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철학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 / 심리 도덕주의란?
유토피아의 어원적인 뜻이 ‘없는(U)’ ‘장소(Topos)’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의미이다. 그래서 ‘실제로 있을 수 없지만, 이상적인 장소’가 곧 유토피아이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은 현실에 없지만 ‘낙원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낙원’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있을 수도 없는 이러한 이상사회에 대해서 왜 철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르네상스 시대 이상사회에 대해 말한 철학자는 모어 이외에도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 그리고 베이컨의 「신-아틀란티스」가 있다. 아마도 철학자들이 존재할 수 없는 이상사회를 말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첫째는 이 세상이 너무나 타락하였고, 너무나 혼란스럽기 때문에, 이러한 현 세상과는 대척점에 있는 ‘이상사회’를 통해 현 세태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두 번째는 실제로 있을 수 있는 미래의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가 사회비판적 기능을 담당한다면, 두 번째는 현 사회가 지향해야할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상사회를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도덕적인 욕구에 의해서이다. 인간은 정신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참되지 않는 것’ ‘거짓된 것’ ‘허상인 것’ 등에 대해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인간의 정신은 ‘참된 것’과 ‘진실된 것’ 즉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사회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진지하게 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된다. 현실이 너무나 속되고, 거짓되고, 정의롭지 않고, 허상이기에 이러한 것을 비판하고 보다 참된 세상, 보다 인간적인 세상을 염원하고자 이상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토피아의 ‘유(U)’는 ‘좋은’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좋은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인간의 의식뿐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고, 눈치채지 못하는 자신만의 기억과 자신만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이는 자기 기억이라는 형식으로 내재하고 있으며, 베르그송에 의하면 자기 삶에서 의미를 가지고 경험되거나 체험된 것은 무엇이나 ‘정신적인(비-질료적인) 형식’으로 내재해 있고, 이러한 기억의 총채가 곧 의식, 자아의식이다. 고중세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곧 영혼의 내용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러한 기억의 총체인 영혼의 내용은 비-물질적인 것이어서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자기의식의 총체를 ‘내면세계’라고 불렀다. 나의 내면세계는 나의 바깥의 외부세계와 구별되는 다른 하나의 세계이다. 종교철학자 앙리 뒤메리는 “정신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때가 되면 자신의 ‘내면세계’를 가지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 내면세계는 오직 자신이 만들어가고 자신이 주인인 그러한 세계이다. 이 세계가 하나의 드라마라고 한다면 이 드라마에서는 주인공도 자신이고, 작가도 자신이고 감독도 자신이다. 그래서 만일 이상적인 세계를 자기 내면세계에서 만들어내고자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를 방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최소한 논리적으로 유토피아는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종교, 참된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내면세계로서의 유토피아는 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스님도, 진정한 수녀님, 진정한 신앙인은 모두 자신 속에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유토피아에 대해 문학적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 천국과 지옥의 ‘알레고리’라곻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단테의 『신곡』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천국과 지상 영혼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데, 인간의 영혼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의 섭리에 의해 각자 자신만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천국편 8곡), 따라서 사람이 신을 알게 될 때, 자기 운명의 실마리를 알게 된다(9곡)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신 앞에 드리는 서약은 곧 천국에서의 자기 영혼의 실체(본질)를 형성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심리학적으로는 결정적인 맹세 혹은 다짐이 자기 영적인 본질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생에서 소명 의식(vocation)을 느끼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정체성(본질)을 창조하고 있는 셈이며, 이는 비유적으로 말해 천국에 존재할 우리들의 영적인 실체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외적 삶과 내적 삶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고, 또 유비적으로 지상의 삶과 천국의 삶은 불가분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이렇게 참되고, 선하고, 정의롭로운 것으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채우지 않고, 거짓되고, 이기적이고, 불공정하고 사악한 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채우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따라갔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사람이 죽었을 때,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일을 어떻게 할까? 그래서 철학자 파스칼은 “확률이 반반이니, 있다고 믿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오직 죽음 뒤의 문제만이 아니다. 장담컨대, 사람이 세상의 온갖 좋다는 것을 다 얻는다 해도 자신의 자아에, 내면세계에 거짓과 위선과 이기심과 사악한 것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면, 타인을 살리는 삶이 아닌 타인을 해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는 죽음이 다가올수록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럽고, 평화나 자유를 느끼기는 불가능할 것이다.내면의 지옥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반대라면 어떨까? 세상의 좋다는 모든 것이 박탈되어 있더라도 만일 그의 자아에, 내면세계에 ‘선한 것’ ‘양심적인 것’ ‘정의로운 것’ 등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는 분명 ‘현재의 천국’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도덕 심리주의’ 혹은 ‘심리 도덕주의’가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남을 해치는 사람들과 벗하지 말아야 하고, 거짓을 퍼뜨리는 사람과 결탁하지 말하야 하고, 항상 선한 것, 공정한 것, 사람들을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 곁에 가고자 해야 한다. 선도 악도 사실은 모두 바이러스와 같이 전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