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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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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스크랩 좋은 시 나쁜 시
푸름/김선옥 추천 0 조회 32 14.06.16 23: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좋은 시 나쁜 시 - 아슬아슬한 경계

최 영 철

 

 

비인기 종목이 되어 버린 시에 아직도 목매다는 지망생들이 있다는 게 고맙다. 시의 고매한 위의가 훼손되고 있는 문단 안팎의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바라보는 눈길 또한 없지 않다. 그러나 재미난 것이 수도 없이 널린 세상에서 시 같은 걸 써보겠다고 자청한 분들이 있으니 우선 고맙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는 분들의 아이 돌잔치에 다니면서 최근 느낀 게 있다. 잔칫상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늘어놓고 아이가 무엇을 집어 드느냐를 가지고 앞으로의 취향과 진로를 가늠해보는 돌잡이 그건 사실 아이의 놀이가 아닌 어른들의 놀이일 것이지만 말이다. 예전에는 가장 먼저 집어 들었으면 하는 게 책이었는데 요즘은 되도록 피해갔으면 하는 게 책이 되어 있다. 책 읽고 공부하는 게 신분상승과 출세의 방편이었던 시절은 아주 먼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이의 손이 그쪽으로 향할라치면 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진다. 그래도, 그 비난과 야유 속에서도, 시험과 힐난 속에서도 시인은 계속 태어날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시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시라면 그것의 귀천을 따지기가 뭣하다. 다 좋은 시, 다 좋은 시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전보다는 못하지만 전국 일간지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 공모에 투고하는 시인 지망생들을 합산하면 어림계산으로도 이만명은 넘을 것 같다. 그 정도 수치라면 혁명은 어려워도 현상유지나 계승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호황은 아니라도 시 산업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시의 위기를 거론하는 분들의 속내에는 시에 대한 과도한 경외감이 있을 것이지만 시는 예시당초 소수에 의해 생성되고 유지된 적빈무의의 장르였다. 굳이 시의 위기를 논해야 한다면 다산과 과식으로 뒤뚱거리는 시의 법람부터 지적해야 할 것이다.

지금 시는 분명 어떤 과체중 상태이다. 무엇인가를 잔뜩 집어먹어 터질듯한 배를 부여잡고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다.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고,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이 말하려고 하는 이 과적 상태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이 시의 위기일 것이다. 시는 이해하고 공감하는 차원이 아닌 눈이 환해지는 새로운 발견과 절실한 감동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장르다. 빈둥빈둥 엎드린 채 펴든 시 한편, 나른한 안락의자에서 포만감에 젖어 무심코 펼쳐든 시 한 편에 눈이 번쩍 뜨이고, 느닷없이 누가 뒤통수를 내리친 듯 가슴이 뜨끔하고, 살을 에는 얼음장과 들끓는 도가니에 내던져진 불편한 상황을 체험하게 한다.

나 역시 그 언저리 상황도 만들지 못하고 말겠지만 그에 가까워지려는 게 시인된 자의 당연한 욕망일 것이다. 갈수록 침침해지는 눈을 비비며 하루 종일 그런 시 한 편을 만나려고 나는 오늘도 수북이 쌓인 시를 잃고 또 읽었지만 원하는 것을 찾지는 못했다. 나는 결국 그런 시 한 편을 만나지도, 그에 가까운 시 한 편을 쓰지도 못하고, 이 어려운 보물찾기의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높다. 왜 쓰는지, 무엇을 쓰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싱겁고 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하다. 이유 없이 축축하기만 하다. 나의 쓰는 행위 역시 그만그만한 의무방어전을 치르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세상이 야기하는 쉼 없는 파문을 시의적절하게 포착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만그만하게 훈련된 시가 대부분이다.

12월, 절박한 심정으로 천여 편의 신춘문예 응모작들을 읽어 온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거기서도 그 한 편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본심과 최종심에 남겨 논의해야 할 작품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궁여지책으로 작품성향, 지역과 남녀, 세대를 안배하여 몇 편으로 압축해보지만 이것이다 싶은 게 없다. 외형은 그럴싸하지만 속씨가 없다. 진열장의 견본 모델처럼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시들이다. 비슷한 향수 냄새가 난다. 언제부터 시에서 이렇게 똑같은 향기가 나기 시작했을까. 피비린내와 땀 냄새, 역겨운 토사물, 시궁창 냄새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은 더 그런 냄새들로 넘쳐나고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작년에 투고한 것에다가 새로 나온 향수 몇 방울을 더 뿌려 투고한 것도 있다. 하루 수십 편씩이라도, 미친 듯 걸신들린 듯 써내야 하는 문청시기에 출세작만을 겨냥하고 있다.

그런 한탕주의로 무엇을 추수하려는지 묻고 싶다. 한 편의 성공작을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강좌를 기웃거리는 게 통과의례처럼 행해지던 시절도 있었다. 데뷔작이 출세작이 되고 대표작이 되고 마지막 작품이 되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무슨 목표 같은 것이 있었다면, 그래서 그 목표가 달성되었다면, 시는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그 이상의 목표가 부여되지 않는 한 시는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쓰는 자나 읽는 자나, 그 시로 하여 획득될 부산물이 없다면 시의 의미는 소멸되고 말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 목표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시의 목표는 멀고 불투명할수록 좋다. 등단이 목표라면, 대중적 지지가 목표라면, 돈과 명예가 목표라면, 그것은 금방 소멸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성취되거나, 아예 성취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보다 먼 영원을 향한 지향, 내 것을 버리고, 내 것이 아닌 타자의 열망을 대신 읊조려주는 것이 진정한 시의 본령일 수도 있으리라.

시가 쓰여지는 자리는 아슬아슬한 경계지점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나를 억누르는 불문율 같은 것이다. 그 절묘한 상황에 가닿거나 그 절묘한 상황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데 나는 지금 어서 써버려야 한다는 조급함에 내몰린다.

지금 쓰지 않으면 자취도 없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이 불안감이 문제다. 나와 비슷한 조루증의 시들이 너무 많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진퇴양난, 아슬아슬한 경계지점에서 피어난 시가 그래서 아름답다. 너무 쉽거나 어려운 시, 너무 길거나 짧은 시, 너무 유식하거나 무식한 시, 너무 그립거나 그립지 않은 시, 너무 희망이거나 절망인 시, 너무 메마르거나 축축한 시, 병이 되고야 말 과도한 자의식과 안하무인의 자만 사이, 자폐 자학 자책 자조 자위 자긍 자찬 같은 것들, 스스로를 향한 이 모든 자문자답이 과도하거나 전무한 시……. 이를테면 그런 시들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이탈한 시들이다. 편중된 시선, 과도한 신념, 과도한 회의는 부드럽지가 않다. 탄력이 없다. 서둘러 어느 한쪽에 몸을 빠뜨리고 희희낙락하고 있는 시는 나쁘다. 절제하고 안배하는 팽팽한 지점이 시가 도달해야 할 지점일 것이다.

 

그 어느 한편으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몸을 버티는 촌각의 시간이 만들어낸 부산물. 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지푸라기에서부터 하늘의 별까지 다 끌어안는 것. 적은 재료로 큰 효과를 얻는 것, 그것으로 하여 세상이 갑자기 막막해지는 것, 세상이 갑자기 눈부시도록 아름다워지는 것, 세상이 갑자기 허무맹랑해 보이는 것.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은 것. 그런 게 좋은 시가 아닐까.

두발 자전거의 균형은 진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때 비로소 유지된다. 멈추고 쉬기를 밥 먹듯이 하는 자전거가 많다. 환호하는 관중이 없으면 슬그머니 자전거를 멈추고 딴전을 피운다. 가던 길을 돌아 다른 길을 기웃거린다.

거기에도 관중이 없는지 살핀다. 웃고 떠드는 관중이 있는 쪽으로 슬쩍 핸들을 돌린다. 별 거 아니라는 듯 그 길을 또 금방 빠져 나온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는지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자전거 후미를 또 다시 슬금슬금 따라간다.

시인은 제 몸을 스스로 수레바퀴에 걸어버린 자이다. 갈 길이 빨라지고 굴곡이 심할수록 몸이 찢어지는 아픔은 극렬해질 것이다. 좋은 시, 나쁜 시는 누군가의 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결정된다. 생이 나에게 짐 지운 이 고역을 비켜가지 않고, 흥얼흥얼 콧노래라도 부르며 동행하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좋은 시인이다. 좋은 시를 살아내고 있는 시인이다. 앞으로도 그것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대의 시는 이미 좋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좋은 시 나쁜 시」 2008.11.08 15:40 최영철 시인의 블로그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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