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구정회
원자력이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에서 탈원전 정책이라는 큰 시련을 겪으면서 원자력계는 물론 국내 산업계가 크게 위축되었다. 원자력계 종사자들은 원자력 기술의 국산화를 넘어 우리나라를 원전 수출국으로 도약시킨 역군이라는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과거 원자력이 추진 과정에서 주민들과의 대화가 부족했고, 2011년 후쿠시마 사태로 원자력의 안전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커진 것도 사실이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런 틈새를 이용하여 과장된 사실 왜곡과 불안감을 조성하여 탈원전 정책의 기반을 제공했다.
이제는 원자력계가 마음을 추스르고, 이런 환경을 극복하며, 국민 신뢰를 되찾고, 국가 발전에 앞장서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원자력의 가장 큰 숙제인 사용후핵연료의 누적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최근 기후 변화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탄소중립과 원자력발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그런데 원자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용후핵연료 관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자력발전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자력을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용후핵연료와 방사성폐기물의 안전하고도 효율적인 관리가 필수적이다. 우리는 2023년 현재 22기의 가압 경수로와 3기의 중수로 등 총 25기의 원전을 가동 중이며, 이들 원전에서 2023년 3월 기준 521,828 다발(약 18,559 톤)의 사용후핵연료가 발생하여 각 원전 부지에서 임시 저장 중이다.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원전 내에 보관하는 사용후핵연료 저장조의 포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사용후핵연료 저장과 처분의 주목적은 원전의 정상적 운전을 지원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50~60년 정도 임시저장으로 원전 저장조의 포화 문제를 해결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최종처분을 위한 준비를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용후핵연료 관리는 운반, 저장, 처리 및 처분 등을 들 수 있다. 운반 분야는 1987년의 첫 수송과 ‘90년대 초중반 고리원전에서 약 6년간 소내 수송을 성공리에 수행한 이래, 국내에는 이미 충분한 경험 축적과 상용화가 이루어져 있다. 각종 운반 용기 또한 국내 중공업체들이 많은 제작 경험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좋은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사용후핵연료의 저장은 중앙집중식 중간 저장시설 또는 발전소 내부나 인근 부지에 운반·저장 겸용 용기에 담아 저장하거나, 맥스터 방식과 같이 사용후핵연료를 담은 캐니스터를 콘크리트 구조물 내에 저장하는 등의 다양한 옵션이 있다. 중앙집중식 중간 저장시설의 경우 부지를 확보해야 하는 문제가 있지만, 저장 문제 또한 이미 충분한 기술개발과 상용화가 이뤄져 있고, 원전 부지 내 임시 저장이라는 방식이 있기에 사용후핵연료 처분장이 확보되기 전까지의 사용후핵연료의 관리를 담당할 수 있다. 월성원전의 경우 이미 콘크리트 사일로, 맥스터 등의 임시 저장시설이 가동 중이다. 저장 분야 또한 기술 확보는 물론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용후핵연료 최종 처분 방안에 대해서는 ‘직접 처분’과 ‘처리 후 처분’의 두 가지의 옵션이 있다. 원전을 운영 중인 31개 나라 중에서 핀란드, 스웨덴을 비롯한 10개국은 ‘직접 처분’을 정책으로 정하고 필요한 기술과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습식 재처리를 하는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인도, 일본, 영국은 사용후핵연료로부터 재활용할 수 있는 성분을 분리하여, 심지층에 처분하는 폐기물의 양을 줄이는 ‘재처리 후 처분’을 정책으로 정하고 필요한 기술개발과 계획 수립을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나머지 원전 운영국들이 아직 자국의 환경에 가장 적합한 사용후핵연료 관리 기술을 결정하지 않고 정책 결정을 유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업부에서 제2차 고준위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에 따라 사용후핵연료의 직접 처분을 기본으로 관련 기술개발과 부지확보 등을 준비하고 있다. 직접 처분은 사용후핵연료를 처분 용기에 담아 지하 500미터 정도의 화강암반의 심지층 동굴에 넣고 인공방벽을 설치해 인간 생활 환경과 영구히 격리하는 것이다. 직접 처분은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된 기술로서 핀란드에서는 이미 처분장 건설이 착수된 상태이고, 국내에선 처분과 관련된 기술개발을 수행하면서 부지확보를 준비하고 있다. 처분 분야의 가장 큰 숙제는 지하 처분 연구시설과 처분장 부지를 확보하는 일로, 처분 자체가 기술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게 아니다. 기술적으로는 완벽하게 안전하더라도 지역주민과 국민이 믿고, 협조할 수 있도록 소통해야만 한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와의 이해와 협조를 넘어 상생의 해법을 찾아야 하는 매우 섬세하고, 복합적인 문제이다.
사용후핵연료의 성분을 살펴보면 습식 재처리를 하는 국가들이 ‘재처리 후 처분’을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으로 결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10년 냉각된 경수로 사용후 핵연료를 기준으로 하면, 질량의 약 93%를 차지하는 우라늄이 방사능으로는 사용후핵연료 전체의 0.001% 미만에 불과하다. 반면에 질량으로는 각각 1.4%와 0.53% 정도에 불과한 초우라늄원소와 세슘/스트론튬이 사용후 핵연료 방사능과 열 발생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초우라늄원소는 고속원자로에서 핵연료로 재활용하면 방사능 관리기간이 짧은 물질로 핵종 변환이 가능하고, 반감기가 30년 정도인 세슘/스트론튬은 300년만 보관하면 방사능과 열 발생량이 1/1,000 이하로 감소한다. 따라서 사용후핵연료를 특성대로 분리하여 방사능이 오래 가는 물질은 발전도 하면서 반감기가 짧은 핵종으로 변환시켜, 환경 부담이 적은 물질만 처분장에 보내 미래세대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사용후핵연료 처리기술이 지향하는 바이다.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사용후핵연료 처리기술로 파이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파이로는 고온 용융염 내에서 전기화학 반응을 이용, 사용후핵연료에서 우라늄, 초우라늄원소, 세슘/스트론튬 등을 분리해 내는 기술로, 순수한 플루토늄이 분리되지 않아 습식 재처리에 비해 핵확산 저항성이 높은 장점이 있다. 파이로는 사용후 핵연료를 대상으로 하는 민감 기술이지만, 2011년부터 10년간 한미 공동연구를 통해 기술적 타당성, 경제적 실효성, 핵 비확산 수용성에 대한 평가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파이로는 공학 규모의 사용후핵연료 실험까지 수행 했지만, 국가의 사용후핵연료 처리기술로 적용하려면 핫셀 시설과 장비구축을 통한 실용화 검증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파이로 국내 실증을 위해서는 미국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파이로에 대한 투자가 직접 처분의 일정을 늦추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파이로 처리 후 처분을 해도 처분장 확보에 들어가는 모든 기술과 부지는 그대로 쓰이고, 처분 내용물만 바뀌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직접 처분을 준비하는 모든 일에 차질을 빚을 일이 없다.
탈원전 정국을 거치며 원자력 생태계가 너무 많이 망가졌다. 가장 큰 문제는 인허가받기가 너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우수한 기술과 산업 인프라를 갖고 있음에도 인허가받기 어려워 국내 개발을 포기하고 외국에서 승인받은 제품을 수입하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원자력계는 워낙 논란이 많다 보니 새로운 기술의 적용이 가장 어려운 분야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시스템도 기검증된 게 아니면 도입이 너무 어렵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기술 선도국이 될 수 없게 하는 것이 탈원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인가를 묻고 싶다. 이 부분의 정상화가 너무나 시급하고 중요하다.
사용후핵연료 관리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은 원전의 임박한 저장용량 포화 문제를 해결하여 정상운전을 최우선으로 지원하며, 처분을 위해 현재 준비해야 할 최적 방안을 조기에 확보하면서, 더 나은 해법을 찾는 노력도 함께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적용할 기술을 완벽하게 검증하고, 국민이 믿고, 수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 사용후핵연료 처분장을 확보하는 데는 기술적 안전성 외에도 주민 수용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한층 더 강화해야만 한다. 지난해 이러한 기술과 부지확보에 관한 신뢰를 담보할 수 있게 특별법안이 발의되었으나, 아직도 통과되지 않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계속 미뤄서도 안 되고,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 기계공학 박사
(전)한국원자력연구원 핵주기환경연구소장
(전)한국원자력연구원 핵주기전략개발부장
(전)한국원자력연구원 핵비확산시스템연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