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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매우 큰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셔서, 바다쪽에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바닷가 뭍에 있었다.
2.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는데,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3. "잘 들어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5.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으므로 싹은 곧 나왔지만,
6.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7.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 그 기운을 막아 버려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
9. 예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막4:1-9)
1 Again Jesus began to teach beside Lake Galilee. The crowd that gathered around him was so large that he got into a boat and sat in it. The boat was out in the water, and the crowd stood on the shore at the water's edge. 2 He used parables to teach them many things, saying to them:
3 “Listen! Once there was a man who went out to sow grain. 4 As he scattered the seed in the field, some of it fell along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5 Some of it fell on rocky ground, where there was little soil. The seeds soon sprouted, because the soil wasn't deep. 6 Then, when the sun came up, it burned the young plants; and because the roots had not grown deep enough, the plants soon dried up. 7 Some of the seed fell among thorn bushes, which grew up and choked the plants, and they didn't bear grain. 8 But some seeds fell in good soil, and the plants sprouted, grew, and bore grain: some had thirty grains, others sixty, and others one hundred.”
9 And Jesus concluded, “Listen, then, if you have ears!”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매우 큰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오르셔서, 바다쪽에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바닷가 뭍에 있었다.
1 Again Jesus began to teach beside Lake Galilee. The crowd that gathered around him was so large that he got into a boat and sat in it. The boat was out in the water, and the crowd stood on the shore at the water's edge.
제가 그만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대면 예배를 드릴 참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목사님이 늘 말하는 예수 이름으로 코로나야 물러가라 하면 될 것이지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뭐냐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뭐 다른 게 있어야 할 것 아니야?
하지만 여러분이나 저나 똑같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3:10-12)
목사나 교인이나 다 똑같다!
목사가 뭔가 보여 주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서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별 볼 일 있는 그 하나님 영생의 일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좀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나의 죄인의 말 세상의 말을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노상 부딪히는 것이 자신의 한계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던 때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에덴에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지은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24.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형무소를 가보면 엄청나게 높은 담이 쳐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거기에 가두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의 처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을 보호하기 위해 죄인을 쫓아내시고 천사들을 세워 지키게 하시고 빙빙 도는 불칼로 사람의 접근을 막으신 것입니다.
죄인들은 거기에 얼씬 못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이라면 그래도 그때까지는 사람들이 에덴 말을 함께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또다시 죄를 범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11:7)
이제는 에덴의 말조차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에덴을 전할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그런 죄인의 세상에 에덴과 연결하시는 유일한 길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는 말씀으로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중요한 것은 이런 처지에 있는 우리에게 에덴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 이 본문이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초등학생도 알아먹기 쉽게 둘째 아주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마음에 말씀을 심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마음에 말씀을 심는 것입니다.>>
농부가 가을에 수확을 바라며 봄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씨앗을 뿌리지 않아놓고 가을에 수확하려고 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또 호박을 심어놓고 거기서 오이를 수확하려는 바보 또한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씨앗은 말씀을 이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심으면 거기에서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열립니다.
그래서 목사가 하는 일은 딱 한 가지입니다.
말씀의 씨앗을 여러분들의 마음에 심는 일입니다.
주일마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목사인 저와 여러분과 친구로 잘 지내자는 것도 아닙니다.
돈도 빌려주고 어려울 때 눈물 닦아주자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 말씀을 제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이 한 가지의 이유로 목사인 제가 있고 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말씀이 심겨지면 여러분들은 진짜 친구를 얻을 될 것입니다.
말씀이 제대로 심겨지기만 하면 이 분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눈물 흘릴 필요도 없고 세상 것들도 문제가 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주특기는 주객을 전도시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닷가로 가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파이프 오르간도 없었습니다.
스타인 웨이 피아노도 성가대도 없었습니다.
멋진 강대상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앉아서 예배드릴 교회 장의자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장의자도 유행 따라서 수시로 바꾸어야 제대로 은혜받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 덕에 우리 교회는 6개는 서울 대형교회에서 나머지 6개는 옆 동네 교회에서 잘 얻어쓰고는 있지만.......
주님은 하늘 위로는 물새가 날고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장소를 택하신 것입니다.
쏴 소리를 내며 밀려오는 파도
발발 게들이 땅바닥에서 기어 다니고
짠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그래도 거기에 얼마나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모여드는 데는 딱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권능 있는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 역사가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거기에 말씀을 통한 하나님 임재 현실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거기에서 딱 한 가지 투자하신 시설이 있었습니다.
밀치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빌렸던 배입니다.
그것도 주님이 설교하신 후에 다시 주인에게 돌려줄 것입니다.
다음 날에는 틀림없이 그 배에 어부들이 타고 물고기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배 위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그것으로 충분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요양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아노도 성가대도 없습니다.
밀고 다니시는 보조 기구 위에 칠판 올려놓은 것이 강대상입니다.
그 위에 성경을 펴고 전해지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셨다면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 현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설교하고 돌아가면 이 칠판은 다시 벽에 붙을 것이고 어르신들은 이 보조 기구를 의지하고 밀고 다니실 것입니다.
오직 이 말씀의 사건이 제대로 일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조차 이 생각이 바뀌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1.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2.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1,2)
제자들은 여전히 신앙을 성전의 돌멩이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격노하셨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댑다 큰 성전을 지어놓고 좋아하기는!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막13:2)
이것은 본질을 호도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를 보니 제 3 성전을 언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가질 시간에 성경 한 절을 더 읽고 외우시는 것이 바람직한 일임을 아셔야 합니다.
성궤를 찾든지 말든지
성전을 다시 짓든지 말든지
진정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이미 성궤는 사라지고 성전은 모조리 부셔지고 말았습니다.(주전587년)
성전이야 예수님에 대한 비유적인 의미를 지녔으니 스룹바벨이 재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정도입니다.
그 성전을 독재자 헤롯이 화려하게 증축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성전 건축이라는 첨단의 종교 행위 형태를 취했지만 독재자 헤롯의 정밀하게 계산된 정치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교활함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화려한 정치 수작을 로마를 불러다 다시 무너뜨리신 것입니다.(주후69년)
그런데 사람들은 그 돌탱이를 이 땅에 자꾸만 다시 세우려는지 모르겠습니다.
2.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가르치셨는데,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2 He used parables to teach them many things, saying to them:
설교자로써 제가 끔찍하게 듣기 싫어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한 소리 또 한다는 말입니다.
설교 때마다 새로운 내용을 전해 주고 싶지만.......
나야 그렇다 치고 아내는 사모라는 이름으로 새벽 기도회, 주일 낮, 저녁, 수요, 구역 예배 도망도 못 가고 그 소리를 또다시 들어야 하다니.......
끔찍할 것입니다.
그런 아내가 가물에 콩 나듯이 은혜받았다는 말을 저에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샅샅이 그 설교 본문을 뒤지게 되는데 한 소리 또 한 것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은혜받았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설교자로써 이 예수님의 설교 본문을 보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설교하려고 유심히 예수님 설교를 보는데 예수님의 설교는 차라리 제 설교보다 더 튀는 것이 없습니다.
씨뿌리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이것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런데 놀라운 일입니다.
그 바닷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뻔히 알고 있는 예수님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나라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저의 설교를 통해서도 가물에 콩 나듯이 그런 일이 아내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제 설교를 통해 아내의 눈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였던 것입니다.
어떤 초신자가 있었습니다.
제 설교 내용 중에 발에 걷어차여 찌그러진 전기밥통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저를 보고 몇 번을 “목사님, 그 전기밥통 이야기에 은혜를 받았어요”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해석이 안 됩니다.
그 분에게 찌그러진 전기 밥통이 하나님 나라의 무엇으로 보였을까?
그 바닷가의 사람들 귀에는 예수님께서 콩을 심었다고 말씀하시면 하나님 말씀이 자신들의 마음에 심겨진 것으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을이 되어서 콩을 100배로 수확했다고 하시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영생의 수확으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즉 비유로 들린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은 왜 그렇게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는지 베드로는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일이 안 되다 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물을 내려 봤던 것입니다.
그 때 일어난 일입니다.
7.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눅5:7,8)
뜬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물고기였습니다.
눈을 씻고 봐도 물고기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다시 봐도 그것이 자신의 죄였습니다.
눈을 씻고 봐도 그것은 틀림없는 자신의 죄였습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눅5:8)
5. 그러나 이 제사장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조품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땅 위에 있는 성전에서 섬깁니다. 모세가 장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너는 명심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 준 그 모형을 따라서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히8:5)
하나님의 성전조차 진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돌멩이들입니다.
진정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성전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을 것입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20년을 목회하면서 살았습니다.
제주도를 가기 전에는 초등학교의 교과서에 나오는 귤밭 사진으로 제주도를 상상만 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가 섬이라고 해서 축구 경기하다가 차범근이 공을 차면 그것이 바다로 빠질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거기가면 축구도 제대로 못 하겠구나!
그런데 제주도는 차로 한 시간을 달려야 한 바퀴를 돌만큼 큰 섬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진만 보고 제주도 생각하듯이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펼쳐진 역사라는 이 사진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는 중입니다.
즉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리산 대청봉에 올라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와 하나님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형은 하나님의 나라를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도 달도 산도 바다도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19.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롬1:19,20)
그런 엄청난 전경만이 아닙니다.
노상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합니다.
농부가 봄에 씨 뿌리는 것도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고 있었습니다.
비유에 대해 다시 설명하자면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은 영적인 것을 설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이 땅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한계에 직면한 이 이기적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영원을 갈급했습니까!
바로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이신 것은 전적으로 이타적인 하나님 나라의 내용성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빌어서 기복적 내용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 창조의 목적을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이 땅의 유한성에 질려서 하나님의 나라만 소망하도록 주신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둘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오직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믿습니다. 삼박자!”를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기복적 내용을 찾아보세요!
3. "잘 들어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3 “Listen! Once there was a man who went out to sow grain.
얼마 전에 하수구에 흘러온 흙을 퍼낸 적이 있습니다.
여름만 되면 빗물에 쓸려오는 흙이 하수도 구멍을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수도에 쌓인 흙들을 긁어냈습니다.
장로님께 수레를 빌려서 그 흙을 옮겼습니다.
그 흙으로 교회 마당 한구석에 작은 채소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갓씨를 뿌렸습니다.
그랬는데 난리가 난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잡초가 나왔습니다.
갓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물 주고 거름 주니 옳거니 하면서 씨앗이라는 씨앗은 모조리 발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씨앗들은 제대로 그 환경만 되면 여지없이 발아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씨앗 속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어르신들이 농부이시니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박씨를 뿌리면 호박이 납니다.
수박씨를 뿌렸는데 거기에서 참외가 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일생 농사하신 어르신 앞에서 제가 무슨 농사를 말씀드리겠습니까!
제가 여기에서 수박씨 호박씨 말씀을 드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이르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어르신들이 농부가 아니라 제가 농부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에 심는 농부입니다.
이 요양원의 공간 안에 계신 이상 제 소리를 피하실 수 있는 어르신은 없으실 것입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제가 소리를 질러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지없이 하나님 말씀의 씨앗이 어르신들의 가슴에 심겨지는 중입니다.
이런 일을 보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머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위로 시커먼 콜타르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입니다.
그 콜타르를 뚫고 머위가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힘입니다.
말씀을 들으신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이렇게 발아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르신들께 이미 사건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제가 죽 설교를 하다가 코로나로 한 이 년 쉬었나요?
다시 설교를 부탁받았을 때 저는 좀 겁이 났습니다.
교회라고는 발도 붙여보지 않으신 어르신도 여기에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녀가 아기를 낳았는데 그 이름이 예수님이라고 하면 저를 어떻게 보실지 겁이 났다는 말입니다.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고?
나는 교회를 나가지 않지만 마누라가 권사이니 그랜드 피아노를 기증하셨다고 말씀하신 어르신도 여기 앉아 계십니다.
하지만 여기 요양원에서는 그런 걱정 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천국 문 앞에서 예수님은 너 교회에 그랜드 피아노 바친 적 있어 그런 것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더니 그 말씀의 사건이 일어났는지만 확인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심어지기만 하면 죽음이 와도 죽지 않는다는 하나님 나라의 영생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그것은 아스팔트 콜타르라도 뚫고 나옵니다.
지금 그 말씀의 씨앗이 여러분의 가슴에 떨어져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아니라 설교를 하는 제가 느끼는 일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는 도중에 어르신들의 입으로 “아! 맞아” 하실 때는 말씀이 제대로 심기고 있구나 하고 제가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4 As he scattered the seed in the field, some of it fell along the path, and the birds came and ate it up.
그러니까 일단 사건은 일어난 것입니다.
씨앗을 제대로 뿌리면 100% 발아한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제대로 씨앗이 발아하고 성장하고 열매를 제대로 맺을 것인지 그런 염려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가을에 수확을 바란다면 몇 가지만 신경 쓰시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씨앗이 제대로 밭에 뿌려졌는가?
둘째로 돌 위에 떨어졌나?
셋째로 가시덤불과 자라지 않나?
그래서 씨앗은 이미 뿌려진 것이고 이 세 가지의 현실을 없애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치명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국을 기대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주의를 경솔히 여기면 나중에 지글거리는 불 위에서, 목사님이 눈뜨면 천국이라더니 여기가 어디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3. "잘 들어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3 “Listen! Once there was a man who went out to sow grain.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저에게 어려운 일은 씨앗을 뿌리는 일이었습니다.
갓김치가 먹고 싶어서 갓씨를 샀는데 이것이 얼마나 작은지!
이것을 뿌린 것인지 만 것인지 그런데 발아한 후에 보니 콩나물처럼 한 곳에서 우우 하고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저만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도 밴 것은 솎아 먹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바람에 날렸는지 마당 한가운데에서 갓이 나온 것입니다.
성경 말씀처럼 그것은 제 차바퀴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단히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우리 어르신 중에는 소를 몰아 논밭을 가셨던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난리는 수시로 났습니다.
가뭄이 들면 곡식들이 말라 죽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소 대신 콤바인과 트랙터가 농사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논과 밭은 네모반듯합니다.
거기에 농로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예 길과 밭의 경계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농부들은 씨앗을 가지고 쫙 뿌려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제대로 밭에 뿌려진 씨앗이 있었고 길에 뿌려진 씨앗이 있었습니다.
실은 길이 어디서부터인지 잘 몰랐습니다.
먼저 성경은 길에 뿌려진 씨앗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씨앗이 그대도 드러나 있을 것입니다.
흙에 씨앗이 덮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대로 새 모이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길 위로 떨어졌으니 사람 발에 밟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씨앗이 아주 경솔하게 취급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완전히 동일한 것입니다.
목사이니 여러분들과는 다른 성경이 아닙니다.
아주 똑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이 성경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저는 이전에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성구들은 외웠습니다.
여기 카드가 보이시죠?
이제는 성경의 본문을 통째로 복음서부터 암기하기로 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죽이고 살린다고 확실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말씀을 들으시면서 무슨 소리 죽으면 공(空)이지 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즉 성경의 말씀을 아주 경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이 시간이 끝나면 내가 무슨 소리 들었지?
말씀을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새들이 홀랑 먹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나님 말씀은 생명이다.
이것만 기억하세요.
오늘 요양원에서 이 말씀을 들었지!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5.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으므로 싹은 곧 나왔지만,
5 Some of it fell on rocky ground, where there was little soil. The seeds soon sprouted, because the soil wasn't deep.
둘째로 이 씨앗은 밭에 제대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랬으니 일단 발아는 한 것입니다.
하지만 식물이란 발아기를 넘으면 그것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돌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돌 위에 얇게 깔린 흙에는 뿌리를 깊게 내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럴듯했습니다.
하지만 밑으로 뿌리를 못 내리면 위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이 돌덩이는 밭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밭 안에도 돌멩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밭에 갓을 심어서 거기에서 나온 갓으로 김치를 담았습니다.
그런데 수확한 다음에 갓 한 그루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뽑아버리려다가 놔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무성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씨앗을 받은 것입니다.
그 작은 씨앗들이 편지 봉투로 두둑히 반을 넘어 채웠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백배라고 했는데 그것은 수천 배 수만 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저는 땅을 다시 뒤집어 파고 거기에 거름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봉투에서 꺼내 땅에 뿌렸던 것입니다.
그 씨앗이 편지 봉투에 들어있었더라면 전혀 발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땅에 묻히자 일어난 일입니다.
6.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6 Then, when the sun came up, it burned the young plants; and because the roots had not grown deep enough, the plants soon dried up.
뿌리가 제대로 내렸더라면 햇빛이 식물 성장의 필수적 조건입니다.
하지만 뿌리가 없다 보니 햇빛이 재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씨앗을 내린다는 것은 견뎌내는 일입니다.
주님의 해석에 따르면 돌 위에 떨어졌다는 것은
16. 돌짝밭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17. 그들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막4:16,17)
사람들은 신앙을 착각합니다.
신앙을 갖으면 고통스러운 일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그런 말이 아닙니다.
반대로 신앙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는 고통도 있습니다.
밭 안에 엄청난 돌멩이가 묻혀 있을 수 있습니다.
집사님이 권사님이 사모님이 목사님이 누가 자신의 돌멩이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되면 고난에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5. 또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자녀에게 말하듯이 하신 이 권면을 잊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주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라.
6.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훈련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자마다 채찍질하신다."
7. 주께서 여러분을 훈련하시거든 그것을 견디어 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듯이 여러분에게 대하십니다. 부모가 훈련하지 않는 자녀가 무슨 자녀이겠습니까?
8. 모든 자녀가 받는 훈련을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9. 우리가 육신의 부모도 우리를 훈련하는 분으로 모시고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복종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더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0. 육신의 부모는 잠시 동안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훈련하였지만, 영들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훈련하십니다.
11. 모든 훈련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생각되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연단받은 사람들에게 의로움이 깃든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히12:5-11)
7.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 그 기운을 막아 버려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7 Some of the seed fell among thorn bushes, which grew up and choked the plants, and they didn't bear grain.
주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18.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달리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 밖에 다른 일의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막4:18,19)
이 경우는 또 다른 것 같습니다.
뿌리도 잘 내리고 햇빛 받아서 성장도 잘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가시덤불 사이에서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면 가시덤불 사이에 자랐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이르는 것인가?
제가 듣기로 국회의원들의 2/3의 이상이 개신교와 카톨릭 교인입니다.
얼마 전 바이든이 날리면이라고 말한 사람도 기독교 신자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지나가지도 않은 사슴을 두고 그것이 방금 지나갔다고 말한 사람이 아닙니다.
온 백성들이 보고 있는 사슴을 향해서 저것을 말이라고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슴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말이라고 하면 다음부터 사슴은 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교회에서 하나님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것은 확실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직장에서 목 안 잘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가시나무 사이의 씨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미신 정부를 향해 미신을 지적하는 여당 기독교 의원은 없습니다.
사도신경도 잘 외우고 주기도문도 잘 외우고 일단 세상에 나가면 바이든이 날리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열매는 없습니다.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생이 없습니다.
그의 실상 소망은 재리와 일의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신앙 고백한 것들은 모조리 허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염려를 모조리 버리시라는 것입니다.
걱정거리들을 내가 잊고 있어도 머리 좋으신 하나님은 모조리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들은 지금 자신이 사도신경 잘 외우고 주기문 잘 외울 수 있다는 사실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8.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었다."
8 But some seeds fell in good soil, and the plants sprouted, grew, and bore grain: some had thirty grains, others sixty, and others one hundred.”
이 결과는 말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이미 그 판정은 다 나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밭에 떨어졌나?
돌 위는 아닌가?
아니면 가시밭에 떨어지지 않았나?
이 경우만 피했다면 수확은 자동으로 정해진 일입니다.
제가 처음 갓씨를 살 때입니다.
작은 봉투에 들어 있었는데 100개인지 200개인지 눈에 제대로 뵈지도 않은 것을 3000원에 샀습니다.
그런데 다 수확하고 버려진 하나에서 받은 씨앗이 퉁퉁하게 편지 봉투 반 넘어 채웠습니다.
그것을 셀 수가 없어 모르겠는데 수만 배를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말씀을 제대로 듣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에 가고 안 가고는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졸든지 자든지 비행기가 여러분을 제주도에 데려다줄 것입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하나님 나라에 데려다줄 것입니다.
9. 예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9 And Jesus concluded, “Listen, then, if you have ears!”
주님의 말씀은 잘 들어라는 경고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주님의 말씀은 아주 냉정합니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은 모르겠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으로 마칩니다.
헷갈릴 것이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 이야기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씨앗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딴 방법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말씀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 말씀을 듣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 일이 사람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백성들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 번은 마을 운동장을 슬슬 걸어서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야구 하던 미국 친구들이 달려오면서 떼거지로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watch out!”
뭔 소리?
왜 저래?
다음 순간입니다.
하늘을 나르던 야구공이 내 앞에 퍽 소리를 내면서 떨어진 다음에 그 영어가 해석이 된 것입니다.
아 “watch out!”
아! 보라고
아! 공 조심하라고
그 말이었구나.
하나님 나라의 말도 이렇게 들리고 안 들리는 사람이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더 길게 말하면 예정론이니 혹은 자유의지론이니 복잡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 즉 말씀이 제대로 들리도록 작업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찬양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신앙인이라는 딴 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제대로 들리는 귀를 가진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실은 여러분은 이미 그 백성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