 때문에 마치 읽는 사람 자신이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숨이 차오르게 된다. 이런 구문을 병행구문(Parellerrism)이라고 하거니와 병행구문의 13번 반복은 같은 문장의 계속되는 반복으로 인해 강박적인 속도감을 준다.
또한 이 시의 음악적 요소로 '-오', '-소'로 끝나는 각운(脚韻)의 지속적인 되풀이를 들 수 있다. 각운과 아울러 3행부터 15행까지 나타나는 '제'의 반복, 18행부터 21행까지 나타나는 '그중에'라는 말의 반복이 일으키는 두운(頭韻)에 의해 음악성은 더욱 증폭된다. 각운과 두운의 반복, 그리고 '제1인의', '제2인의' 등과 '무서운', '무서워하는' 등의 말들이 만드는 유음(流音) 현상의 연속성은 과도한 리듬감과 희열을 준다. 리비도의 리듬을 연상시키는 지나친 반복의 가쁜 호흡과 더불어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길은뚫린골목이라도좋소)'와 같은 거시적 대립 구조의 아이러니 때문에 현기증이 나면서(리듬) 대립적 의미가 붕괴된다(아이러니). 즉 대립되는 것들이 같아져 버리는 것이다. 안과 밖이 없고 어디에선가 한번 꼬여 안과 밖이 같아져 버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오감도 시제1호」는 그렇게 출구가 없는 '감금의 뫼비우스 띠'를 형성하게 된다. 그 안에 우리를 갇히게 한다.
시에 있어서 형식은 곧 내용이다. 바로 그런 실존의 현기증, 출구를 찾을 길 없는 뫼비우스 띠 위에서의 빙빙 도는 갇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이 시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무서운 사람=무서워하는 사람',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는 것=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는 것', '막다른 골목=뚫린 골목'과 같이 반대되는 것들이 아이러니의 구조에 의해서 같은 것이 되어 버리는 실존의 모순도 이 시의 주제가 된다. 숨가쁜 반복과 각운, 두운, 유음 현상들이 만드는 속도감이 이 시의 주제를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증폭시키는 시적 효과를 만들어 주고 있다.
3. '13'이라는 숫자의 의미
이상 시의 특징은 아무리 해도 그 시의 의미가 다 해석되지 않는 데 있다. 시를 읽는 기쁨은 바로 그러한 의미의 불확정성, 애매성,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모호한 의미의 잉여가 남는 것에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의 의미가 다 확정되지 않는 것이 불안을 줄 수도 있지만 시의 언어라는 것은 과학의 언어나 사회학적 언어와 달라서 바로 그러한 '의미의 불확정성'이 시의 위대한 점이요, 기쁨이 되는 것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관공서의 문서나 전자 제품의 매뉴얼이나 과학 책이나 사회학적 칼럼이나 법전의 한 조목을 읽는 것과는 다른 마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의 해석에는 아무리 다 굴착을 해도 굴착되지 않는 빈틈, 의미의 잉여가 남는 것이고 이상 시야말로 그런 의미의 불확정성이 넘치고 있다.
「오감도 시제1호」의 시를 해석할 때 가장 많은 논란을 낳은 부분이 '13'이라는 숫자의 해석이다. '13인'이라는 숫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문학평론가 임종국의 해석이 가장 선구적이고 정평이 있다고 하겠다. 『이상 전집』을 펴낸 임종국은, 13인은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기독 이하 13인"이라고 해석을 한다. 그래서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라는 구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운명을 가진 유다와 누군지 모르는 배반자를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와 다른 사도들의 불안을 읽어 낸다. '최후의 만찬'에서는 무서운 사람과 무서워하는 사람으로 모든 인간의 운명은 요약되고 다른 사정 같은 것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너희들 중 한 사람이 오늘 밤 나를 팔 것이다"라고 예수가 말했을 때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지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모두들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서로는 무서워했을 것이고 유다 자신도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어 무서워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 무서운 사람이 되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불길한 시간 속에서 파국이 가까워 올 뿐인 것이다. 결국 시인이 본 현대인의 모습은 '누가 무서운 사람인지 몰라서 서로를 무서워하고 있는' 불안의, 위기의, 불신의 집단인 것이다.
서정주 시인은 '13인'을 당시 식민지 치하에서 제국의 불길한 공포에 떨고 있는 조선 13도(식민지 시대에 조선은 행정조직상 13도로 분할되어 있었다)로 해석을 하고 있고 마광수는 심리주의 비평의 시각에서 억압된 리비도의 방출, 정자(精子)들의 질주로 해석을 하고 있다. 또한 이상 시 연구 중 숫자 시와 기하학적 도형 시에 탁월한 해석을 보여 준 수학자 김용운은 '13'을 시간적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면서(시계는 12진법으로 되어 있음을 상기해 볼 것) '시계 시간의 부정, 시간의 불가사의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문학평론가 이재선은 이상의 다른 시 「일구삼일년(작품제1번)」이라는 시와의 상호 텍스트적 측면2)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란 '모든 텍스트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텍스트와 연결되어 있다'라는 시각에서 '다른 텍스트와의 상호 관계성'을 가리키는 문학 용어이다. 이상 시 「일구삼일년(작품제1번)」의 '10'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의 방의 시계 별안간 13을 치다. 그때, 호외의 방울소리 들리다. 나의 탈옥의 기사. 불면증과 수면증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는 나는 항상 좌우의 기로에 섰다. 나의 내부로 향해서 도덕의 기념비가 무너지면서 쓰러져 버렸다. 중상. 세상은 착오를 전한다. 12+1=13 이튿날(즉 그때)부터 나의 시계의 침은 3개였다.")에서 13이라는 숫자를 '시계 시간이 끝난 호외의 시간, 탈옥의 시간, 도덕의 기념비가 무너져 내린 내면적 위기의 시간'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 편의 텍스트의 의미가 다른 텍스트와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그 의미를 다른 텍스트와의 연결 속에서 찾아내려는 것을 '상호 텍스트적' 탐구라 부르거니와 이재선의 해석은 적절하고도 새로운 것이라 하겠다. 필자 또한 '13'이라는 숫자를 '제8요일'이나 '25시', '13월'처럼 인간의 시간이 끝난, 코스모스(질서)가 붕괴하고 절대적 카오스(혼란) 속으로 내던져진 '위기의 어떤 상태'로 본다.
까마귀의 눈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도로를 달리는 아해들의 모습은 달려도 그만, 달리지 않아도 그만일 것이고 골목은 막다른 골목이어도 그만, 뚫린 골목이어도 그만일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아이러니컬한 허무주의를 읽어 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오감도 시제1호」는 1930년대적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 안에서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는 시대인들의 불안과 위기를 아이러니적 구조와 띄어쓰기조차 없이 빙빙 도는 것 같은 현기증 나는 속도감의 언어로 그려 낸 1930년대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2006년, 지금 우리 시대의 '조감도', 또는 '오감도'가 되기도 한다. 고전이란 그런 것이다. 시간의 한계 속에 구속되어 버리는 작품이라면 고전이 되지 못한다. 1930년대 경성이라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이 시는 어느 시대에나 공감할 수 있는 '인간 실존의 조감도'가 될 수 있기에 한국 최고의 현대 시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속에 내몰려 시작이 어디인지,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생존의 막다른 골목을 쓰러질 때까지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아해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시대인의 초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까마귀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 같은 불길한 기상도는 바로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참담한 우울의 풍경이라고 하겠다. 「날개」의 마지막 구절을 빌려 이렇게 외쳐 보고 싶은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마음은 아닐 것이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득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4. 「거울」, 왜 나는 둘일 수밖에 없는가
이상은 사물 '거울'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거울」, 「오감도 시제15호」, 「명경」과 같은 '거울'에 관한 시편을 세 편이나 남기고 있다. 또한 소설 「종생기」에는 "거울을 향하여 면도질을 한다. 잘못해서 나는 생채기를 내인다. 나는 골을 벌컥 내인다. 그러나 와글와글 들끓는 여러 나와 나는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그들은 제각기 베스트를 다하여 제 자신만을 변호하기 때문에 나는 좀처럼 범인을 찾아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렇게 이상의 작품 속에서 '나'의 모습은 군웅할거의 전쟁, 와글와글 들끓는 여러 개의 나와 나의 충돌로 불안정한 분열을 보인다. 이상은 '나'라는 것이 투명한 일인칭 대명사가 아니고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며 '거울'로 인해 분열되고 하나로 화합될 수 없는 여러 개의 존재로 인식한다. 그렇게 '거울'은 자기 확인의 도구이자 자기 분열의 도구이기도 한 양면성을 가진 사물로서 이상의 텍스트들 안에 형상화되어 있다. '거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결코 '나'는 하나일 수가 없으며 적어도 '둘 이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비극!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으로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 내게 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는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운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거울」
시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의 음악성이나 구조 등 형식적인 특징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첫 느낌'이 주제나 내용 파악보다도 훨씬 더 시를 시답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는 다른 장르의 언어와 달라서 음악성과 아울러 어느 정도의 무의미를 허용하기 때문에 의미 파악이 시에서는 전부가 될 수 없다. 시적 언어에서 의미는 무의미와 아주 가까이 있으며, 그 말은 시적 언어가 가지는 의미란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다의미(多意味)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감지해야 하는 것은 그 형식이며 형식에 따라서 의미는 한 개일 수도 있고 여러 개가 될 수도 있다.
이 시는 이상의 시 중에서 퍽 특이하게도 전체적인 구조가 통일성이 있으며 형태의 질서를 보여 준다. 전체적으로 '-오', '-소'의 각운(전체 시행 13행 중 11행)으로 인해 음악성이 풍부하고도 형태적 측면에서 안정된 질서 감각을 느끼게 해 준다. 비논리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의 비약적 전개를 보여 주고 있는 이상 시로서는 드물게도 기(1~3연)-승(4연)-전(5연)-결(6연)이라는 논리적인 전개까지도 느끼게 한다.
1연은 거울 속 세계의 성질에 대해 진술한다. 거울은 하나의 단순한 사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거울 속 세계는 '소리가 없는', 즉 나와의 청각적 접촉이 단절되어 있는 하나의 '공간'인 것이다. '소리 없는 세상'이란 것은 소리로 넘쳐 나는 인간의 세상과는 반대인, 고유성을 지닌 특수한 세상이라는 것이다. '나'나 '외부적 세계'에 기생적으로 존재하는 종속적인 세계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유아독존의 세계라는 말이 된다.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거울은 나를 비춰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우리는 통상적으로 생각하는데 '거울'이 나보다도 먼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니! 2연에서 거울 속에도 나에게는 귀가 있는데, 딱한 귀가 두 개나 있는데 나와 거울의 청각적 접촉은 불가능하다. 왜?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으니까. 이 시의 주인공은 '나'가 아니고 '거울'이다. 거울 속의 세계에 대한 진술이 1연으로 가장 먼저 나왔으니까. 그리고 그 거울의 성질은 '소리가 없는' 부정적 성질이다. 그래서 이 시는 거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먼저 드러낸다.
그러한 거울의 부정적 인식은 3연에서도 '나'와 거울 속의 나의 신체적 접촉 단절('악수할 줄 모르는')이라는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진다. 거울이란 모든 사물을 거꾸로 반영하는 전도적 성질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거울 속의 모든 '나'는 '왼손잡이'가 된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거울 속의 내가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거울의 부정적 성질, 거울 밖의 나를 거울 속의 나로부터 소외시키는 그 단절을 다시 강조한다. 1연, 2연이 청각적 단절이었다면 3연은 촉각적, 근육 운동적 감각의 단절을 강조한다. 거울의 소외다.
4연은 논리적 전개상 승(承)의 부분이다. 1, 2, 3연에서 문제를 제기했던 거울의 소외적 성격을 4연에서 이어받아 더 구체적으로 종합한다. 나는 거울 때문에 나를 만져 보지 못하지만(촉각적 단절) 거울이 아니었다면 나를 만나 볼 수 있었겠느냐는(시각적 접촉) 3연에서 거울은 1, 2연에서처럼 소외라는 부정적 속성을 지닌 것만이 아닌, 시각적 접촉이라는 긍정적 속성을 지닌 것으로 재발견된다. 그런 거울의 이중적, 복합적 성격은 4연에서 복문(複文)으로 형상화된다. '촉각적 접촉+시각적 통합성'이 복문적 구성을 통해 등가적으로 병치된다. 4연에서도 어디까지나 '거울'이 능동적 주체성을 가지게 되고 나는 소극적 종속적인 위치에 머무르게 된다. "거울때문에", "거울아니었던들"이라는 말이 문장 앞에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거울이 주인이고 '나'는 타자다.
5연은 논리적으로 전(轉)의 부분에 속한다. 그동안 거울의 성질과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에 대해 서술했던 시각을 전환시켜 '거울'의 나에 대한 주도적 전제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에서 '내(인간)가 거울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거울이 나(인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비극적 인식이 토로된다.
"잘은모르지만외로운사업에골몰할께요"는 거울 속의 나의 '나'에 대한 적대적, 공격적인 관계까지도 암시한다. "외로된(외로운)"은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외로된'에서 '외로'를 '왼쪽으로', '삐뚤어지게'라는 부사로 읽고 '된'을 동사어간으로 본다면 나에 대하여 잘못된 사업, 음모 같은 것을 꾸미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외'를 명사어근에 붙어 단지 하나뿐인 것(외기러기, 외아들 등)을 뜻하는 접두사로 본다면 '홀로된', '홀로 하는', '혼자만의 사업'으로 읽을 수 있다.
아무튼 나에게 종속적이어야 할 나의 영상에 불과한 '거울 속의 나'가 내가 거울 앞에 없을 때도 나를 가지고 있고 자기만의 홀로된, 독자적인 사업에 열심일 것이라는 이야기는 거울이 이제 보통 거울이 아니고 나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주인이요 초현실적 권능자요 지배자라는 것을 보여 준다.
6연은 이제까지의 모든 전개를 종합적으로 끝맺음하는 결(結)의 부분이다. 이제 거울 속의 나와 나의 관계는 3단계로 요약된다. 나와 거울 속의 나의 관계는 '반대'이기도 하고 '유사'하기도 한데 촉각적으로 단절되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섭섭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거울 때문에' 우리는 결코 하나가 아닌 둘의 존재로 분리되는 것이고 그러나 '거울 아니었던들' 나를 만나 볼 수도 없으니 거울은 고맙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무서운 모순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거울이 보여 주는 시각적 반영체로서의 나, 이미지로서의 나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거울이라는 반영체 때문에 내가 나를 만날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시각적 반영체로서의 나를 빼고는 나의 다른 전부를 상실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시 「거울」은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다.
거울은 타자의 은유다. 사실 우리는 나의 존재를 타자에 비추어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족, 친구, 연인, 동료와 같은 타자에게 나를 확인해 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타자로서의 그들은 나를 나에게서 소외시키고 오히려 내가 나를 만나지 못하도록 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하지 않는가.
「거울」은 무서울 정도로 정직하게 인간 실존의 비극성을 그린 그렇게 슬픈 시이다. 타자에게서 나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식이 생성된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일 수가 없고 적어도 둘 이상의 나가 되어야 하는 분열을 필연적으로 앓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의 말대로, 사는 것은 질병이요 위독인지도 모른다.
5.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이상 문학이 난해하다거나 미친 사람의 잠꼬대 같다거나 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수의 독자들을 매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시대의 문화에서 어떤 시인은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또 다른 시인들은 비난, 소외를 받는데 그것은 독자들이 '동질성의 미학', '이질성의 미학'이라는 입장에서 작품을 수용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한다. 이상과 같은 경우 전통적인 서정시의 규범 미학에서 벗어나는 미적 충격을 독자에게 주었기 때문에 동질성의 미학에서는 수용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이질성의 미학에서는 매혹이었을 것이다. 이상 문학의 난해성은 수수께끼 같은 삶과 세계의 비밀을 복합적으로 함축한 암호 문자와 같기 때문에 지적 호기심이 강한 독자들에게는 매혹과 도전이 된다.
2) 이상의 시에는 숫자 기호나 기하학적 도형, 숫자 표, 과도한 한자 사용, 프랑스어·영어 사용, 수술실의 해부 장면, 물리학적 공식, 순열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등 비(非)시적인 기호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문학적으로 어떤 시적 효과를 내는지, 전문 학자들은 그것들을 다 해석할 수 있을까?
숫자 기호나 숫자 표, 기하학적 도형이나 외래어 사용 등은 모더니즘 문학에서 서정시적 전통과 규범에 미적 충격을 가하기 위해 자주 쓰는 문학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오감도 시제4호」처럼 뒤집혀진 숫자 표가 배열되고 진단서 형식으로 씌어진 시의 경우 그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이어령, 임종국, 김윤식, 송기숙, 김종은, 이승훈, 김승희 등의 이상 연구자들이 각기 자기 나름의 방법론과 시각으로 해석을 하고자 노력을 하여 상당히 많은 성과가 축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전공이 건축이었고 고등수학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상은 「오감도 시제4호」에서 본다면 숫자를 합리주의적 세계관의 데카르트적 기호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고, 거울에 비쳐 뒤집혀진 숫자판은 그러한 데카르트적 가치 체계의 전도(임종국),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비합리주의적 질병의 세계(김승희)로 해석되기도 한다.
3) 이상을 1930년대 '박제가 되어 버린' 식민지 지식인의 전형으로 읽기도 하고 서구적 모더니즘 취향에 무분별하게 빠져들어 전통적 형식 파괴, 무책임한 댄디, 퇴폐와 허무주의의 병균, 위트와 패러독스를 즐긴 보헤미안 타입의 반(反)영웅이라는 시각으로 비판하기도 하는데 '인간 이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상은 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고전에 해박하고 고등수학과 물리학을 정통으로 꿰고 있으며 초현실주의, 미래파, 입체파, 다다이즘 등의 세계 문예사조를 꿰뚫어볼 수 있었던 지적인 시인이고 소설 「날개」에서 보여 준 것처럼 식민지 조국과 일본 제국주의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는 현실에 대한 비판력을 명증하게 갖춘 문인이자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시대와 현실을 외면한 무분별한 서구 취향의 모더니스트라기보다는 식민지 시대와 현실 상황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그것을 '반어'적으로 비판한 천재 예술가다. 자기의 모든 것이 상실된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반어는 직설법보다 더 깊은 고뇌를 동반하는 언어다. 그런데 이상은 자기 스스로 한 가지 동일한 정체성으로 고정되는 것을 싫어했는데 김해경이라는 이름을 이상이라 개명했다거나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異常, 異狀, 異相, 以上이라는 동음이의어를 가지고 언어유희를 한다거나, 이상 외에도 삽화를 그릴 때는 보산, 비구, 하융 등의 필명을 사용한다든가 하는 개명 행위가 그것을 보여 준다. 자기를 규정하는 한 가지 이름으로부터의 자유.
<자료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김승희 / 재편집: 오솔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