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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그건 그렇고, 저는 고통으로 인해 지쳐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명상을 통해 직관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았지요. 극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마치 전신이 불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저의 신경체계가 가시달린 철사로 이루어져있는데 거기에 전기까지 흐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한 극도의 고통은 정말로 오라 전체(the whole aura)에 꽉차있습니다. 오라가 고통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관심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저는 ‘왜 이러는 것일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수잔은 한국의 호텔방에 일반적으로 비치되어 있는 불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불경에서 수잔은 부처가 마치 모든 뼈가 부서진 것과 같은 고통에 휩싸였었다는 것과 그가 악마에게 공격당했었다는 것을 읽고 있었습니다. 수잔은 그것을 제게 읽어 주었고 그 즉시 저는 괜찮아졌습니다. 하하하하. 악마에게 공격당하고 뼈가 부서진 것 같아도 괜찮습니다. 저의 이러한 이야기는 단지 이런저런 경험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식혁명이라는 책으로부터 하나의 이원성으로 보이는 것이 드러났고, 그것이 그 당시 저를 고민케 했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것에 대해 누군가 정치적인 입장을 취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200이상의 것은 생명에 우호적인 것, 생명을 도와주는 것, 진실인 것들이고, 200이하의 것은 거짓인 것, 생명을 손상하는 것, 그리고 독성이고, 악의적이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남에게 파괴적인 모든 것이라는 정치적 입장 말이지요. 이러한 것은 어떤 양극성을 만들어 내는 듯이 보였습니다. 양극성들을 초월하는 것에 기여하려했던 연구가 그 자체로서 어떤(200이상 대 200이하라는 선악의 양극성과 비슷한) 양극성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하하. “200이하는 멀리해야 해. 200이하의 아이들과는 함께 놀지 말아라 지미야.” 하하하하. “그런 아이들은 악하고 탐욕스러운 생각을 갖고 있단다. 그 아이들은 너를 거리의 불량배가 되도록 끌어 들일거야. 네게 문신을 새기도록 하고 마약에 중독 시키고 바보로 만들고 범죄에 빠뜨리거나 어떤 악마적인 것을 하게 할 거란다.” 이러한 일들이 초래되는 듯이 보였고 그것은 저를 고민케 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계속 연구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연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분들이라면 운동역학이 매우 명확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상상도 없습니다. 운동역학은 과학적이고 ‘증거에 근거한’ 것입니다. 운동역학은 진실로 증거에 근거한 것입니다. 당신의 팔은 강해지거나 약해집니다. 그것에는 어떠한 ‘만약’이나 추측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같은 답을 내놓습니다.
‘신성의 도움 없이 천국에 이를 가능성이 희박하다.’라고 말한 예수의 목적은 그러므로 정토종과 같습니다. 당신은 1000의 수준의 위대한 화신들의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존재를 당신의 스승으로 긍정하는 것, 단지 이것이 당신을 종착지까지 인도해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질문(깨달음과 구원의 차이에 대한)을 묻습니다. 부처는 깨달음으로의 길을 가르치고, 예수는 구원으로 길을 가르칩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알아보지요. 이것은 사실이다, 저항하세요 (긍정반응).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다른 질문이 있습니까? 예수는 구원으로의 길을 가르쳤습니다. 불교와 힌두교의 특정한 교파들에서조차 제가 가르치는 의식 자체를 통한 길이 세상에 존재하는 부정성 때문에 알맞지 않다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하나에 집중된 마음이 어떻게 명상의 상태에서 절대적으로 에고를 초월하게 되는가. - 이것에 대해서는 아마도 오늘 오후에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돌연히 당신이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신성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것은 명백하지 않지요. 부처는 소수에게 알맞은 길을 가르쳤습니다. 부처는, “당신이 일단 깨달음에 대해 듣는다면, 당신은 결국에는 그것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the spirit)은 생을 거듭해서 영적인 길들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는 ‘끈기 있는 영적인 헌신(arduous spiritual commitment)을 통해서 당신은 이번 생에 깨달을 것이다.’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 비록 그 자신은 그러했지만 말입니다. 부처의 경우는 정말 그러했습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제가 설명하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참나에 대한 각성’을 더욱 나타냅니다. 600의 수준에서 무한한 사랑의 현존으로서의 참나에 대한 앎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현자의 수준인 700에서는 신성으로서의 참나(the Self as divinity)에 대해 각성하게 됩니다. 신성으로서의 참나와 그리고 참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모든 것은 마음에서 투영된 지각적 인상들(perceptual impressions)일 뿐이라는 것을 각성하게 됩니다. 구원자를 갖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당신이 600이상이라고 할지라도, 구원자라는 위대한 선물이자 신성(the great gift and divinity of a savior)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당신의 존재의 진실을 깨닫는 것은.... 구원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원해야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원이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깨달음과 구원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충분한 설명이 되었나요? [질문] ‘구원은 필요한가요?’ 물론입니다. 하하하하. 당신이 바다에 떠 있는 코르크가 되는 것이 가라앉는 납덩이이기 보다는 더 낫지요. 좋은 질문입니다. [질문] ‘그리고 만일 구원이 필요하다면, 무엇으로부터 구원되는 것입니까?’ 구원은 당신이 육체를 벗어날 때, 당신이 도달하는 의식수준과 관련됩니다. 예수는, “나를 마음에 품은 자들아, 나는 나에 대한 너의 헌신으로 묶인바 되었으니 네가 천국의 영역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네게 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정토종과 기독교는 둘 다 매우 현실적(practical)입니다. 또한 예수와 부처 모두 엄청난 무지의 시대(in a time of great ignorance)에 가르침을 폈습니다. 부처가 기원전 500년에 태어났음을 잊지 마세요. [그 당시에는] 언론도 없었고, 아무도 교육받지 못했으며, 아무도 읽거나 쓰지 못했습니다. 의식의 수준은 아마도 아프카니스탄의 전형적인 국민의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거의 원시적인 수준의, 생존을 위한 기초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상태 말입니다. 정토종은 '삶의 부정성이 너무도 심하고 당신 스스로는 이번 생에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는 [기독교의 구원사상과] 동일한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서원(commitment)은 너무나 특별하고 특정적인 것이기에 오직 천만 명 중에 한 명만이 심지어 그러한 서원을 세웁니다. 우리는 에고를 초월하기 위해 요구되는 수행기법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며, 당신은 그것들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관통하는 불타는 전기선(the burning wire)의 고통은 제외하고서도 말이지요. 오~ 이런. [농담의 말씀으로]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그것의 맛만 보여드리겠습니다. 부처와 같은 영적 스승들을 따름으로서 당신이 영적인 성취를 달성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부처는 당신이 팔정도를 따름으로써 이 순간에 반드시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에 대한] 그러한 서원(that commitment)은 자동적으로 당신이 생을 거듭해서 깨달음의 길에 있게 될 것을 보장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일단 빛의 방향(the direction of light)을 선택하면, 그 끝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저는 부처의 그러한 말을 믿습니다. 부처가 말한 그러한 것이 이번 생에 저에게 일어난 현상들과 일치합니다. 그러한 가르침을 접했던 생에서 저는 소승불교도였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요. 이 전의 생에서 저는 소승불교도였으며 매우 독실한 신도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라는 두 종류의 불교가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는 오랜 기간 명상을 했으며, ‘궁극의 진실은 공(void)이다.‘라는 것이 저의 신념체계였습니다. 공(void)은 매우 미묘한 개념입니다. 공...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신에게는 어떠한 반대되는 것이 없습니다. ’없음(nothingness)‘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치 전부임에 반대되는 것이 있다는 듯이, 공(void)과 ’없음‘을 진실로 혼동하는 다양한 불교 종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900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초월할 필요가 없는 이원성입니다. ’무한한 실상은 전부임인가 없음인가‘라는 이원성은 900이상에서 올라온다 (긍정반응), 910 (부정반응). 대략 900에서 올라옵니다. 900을 지나게 되면 그러한 이원성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불교 종파들은 900이하이며 그래서 그들은 없음(nothingness)과 공(void)을 혼동합니다. 그러한 생들에서 저는 [불교에] 매우 열정적으로 독실하고 헌신적이었습니다. [저에게] 궁극의 실상은 공(void)이였습니다. 제가 육체를 벗어서날 때마다 저는 공(void)으로 들어갔습니다. 생들(lifetimes) 사이에 연결이 없는 생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존재에 대한] 앎 다음에 없음(blank) 그리고 다시 앎 다음에 없음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번 생 바로 전에도 일어났습니다. 존재에 대한 앎이 없음으로부터 나타났습니다. 없음으로부터 돌연히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고는 그러한 문제가 스스로 해결되었습니다. 매번 제가 궁극의 실상이 공(void)인 불교 종파의 신자로서 육체를 벗어났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이 만들어낸 궁극의 실상으로서의 공(void)을 경험했습니다. 공(void)이라는 궁극의 실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 신념체계 속의] 진실에 대한 많은 생에 걸친 명상을 통해 저는 [궁극의 실상으로서의] 공(viodness)를 만들어냈습니다. 오늘날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오역들 - 오역은 아니지만 부처의 가르침은 이러한 오류(공을 없음이라는 여기는)를 피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설명되어있지 않습니다. 궁극의 실상이 [없음으로서의] 공(void)이라는 저 자신의 깊은 신념과 부처에 대한 저의 헌신으로 인해 저는 없음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육체를 벗어날 때마다 없음을 경험했습니다. 하하. 그러나 그것은 실상이 아니기에 당신은 없음으로서의 공(void)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또 다른 육신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꽝~!(Bang~!) 제가 지금 이 육체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것은 갑작스런 폭발과 같았습니다. 작은 유모차에 이 육체가 있었습니다. 세 살 또는 네 살 경에 작은 유모차에 있었습니다. 꽝~! 갑자기 펑~! 존재와의 갑작스런 맞닥뜨림은 마치... 꽝! 없음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대조(contrast)였습니다. 궁극의 실상은 없음이 아닌 전부임입니다. 전체임은, 완전히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부임은 ’그 무엇도 아님(no thing)‘입니다. ’그 무엇도 아님‘입니다. 그것은 ’그 무엇‘이 아닙니다(it's not thing). 궁극의 실상은 공(void)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부입니다. 아시다시피, 부처는 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신에 대한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신념체계는 당신이 신이라고 믿는 것을 창조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자신의 상상과 무지의 투영을 추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그저 잊어버려라. 그리고 당신 자신의 의식의 근원을 발견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의식의 근원)이 불성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그것을 불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오~, 그것 역시 오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공(void)이라고 불렀습니다. 공(void)은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렇지요? 이제 사람들은 없음(nothingness)을 실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진실로 그러한 것을 추구하고 그것에 열렬한 신봉자가 된다면 당신을 없음을 궁극으로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궁극으로서의 없음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저는 그러한 갈등[없음과 사랑에 대한]을 해소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와 부처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가슴의 길... 저에게는 보다 높은 상태에서 추락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이것(추락한 스승)은 다른 이야기인데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지요. 자신들이 가르침을 펼칠 때에는 500대 후반으로 측정되었다가 이제 다시 측정해보면 200대의 수준인 스승들이 있습니다. 상당한 수가 있으며 그들은 모두 아주 유명합니다. 제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오! 그렇지요. 예수와 부처. 저는 매우 높은 상태에 도달했었던 스승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그러한 상태에 더 이상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비롯한 모든 신의 속성들(the attributes of God)에 대해서, “그러한 것들은 모두 집착이다. 당신은 그러한 집착들을 놓아 버려야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신의 속성들입니다. 그렇지요? 이러한 생각(이러한 것들은 놓아 버려야할 집착들이라는 생각)은 소승불교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랑‘과 ’사랑에 대한 집착‘은 다른 것들입니다. 저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어쨌든 그 당시에 저는, ’그래, 사랑은 하나의 집착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아름다움과 사랑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놓아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것들을 집착이라 여기며 낮게 보았습니다. 저는 예수와 부처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저는 부처가 ’궁극의 실상은 공(void)이다.‘라는 것을 상징한다는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집착으로서의 사랑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종국에 저는, ’아니야, 부처가 예수보다 높아. 사랑은 집착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사랑을 놓아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피유~. 저는 무한한 공(the infinite void)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무의식적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공(空)으로 들어갔습니다. 말씀드리지만, 공(空)은 아주, 아주 경이롭습니다. 그것은 매우 경이롭습니다. 그것은 보잘것없는 에고를 넘어서 있는 차원입니다. 없음, 무한한 없음의 절대적인 경험입니다. 거기에는 하나의 생각이 남아있습니다. 그것(무한한 없음의 상태) 안에서 모든 실상이 드러납니다. 당신은 무한한 실상의 무한한 장 안에서(within the infinite field of the infinite reality) 모든 것이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봅니다. 그것은 분명 실상을 극명하게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었습니다. 어떤 본유적인 영적 직관이 거기에 오류가 있음을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그것(영적 직관)은 언어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앎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의 생각을 놓아 버리는 것은 마치 우주선이 당신을 무한한 미지의 공간으로 데려가 당신을 내려놓고 그곳이 어딘가를 나타내는 모든 지도를 파괴하고 출발지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그곳이 어디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당신의 존재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습니다. 되돌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그 하나의 생각을 놓아 버리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하나의 생각을 북돋아 공(空)의 무한한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막대한 에너지, 막대한 힘 - 제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힘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그것은 의식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보다 덜 지혜롭고, 운이 나쁜 사람은 그것이 궁극의 실상이라고 확신하여 그 마지막 하나의 생각을 놓아 버리고 없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없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역설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의 실상이 없음이라면] 없음이 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 오류를 발견하기 전까지, 당신은 아마도 그러한 없음의 경험 속에서 많은 영겁(quite a few eons) 동안 머무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오류가 있다는) 직관적 앎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무한한 실상은 사랑의 본질(the quintessence of love)이라는 직관적 앎이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 공간의 ’사랑의 부재(the absence of love)‘가 그것이 완벽한 공간, 궁극의 실상이 아니라는 경고의 신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신문을 배달하다가 얼어 죽을 뻔 했던 때에, 저는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모든 시간과 모든 것을 넘어서있던 그 경험의 가장 심원한 것은... [그러한 상태에서] 당신은 당신이 언제나 존재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든 우주들 이전에 ’내가 있고(I am)‘ 모든 우주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입니다(I will still prevail)‘. 이것은 분명합니다. 우주들은 그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공간에서 당신은 이것을 압니다. 그러나 가장 심원한 것은 너무도 숭고한 거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 무엇과도 다시는 혼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무한한 공(空)에 부재했던 것이 그러한 사랑의 진동이었습니다. 구원과 깨달음의 차이에 대해 답을 한 것 같군요. 공(空)으로서가 아닌 전부임으로서의 무한한 실상. 공(空)은 모든 형상의 없음을, 형상의 없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존재의 근원은(that which you are)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이해해야할 불교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이 있습니다. 궁극의 공(空)은 차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차원이 없다는 것)은 공(空)이 비이원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because it is no thing).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인 것입니다. 전부가 되려면 당신은 그 무엇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무엇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형상도 없어야하며, 어떠한 속성도 없어야하며, 어떠한 조건도 없어야하며, 어떠한 묘사(descriptions)도 없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 모든 것(all that is)인 것입니다. 모든 곳에 있기 위해서는 당신은 어느 특정 장소에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어느 특정 장소에 있다면, 당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공(空)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것이 부처의 얼굴(the Buddha face)입니다. 그렇지요? [농담조로 부처를 부르심] “부처여~” 이 설명은 진실이다, 자항하세요 (긍정반응). 고맙습니다. 하하하.
David Hawkins - Jan 2002 - Casuality,
The Ego_s Foundation
○ David Hawkins
모울님의 번역입니다
첫댓글 죽은 이는 죽은 이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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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