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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죽령-도솔봉-묘적봉-묘적령
0. 위치 : 영주시 풍기읍. 봉현면, 예천군 상리면, 문경시 동로면, 단양군 대강면 0. 코스 : 죽령-삼형제봉-도솔봉-묘적봉-묘적령-두산동 (하행)
새벽 2시50분 죽령휴게소 풍기 쪽에서 들머리다. 동짓달 초닷새 희미한 달빛은 오간데 없고 희뿌연 하늘에 눈발만이 제멋에 휘날린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눈밭을 가야한다. 속리산 구간에서 시종 굵은 빗줄기에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가며 한여름 추위에 오싹거렸던 때가 뜬금없이 스쳐간다. 머리에는 주먹만큼 한 등을 하나씩 달고 발에는 묵직한 아이젠에 털모자와 점퍼로 중무장을 하니 몸놀림이 아무래도 둔할 수밖에 없다. 비로봉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도솔봉까지는 6km 거리다. 처음부터 오름길로 눈을 맞으며 그냥 하염없이 오르고 올라야 한다. 우의를 걸치기도 그렇고 그냥 가노라니 배낭이며 옷자락에 눈이 달라붙고 바지 끝자락과 장갑에는 더덕더덕 얼음조각이 맺혔다. 가끔 날카로운 바람이 턱을 훑고 간다. 랜턴불빛에 의지하다 보니 간혹 늘어뜨린 나뭇가지를 들이받는다.
눈밭에 쉴 틈도 없이 끊임없이 오르다보니 겉과는 달리 몸 안에서는 후끈후끈 열기에 감싸인다. 어둠 속 1230m 팻말에 이제 도솔봉일까 싶은데 아마 1288봉인 게다. 오르락내리락 돌고 돌아 1260m 팻말에 이제 다 왔나 싶은데 아마 삼형제봉인 게다. 다시 오르락내리락 돌고 돌아 1270m 팻말이다. 이번엔 틀림이 없겠지 싶은데 겨우 턱밑에 다다랐다. 험한 바위 틈새를 기어오른다. 정상의 텃세라도 하려는 듯 바람은 더 앙앙거린다. 갑자기 길이 없어졌다. 둘레둘레 살펴보다 갑자기 곤두박질치듯 급경사를 내려서 왼쪽으로 돌아간다. 비로소 헬기장처럼 평평하니 보다 넉넉한 품에 도솔봉이다. 거참, 어둠속에 표지석(1314m)은 쏟아지는 눈을 아랑곳 않고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앉아있지를 않는가. 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3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악천후에 아주 힘겹게 찾아왔지만 더 이상 볼 것도 보이는 것도 없으니 그냥 눈도장만을 찍는다.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저 허공 너머 북쪽에 비로봉이 있을 터이고 좌측에 삼형제봉(1261m)과 우측에 묘적봉(1148m)을 근엄하게 거느리고 소백산맥의 중심을 이루며 백두대간 길에 우뚝 솟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안에 내가 자랑스럽게 서있는 것이다. 소백산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으로 그 냄새가 은연중 폴폴 풍겨난다. 우선 산봉우리만 보더라도 비로봉, 연화봉, 제1연화봉, 제2연화봉, 도솔봉 하는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도솔봉(兜率峰)의 도솔이란 도솔천에서 온 말이지 싶다. 즉 욕계육천(欲界六天) 가운데 네 번째 하늘로 사람들의 욕망을 이루어 주는 외원(外院)과 미륵보살의 정토인 내원(內院)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으니 그 이름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곳이란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지 싶다. 그토록 엄숙한 의미가 담겨있는 봉우리 정상에서 어둠 속에 펑펑 쏟아지는 눈이나 실컷 맞으며 장님 코끼리 뒷다리 만지듯 하다가 마음만 놓고 간다.
도솔봉은 봄이면 철쭉꽃이 산을 물들이고 겨울에는 설경이 그만인데다 가을철 억새에 정상의 바위지대는 가히 일품으로 비로봉에 버금간다는데 지금은 아니다.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그저 눈만 펄펄 휘날리고 바람만 바쁘게 제 갈 길을 간다. 어렵사리 올랐지만 어쩌랴. 길목에 철쭉나무가 눈을 뒤집어쓰고 눈꽃을 피우고 있다. 나무계단을 조심스레 타고 내려가 능선을 간다. 이만하면 나름대로 겨울 설경은 본 셈이 아니냐. 밤길을 4시간쯤 걷고 아침 7시쯤 되니 여명이 밝아 온다. 나무야, 추위 속에 멀건이 서서 멀뚱멀뚱 뭐하니? 울창했던 숲을 그리워 하니. 꼬까옷 곱게 입었다가 벗어서 아쉬워하니. 지난 한 해를 되새김질 하니. 모두 부질없는 짓으로 미련일랑 탁탁 버리고 잊으려무나. 머지않아 잎 피우고 꽃 피워야 하지 않니. 네 몸 어딘가에 곱게 그리고 굳세게 담았다가 봄날에 당당하게 내놓아야 하리니 너는 임산부의 마음가짐을 잊지 마려무나.
나무야, 네가 드러낸 몸통에서 건강미 넘치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을 보는 것 같다. 꿋꿋하게 겨울을 이겨내고 봄날 해말간 모습으로 다시 드러내는 너를 보면서 자못 감탄을 자아냈지. 그런데 나 지난밤 너희들 곁에서 오락가락 해보았지만 쉽지가 않더구나. 몇 번이고 그냥 돌아서고 싶었단다. 그래도 내친걸음이기에 예까지 와서 꼼짝 않고 서있는 너희에게서 은은한 숨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혹독한 추위만큼 봄날도 가까이에 있단다. 묘적령을 지난다. 오른쪽으로 탈출하면 대강면 사동리로 간다. 1015봉에 올라섰다. 눈밭에 발자국만 보고 따라간다. 왼쪽으로 가다보니 능선을 허물고 도로를 개설하고 있다. 고항치로 터널을 내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가파르게 올라 옥녀봉(885m)이다. 나무를 베어내고 돌탑까지 쌓아 조망하기에 아주 좋다. 봉우리 몇 개를 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올라온다. 반가움에 길을 물어보아야지.
낯이 익은 얼굴들이다. 앞서 갔던 우리 팀이다. 길이 어긋났다며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한단다. 그만 대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조금조금 하다가 고항치까지 되돌아왔다. 맥이 탁 풀린다. 눈발은 약이라도 올리듯 더 휘몰아친다. 아마 2시간가량은 방황을 한 셈이다. 묘적령삼거리에서 선두가 오른쪽 길인 것을 눈보라에 그만 왼쪽으로 접어든 것이 단초가 되었다. 순간의 착각이 그만 일을 그르쳤다. 악천후에 지칠 대로 지쳐서 끝내는 이쯤에서 산행을 접었다. 고항치에서 예정에 없던 봉현면 두산동으로 하산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 난 눈길이다. 얼었다 녹았다 눈에 덮여 유리알이다. 트럭 한 대가 비실비실 내려온다. 세우고 싶으나 너무 미끄러워 위험하지 싶다. 터덜터덜 내려가는 발길들이 좀은 힘이 없어 보인다. 잠을 못자고 눈길 야간산행에다 생각지 않은 샛길로 빠지고 지쳐 당초 목적지가 빗나갔지만 다음을 예약한다.
*. 2007년 12월 14일~15일 무박 9시간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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