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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태복음26장57~68절
제목 : 불법적인 재판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주검을 수습하여 자신의 새 무덤에 모십니다.
예수님을 처형하고 장사까지 했음에도 혹시 부활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합니다.
1.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57~58절)
=====26:57
예수를...끌고 대제사장 가야비에게로 가니 - 마태는 예수께서 전직 대제사장이자,현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예비 심문받으신 사실(요 18:12-23)을 생략하고 불법적인 야간 심문을 위해 가야바의 처소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쪽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다(예수의 재판 절차에 대해서는 강해를 참조하라). 아마 그 당시 가야바와 안나스는 같은 건물 내에서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거주했던 것 같다(Wycleffe). 여하튼 3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마태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대제사장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가야바는 분명 예수를 합법적 절차에 의해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테 큰 역할을 했던 자이다(요 18:14). 그리고 '서기관과 장로들'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아 이 모임이 산헤드린 공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예수를 붙들어 오자마자 심문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있으나(61절), 누가에 의하면 심문은 날이 샌 후 이뤄졌고, 심문이 시작되기 전까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치욕스런 장면과 백성들의 희롱과 조소(嘲笑)가 계속되었다고 한다(눅 22:54-65). 한편 당시의 법에 의하면 해가 뜨기 전 어둠 속에서는 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會集)이 금지되었으며 어떠한 심문이나 재판도 불가능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누가의 견해만을 취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절차상의 차이로 보아 안나스에게 먼저 예비 심문을 받으신 후 가야바에게 끌려와서 해뜨기 전에 비공식 심문을 받으신 후, 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공식 심문을 받으신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빚어진 몇 가지 불법을 살펴보면
(1) 해뜨기 전에 이뤄진 재판,
(2)예수에게 변호인이 전혀 없음,
(3)재판 소송은 적어도 이틀간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안식일, 유월절, 장막절 등의 절기 전날에는 자연히 새로운 재판이 집행될 수 없었는데도, 이것을 무시한 채 하룻밤 만에 모든 절차를 진행시킴,
(4)산헤드린의 공식적 회집 장소에서가 아님 가야바의 거처에서 재판이 속개됨,
(5) 안나스 앞에서의 증인 없는 심문,
(6) 대제사장의 직접 심문,
(7) 이미 잠정적인 사형 언도를 내려놓은 후 모든 재판 과정을 그것에 맞추어 진행한 점 등이다.
실로 심문을 받고 엄중한 판결에 의해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불법적으로 심문하고 거짓 증거로 그분을 처형하려 하고있는 것이다.
=====26: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쫓아 - 57-75절은 예수에 관한 장면과 베드로에 관한 장 면이 한번씩 번갈아 나오는 교체 편집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57절의 예수의 장면에 이어 베드로가 등장하고 있다. 베드로는 용기와(51절) 비겁(56,70절) 사이의 망설임 속에서, '멀찍이' 예수를 따랐다(Brngel). 한편 요 18:15, 16에는 베드로가 요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안뜰에 들어갈 수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있다. 여하튼 수제자로서 예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는 비록 처음은 도피했었지만, 이제 다시 정신을 차려 예수의 신변을 돌아보려는 애타는 심정으로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 결국을 보려고...하속들과...앉았더라 - 베드로는 마당에 피워놓은 숯불에 둘러선 '하속들', 곧 산헤드린의 관원들과 대제사장의 시중들 틈에끼어 들어 예수에게 되어지는 '결국', 곧 심문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보려고 하였다. 아마 이때 요한은 예수의 심문 장소에 좀더 접근(接近)해 있었음이 분명하다(요 18:16). 바로 그 요한이후에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는 말씀을 남겠는데(요일 4:18), 이는 베드로의 안절부절한 행동에 대해 무언가를 지적해 주는 듯하다.
2. 거짓 증거를 찾는 대제사장(59~62절)
=====26:59
온 공회 - 이 공회가 불법적 공회였다는 견해와 법적으로 공회가 밤에야 열릴 수가 없었으므로 이 모임이 밝은 다음에 모일 정식 공회를 위한 예비 모임이었을 것이라는견해가 있다.
이에 대한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자의 견해에서 산헤드린은 세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도급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
그리고 산헤드린의 전체 회원수는 72명이나 회의의 정족수는 23명이면 되었다.
따라서 본문의 '온 공회'는 모든사람이다 참여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산헤드린이 어떤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정족 인원이 모였을 뿐 아니라 그 회의의 핵심적(核心的 ) 인물들과(대제사장 등)이 모여 그 심문에 있어서 하나의 주체로서 관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와 함께 후자의 견해를 살펴보면 한밤중에, 그것도 유월절 밤에 온 산헤드린 공회가 다모였을 가능성은 없다.
랍비들의 법에 의하면 범인을 심문하는 것은 낮에 해야 하며 낮 동안에 끝내야 한다.
밤에 모인 그 모임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정식으로 의회를 소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차하게도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모여 예비 심문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중 두번째 견해를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으나 첫번째 견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26: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 예수를 옭아매기 위하여 여러 거짓 증언자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의 증언에는 일치된 것이 없었다.
이 대목에서 마태는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막 14:56)는 마가의 평행구를 축소하는 대신 마가에는 없는 '두 사람'의 증인이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하튼 이 두 증인들은 추측컨대 공회에 매수된 자였거나 아니면 윗 사람의 비유를 맞출 목적으로 증인의 자리에 선 것으로 보인다.
=====26:61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수 있다 - 드디어 두 증인의 일치된 증거가 나왔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는 증언이다.
분명히 이 언급은 예수의 생애의 사실들에 부합되게 보인다.
실로 예수께서는 성전을 실격시키고 삼 일 후에 자신의 부활할 것을 고지하신 바 있다(요 :19).
확실히 주님은 성전을 비난하고 그 건물의 무너짐을 예언했었다.
그러나 증인들은 성전을 정죄한 예수를 성전 파괴를 직접 감행할 범법자로 혼동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직접 성전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결코 말씀하지 않았다.
단지 '너희가 이 성전을헐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일밖에는 없다(요 2:19-21).
더욱이 그 말씀의 참 뜻은 자신이 죽은 후 사흘만에 있을 그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지 옛 성전이 몰락한 후 사흘만에 성전을 짓겠다는 예언을 한 것은 정녕 아니었다.
그러므로 중인들의 말은 순전히 오해에 의한 증언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 두사람의 증거는 서로 일치하지 못함으로써(막 14:59) 그 증언의 신빙성마저 결여되고 있었다.
한편 렘 26:1-19에 의하면 예레미야가 성전 멸망을 예고(豫告)한 것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
3.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예수님(63~64절)
=====26:62
대제장이 일어서서...아무 대답도 없느냐 - 예수께서는 법적으로 자기를 변호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대제사장은 예수께 그러한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러나 거짓 증거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어떻게든 예수를 해하려고 하는 교활한 가야바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예수의 진술에서 무언가 또 다른 걸림돌을 찾아내려는 조급한 상태에서 변론의 기회를 준 것이분명하다.
이러한 저들의 비겁한 공작 (工作)은 예수의 위엄있는 침묵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다.
한편 예수의 침묵하는 모습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사 53:7)라는 구약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진정 때로는 거짓앞에서 침묵하는 것이 거짓을 이기는 방법일 수도 있다. 진리는 거짓 증거에 대하여 굳이 자신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그 진실성을 밝힐 뿐이다.
=====26:63
잠잠하시거늘(에시오파) - 이는 미완료 과거 시제로서 예수의 침묵이 순간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진정 침묵의 시간이 계속됨에 따라그 무겁게 내리깔린 무언(無言)의 언어가 사악한 산헤드린회원들의 가슴마다에 웅변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거짓된 증언을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게끔 되었을 것이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 이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는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또는 판단하시고 보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맹세 형식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마태만의 독톡한 것인데,
재판석에서 피고에게 서약시키는 형식이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 이것은 예수께서 과연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전에도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어 왔었다(12:28-42 ; 16:1-4 ; 21:1-11, 14-16, 23).
그런데 이 질문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죄책(罪責)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즉 비록 예수를 판 자는 가룟 유다였지만 율법의 교묘한 올가미와 교권주의자들의 사악한 질문을 통해 예수를 처형할 합법적 이유를 구체적으로 마련한 자는 바로 대제사장 가야바였던 것이다.
실로 가야바는 이 적나라한 질문을 통해 율법적으로는 신성 모독의 범죄를 찾고자 했으며 정치적으로는 반란 음모죄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여하튼 가야바가 던진 질문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물음은 네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산적 속성을 지니고 있느냐는 것이며, 네가 '그리스도'냐는 물음은 네가 이 세상을구원할 사역을 지니고 온 메시야이냐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은 구약 시대 이래로 메시야를 대망해 온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결국 그 질문으로써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할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64절).
=====26:64
네가 말하였느니라(쉬 에이파스) - 예수의 이 대답은 마가복음'에고 에이미', 즉 '내가 그니라'는 직접적인 대답보다는 약하다(14:62). 즉 '네가 말했다'는 예수의 말씀은 대제사장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긍정하는 말이다(25절 주석 참조). 한편 이러한 답변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5:33-37에서 친히가르치신 바 '맹세하지 말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친히 실행하신 것이다.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것...너희가 보리라 - 이 말씀은 예수 자신에 관한 가장 은밀한 신비를 밝히는 것으로서 비록 지금은 죄인으로 가장 낮고 천한 위치에 있지만,당신의 때에는 그 모든 것이 변하여 영광과 권능으로 변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변화산상에서 그 전조(前兆)를 보이신 바 있다(17:2-13). 진정 그 당시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예수의 십자가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그 십자가 이후에 전개될 영광스런 장면들을 선취적(先取的)으로 보고 계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영광스런 광휘(光輝)의 장면, 곧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한 이같은 선취적인 고백은 대제사장을 깊이 당황케 했을 것이며 그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진정 '네가 말했다' 그리고 '너희는 볼 것이다'는 예수의 권위에 찬 응답은 그의 현재의 권위를 확인하고 장차 있을 그의 영원한 왕권을 암시해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이란 표현은 시 110:1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행위와 통치권을 전해받으실 것을 내포한 말이다.
이는 결국 성부 하나님과의 동격을 이루실 예수의 신적 선언인 것이다. 그리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단 7;13, 14)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위엄과 영광으로 임하실 예수의 최고의 자기 계시이다.
어찌 되었든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사실상동일시하신 이 말씀은 자신이 죄를 용서한다고 말한 이전의 주장 만큼이나 불경스러운 것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들에게 확실한 고소거리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4.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예수님(65~68절)
=====26:65
옷을 찢으며 -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자로 '하나님을 모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한편 본문의 '옷'(히마티아)
은 겉옷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인데, 여기서는 대제사장의 예복을 가리킬 것이다.
이에 비해 마가복음에는 속옷올 가리키는 '키토나스'라는 말이 나온다.
아마 이때 가야바는 속옷과 겉옷을 동시에 잡고 자기 목 부위에서 가슴이 노출될 만큼 찢어 내렸던 것 같다.
여하튼 옷을 찢는 것은 극한 슬픔에 직면했거나 의로운 분노의 한 표현으로 행하던 유대인들의 전통적 행동이었다(왕하 1:37 ; 1 Macc 11:71). 특히 랍비들이 규정한 바에 의하면 율법에 중대한 위협이 발생했을 때 법관은 일어나 옷을 찢도록 했다.
그리고 그 찢는 부분이나 길이등의 세밀한 면까지 제시하고 있다.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에블라스페메센) - 이를 직역하면 '하나님께 모독하는 말을 하였다'가 된다. 즉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이제 신성 모독의 가장 중한 범죄자가 된 것이다(레 24:16).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의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들에게는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중한 범죄로 인정되었지만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26:66
생각이 어떠하뇨 - 대제사장 가야바는 귀중한 한 생명의 생사가 달린 시점에 정식재판 과정을 거치는 신중함을 보이지 않고 마치 군중을 선동하듯이 분위기를 이끌므로써 거의 환호에 가까운 사형 판결을 이끌어 냈다.
아마 이때 산헤드린을 위시한 군중들은 만장 일치로 예수의 사형을 연호(연호)하였을 것이다(막 14:64).
사형에 해당하니라 - 오직 마태복음만이 사형 판결을 직접 화법으로 보도함으로써 그 당시 고조된 분위기를 더욱 생생하게 소개한다. 그 대신에 마태복음에는 '모든 사람'이 거기에 찬성하였다는 부분이 없다(막14:64). 한편 공의회의 사형 판결은 아마 신성 모독의 법조문에 해당하는 레 24:16을 근거로 한 것 같은데, 이 판결은 여러가지로 불법이었다.
사실 탈무드에 가르치기를 '산헤드린은 생명을 구할 것이지 멸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밖에도, 궐석(궐석 ) 판결을 하지 말 것, 다수의 동의가 아니면 판결을 내리지 말 것, 사형 선고 받은 자는 판결 당일에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 원칙이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법규는 죄인에게 가급적으로 자비를 베풀라는 것인데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그 선한 정신이 전혀 준수되지 않고 있다. 또한 산헤드린 법 4:1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다.
(1) 범죄인 심문은 반드시 낮에 할 것, 또 해지기 전에 끝마칠 것,
(2) 만일 선고가 무죄일 때는 심문의 날에 선고할 것이나, 유죄일 때는 다음날에 선고할 것이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이와 같은 법규를 어기고 예수의 심문을 유월절 절기와 안식일의 임박으로 인해 조급하게 행했다.
즉 그들은 예수를 심문한 당일에 선고를 내리고 당일에 형을 집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놀라운 일이아니다.
악한 통치자와 타락한 종교와 의식이 없는 백성들이 만날 때는 항상 이렇게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하게 된다.
=====26:67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사 50:6의 예언, 곧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 하였느니라"는 메시지가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실로 불법 판결이 끝나자 주위에 기다리고 있던 하속들이 차마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모와 학대와 조롱을 일삼은 것이다(막 14:65).
정녕 그들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최악의 수치를 예수께 안겨준 것이다.
여기서 남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더할 수 없는 모욕이다(민 12:14 ; 욥 30:10).
주먹으로 치고...손바닥으로 때리며 - 도무지 반격할 수 없는 자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는 것은 더더욱 야만적이다.
한편 누가는 이때 그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구타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웠다고 증언하고 있다(눅 22:64).
이와 함께 본문의 '손바닥으로 때리며'(에르라피산)는 '몽둥이로 때리다' 뜻하는 '라피스 마'에서 유래한 단어로 그 당시 하속들은 손바닥 뿐 아니라 몽둥이로도 예수를 심하게 구타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신성 모독자를 구타한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의 범죄를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영적 무지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26:68
琉 볕돗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 여기서 마태복음과 다른 공관복음은 상호보충적이다.
즉 각 기사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포함하고있다.
그중 마가와 누가는 조롱하는 자들이 예수의 눈을 가리고 나서 그에게 선지자 노릇을하도륵 강요하며 조롱했다고 한다(막 14:65 ; 눅 22:64).
한편 마태는 눈을 가리웠다는 말을 생략하는 대신 그 조롱하는 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야'라고 불렀으며, 눈을 가리운 채 구타한 후 '너를 친 자가 누구냐'는 조롱조의 질문을 함으로써 메시야의 신적 통찰력과 능력을 보이라고 빈정거렸다고 한다.
사실 유대인의 그리스도(메시야)관은 불의를 정복하고 각종 능력을 행사하며 민중을 압도하는 어떤 탁월함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그들이 보기에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침묵(침묵)으로 일관하는 자가 그리스도 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 여기서 '선지자 노릇 하라'는 말은 장래의 일을 예언하라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지식을 드러내라는 뜻이다.
즉 메시야라고 하면 비록 눈이 가리워져 있어도 자기를 친 자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느냐는 비아냥거림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전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다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줄 수 없었을 것이고,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을 장사 지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던 여자들은(56절) 예수님을 장사 지낸 것까지 목격했으며,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선 이들이 경비병들을 보내어 무덤을 지킬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으며, 또한 틀림없이 부활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무덤에서 살리시기 위해 무덤에 거하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합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사형 판결과 집행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매우 큰 충격과 두려움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57~61절).
이런 상황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용기 있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안식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무에 매달린 시체를 밤새도록 두는 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1장 23절).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의 제자이면서도 유대인이 두려워 정체를 숨겼지만(요한복음 19장 38절),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담대하게 앞장서서 주님의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을 감당합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냅니까?
예수님의 제자로서 용기 있게 앞장서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 제자들은 잊고 있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할 거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62~66절).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경비병들을 보내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고 굳게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큰 돌과 경비병,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오히려 주님의 권능을 드높이게 될 것이며 주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내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가로막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기도
열방-전 세계 무슬림 국가, 공산주의 국가, 독재국가의 2/3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각하다. 종교 간의 증오와 갈등이 완화되고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 그치도록
공동체-아무리 막아도 주님의 부활은 막을 수 없으며, 아무리 속여도 주님의 부활은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