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의류(地衣類)
주변 산을 오르다 힘들고 지쳐 쉬고 싶을 때 사람들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작은 바위나 그루터기를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주변에 꽃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이끼도 아닌 생물체가 납작하게 퍼져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앉았다 일어나기라도 하면 옷에 허옇게 묻어나기도 하는데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뭘까?
이 이상한 생물체의 정체는 ‘지의류(地衣類)’다. 한자로는 ‘땅 지(地)’, ‘옷 의(衣)’자다. 지구 상 어디에서든 살 수 있는 강인한 생물이기 때문에 ‘땅의 옷’이라고 부른다. 적도에서 남극・북극까지, 바닷가에서 6,000m 고도의 고산지역, 도시의 보도블록과 콘크리트, 사막 등 어디에서든 살 수 있다. 지구 전체에 얼마나 많이 살고 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정도라고 할 만큼 많이 분포되어 있다.
지의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사람은 스위스 식물학자 ‘시벤테너’라고 한다. 그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지의류는 간단한 식물은 아니고 수십만의 독립적인 개체들이 영원히 종속되어 군체를 이루고 있는 ‘균류’로 보인다고 했다. 균류의 노예는 조류이며, 균류는 조류를 찾아내 단단히 붙잡고는 조류에게 서비스(광합성)를 강요하는 것이다. 균류는 조류를 거미줄처럼 촘촘한 망사 형태로 둘러싸면서 점점 뚫기 어려운 막으로 변한다. 그리고 자기가 쳐 놓은 망 안에 들어온 조류의 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더 빨리 증식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의류’는 회녹색의 작은 생물로 균류와 조류의 공동 생명체다. 이끼와 달리 훨씬 높은 곳까지 줄기를 타고 올라가지만 느리게 성장하는 식물이다. 그래서 곰팡이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얇은 조각 하나를 만드는데 무려 몇 년이 걸린다고 한다. 대개는 1년에 1mm씩 자란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무가 병들지 않았나 걱정하는데 그것은 괜한 걱정에 불과하다. 지의류는 나무에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 가만히 놔두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균류(菌類)와 조류(藻類)의 공생체인 ‘지의류’는 조류는 광합성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만들어 곰팡이에게 제공하면서 공동생활을 하는 공생체인 ‘균류’이다. 서로 종류는 다르지만 도움을 주며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물을 ‘공생생물(共生生物)’이라고 한다. 작은 지의류는 굼벵이처럼 성장 속도로 기나긴 수명으로 보장받는다. 외국에서 발견된 최고령 지의류 중에는 수백 살이 된 할머니도 있는 걸 보면 지의류는 느린 삶에 완벽하게 적응한 생명체임에 틀림이 없다.
지의류는 전 세계에 2~3만여 종이 있고, 한국에는 700~800여 종이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의류는 종이 너무 많아서 구분하기 쉽지 않다. 보통은 생장하는 모양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누는데, 나뭇잎 모양으로 생장하면 ‘엽상(葉狀)지의류’, 관목처럼 생장하면 ‘수지상(樹枝狀)지의류’, 특정한 모양 없이 생장하면 ‘가상(痂狀)지의류’라고 부른다. 수지상지의류 중 ‘사슴지의’와 ‘뿔사슴지의’는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서 순록이 생존하는데 유일한 먹거리다. 다른 동물과 달리 순록은 지의류를 소화시킬 수 있는 장내 미생물을 가지고 있어 가능하다. 우리나라 고산지대에서도 자란다고 한다.
지의류의 생존력을 실험한 적이 있는데 2008년 유럽우주국에서 과학자가 우주정거장으로 가져가 우주공간에다 18개월 동안 지내게 했는데 놀랍게도 살아 있었고 지구로 돌아온 후 일부 지의류는 다시 성장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우주의 혹독한 환경(자외선은 지구보다 1,000배, 영상 40도에서 영하 12까지 오르내림을 200회 실시) 속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주의 강렬한 자외선에도 견디는 지의류의 강인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화장품을 오래 보관하는 천연 방부제로 쓰고, 자외선 차단제(선크림)를 만드는 원료나 첨가제로 이용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 미이라를 만들 때도 방부제로 이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빵과 샐러드를 만드는 데 쓰이며, 항암작용을 하는 ‘석이’와 ‘송라’를 약용으로 섭취하고, 다이어트 차로 뜨거운 물에 ‘황설차’와 ‘백설차’로 우려서 마시기도 한다. 최근 들어 특히 생물자원으로서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또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살고, 수명이 길며 환경으로부터 여러 물질을 축적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지표생물(指標植物)’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대기오염이 특히 심각했던 영국에서는 과학자들이 지의류를 이용해 대기오염 정도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다. 연구 결과 공기가 오염되면 더 이상 영양분을 만들 수 없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지의류 종의 수 변화와 사람들의 폐암 발병률을 비교했더니, 지의류 종이 다양할수록 폐암 발병률이 낮았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미세먼지 농도 증가로 인한 피해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는데 이때 지의류 속에 축적된 중금속 농도를 분석하면 그 중금속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또 얼마나 멀리까지 확산 되는지를 측정해 볼 수도 있으며 숲의 건강 정도를 파악해 볼 수 있는 척도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지의류에게도 불청객이 있다. 생물이 생존을 위해 다른 생물의 형태, 소리, 냄새 등을 비슷하게 따라 하는 것을 ‘의태(擬態)’라고 한다. 상당수의 곤충이 의태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의태는 ‘은폐의태’로 다른 자연물과 모습과 비슷하게 하여 포식자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식물뿐만 아니라 자연물을 모방한 곤충도 있는데 지의류 속에 숨어 사는 ‘애알락 명주잠자리’의 유충이 그것이다.
우리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견딜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지의류를 숲속이나 계곡 주변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켜켜이 쌓여 있는 세월의 흔적. 다양한 무늬의 지의류가 없었다면 우리가 느끼는 옛 절터의 고즈넉함이 반감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수백 년 세월 지키며 살아온 것은 혹 지금까지 연구도 덜 되거나 관심이 없어서 아닐까? 요즘은 환경오염도 있지만 건강 보조식품으로 알려지면서 많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만일 지금 채취하고 있는 지의류가 10cm라면 앞으로 100년이 지나야 다시 볼 수 있을텐데 말이다.
첫댓글 마지막 단락을 읽다보니 예전에 한 스님이 티비에서 산초열매 장아찌를 시연한 후
그 해 가을 온 산의 산초열매가 작살(?) 났었다는 기억이,,, 몸에 좋다는 말을 말던지
지의류,,땅의 옷이라 멋지네요^^
오래된 나무 겉에 하얗게 보이던 것이 지의류였네요. 아픈게 아니라 공생하는 것이라니 다행입니다. 오늘 또 하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