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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50회. '300년전 여성군자가 쓴 요리백과 「음식디미방」' (1999.12.18.)
51회 : 300년전 여성군자가 쓴 요리백과 「음식디미방」
300년전 여성군자가 쓴 요리백과「음식디미방」
방송일: 19991218 조회수 : 2017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51회 300년전 여성군자가 쓴 요리백과 -음식디미방 99.12.18 (토)..더빙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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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스튜디오 1...
-블랙화면에 조명이 비추면
고서의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리고 멈추면 책의 마지막페이지이고 -여자 성우-
마지막페이지의 글씨가 뽑아져나온다. "이 책을은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배꺼가오되 가져갈 생각일랑 하지말고 부디 상치말게 간수하여 수이 떨어버리지
말아라"
-위의 C.G.글씨 제자리로 돌아가고 줌아웃으로 죽 빠지면 그 화면을 보고있는 유인촌 세트는 기본세트..
잠시후 돌아보며)
책을 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책이 영원히 보관되기를 바랄겁니다. 그러나 (손으로가리키며)
이렇게 책을 잘 보관하라는 말을 책속에 구구절절이 써놓는 경우는 드문데
(화면 보며)"딸자식은 배껴가되 가져갈 생각일랑 하지말고 떨어지지않게 잘 간수하라"
대체 무슨 책이길래 이렇게 소중하게 간직하라는 말을 거듭해서 당부하고있는걸까?
-뒤의 화면이 사라지고 MC 왼쪽으로 책의 음식디미방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는 페이지가 등장)
바로 이 책의 이름은 음식디미방입니다.음식디미방이라는 글씨 뽑아져나온다)
(글씨 보며)근데 음식디미방..?(고개 갸우둥) 앞에 음식이라는 말이 있어 음식에 관련 된 책이라는 건 짐작
하실텐데...
이 디미방이라는 말이 낯설겁니다. (잠시 포우즈)바로
이 디미는 한자어입니다. 알지(知)에 맛미(味)..그리고 방법방(方)-고어에서는 지 발음을 디로 했기 때문에
지미방이 디미방이 된겁니다..그러니까 음식디미방은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의미로 이 책은 요리책
입니다.
(시선 바꿔서) 요즘의 생각으로는 요리책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하실텐데...이 책이 쓰여진 건 지금으로부터
330년전인 1670년경...당시엔 요리책은 흔한 책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이 책은 안동에 살던 양반집 마나님인 정부인 장씨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뿐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여성이 쓴 최초의 요리책입니다.
때문에 내용도 한글로 되어있어 쉽게 읽을 수 있을 뿐만아니라 직접 음식을 했던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기록해놓은 것이기에 330년전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즐겨먹던 음식과 그 문화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
니다.
조선 양반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우선 이 책에 어떤 내용들이 담겨져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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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300년전의 요리책엔 어떤 내용이 담겨져있나?..(요리백과사전이다.)
-경북대학교로 찾아들어가는 PD 7"
-경북대학교로 틸업하면 현재 책이 보관되어있는 곳은 경북대학교 도서관의 고서실-
-안으로 들어가서 책을 집어들고
-현장음-
"이 책이 바로 규곤시의방입니다.
규곤은 여자들이 거처하는 안뜰..규방이라는 뜻이구요..시의방은 옳은 뜻을 풀이해서 쓴 방법이다..
표지에는 이렇게 규곤시의방 이렇게 되어있는데 한 장을 넘겨서 안을 보면 책이름이
다시 음식디미방..이렇게 나온다..
음식디미방은 장씨부인이 직접 손으로 써놓은 기록이고 표지에 있는 규곤시의 방은 장씨부인의 남편인
이시명어른께서 이 책의 외형적인 품격을 갖추느라고 나중에 써서 종이에 붙인거다."
-음식디미방으로 줌인 11" 저자가 직접 쓴 <음식디미방>이라는 책이름은 책의 첫머리에 한글로 쓰여져있었다.
-책 넘긴다. 15" 책엔 음식과 그 조리방법이 빼곡이 기록되어있었는데 우선 눈에 띄는 건 글씨체였다.
-보다가-
-"자라탕" 설명 끝나고 페이지 18"
넘기면 종이 가득 써내려간 글씨가 반듯해 책을 쓴 이의 정성과 성품이 느껴진다.
또한 책내용을 보면 각각의 음식에 대한 조리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을뿐만 아니라 음식을 종류별로 나눠서
채계적
-음식디미방 C.G. 23" 으로 정리해놓고 있다.
국수와 만두를 포함한 면병류,/ 어육류,/채소와 과자를 모아놓은 소과류,/
그리고 주류까지 그 종류가 모두 146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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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현교수님(21 4735)
오늘날에 이 자료를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들로 봐서는 당시 사람들이 무슨 재료로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
가를 그대로 알 수 있는 생활문화사적 가치가 큰 자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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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성선생 집 찾아가기 15" 음식디미방엔 어떤 음식들이 있는지
-책 꺼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위해 궁중요리연구가인 황혜성씨를 찾았다.
-책을 책상위에 놓다 -3-4"흘리다가-
-책을 펼친다. 8" 황혜성씨는 음식디미방을 처음으로 현대말로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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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성인터뷰( 16 1920)
시골의 양반음식이 어떠했냐를 알게되는데에 눈을 뜨다 그저 궁중음식만 반하다가 양반들도 먹고 살았는데
이렇게 귀한게 어딘가..내가 하두 감격을 하니까 우리 전수하는 사람들이 감격하는 책이 어떤 책이냐 공부
하자고 해서 공부도 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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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13" 최근엔 음식디미방에 나온 음식 중 46가지를 직접 만들어 슬라이드촬영을 해 당시의 음식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현장음-
"이거는 책 처음에 나오는 만두하고 국수류거든요..."
-사진들 14" 만두와 국수도 재료나 모양에 따라
-석류탕 가지각색이다. 석류모양의 만두인 석류탕/
-상화 지금의 찐빵과 같은 상화/
-숭어만두 그리고 숭어로 만두피를 만든 숭어만두도 있다.
-밤설기 -보다가-
-앵도편법 8" 그런가하면 앵두와 설탕을 조려 응고시킨 지금의 젤리와같은 음식도 있다.
-자라탕 -보다가-
-C.G.(채소류) 28" 이외에 반찬도 다양하게 소개되어있는데//
-C.G.(육류) 특히 육류중엔 개고기와 생치 즉 꿩고기 요리가 많다. 농사에 소가 귀하게 쓰이던 시절..
흔한 개와 꿩이 육류음식을 대신했다.
-C.G.(해산물) 이렇게 음식디미방에는 재료별로 다채로운 요리들이 담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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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려선생 인터뷰 (18 2002)
이 책에 나와있는 음식들은 일상적으로 먹는 게 아니고 별미가 나온다.
밥이라든가 이런 흔한 반찬종류는 별로 없고 국수를 해먹어도 오미자국에 띄운다든지 석이가루를 썼다든지
이런 귀한 재료를 많이 썼기 때문에 특별한 날 맛있게 해먹는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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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간수법 14" 뿐만아니라 음식디미방에는 음식을 보관하는 지혜도 있다.
복숭아를 밀가루죽에 넣어두면 겨울에도 싱싱하게 먹을 수 있다고 적고있는데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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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완섭 인터뷰 복숭아를 밀가루풀에 넣는 건 아주 좋은 방법인데요 복숭아도 호흡을 하면 영양이 소모되고
수분이 날라간다
그러니까 이걸 밀가루풀에 집어넣으면 빠져나가는 수분을 막아주고 또 설사 수분이 빠져나가더라도 흡수가
되겠지..그 다음에 어차피 호흡하면 영양소가 소모되니까 밀가루풀에서 탄수화물이라는 영양소가 복숭아속
으로 들어가겠지
왜냐하면 복숭아속에 있는 것도 주로 탄수화물이거든 그러니까 그게 빠져나가더라도 풀에 있는 영양소가 들어
가니까 말하자면 복숭아와 밀가루풀사이에 영양의 균형을 맞춘다는거다. 그러니까 아주 현명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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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간수하는 법 11" 가지를 보관할때엔 뽕나무재에 넣어두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재의 살균력을 이용한
것이며//
-전복 간수하는 법 12" 생전복을 참기름에 넣는 건 공기를 차단시켜 전복을 싱싱하게 보관하기위한 것이다.
-비시나물 쓰는 법 16" 그런가하면 지금의 비닐하우스와 같은 방법을
자막이 나온다 이용해 겨울철에 채소를 길러먹는 방법이 소개되어있다..
겨울에도 야채와 과일을 즐기기위한 지혜가 발달되어있었던 것이다.
"마굿간앞에 움을 파고 거름과 흙을 깔고 쉬엄취,산갓,파,마늘을 심고 -본다-
그 움위에 거름을 더 퍼부으면 움안이 더워서 그 속의 나물이 싹이 나서 자라면 겨울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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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음식디미방 관련책들이 뒤에 걸려있고..)
(고개 끄덕이며) 온실재배로 인해 음식에 제철이라는 개념이 없어진 건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이미 330년전에 비닐하우스와 같은 기법을 이용해 겨울철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었다니 놀랍군요...
뿐만아니라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의 음식보관법도 다양하게 발달되어있었는데요....//
이렇게 이 음식디미방에는 146가지에 달하는 양반들이 즐겨먹던 음식뿐만이 아니라 생활의 지혜까지 꼼꼼이
적어놓고 있습니다. 뭐 음식에 관한한 없는게 없는...//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음식백과사전인 셈입니다.
(시선 달리 해서)더욱이 이 책은 음식을 종류별로 나눠서 정리해놓았기 때문에 원하는 종류의 음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요..이렇게 방대한 양의 요리들을
체계적으로 꼼꼼하게 정리한 사람은 330년전 안동에 살던 양반집 마님인 정부인 장씹니다.
(한 호흡 쉬고) 정부인 장씨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러한 요리책을 남겼던 것일까?
그런데 정부인 장씨는 이미 우리에게 알려졌던 인물입니다.
기억하는 분들 계실지 모르겠는데 지난 11월에 문화의 인물로 지정되기도했고//
이미 2년전에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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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음식디미방의 저자,정부인 장씨는 누구인가?
-서재로 걸어올라가기 8" 정부인 장씨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보기위해 이문열씨를 찾았다.
소설<선택>엔 정부인장씨
-선택책에서 줌아웃 6" 의 삶이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쓰여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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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인터뷰 정부인 장씨같은 경우는 제게 직계 13대할머니가 됩니다.
그러나 제가 <선택>의 주인공으로 정부인장씨를 선택한 건 제 사적인 관계때문이 아니고
이 할머니께서 보여주신 삶이 우리가 흔히 현모양처..가정적인 성취도 충분히 이루었고 아울러 사회적인
사회성도 가지고 있어..어떤 여인 못지않게 뛰어난 분이어서 우리 사회 이상형이 될 수 있다고
보아서 선택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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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실기 22" 이문열씨가 소설의 자료로 이용한 것은 정부인 장씨 실기-
(4-5"띄우고)
숙종때 이조판서까지 지냈던 갈암 이현일이 어머니인 정부인 장씨의 팔십평생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차 트래킹 6" 실기에 의하면 정부인 장씨가 태어난 곳은 안동 금계리-
-경당으로 들어가는 PD와 장흥효 11" (걸어들어가는 그림 좀 흘리다가)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인 1598년 안동장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족보 살펴보기 19" 안동장씨 족보에 의하면 정부인 장씨는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다.
-현장음-
"이 분이 무남독녀로 낳아서 키운 분이 정부인 장씨다.."
-광풍정 15" 경당 장흥효는 조선중기의 대학자로 집 가까이 광풍정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냈던 인물이다.
-제월대로 틸업 7" 관직도 마다한 채 평생을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는데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경당문집 13" 이러한 경당 장흥효가 서른다섯살 되던 해, 뒤늦게 얻은 자식이 정부인 장씨다.
장씨는 자연스레 학문을 접하게 되었고 그 수준도 높았다.
-전가보첩 13" 전가보첩은 장씨가 10살전후에 쓴 시를 수로 놓아 모아놓은 것으로 이 시를 통해 장씨의
학문적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성인음 감상 15" -좀 보다가-
"성인과 같은 때에 나지않아서 성인의 모습은 뵐 수가 없지만 성인의 말씀은 들을 수 있으니 성인의 마음을
볼 수 있네"
장씨의 시엔 조선시대 여느 여류시인들의 서정적인 시와는 다른 성리학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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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환 인터뷰 장씨부인의 시 작품은 바로 이런 퇴계의 심학의 주류적인 맥락속에서 영특한 장씨부인의
이른 10여세의 이른 나이에 심학에 대한 지성적인 자각하에 쓰여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사적으로 음미하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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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실기 15" 실제 실기에 의하면 정부인 장씨는 소학과 중국의 역사서인 십구사략을 공부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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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용인터뷰 (테이프 15...2714)
당시 보통여자는 소학은 기본일뿐아니라 소학의 위인 사서오경 그리고 현실에 실제 적용할 수 있는 현실
경험인 역사책..
십구사략을 모두 공부한 걸로 되어있다. 그리고 15세 전후에 남아있는 시는 수준이 높아 중국의 고서와 전부
관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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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발시 13" 정부인 장씨는 글씨도 능했다고 한다.
지금은 초서체로 쓴 학발시만이 남아있는데,// 당대 최고의 명필가인 청풍자와의 일화로 그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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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현인터뷰
하루는 청풍자께서 친구에게 노는 겸 찾아갔겠지요..찾아가서 여러 가지 고담준론을 하다가 글씨에 미쳐서
경당께서는 이 사람에 나한테 글씨 좀 남기고 가게 해서 쓰신다.쓰시고 난 뒤에 아버지 경당은 당신 외동딸이
쓴 글씨를 보인다 청풍자는 처음 그것을 보더니만 이게 과연 우리나라 사람 글씨 이렇게 잘 쓴 글시가 있나
이 글씨는 조선사람의 글시와 유를 달리한다 내가 처음 볼때는 중국의 대가의 글씨인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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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역서화징 20" 조선시대 서화가들을 소개한 책인 근역서 화징에 의하면 장씨는 그림실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그림은 열살즈음에
-호랑이 그림 그렸다는 호랑이 그림으로 사실적이고도 힘이 있다....
-정부인 영정 15" 이렇게 학문적인 소양과 재능을 갖추었기에 정부인 장씨는 체계적인 요리책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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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한옥...)
(정부인 장씨 영정 뒤에 걸려있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은 교육을 받지못했습니다.
남자들이 사서삼경을 배울 때 여자들은 여사서라고 해서 여자들이 지켜야할 법도와 예절을 배웠습니다.
(자막 프레이..제작편집할 때)
그런데 대학자의 집안에 무남독녀로 태어난 정부인 장씨는 집안의 분위기와 타고난 총명함으로 인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수준도 높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선비들의 교육과정 중 최고의 수준이라는 시경 서경까지 터득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러한 학식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이런 체계적인 요리책을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분위기전환..돌아서며)
사실 이 음식디미방이 나오기전에 요리책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수운잡방 화면에 등장) 이 책은 <수운잡방>이라는 요리책인데 음식디미방보다 100여년 전인 1540년에 김수
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도문대작 화면에 등장)
그리고 이 책은 <도문대작>으로 1611년 바닷가로 귀양 간 허균이 유배지의 거친 음식들을 먹게되자 전에 먹던
좋은 음식을 생각나는대로 적은 책입니다.
이 책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있을 뿐아니라 음식에 대한 간단한 소개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한호흡..)그런데 이 음식디미방은 146가지 음식의 조리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이전의 책들과는 달리 조리방법에 대한 정보를 주는 본격적인 조리서인 것입니다.
더욱이 각각의 조리과정에 대한 설명이 어찌나 자세하고 구체적인지 지금도 이 책을 보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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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 실증적인 요리서로는 최초다.(짧게...4-5'...짧고 스피드하게..책과 조화를 시켜야..)
-음식디미방의 탁면법부분 20" 음식디미방의 특징은 조리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지금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수의 일종인 탁면법을 책에 쓰여진 방법대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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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려인터뷰(테이프 17 3303)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탁면법에 대해서 할텐데 탁면은 녹두로 녹말을 만들어서 그걸 화채로 만들어서 먹는
방법이다 여기 오미자와 깨가 있어서 그 국물에 만드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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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그림 타이트 5" -음악(보다가)-
-탁면법 첫 부분 20" 탁면법의 처음은 녹말가루를 만드는 방법 부터 시작된다.
녹두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뒤 맷돌에 갈으라고 적고 있다.
-직접 만드는 모습 35"
-현장음-
"여기 불려서 이만해졌거든..이걸 벗겨야돼 벗기는 거를 이게 지금 이렇게 보면 그릇이 도돌도돌 하잖니 이게
바로 옛날에 보리쌀 벗기고 으깨면서 벗기는거거든.."
지금처럼 시중에서 쉽게 녹말가루를 구할 수 없던 때- 가루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국수나 만두조리법에는 가루를 내는 방법을 조리법의 첫머리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해당부분 19" -보다가 자막 나오면-
녹두를 갈은 뒤엔 가는 체로 건더기를 걸러내고 또다시 모시베로 걸러내라고 적고 있다.
조리과정에 필요한 기구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가는 체에 걸르는 모습 5" -현장음-
-모시베에 넣고 17" "체에 받친 걸 넣어볼께..거품이 나오잖니 이렇게 놓고 짜는거야.."
책에 쓰인 방법대로 가는체와 모시베를 이용해 녹두물을 걸러냈다.
이렇게 여러번 걸러내는 건 고운 가루를 내기위한 것으로 이 과정에선 특별한 조리기구를 써야한다.
-질그릇에 담기 14" 음식디미방에선 단계별로 필요한 조리기구를 정확하게 써놓고 있어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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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기구들앞에서 인터뷰 *한복려인터뷰(테이프 18 5000)
이 음식디미방에는 조리할 때 어떤 재료를 쓰라는 것이 단계별로 되어있다.
그래서 체를 예를 들자면 여러 가지 종류가 나오는데 체 입자에 따라서 고운 것 그러니까 깁체 또는 총체라고도
하는데 또 중간체가 되겠고 이건 굵은 걸로 어레미라는 거...
발을 어떻게 곱게 하느냐에 따라 체이름을 다르게 부르고 또 한가지는 이 발을 뭘로 만드느냐에 따라 총체 말총
만들었다든지 그런 표시가 있다
그다음 이런 건 가루를 내릴 때 고물을 내릴 때 쓰지만 녹말을 만들어야할땐 아주 고운 걸 내려야할땐 이런
주머니를 써서 주머니나 보자기를 쓰거든요..그것에서도 베를 썼다든지 모시를 썼다든지 명주주머니를 썼다든지
그런것도 명확하게 되어있어서 얼마나 과학적으로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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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의 노란물을 부우면 녹말가루 가라앉아있다. 10" -자막.(음악).-
-물붓는다 10" 책에 소개된 대로 녹두를 갈아서 짜낸 물을 그릇에 담아두면 이렇게 하얀 액이 바닥에 가라앉는데
이것이 녹말가루다.
-긁어내 말리는 기름 10" -자막(음악)-
-가라앉은 액을 긁어낸다.. 12" -현장음-
"한지에다가 쏟아놓는거야..이렇게 떠서..가라앉은거를"
-말리는 모습 7" 이제 가루를 말려서 찧으면 녹말가루가 된다.
-녹말가루 2" -현장음-
"말리면 덩어리가 져있어 그래서 곱게 빻은거야"
-국수 만드는 과정 13" -자막(음악)-
다음은 녹말국수를 만드는 과정이다.
녹말가루 한홉을 물에 타 양푼이라는 용기에 담아 뜨거운 물에 익히라고 적고 있다.
-한홉 담는다 -현장음-
16" "한홉이면 너무 되지않게 하라는 말이 나와요 한홉이야.. 이게 한홉이라는거야..요새 말하면 한 컵이다.
한홉을 똑같이 해보자.."
-녹말가루 물에 타는 모습 6" 음식디미방은 요즘의 요리책처럼 음식재료의 양까지 정확히 적고 있다.
-양푼에 쏟는다.. 6" -현장음-
"여기에다 쏟거든..가루를 이렇게 편편히 쏟으라고 되어있어.."
-중탕하는 모습 8" 양푼은 지금의 쟁반과같은 그릇이다. 양푼에 녹말물을 넣어 뜨거운 물에 익힌다.
-국수 썰기 7" -자막(음악)-
-찬물에 떼어내기 6" 익힌 녹말가루를 찬물에 담는 건 잘 떼어내기 위해서다.음식디미방엔 이러한 세심한
부분도 빠짐없이 기록돼있다.
-써는 모습 7"
-오미자차에 마는 모습 6" -자막(음악)-
-오미자차 만든다 12" 오미자를 물에 우러낸 뒤에 고운체에 받치면 오미자차가 된다..
여기에 국수와 함께 얼음을 넣으라고 음식디미방엔 쓰여있다.
-얼음에 담는다 20" -현장음-
"그 책에 얼음을 넣으라고 되어있어.그러니까 이게 진한 맛이고 차갑게 먹는 음식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 옛날도 얼음을 어떻게 저장을 했는지 시원하게 하라는 소리 나온다..
얼음하고 국수를 만들었지..여기에다가 오미자국을 붓는거야.."
-오미자 붓는다 4" 이것이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탁면법이다.
-책 대처방법 4" 그런데 탁면법의 마지막엔 또 한가지 정보가 덧붙여져있다.
-한복려인터뷰 40" 현장음18 0727)
재미있는 건 여기에서 마지막에 오미자가 없거든 참깨를 갈아서 해라 그랬거든요
그게 바로 토장법이라고 나와있는데 깨색깔이 누릇하게 흙토자 붙여서 토장법이라고 한 것같다
그래서 이 방법은 정말 본인이 경험하지않고서는 이런 방법이 나올 수 없는데 생각해보면 새콤한맛..
또 한가지는 고소한 맛 이 두가지를 똑같은 재료를 넣어서 한다는 게우리가 볼 때 얼마나 지혜로웠나 알 수
있어요
-깨국에 말기 27"
이렇게 음식디미방에는 음식재료의 양이나 조리기구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있을뿐아니라 특별한 재료가
없을때 대체방법까지 소개하고있다.지금 이용해도 손색이 없는 조리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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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한옥...한상 차려진다)
(탁면 앞에 놓고) 자..이 요리가 녹말가루로 만든 탁면입니다. 오미자차에 말아서인지 색이 곱죠..
그리고 이 옆에 있는 건 깨국에 만건데...그럼 맛을 한번 볼까요..
(먹는다..) 이 오미자차에 만 국수는 새콤하면서 시원하네요...그리고 녹말국수는 묵처럼 입에서 씹히는 감촉이
부드럽고 담백한 맛이 있습니다.이번엔 깨국에 만 국수를 먹어보겠습니다(먹는다)
오미자차에 만 것과는 달리 고소한 맛인 납니다.. 뭐 지금이야 녹말가루를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집에서 간단히
해먹을 수 있는 별미로 손색이 없을것같은데..
(음식 내려놓고) 이렇게 이 <음식디미방>은 조리법이 상세하게 쓰여있기 때문에 지금도 이 책을 보고 그대로
재연이 가능합니다.때문에 당시 사대부가의 음식들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뿐만아니라 그 특징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돌아서면 한상 차려져있다.) 지금 여기 차려진 음식들은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대로 요리를 한 겁니다..
비교적 요리하기가 쉬운 것들로 10여가지를 만들어봤는데요..
(상 타이트) 자세히 보면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연근을 이용한 음식들도 보이고 가지찜..
참게젖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요즘은 보기 힘든 재료로 만든 음식도 있는데요..(동화누르미와 동화돈채 보며)
동화누르미..동화돈채? 실제 음식디미방에는 이 두가지 요리외에도 동화를 이용한 요리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자막으로 동화선 동화돈채)동화가 뭘까요..(상아래에서 동화를 꺼낸다.)
바로 이겁니다...호박과 비슷하면서도 크기는 더 크죠..예전에는 이 동화가 흔한 음식재료였는데 지금은 전국에
한 두곳에서만이 재배를 하고 있습니다.한 가지에 두세개의 열매밖에 나지않아 수지가 맞지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요리를 보면 또 한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 누르미라는 요립니다.
동화누루미..대구껍질 누르미?..(누르미요리 타이트) 이외에도 이 책엔 이렇게 누르미라는 이름이 붙여진 음식
들이 모두 6가지가 나옵니다. 상당히 즐겨했던 요리인 것같은데
누르미라는 건 이렇게 밀가루죽을 만들어서 음식위에 끼얹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하면 음식이 오랫동안
따뜻하게 유지 될 뿐만아니라 부드러워지기 때문에 먹기에 좋습니다.
이 누르미란 요리는 지금도 안동일부지역에는 남아있는 요리법인데 대개는 기름이 이용되면서 현재 누름적..
그러니까 음식에 밀가루를 입혀 튀기는 요리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음식디미방을 통해 당시 즐겨먹던 음식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변화발전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엔 이러한 다양한 음식외에도 술종류가 유난히 많습니다.
(진열대가 죽 생긴다..각각의 병에 이름이 붙여져있다.)
책에 소개된 술들을 죽 진열을 해보았는데 상당한 양이죠..총 53종류가 소개되어있는데 146가지의 음식 중 53
가지가 술이라...전체 음식의 3분의1가량이 술입니다.
(진열대 죽 훑어보며) 그 종류를 보면 (소주 글씨 나온다) 소주가 있습니다..지금도 안동소주는 유명하지요..
(이화주 나온다)그리고 배꽃이 피는 시기에 담그는 이화주도 있구요
(죽엽주 나온다) 대나무잎을 술독 위아래에 깔아서 술을 담궈 대잎의 향과 색을 낸다는 죽엽주도 있습니다.
(일일주 나온다)그런가하면 일일주도 있는데 대개 술은 보름이상씩 숙성시키는데
이 술은 아침에 담궈 저녁에 먹는 술도 있습니다. 재료나 숙성기간별로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술이 양반집에서
만들어졌던 것인데 왜 이렇게 많은 술을 만들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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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당시 양반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음식디미방
-장지현선생 집 외경 12" 우선 음식디미방에 나와있는 술의 종류를 분석하기 위해 전통주를 연구해온
장지현씨를 찾았다.
-현장음(보다가)-
" 맑은 술 청주는 24가지 정도.."
-분석표 18" 음식디미방에 가장 많이 소개된 것이 청주로 여러번 걸러내 맑게 뽑아낸 고급주다.
그 다음은 짧은 기간에 숙성시킨 뒤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쓰는 탁주로 청주에 비해 급이 낮은 술이다.
일일주는 여기에 속한다.
- 제조방법으로 나누면 이렇게 다섯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귀중본실
-자료 꺼낸다 10 양반집에서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술을 빚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보자기 푼다 35" 지난 89년 현풍곽씨문중에서 묘를 이장하던 중 관속에서 발견된 편지다.묘의 주인공은
정부인장씨와 겉은 사대에 살던 곽주라는 사람의 부인으로 1602년에서 52년까지 50여년간 곽주가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의 양은 모두 170매- 그 안엔 양반사회의 일상적인 모습들이 담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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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현인터뷰
이 편지의 많은 내용이 음식이나 술과 관계된 것이 많다 특히 술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군데 나오는데 대체로
당시 양반사회에서 술을 어떻게 썼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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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 부분 12" 편지엔 탁주의 쓰임새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자막 보다가-
종들에게 탁주를 내주라는 것이다. 돗수가 낮고 질이 좋지않은 탁주는 주로 종들을 위한 것이었다.
-맑은 술 부분 24" 그런가하면 맑은 술 즉 청주의 쓰임새를 알 수 있는 내용도 있다.
술 잘 먹는 친구들이 서울에서 오니 좋은 술을 내오라고 하는데 좋은 술은 바로 청주다..
그런데 음식디미방에 나온 술 중 그 종류가 유난히 많은 것이 청주다.
단지 손님 접대를 위해 그렇게 많은 청주가 필요했던 것일까?
-모현관외경 11"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서가 있다
-금고 열고 15"
책으로 줌인 되면 유희춘이라는 양반이 1567년에서 1577년까지 10년간 쓴 방대한 양의 일기가 그것이다.
이 미암일기엔 매일매일의 사소한 일들이 기록되어있는데 그 중엔 손님접대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일기의 한 부분 -현장음-
"진안에서 봉안사..하숙이가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시 한수를 읊었다.."
-손으로 가리키며 53" 그리고 --월 22일 기록엔 덕현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와 즐겁게 담소하며 술을 먹었
다는 기록이 있고//
-보다가-
바로 다음날인 23일에도 손님들이 와서 주과를 마셨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미암일기에서 손님이 찾아온 횟수는 10년간 모두 3,814회...거의매일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신 셈이다.
-보다가-
-미암일기 풀 14" 양반가에서 손님을 맞아 술을 대접하는 건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때문에 집에는 늘 술이 있어야했으며 술은 그 집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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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교수 인터뷰
외부에서 많은 손님들이 찾아올 때 술을 대접하게되고 그 술을 통해 그 집의 가풍이나 가격을 어느 정도 상징
할 수 있는 그런 작용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주부의 경우에는 어떡하면 우리 집의 신분적인 특권이 술을 통해
다른 사람과 차별적으로 확보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고심을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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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소주 술 붓는다 32" 지금도 안동의 일부 종가에선 전통주를 만들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안동소주로
음식디미방에도 소개가 되어있다.
소주는 곡주를 끓여 수증기를 받아내는 증류주로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청주보다 독해
여름철에도 잘 상하지않는다.
때문에 1년내내 집에 술을 보관해야하는 양반가의 여름용술로 사랑받았다.
그리고 소주외에도 양반가에선 계절별로 다양한 술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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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화인터뷰
봄 되면 진달레꽃술도 되고 또 4월5월되면
(생략)
담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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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팬 6" 조선시대 양반가의 손님접대문화는 다양한 술을 만들어냈다.
-양반 마주앉아있다 10" 정부인 장씨가 음식디미방에 특별히 53가지의 술제조 방법을 소개해놓은 것도
양반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좋은 술을 빚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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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한옥...)
이렇게 이 <음식디미방>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어떤 음식들을 즐겨먹었는지도 알 수 있을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양반가의 문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요리서가 아니라 조선중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역사서인 것입니다.
(정부인 장씨의 영정 뒤에 나타난다)이러한 귀중한 책을 남긴 것이 1600년대 안동에 살던 정부인 장씨-
사실 조선시대 여성이 책을 쓴다는 건 쉽지않은 일입니다.
시서화에 능한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도 작품들만 따로 남겼을 뿐 스스로 책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방대한 양의 음식조리법을 정부인 장씨는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아시는 분들도 계실텐데..정부인 장씨를 두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2년전 정부인 장씨를 주인공으로 하고있는 이문열씨의 소설 <선택>이 발표된 뒤 여성계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건 결혼이후의 정부인 장씨의 삶 때문입니다.
학문의 수준이 높고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던 정부인 장씨는 결혼 이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만 충실
합니다.
이러한 정부인 장씨의 삶에 대해 이문열씨는 소설 <선택>을 통해 재능이 많은데도 결혼이후 가정을 돌보는데
에만 전념했던 정부인 장씨의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를 들어 가정보다는 사회활동에만 가치를 두는
현대여성들의 생각을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여성계에서는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삶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현대여성들이 추구하는
삶에 역행되는 것이라며 반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러한 논란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정부인장씨의 삶에 대한 평가는 시대적인 배경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정부인 장씨 영정으로 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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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시대적인 소명에 충실했던 정부인장씨(정부인장씨의 치열하고 철저했던 삶)
-정부인으로 줌인되면 바로
(스튜디오 그림 활용) 2" 정부인 장씨가 살던 시대는 17세기-
-양반집 풀 5"
-양반집 현판 이 시기 여성들의 삶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된다.
-양반집안으로 죽 들어가는 카메라 17" 그 변화상을 볼 수 있는 단적인 예가 양반집의 구조다.
여성들의 활동공간이 집 안의 깊숙한 곳으로 옮겨지게된다. 안채가 따로 구분되어 집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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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수 인터뷰 ( 12 2750)
조선후기 사회로 오면 특히 가부장적인 권위가 강화되고 남녀의 내외법이 보다 분명하게 정해짐으로서 남성
공간과 여성공간의 분화가 엄격하게 적용되고
그것이 보편화됨으로서 사랑채와 안채의 분화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집도 그와같은 사례로 대표적으로 뽑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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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구조 C.G. 16" 가옥구조의 변화는 바로 남성중심사회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조선건국초기부터 시도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활동이 자유로웠던 고려의 사회분위기가 하루 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던 것이 17세기에 와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외법 그림 25" 이 시기 내외법도 강화된다.
남녀간의 자유로운 접촉이 규제되고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뚜렷이 구분된다.
따라서 여자들은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외출을 하더라도 얼굴과 몸을 가려야 했다.
-평교자 옥교자 11" 가마도 뚜껑이 없는 평교자에서 뚜껑이 있는 옥교자로 완전히 바뀌게되는 것이 17세기다.
왜 17세기에 와서 이런 변화가 생기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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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용인터뷰(20 1820)
17세기는 임진왜란이라든가 병자호란 양란을 거치며 그동안 이어져온 질서가 흐트러지고
그러면서 다시 복원하고 계승해야되는 그런 과제도 남아있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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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자료화면 16"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17세기 조선은 피폐해져있었고 사회기강마저 무너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나라를 다시 세우고 사회기강을 바로 잡기위해 유교적인 이념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족보 8" 이러한 시대에 살았던 정부인 장씨도 여늬 여성과 다르지않았다.
결혼을 한 뒤엔 내외법에 따라 가정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게된다.
-차 트래킹 6" 정부인 장씨는 아버지 장흥효의 제자였던 석계 이시명과 결혼했다.
-유적비 7" 그런데 종가가 있는 마을 입구엔 정부인장씨의 유적비가 세워져있었다.
-집으로 찾아 들어가고 8" -흘리고-
-사당으로 들어간다 13" 그리고 집안에서는 존경받는 어른으로 모셔지고 있었다.
-흘리고-
-위패 13" 사당엔 부군인 이시명과 나란히 위패가 모셔져있었는데 불천위였다.
4대까지만 모시는 일반적인 제사와는 달리 불천위로 영원히 모셔지고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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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우리집에는 이 세분을 제사를 지내는데 특히 정부인 안동장씨의 기일은 7월7석이어서 손님이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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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서당 21" 후손들은 정부인장씨를 두고 여성군자로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인 장씨가 재령이씨 집안에 시집온 건 열아홉살때다.
당시 석계 이시명은 서당에서 후학을 기르던 분으로 상처를 하고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정부인 장씨는 석계 이시명과의 사이에
-현판 16" 6남1녀를 두어 전처의 소생까지 10명의 자식을 길렀다.
그 중 일곱아들은 학자로 대성했을 뿐아니라 행실도 반듯해 주위에서 칠현자로 불리웠다
-창고의 문집 19" 일곱아들이 남긴 문집은 지금도 서당창고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특히 둘째 휘일은
<홍범연의>라는 정치철학서를 남겼고 셋째 현일은 퇴계 이황의 학풍을 잇는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문집 4" ------------------------------
이문열인터뷰(테이프 14 3210)
일단 옛날 체제에서 어떤 사람이 호와 문집과 정자를 가지고 있다면 일단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일곱분이
다 여섯자제분이 다 호와 문집과 정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건 단순한 부나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과 관계가 있는 것이고 또 그분들 저서를 다 모으면 옛날식책
으로 하면 과장 보태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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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12" 일곱아들 중 셋째아들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장씨에겐 정부인이라는 품계가 내려진다.
-행실기 10" 그리고 훗날 갈암 이현일은 일곱 아들이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던 건 정부인 장씨의 가르침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실기에 적고 있다.
-수비산 15" 뿐만아니라 실기엔 아내로도 현명했던 정부인 장씨의 일화가 소개되어있다..
당시 선비들은 명나라에 대한 신의가 두터웠다. 부군인 석계 이시명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해
가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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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현인터뷰(5 1740)
장부인이 생각하기에 좋은 제자를 만나서 학문을 가르쳐야하는데 영양골짜기에서 아무것도 하지못하지않느냐
어떻게하면 학문을 펴느냐 여러 가지 구상하는 중에 땅을 판다. 그래서 친정 5리 떨어진 곳에가서 땅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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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동 줌인 23" 그리고 동네이름을 "클대" "명나라명"의 대명동이라고 지어 부군 이시명을 마을로 내려오도록
했다. 지금도 이 마을을 사람들은 대명동이라 부른다...
이렇게 정부인 장씨는 지혜를 발휘해 남편을 마을로 돌아오게했고 이후 석계 이시명은 서당을 짓고 후학을 기르
는데 전념한다.
-경당고택 외경 7"
-경당집 정부인 장씨는 끊어질뻔했던 친정의 대를 이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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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진 인터뷰
출가한 이후에 경당할베가 상처- 어머니 돌아가시고 후사 없다.
그래서 주우에 수소문해서 계비를 얻어서 아들 둘 딸 하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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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당 집 16" 3년간 친정집에 머물며
어린 새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대소사를 치뤘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정을 시댁근처로 옮겨 어린 동생들이
성장할때까지 돌보았다.
정부인 장씨는 두 집안의 어른으로 그 역할을 다 했던 것이다.
**이배용인터뷰 ---------------------------
(20 2820)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친정 돌볼 수 있을 만큼 인정되고 그걸 통해 가족의 화합과 조화를 이뤄내는 건
장부인의 지혜라든가 당시 어른으로서 장부인의 폭넓은 역할 이런게 많은 족적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았나 생각되고
지금도 불천위로 정부인 장씨를 제사를 받드는 건 당시 남성중심의 가치를 서서히 변화시켜서 여성의 존재
가치를 읽깨워주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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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한옥...)
정부인 장씨는 인지한 어머니로 현명한 아내로 그리고 효심 가득한 딸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냈기에 300여년이 흐른 뒤에도 어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남자들 그것도 사회지도층인 사대부에 대한 최고의 호칭인 군자로도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부인 장씨가 나이 일흔에 쓴 것이 바로 이 <음식디미방>입니다.
책 뒷면에 이 책을 잘 보관하라는 당부의 말을 쓰면서 그 첫머리에
"이리 눈이 어두운데"라고 쓴 것처럼...침침한 눈으로 평생의 경험을 되살려 조리서를 써내려간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스레 <음식디미방>을 쓴 이유는 단 한가지,//
후손들에게 전하기위해서였습니다.음식조리법을 대대손손 전하기 위한 정부인 장씨의 마음-
이 책은 정부인 장씨가 팔십평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음식디미방>을 보면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146가지 음식중에 16가지 음식에는 음식이름밑에 맛질방문이라는 말이 쓰여있습니다.
(책속의 글씨가 C.G.로 뽑아서 나온다)맛질방문?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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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7 나이 일흔에 후손을 위해 자신의 지식을 집대성해 요리책을 남기다.
-황혜성선생과 함께 7" 맛질방문의 의미를 알아보기위해
음식디미방을 처음으로 현대말로 풀이한 황혜성선생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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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혜성 인터뷰(16 0620)
맛질이 뭐냐 백방으로 생각하다가.
맛있는 방법이다..방문이라는 건 방법이라는 뜻이거든..그러니까 이 어른이 맛있는 방법이 다하고 이렇게 여러
개로 열몇개를 죽 써놓은 걸로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이걸 해석을 해서 책까지 내놓은 다음에 문제가 있어
맛질이라는 소리를 외갓집에서 하더라.
그게 그게 아니구요 맛질이라는 동네가 있다구요 근데 그게 장씨네 외가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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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찾아가는 트래킹 5" 정부인 장씨의 외갓집이 있었다는 경북 예천으로 향했다.
-간판등에 맛질 있다. 7" 과연 맛질마을이 있었다...그리고 간판에도 맛질이라는 글씨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안동권씨 일족 -----------------------
(12 5230)
내고 알고있기로는 말을 캐러가는 길목이라서 맛질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이 고장에서 만드는 솜씨가 좋은 사람들이 살았다고해서 맛질이라고 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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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집터 손으로 가리키며 12" 이곳 맛질마을에 안동장씨의 외가인 안동권씨가 살았다.
지금도 일부 안동권씨들이 남아있고 정부인 장씨 외갓집터도 전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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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0626)
정부인 장씨의 외가집터라고 지금 이 근처에서는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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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 19" 정부인 장씨는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에게 듣고 배웠던 요리까지 음식디미방에 적었다.
자신이 알고있는 요리에 대한 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책을 쓴 것이다.
-안동대 수업 모습 20" 책에 쏟은 정부인 장씨의 정성은 글에서도 나타난다.
현재 안동대에서는 음식디미방을 이용해 고어에 대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정부인 장씨의 글엔 특징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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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귀남(7 0550)
한글이 쉽게 읽히고 쓸 수 있게 한다는 그런 장점을 가장 잘 살렸다 그러니까 문장을 하더라도 말하듯이 했다
라는 그런 측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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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에서 해당내용 c.g.로 18" 실제 내용을 보면 마치 며느리를 앞에 두고 말을 하듯이 쓰고 있다.
-음악(본다)-
한문실력이 뛰어난데도 굳이 한글로 써내려 간건 후손들이 늘 가까이에 두고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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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용인터뷰
정부인장씨께서 말년에 음식디미방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틀림없습니다.
거의 가보 비슷하게 보존하라는 말씀을 남겼다는 거다 이건 본인이 학문과 도덕으로 가문을 세우고 그 마지막
완결로 본인이 이제까지 노력해왔던 가정공동체에 대한 봉사- 또한 사회공동체에 대한 봉사로 음식디미방을
남겨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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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발문(프롤로그의) 19"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길 바랬던 정부인 장씨의 마음-
그 간곡한 바램이 <음식디미방>곳곳에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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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징 (기본세트에 책과 정부인장씨 영정 이미지그림이 등뒤에 펼쳐져있다)
그동안 우리 선조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밝히는 일이 쉽지않았습니다.
조선시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유교적인 사회분위기속에서 요리 관련서적이 거의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조선중기 양반가의 음식들을 들여다봤습니다.그리고 당시 양반문화도 살펴봤습니다.
그건 일흔나이에 정성스레 자신의 평생의 경험을 써내려갔던 한 여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146가지 음식의 조리방법을 한자한자 꼼꼼하게 써내려갔을 노년의 정부인 장씨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책안에
담겨졌을 정성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가는데요,
이 한권의 요리책은 그러한 정부인 장씨의 치열했던 삶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한호흡)오늘 <음식디미방>이라는 요리책을 통해 만나보았던,/ 330여년전 이 땅에 살던 한 여인,정부인 장씨-
그동안 여성으로서 정부인 장씨의 삶에 대해 이견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부인 장씨의 팔십평생은 여성이 아닌 한 인간의 삶으로 바라봐야하지 않을까요 그 터전이 가정이든
사회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삶- 그것이야말로 가치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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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프 1
<< 백교수 인터뷰 >>
4531
서고로 찾아들어가는 두사람
책 꺼내며.."이 책이 바로 규곤시의방입니다.
책 맨앞에 장씨부인의 남편이 쓰신 한시로 새색시가 시집 와서 시부모님의 입맛을 몰라서 망설이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가 됩니다.
본문에서 만두법이라 든지 여러 가지 탁면법 상화법 요리법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맨 끝에 장씨부인이 직접 쓰신 발문이 있습니다. 발문의 내용은 이책이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잘 알아서 쓰인대로 시행을 하고 딸자식들은 이 책을 배껴갈 수는 있지만 가져갈 생각은 절대
하지말라..잘 간수해서 떨어지지않게하라.."이런 당부의 말을 적고 있습니다.
4726
서고로 들어가는 두사람 위와 같은 사이즈
바로 여기에 그 책이 있습니다. 규곤시의방..책을 넘겨서 보면 장씨부인의 남편이 쓰신 한시가 있습니다.
새색시가 시집 와서 첫날에 부엌에 내려가지만 시부모님들의 입맛을 몰라서 망설이고 있다.
그다음에 이렇게 본문이 시작되는데 면병류라고해서 면으로 만든 음식이나 예를들면 만두라든지 떡 만드는
방법..증편법..송이버섯을 넣어서 만드는 빈자법이라고 해서 지금으로 말하면 빈대떡 만드는 방법이라든지
이렇게 해서 모두다 145가지의 종목에 대해서 아주 꼼꼼하고 정밀하게 쓰고 있다. 이렇게 음식에 대해 자세
하고 치밀하게 쓸 수 있었다는 건 이 분이 가지고 계신 학식이라든지 사물에 대한 지식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매우 탄탄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책의 맨 마지막부분에 보면 책의 발문이 나와있다.
내용을 잠깐 볼까요 " 이 책을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잘 알아서 이대로 시행하고 자식들은
각각 배껴서 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은 하지말로..잘 간수해서 십게 떨어지지않도록 하라..
이렇게 책을 만들고 당부말씀을 하고 있는 아주 꼼꼼하고 치밀한 성품을 볼 수 있다.
4530
규곤시의방 제목
"규곤시의 방인데요..주방에서 여자들이 쓰는 음식관계를 설명한 책이다. 책이름도 음식 디미방으로 되어있는데
이 부분은 직접 장씨부인이 쓰신건데 처음 시작할 때 면병류부터 시작한다..
면은 가루로 된 것으로 만두법 싀면법 토장법 탁면법 석류법 이렇게 면류가 끝나고 면류가 끝난 뒤 어육류로
이어진다..어육류는 생선이나 고기로 만든 여러 가지 음식을 설명한 책..이 중에는 게젖담는 법이라든지 열탕이나
자라탕 만드는 방법까지 설명되어있다.
이러한 어육류가 끝난 뒤에는 주국방문이라고해서 여러 가지 술만드는 방법 양조볍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양조법에는 여러 가지 재료를 써서 각각 만드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우리가 지금 흔히 알고있는
소주..소주 만드는 방법도 네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네가지가 각각 조금씩 달라서 소주의 독특한 맛을 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체 합쳐서 145개항목의 음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5133
(위와 같은 사이즈)
규곤시의방..이 책이 바로 음식조리서로서 우리 아시아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진 책이다
(넘긴뒤)표지에 장씨부인의 부군이신 석계선생이 한시로 이렇게 새색시가 시집을 와서 처음에 주방에 들어갔는데
시부모님 입맛을 몰라서 망설이고 있다. 그다음에 음식디미방..장씨 부인이 직접 쓰신 글씨로 면병류..
면에서 부터 시작을 해서 여러 가지 음식조리법을 꼼꼼하게 써놓았다.
만두법..만두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고 상화법..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서 이 전체 합쳐서 145개의 조리
법을 아주 자세하고 치밀한 글씨로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을 따라서 음식을 만들어보면 그대로 만들
수 있을만큼 아주 설명이 자세하게 잘 되어있다.
그리고 맨 끝항목에 가면 여러 가지 술을 만드는 방법이 나와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먹는 소주,,
지금 뭐 안동소주의 전통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소주 만드는 방법이 네가지가 있는데 소주 먹는 방법이 네가지로
나눠서 갖가지 조금씩 다른 방법이 있다.
밀소주 소주 찹쌀 소주해서 재료에 따라 다르고 방법이 약간 달라서 맛을 제조법에 따라 맛을 달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내용이 끝나고 맨 끝에 장씨부인이 직접 쓰신 발문이 있는데 그 내용을 잠깐 보면 그 책을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너희들 여기 있는대로 시행해서 딸 자식들은 각각 배껴서 가져 갈 수는 있지만
가져갈 생각은 하지말아라..여기서는 조리서를 짓고 잘 간수해서 쓰길 바라는 장씨 할머니의 마음가짐을 오늘날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414
(두사람 앉아서)
이 책이 표지에는 규곤시의방이라고 되어있고 이 안의 책이름은 음식디미방 이렇게 되어있다.
이렇게 두가지 이름이 된 건 정씨 부인이 지었던 이름이 음식디미방이고 규곤시의방은 부군인 이시명선생이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장씨 부인이 17세기 중엽과 후기에 사시면서 안동과 영양 영해 일대에서 음식을 만들고
조리를 했던 여러 가지 방법을 설명한 그런 책이다. 그래서 조리법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설명들이 있고 전체
합쳐서145개항목의 조리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분리는 면병류 면가루로 만들거나 또 떡에 관한 음식들 또
어육이라고 해서 고기나 생선으로 만드는 음식들 그리고 주국방문이라고 해서 술을 만드는 방법이 쓰여있고
마지막에 초 만드는 방법까지 되어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음식제조법이 설명되서 우리나라 옛날 조상님들이 어떻게 음식을 해서 만들었는지 음식생활사에
아주 귀중한 자료고 이런 자료는 동아시아에 걸쳐서 가장 빠른 자료로 알려져서 가치있는 책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에는 많은 우리말 어휘들이 담겨있다 음식재료 조리법 동사 형용사들 그래서 이런 어휘들이 우리 국어
역사를 연구하는데 다른 어떤 자료도 없는 그런 많은 어휘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또 이 책에는 조리법 나오는 것중
에 몇가지 중복되는 것들이 있다. 같은 이름으로 조리법항목이름이 같은 게 두 번씩 나오는 게 있는데 그것은 이
재료를 약간 달리하거나 방법을 달리해서 맛을 다르게했던 그런 조리법까지 적어놓고 있다.
그리고 이 조리법중에는 밑에다가 맛질 방문이라고 적혀있는 게 있다.
이런 맛질방문이라고 적은 게 16가지가 있는데 이 맛질방문이라는 건 장씨부인이 친정에서 배웠던 조리법을 따로
맛질방문이라고 구별해서 적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장씨부인이 시집 와서 배웠던 조리법과 친정에서 배웠던 조리법이 이 책에 같이 포함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말이 많이 있는데 뒤에보면 쌀이름중에 윗단이 쌀 오려쌀 난경자쌀 이런
쌀이름이 나온다.
올벼살 밑단이 쌀 논경자쌀 이런 건 당시 벼 품종이라고 보이는데 이게 도대체 어떤 품종인지 밝혀내지못하고있다.
여기에는 양념재료도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호초 천초 호초는 후추고 천초는 산초라고 부르기도 하고 지방에
따라 달리 불리는데 이 두가지로 여러 가지 음식에 양념을 하는데 이 두가지가 25번이나 반복을 해서 나온다.
음식마다 양념을 넣게되니까 그렇게 나오는거다.
여기에 비해 고추는 나오지않는다. 고추가 17세기 후기에 나오지않는다 오늘날 영양이 고추로 아주 유명한데 이
시기 고추가 아직 재배가 안되었거나 이런 걸로 보인다
임진왜란때 고추가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이런 깊은 산골까지 들어가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않았을까..
조리와 관련된 것중에서 아주 재미있는 말들이 나오는데 이런 게 있다.
밥솥에 밥을 할 때 물이 걸어서 질벅하는 걸 표현하는 낱말이 물이 질번질번하다. 질번질번하거든 거기에다가
가루를 넣어라..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 또하나 물동이에 물이 넘칠라말라하는 걸 자라자라하다라는
낱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고어사전에도 없는 그런 낱말로 이 책의 우리말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상당히 재미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들을 볼 때 다시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조리법과 관련된 음식생활사연구..이게 이 자료가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또 우리말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또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장씨할머니가 직접 써놓은 당부의 말을 보면 이 책을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내뜻을 잘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내용을 배껴가되 이 책을 가져갈 생각은 절대로 하지말아라.
부디 이 책이 상하지않게 잘 보관해서 떨어지게도 하지말라..
이 책이 아주 340년이나 그렇게된 책인데 깨끗하지않나 이렇게 깨끗한 건 장씨할머니 자손이 잘 지켜서 오늘날
우리가 17세기 사람들이 음식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게해주고 역사를 연구할 수 있게 해준 좋은 자료다.
장씨 할머니가 이 책을 지은 건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당신께서 알고계신 조리법을
0219
(타이트 인터뷰샷) 어떻게 경북대도서관에?
규곤시의방이 원래 존재 이휘일의 종택에 있다가 1958년에 경북대학교 --라는 이름으로 도서관에 기증-
그래서 그 기증된 책을 당시 경북대 국문과의 김사엽박사님이 보시고 60년도에 논문을 쓰셔서 발표를 한거다
그렇게해서 세상에 알려진거다.
0300
처음 어떻게 발견?
이 책은 원래 안동장씨 부인의 아들이셨던 존재 이휘일선생의 종가 영해에 있던 종가에 보존되다가 1958년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원지--문고라는 문고로해서 기증이 됐다.
당시 경북대 국문과에 계시던 김사엽박사가 이 책을 보시고 논문을 쓰셔서 학계에 소개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
지게되었다.
0345
제목이 두 개?
그 표지의 제목은 한문으로 해서 규곤시의방 - 규곤은 규방이라는 뜻이고 시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 의미..
규방에서 쓰는 여러 가지 내용들을 올바르게 표현한 책이다했는데 이런 제목에서 속에 열어보면 음식디미방이다..
이렇게 되어있다. 음식디미방은 장씨부인이 직접 붙인 명칭이고 규곤시의방은 남편이셨던 이시명선생께서 책의
외형적인 품격을 갖추느라고 나중에 쓰신 것으로 판단된다.
음식디미방이란 뜻은 음식의 맛을 잘 내는 방문이다는 뜻이다.
지미는 알지자로해서 지미를 한글로 표현한거다.
0501 이 책의 대단한 점은?
음식조리서로는 17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해서 나와서 우리 동아시아에서 제일 오래된 책으로 알려져있다
내용을 보면 분류가 면병류 어육류 그리고 주곡방문을 해서 양조류 또는 식초 만드는 방법..
이렇게 체계적으로 분류되어있고 그 안에 각각의 조리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설명방법이 아주 세밀하고
체계적이어서 그것을 따라서 음식을 만들 수 있을정도로 잘 되어있다.
그걸로 봐서 오늘날 연구하는 사람들로 봐서는 17세기 중 후기에 우리 조상들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먹고 살았
는가 그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에 어떤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생활문화사적 가치가 아주 크고 그 다음에 이 책에는 당시의 언어 17세기 중후기 우리말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데 특히 음식조리서다보니까 음식재료명칭 여러 가지 곡식명칭이라든지 채소명칭 그런 재료명칭이 많이
나오고 조리를 하는 방법을 설명했기 때문에 동사들 조리음식된 상태를 설명하는 형용사들 이런 것들이 아주
풍부하게 다양하게 있다. 그런 낱말등 중에 절분절분하다
자라자라하다 물이 찰랑찰랑한 건 자라자라했다든지 밥솥에 물기가 질벅거리는 모습을 절번절번하다든지 이런
표현들은 참으로 다른데선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어휘들이다. 이런 점에서 가치가 있다.
0724
음식종류는 얼마나 되고 주로 어떤 음식들?
음식 전체 종류는 145가지..종류가 있다.그 중에 면이나 떡으로 만든 음식이 18개가 있고 어육류라고 해서 생선
이나 고기로 만든 음식이 73가지..그다음에 주국방문 양조법으로 소개된 것이 51가지 초만드는 법이 3가지
그래서 전체가 145가지 아주 많은 조리법이 있는데
그 안에 조리법은 만두 만드는 법이 있고 오늘날 우리가 친밀한 빈대떡 만드는 방법..각종 탕을 만드는 방법..떡을
만드는 방법...고기를 가지고 요리하는 방법..예를 들면 양고기삶는 방법..질긴 고기 삶는 방법..또 개고기 삶는
방법..개와 관계된 요리도 다섯가지 정도가 나온다. 그래서 당시 개장국이라든지 이런 것이 당시 양반사회에서
상당히 많이 애용된 음식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 다음 술종류도 많이 나오는데 대체로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집안에서 만드는 가양주..향토주로도 볼 수
있고 그런 술종류가 많이 설명되어있는데 그 중엔 오가피주 오가피주 설명보면 아주 특이하다 오가피주를 먹으면
나이는 삼백살을 살 수 있고 아들은 서른을 나을 수 있다 이런 중국에서 있엇던 사례를 가지고 와서 하기도 하는데
이런 요리법이 소개되어있다.
0945
장씨부인이 쓰신 초서로 아주 아름다운 초서체있다 그러니 글씨에 아주 능하셨던 분 그런 분이 한글로 쓰신 건데
이 글씨체는 앚 반듯하고 그런 해정한 글씨체로 장씨부인의 성품까지 볼 수 있는 그런 글씨체다
1022
발문?
책의 뒷부분에 장씨부인이 흘린체로 쓰신 발문이 있다. 발문의 내용은 내가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이 책을
썼으니까 너희들은 뜻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가져갈 생각하지말고 보관할때도 절대로 떨어지게하지말라고
당부..장씨부인은 이 책이 종가에 계속 보존되면서 가문에 퍼져나갈 수 있도록 그런 생각에서 이런 발문을 쓰지
않았나.
1140
17세기 후기에 나오는 한글자료들은 한문을 기본으로 하고 그걸 번역한 언해문들
그런데 이 자료는 한문을 바탕으로 하지않고 바로 장씨부인의 생각을 한글로 적은 1차자료다.
그런 점에서 다른 언해문자료보다 훨씬 더 생활언어 이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조리법이나 음식생활사 연구에도 중요하고ㅓ 살아있을 당시의 말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하기 때문에 저는
국어학을 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생생한 생활언어를 반영하고 있는 자료도 많지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 책을 가치있게 생각하고 연구해왔다.
1250
제가 지금 이 책의 주석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 경북대학에 보관되어있는 책으로 귀중한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을
자세하게 고고학자가 풀이해서 설명해줘야지 다른 사람이 연구할 수 있는 길이되겠다해서 풀이하고 있다 물론
풀이하신 분이 있는데 전문 국어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용이 안 통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다방면의 학자들이 이 자료에 접근하기위해 이 자료에 쉽게 접근하기위해 풀이해줘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 출판부에서 이 사업 기리기위해 주석작업 진행하고 있다.
1453
이 책은 많은 관심을 끌고있는 책인데 비해서 책의 내용이 정확히 풀이되거나 은밀하게 해설된 게 부족하다
특이한 어휘들이나 표현들이 많이 나와서 전문 고고학자가 아니면 다른 방면의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테이프 2
1534 어떻게 연구발전?
이 책이 소개되고 음식사하는 사람들이 현대어로 번역한 게 있는데 자료자체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없어서
다방면의 연구자들이 접근할 수가없다 그래서 경북대 출판부기념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 음식을 통해 당시 사람
들이 어떻게 해먹었느냐
예를들면 술만드는 방법도 스무말술 빚을때와 단말 빚을 때 다르게 되어있다. 한말빚이는 가정에서 쓰려고 하는
그런 조리법이 다르게 되어있는 건 여러 가지 의례절차에 따라 음식장만하는 게 달랐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생활문화 음식문화 이런 쪽의 연구가 더 철저하게 진행되어야 되겠다.
1730
17세기 전후 여성이 저술한 책은 제가 알고있기로는 특히 한글로 된 책까지도 없다
다만 편지글은 16세기 후반부터 나오다 하나의 독립된 책으로 주제를 가지고 나온 책은 이 책이 유일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된다, 장씨부인께서 해박한 지식과 음식에 대한 지식이나 이분은 다른 방면에도 지식이
있었다. 그런게 없으면 이런 책이 이뤄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17세기에 나온 이 책은 우리 여성학이나 음식 역사 뿐아니라 여성사흐름이나 이런 쪽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1844
난경자쌀 밑단위 쌀 이건 벼품종같은데 농서에도 실려져있지않은 낱말 ..당시 재배되었던 벼 품종인 것같은데
어떤 건지 앞으로 연구가 되어야할 것같고 그 다음에 음식 만드는 과정에서 물의 상태를 표현한 말이 두가지가
나오는데 솥에 밥을 해서 밥물이 끓을 때 물이 절분절분하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다른데 안나온다
물동이에 물을 부었을 때 물이 넘칠라말라하는 걸 보고 자라자라하다 요즘의 찰랑 찰랑하다는 말과 통하는
말인데 이 말도 역시 다른데 나오지않는 특이한 말로 당시 생활언어로 쓰였던 말이다.
테이프 3
<<조옥화할머니 인터뷰>>
5027 장독대앞에서 인사하는 두사람(PD와 조옥화할머니)
누룩 만지는 두사람
## 누룩 만지는 할머니 인터뷰
5441 안동소주 대대로?
조선시대부터 가양주로 내려와서 민가로 내려와서 술이 대량으로 하게되었다.
5504
조선시대부터 내려왔지만 할머니한테 배우고 몇가지 전수해와서 이래 하고 있다.
5533
많이 담궜지요 큰 일할때는 10말씩 12말씩 잔치할때는 그렇게 큰 독에 많이 담그고
그거 먹고 떨어지게되면 그 다음에는 이제 손님 봐가면서 조그마한 이런 항아리에 담고
이래서 몇가지 술을 담궈 먹었다 옛날에는 딴 음료보다 남자분은 오시면 으레히 술상으로 나가고 그랬지요
5626
0309 발효라는 건 음식이 놓아두면 그대로 --술이라는 건..
0331 6월에 가면 싸리꽃도 따서 술을 만들고 가을주는 복숭아 이런 것도 술을 담그지만 산머루같은 걸로 많이
만든다 6월되면 더덕 나지..더덕같은 걸로 술을 담그고 술을 담그려면
100여가지도 만들 수 있는데 이 누룩이 깨가 없으면 술이 안된다.
0455
집의 부인들은 주로 일이지요..이거 디디지요 이거 디뎌 뜨면 술을 담그지 이게 모자라면 이웃에 가서 빌려도
온다..빌려 쓰고 만들면 갚고 그래한다.
0533 누룩이 중요한가보지?
잘못되면 안되기 때문에 제일 처음 키가 여기 있다.열이 올라와서 자연으로 열이 내려와 마르지 밑에 두면 술이
잘 안 익고 맛도 없다.
0620
농부들이 농사짓는 것같이 이것도 술을 만드려면 1년에 얼마만큼 많이 드나 생각해서 누룩은 많이 디디고 쥰비를
해야된다.옛날엔 술이 모자라면 이웃집에 가서 한 장두장 빌려 쓰고 우리가 디뎌서 갚고 이렇게 살았다.
누룩이 없으면 술을 아무리 담그고 싶어도 못담그고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룩은 농사철에 농사 짓는 것과 같고 부인들이 길쌈하는 것과같이 누룩은 준비를 해놓아야한다.
쌀 1말에 누룩이 몇장 든다는 걸 생각하고 1년에 손님이 몇번 오시게되고 우리가 쓰게 된다는 걸 계산해서
어른들이 누룩을 솔을 몰아서 연자방아에 돌고 그랬다. 그럴 때 한섬 두섬 열섬 이래 누룩준비를 한다.
술이 아무리 담그고 싶고 하고싶고 써야되는데 이 누룩이 없으면 못담근다.
술을 모르지 요즘은 음료료 손님접대를 많이 하는데 옛날에는 남자 분들 또 여자분들도 연세가 높으고 노인들은
농주를 자시던 분들은 한잔 두잔 하시거든요..그렇기 때문에 주로 이 술이 준비되 가지고 으레히 오늘 손님 몇분
왔다 한분 남자분 왔다하면 술대접하는 게 차대접하는 것과같지싶다
0900
종류도 많았겠네?
1년 12달에 4계절이지요..4계절에 정월에는 솔술 담고 2월에는 매화꽃으로 술을 담어 빚고 3월에는 여기에는
찬꼬치라고 하는데 위에는 진달래라고 하더라 4월에만 난초뿌리 이것도 가지고 담그고 5월에는 배가지고 배술도
담그고 하지만 배도 넣고 담지요 배꽃을 준비해가지고 떨어지는 걸 깨끗하게 주워서 말려놓았다가..
5월,6월가면 쓰는 술이 더덕술 더덕도 기침 나고 감기기운 있는 건 도라지..1년 2년 3년 묵은 걸 가지고 도라지를
삶아서 깨끗하게 해서 그 물에 누룩복자 준비를 해 놓았다가 이건 이 물에 놓고 밥을 찌거든..
밥을 찌면 넣고 도라지 삶을 물을 가지고 섞어가지고 도라지 담아서 기침 나는데 먹고 많습니다.
1100
검은 머리가 희지고 책자에도 있고 그런 옛말 전설에도 있고 그런 말들은 많다. 일일이 오가피니 전부 그런게
다 한가지한가지 이름이 다 있다. 다만 이거하고 쌀하고 담아서 뻑뻑한 것만 농주다 탁주다 하지만 다른 술은
우리 몸에 유익한 게 다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에는 부인들도 아낙들도 술을 다 했다.
또 저런 나무에 열매가 파란 콩 까치 나무같이 달린 것도 삶아서 하면 피부병에 좋다.
긁으면 피가 주루루 이럴때는 삶아 술 담궈 먹기도 한다. 한국사람들은 술에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술을
많이 마신다. 요즘은 현대화로 술을 조심을 많이 한다.
테이프 4
밥 펼 때 인터뷰
2114
주부솜씨가 접대할 때 식사라든가 하면 간이 안 맞고 술도 떫고 그러면 주부의 대수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술을
할 때는 몸을 정결하고 마음가짐을 옳게해서 침착하게 해가지고 목욕도 하고
머리도 빗고 해가지고 이 소주같은 거 내릴때는 아주 그렇게 내리고 남자분들이 소변을 하고 온다
든가 이런데 옛날에는 들어오면 저게 터져서 자꾸 김이 새 밥이 안 익거든요 저 소주고리도 얹어서 본을 바르는데
본을 발라 놓으며는 화장실에 갔다오면 저게 터져요 술도 내리던게 잘 안내리고 그렇기 때문에 술을 내릴때는
마음가짐을 침착하게 먹고 술을 뜰땐 상에 바치기도 하지만 저게다 한 그릇 떠놓아요
정수를요 사발이나 대접에 물을 떠서 한그릇 떠놓고 남이 알게모르게 마음에 다짐하고 먹기 때문에 한쪽 상에
저런 장꼬박 있으면 단지위에 본을 소주내립니다 하는 마음으로 중얼거리면서 정화수를 떠놓는다
2340
이 술을 담는데는 쌀이 한말이면 누룩도 한말이어야한다 이 술을 담으려면 누룩을 깨서 물을 붓거든 물을 부어서
이게 이제 우리 사투리로는 살굿는다 그러거든 산다 살린다 불린다 이 마른 거를 불린다 QFDJ야된다 언제나 이
가루를 여기 섞는거보다 물에 섞어 여기 부어야만 술이 안 시고 맛이 있게된다.
4500
술을 꼭 대접하고 요즘에는 저런 음룟가 많은데 옛날에는 계절마다 나는 꽃이라든가 식물리 이런 걸로 해가지고
술을 많은 양을 담는다 그 재료에 따라 많이 담고 큰 일 회갑잔치하고
이럴때는 술을 쌀로 두섬씩 이래 담는다 담는데 소주는 두섬을 해도 두섬이면 스무말이지 스무말이라도 술은
서말밖에 안 나온다 제일 작은 양이 나오고 막걸리는 쌀 한말하면 닷말 엿말 이래나오지 이러는데 약술은 시기적
으로 꽃술이라든가 이런 걸 할대는 많은 양이 안 나온다 거기
꽃이든가 뿔이든가 이런걸 재료에 비유해가지고 누룩하고 쌀 하고 하기 때문에 술을 많이 안 담고 그저 항아리에
담고 또 계절 바뀌어지면 더덕이라든가 도래 담에 좋은 골담초 이런 거 등등 재료에 따라 담으면 우리 집에 그런
술을 담았다고 자랑이라고 할까 손님 대접하지 손님들이 자기네 술 우리 술 비교도 하고 자기네 술 안 담궜으면
모야집에 주사댁에 가니까 그 술을 담았던데 우리도 담자 해서 도자기에 한병씩 갖다주고 나눠먹고 이러는데
주식과같이 술은 안떨어진다
무슨 술을 계절마다 담아도 과일주로 치면 머루주가 제일 많은 양을 담을 수 있고 그다믕메 칠기 뿌리 마도가지고
술을 담고 많은 사람의 좋은 역할을 하고 이다 또 매실은 물론이지만 은행을 떼가지고 은행을 그대로 안하고 납작
납작 눌러서 그걸 wU서 약간 부서서 술을 담는다 그걸 가지고 살구씨로 술을 담으니까 술을 담게되는 과정에는
술이 몇십종류가되고 백여종류도 할 수 있다 사주는 사람몸에 남자몸에 좋다고 뱀술 그거는 해가지고 대나무
담장밑에 파서 묻는다
그러면 석달씩 있다가 내가지고 그걸 가지고 약술로 쓰고 그렇다보니 아낙네가 많이 하고 거르고 맛에 맞춰서
거르고 이 술이 조금 나온게 싱거웠는데 어떤가 맛을 보여주고 우리도 먹다보면 부녀자들도 술을 엄청나게 많이
한다 반촌에는 부녀자들이 담배도 하지만 술도 엄청한다.
술을 항상 음식과 같이 만지고 해넣고 또 없으면 해 넣고 또
테이프 5
4950
봉제사할때는 청주를 떠가지고 봉제사에 쓰는 술은 올리는 건 수지로 떠넣는다 옛날에 두루미
여기 집마개를 막고 미리 떠놓고 그래 모셔놓고 그다음 청주는 떠가지고 제사 접빈객과 드시고 여는 주로 청주를
쓰지 소주는 약용으로도 쓰고 귀한 손님이 오면 쓰고 술 잘 먹는 분이 소주를 먹고 무난하고 제사 올리고 봉제사
에는 청주를 쓴다. 청주는 맛있고 독특하고 누렇게 맑고 그렇게 된다
이 누룩색깔과 쌀 색깔이 섞여서 그런 색도 잘 되고 옛날에도 썼지만 유교문화로 인해서 청주를 쓰고 안동에는
주로 청주를 쓰고 객지에서 요즘 산소를 올 때 소주든 탁주 아무거나 쓴다 그러나 우리 봉제사에는 꼭 청주를
써서 신주단지같이 모셔놓고 그다음 제간 먹고 또 접빈객 맞이하고 그렇게 한다.
<<김구현선생 인터뷰>>
0230
정부인 장씨가 아버지한테나 혹은 누구한테나 공부를 배웠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정부인이 시집도 가기전에
아버지가 많은 문도들 앞에서 강론을 하는 걸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어른 학문수준이 어느 정도냐하는 건
지금 현재 남은 문헌으로는 짐작을 할 수가 없는데 그 분이 짓은 시로 보든가 마을사람들 얘기로 보면 아주
높은 철학자의 견지에 있었다는 건 사실이다.
제가 볼 때 우리나라 부녀가운데 정부인 장씨에 견줄만한 학자는 없다는 걸 단언하고 싶다
그때 그러한 봉건적인 정세속에서 다름 사람에게 아무 간섭도 받지않고 거스름없이 그 정도 학문수준에 올랐
다는 건 그분에 두뇌가 얼마나 명석한지를 보여주는 거다.
0403
원회운세?
원회운세라는 건 유교사상이 나타내는 우주생성원리다 그러니까 저 끝에 원하는 건 일원이 십이만 구천육백년
십이만구천육백도 우주역사가 하나씩 바뀌어나가는 그런 원린데 그 어려운 얘기 그러면 정부인장씨의 아버지
되는 경당 장흥효선생은 소장도라해서 거기애 대해 우리나라의 아주 권위있는 학잔데 당신이 그때 수많은 문도
앞에서 당신이 가지는 유교사상에서 나타내는 우주생성원리를 설명했다
그런데 알아듣는 이가 하나도 없어 그래서 이 어른이 실망을 해서 당신의 방에 온다 오셔서 안방에서 식사하려고
하는데 마침 따님이 있어 한참생각해서 야야 니 조금전에 원회운세얘기할 때 듣고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아니
하니까 이 어른이 다 얘기한다 그 전까지는 나이 한 십한이삼센데 당신이 따님이 학문에 관심이 있느냐하는 건
아버님이 짐작을 못했다 내딸이 명석한 두되다라는 걸 알고부터 학문에 대한 얘기를 했다는 건 조금 나와있다.
대개 한문이라는 건 십구사략이나 이런 건 상식적인 거고 경학 그 다음 사장인데 아마 십구사략은 아버지께
배웠다는 기록은 남아있다. 아마 학문의 경지에 대해선 당신이 뒷전에 들은걸로 그 정도 올라간게 아닌가 생각
된다.
0620
대개 양반집에서 부녀자들을 안 가르친다 저도 우리집의 고모는 대개 당신의 조부께서 하는 걸 뒷전에서 들은
얘기다 그래서 익힌다 옛날에는 부모를 불러서 아주 관심있는 게 아니면 불러서 가르치는게 없다
그러니가 정부인 장시는 그런 환경속에서 컸고 원체 두뇌가 좋으니까 다른 사람 설명없이 알아듣지않았나
생각된다.
0700
천풍자 어른은 약포의 셋째 제자 이고 이 어른은 선조조 때 초서대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어른은 경당보다 연세가 7,8살 적다. 학문이 통해서 경당집에 자주 놀러오는데 마침 어느날 경당집에 찾아
와서 학문사 토론하다가 자네가 글씨 잘 쓰니까 써달라 그런 뒤 경당께서 이게 내딸이 쓴 글씬데 보라..
이건 적벽부다 그러자 이 어른이 이거 정말 자네 딸이 쓴건가 난 처음 이걸 보고 중국의 대가 글씨가 아닌가
했다 정말 이렇게 쓰느냐 청풍자가 붓을 주고 쓰라고..이 어른읙 글씨는 지금 남아있는 건 한점 뿐이다.
그 어른이 썼는지 안썼는지 확인이 안되는데 이 글씨를 보면 참 이렇게 대단한 초서를 쓸 수 있는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그 어른이 초서를 그만큼 썼으니 다른 글씨를 썼으면 얼마나 썼을까..
그리고 예전에 조선의 양반의 집에서는 여인들이 건방지게 남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이런 건 좀처럼 없다
말하자면 현재 어느 세상을 사는데 그때 사회적인 여러 가지 정세 이 조건을 순응을 해가면서 자신의 뜻을 펴는
사람이 위대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정세에 반할려고하고 거기에 역행위를 해가면서 하는 건 성공하기 어렵다
이 어른은 거기에 순응해가며 뜻을 폈으니까 시집을 가서 그렇게 잘 쓰시면서도 한번도 글씨를 쓴 일이 없다
누구앞에서 글씨를 쓴 일은 없는데 그만큼 쓴 건 사실이다.
1020
청풍자는 약포의 셋째 자녀 이 어른은 역사에도 밝았고 경악에도 밝았는데 특히 이 어른 글씨는 초서로 광해조때
가장 명필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 어른과 장부인아버지와는 아주 친한 관계,..
하루는 청풍자가 찾아와서 여러 가지 고담준론을 하다가 글씨에 미쳐서 경당께서 이 사람아 글씨 하나 남기고
가게 해서 글씨를 쓰시고 난 다음에 아버지 경당은 당신 딸이 외동딸이 쓴 글씨를 보인다
청풍자는 처음 그것을 보더니만 과연 우리나라 사람은 글씨를 이렇게 잘 쓴 사람이 있나..이 글씨는 조선사람
글씨와 그 유를 달리한다. 내가 처음 볼때는 대단한 글씨인줄알았다. 그래서 장부인 어린 소녀를 불러서 붓을
줬다 써보니 그런 필체가 있다 그래서 아마 그 초서 모습이 보통 모습과는 전혀 유를 달리하는 대단한 명필이다.
1200
청풍자에게 처음 보인 글씨는 적벽붑니다. 적벽부를 보시고 난 다음에 ..현재 남아있는 건 학발삼장 그걸 보고
청풍자께서는 과연 어린 소녀가 이렇게 썼느냐 하며 너 한번 써보라 하니까 역시 그렇게 썼다.
1250
그림을 얘기한다면 지금 그림은 딱 한 장이 남아있다. 호랑이그림..그림을 얘기한다면 그림은 딱 한 장..
한장은 호랑이가 소나무밑에서 표호하는 그림인데 제가 그림을 수년전부터 그림의 대가 한테 보였다.
이것이 나이 열몇살 나는 어린 소녀가 그린 상상화다 당시 실력으로서 지금 호랑이 포효하는 그림을 이만치
상상해서 그릴 수 있냐 하니까 그 친구 고개 가로저으며 자네 말이 맞네 라고 놀랬다.
그림 잘 그렸지만 평생 남의 앞에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예전에 우리 조선사회의 부녀가 행실하는 율법이
그런거다 장부인 두드러지게 훌륭하다 그때 사회정세 모든 걸 봐서 당신의 뜻을 다른 사람에게 아무 거부감
느끼지않게 폈다는데에 그런 위대한 측면이 있는거다.
1430
정부인이 시집을 갈 때 남편은 8살위였다 석계선생이 처음 장가 간 곳은 김해선생이라고 대단한 어른이다,
이 어른 사위가 되었는데 이 어른 앞에 1남1녀를 두고 부인 돌아가 2년 뒤 장가가게 되는데
그리고 그 다음에 아버지께 효도한 얘기 시집을 가시고 한 10년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친정의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또 기록에 보면 그 어른이 시집 영해 나랏골과 안동하고는 200리 거리-꼭 한해에 한번씩 친정을
다녀갔다 경당께서는 유1녀하야 어느해 아버지가 어머니가 편찮다는 이야기 듣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머니
시신 수습하고 그리고 얼마 있다가 장가 보내다 새로오신 새어매는 당신의외가의 친적되는 분이다
그런데 연세가 당신보다 10살 어린..이 어른이 시집 와서 2년 동안 친정 머물며 새로오신어머니가 친정에 순응
할 수 있도록 어머니를 가르친다 그 어머니를 당신보다 나이 10살되는 어머니를 친어머니와 똑같이 섬겼다
그래서 10년 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과부가 되겠지
그때 경당께서는 3남1녀 낳았다 친저에서 3남1녀를 데리고 시집으로 데리고 가서 근20년 간 그 3남1녀중에
둘째 자녀 먼저 돌아가신다 그래서 2남1녀를 모든 것을 글을 가르치고 동리 어른들에게 공부하라고 보내고
장가 시집을 다 보내고 20년 이상 당신 집에 키웠고 친정동생들을 위해서 친정사당까지 지었다고 한다
그래 섬겨서 친정을 돌려보내서 지금 안동장씨가운데 경당파 춘파 장씨 하는 말이 석보할매 없으면 우리 없었다
하는 말들이 그 자손들이 많이 한다.
1740
친정 돌보는 일?
그게 말하자면 정부인 장씨의 남편 석계하는 어른이 높은 어른이다 학문도 높고..이런 어른의 뜻을 맞추어서
당신의 남편의 뜻을 펴도록 해주었다. 그 남편이 뜻을 펴도록 모든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 게 한두개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우리가 병자호란 하는데 그때 우리 조선사람들이 중국을 섬긴 건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 그러냐 임진왜란때 명나라군사가 우리를 지원하는 것은 우리가 6.25사변때 미군이
유엔군이 우리를 지원하는 것보다 몇곱이다. 우리 군대 30만의 군대 온다
그리고 여순서부터 쌀을 지원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랑캐족속이 왔을때는 우리 조선사람 입장에서는 도덕적인
장신-석계께서는 그 나라 임금이 삼전도라고 해서 청나라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흥분해서
장부인께서는 남편의 그 뜻을 받들어 그 남편은 도저히 내가 편안하게 살 수 없다 산에 들어가겠다 수산에
들어가..수비산에 가셔가지고 근 20년가까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장부인 생각하기에 좋은 제자를 만나서 학문을 가르쳐야하는데 영양골짜기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않느냐 어떻게 하면 학문을 펴느냐 여러 가지 구상하는 중에 땅을 팔다 그래서 친정 5리 떨어진 곳에 가서 땅을
사서 동네 사람에게 너희들이 누가 오거든 이 동네는 대명동이라 하라
그래서 남편한테 내가 친정 가까이 가니까 대명동이라 하더라 대명동은 당신의 뜻과 같으니 함께 가자 그래서
남편 오다..
오셔서 얼마 못살다 돌아가시고 지금 석계선생 산소도 그 대명동에 있고 장부인 산소도 역시 돌아가시긴 석보
에서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신 뒤엔 남편과 함께
테이프 6
**김구현선생 인터뷰 계속
2208
우리 옛날에 있어서 조선 양반의 도학은 딸이 하나 있더라도 양자를 얻을 수 없다 그러니까 외동딸이기 때문에
경당께서는 아들이 있을 수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까 장부인생각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를
장가 보내면 우리 아버지 후손을 이을 수 있지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래서 시집에서 친정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장가를 보내는데 새로오신 어머니는 당신의 외가의 친척되는 분
이다 당신보다 나이가 10살가까이 어린 분이다 이 분을 새 어머니로 맞이한다
우리 안동에서는 새어머니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기록을 보면 당신보다 10살이 어린 새로오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어머니와 똑같이 모셨다고 한다 이 어머니가 시집을 오셔서 10년을 경당이 사시게된 70에서 작고하시게
되니까 경당 장사를 다 지낸 뒤 친정에서 어머니가 낳은 3남1녀하고 그 새어머니를 모시고 200리나 되는 석보로
모시고 와서 당신 친정집사당까지 지어주고 친정에 온 아들 6살 아들을 친정동생 4남매를 시집장가를 다 보내서
친정으로 보낸다 아버지를 장가를 안 보냈으면 경당후손은 없었을 것이다.
경당 후손들이 석보할매 없으면 우리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어른이 친정을 돌보았다는 것도 좋은 일화지만
시집에서는 당신의 자녀 일곱분을 다 모두 두뇌가 명석한 어른이 되어서 기록에 전혀 장부인이 글을 가르쳤다는
건 없는데 머슴의 자제를 가르쳐 그동네 나도 저집 종이 되어봤으면 가르치는데 어느날 하루는 어떤 아이가 이
어른이 베를 짜다가 버렸다 장부인이 하두 미안해서 우니까 장부인이 아무 말 하지않고 고치다 열흘 후 아이한테
가서 베만질 때 이렇게 하라고 이것이 어른되는 사람이 그 어린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론이다
그 자리에서 꾸짖게되면 실망한다 열흘뒤에 그러지말라고 한다
그 사람이 자주적인 역량이 클 수 있도록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가난한 사람이 자력으로 클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야지 절대로 덮어놓고 하는 건 그러니 요즘으로 봐서 좋은 --다 할 수 있다.
2550
갈암은 어제 보니까 이조판서뿐아니다 공조참의에서부터 여러개 다 거쳤다. 그러면 내가 갈암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드리면 ..갈암 이현일 당신이 낳은 둘째아들이고 석계에게는 셋째아들,갈암이현일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퇴계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말하자면 --율곡에 송시열선생이 있다면 퇴계학맥에서는 거기에 버금가는 학자가
바로 갈암 이현일선생이다.
갈암이현일선생은 제가 생각하기에 손색 없다.
율곡이 퇴계 반대하는 것에 대해 가장 조리있게 설명하신 분이다 또 장부인의 자제..그 분들이 갈암뿐이었나
하면 그게 아니다 장부인자제 7형제가 한마음이 되어서 비판..우리가 알아야될 건 과거 우리나라의 학문논쟁은
2900
유교의 교육은 글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하는 건 배움이지만 더 중요한 건 배운 걸 자기 인간생활 사회를 위해
어떻게 선용하느냐 하는 거다 그러니까 장부인께서 늘 자제들에게 말하는 건 넌 문장을 잘 한다는 건 별로
기쁘지않다 너가 나한테 배운걸 알아서 그대로 하는 게 기쁘다.노비나 종들이나 이웃의 못사는 사람 이런 사람
들을 가르치고 그래서 이웃에서 하는 말이 나도 저 집 종이 되어봤으면 하는거
2930
못사는 사람.저사람이 능력이 있는데 못사는 사람은 늘 일을 맡겨서 자립할 수 있도록 키워준다 당신의 자제나
조카들이 어머니 그렇게 일을 주면 우리 가정살이 축난다 너는 모르는 소리 하지말아라
내가 저사람 잘 키워서 내 힘으로 그 사람이 살림을 넉넉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날 잊겠는가 언젠가 날 도와주면
내가 더 잘 살 수 있지않겠느냐 ...요즘 도와주는 건 그 사람이 가난해서 도와주기보다 열심히 일해서 사회활동을
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전보다 나은 생활..
이런 의미에서 사회교육한 분..병자호란 일어나니까 옛날에 모아서 아마 어덯게 갔다왓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아마
석계같은 분은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조선의 역사책에서 나라의 전쟁이 일어나서 여자가 의병운동을 하셨다하는 건 이 어른 한 분 뿐이다.
--시비
**안동대학교
테이프 7
#강의실에서 안귀남선생 인터뷰
5344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저는 국어학입장에서 봤기 때문에 국어학 자료는 모든 자료가 된다 그런데 우연하게 식품
영양학과 윤숙경선생과 이야기하면서 음식자료가 많이 접하게되었다 그러던차에 음식디미방이 마찬가지로
윤숙경선생이 발표한 다른 요전의 다른 운주법을 하다 관련되게 음식자료집에 대해 제가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가 운주법을 먼저 지난 학기에 했고 그럼 학부수업으로 뭘할까 하다가 이 지역의 방언이라고 하는 것이
걸렸 일단..그리고 또 강좌명에 맞게하려면 어떻게 할까 하다가 17세기를 반영하는 방언이고 분량도 많지않고
학생들하고 함께 이야기하면 또 이쪽 지역 학생이 많기 때문에 방언에 대한 느낌이 많다
그런 측면이 좀 다른 자료보다 쉽게 접근할 수있다
평소 어머니나 할머니가 하던 말이 여기 표현되어있다 그런 말들은 예를 들면 물에 씨라 또 안동방언의 가장 큰
특징중에 얼굴 씼다를 써라 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도 그런 표현이 나온다 씻어라를 아주 축약된 써..
어미를 탈락한 그런 표현 많다 아마 방언하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 많다
제가 접하고 자료를 읽어보니까 처음에는 좀 어렵겠지만 나중에 가면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단순히
방언적인 가치 또 이쪽 지역의 필사본에 대한 거다 최근 국어학계 필사본에 대한 가치 높아지다..
학위논문에 언간에 대해서 했는데 언간이 필사본으로 되엉있고 필사본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던 차에 또 마침
이쪽지역의 책이고 하는 측면이고 또하나는 음식디미방이 그 이전 음식관련자료와 살펴봤을 때 여성이 썼다는
점이다
그럼 그 이전의 것을 살펴봤을 때 허균의 도문대작이라든가
한문으로 된 게 많다 15세기나 16세기 한문자료집 많고 그 전에는 중국의자료들이많다
그런데 허균이라든게 16세기 1600년댄데 그 당시 주방문은 남자가 썼는데 여성이 썼다.
제가 보기엔 장씨부인이 15살에 십구사fir을 읽을 정도로 총명했는데 19살에 시집을 오면서 그런 학문적인 것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정말 현모양처로 자식을 돌보고 결국 음식을 만든다는건 남편의 손님을 맞는 것
그러니까 결국 거기에 남편 아녀자들이 먹는 게 아니라 남편을 먹는 거고 6남2녀의 자식을 기르면서 거기에 선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다 공부보다 선이다 자기 가치관속에 보면 이미 갖춘 사람으로 학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역할이 음식을 잘 만드는 것..음식 만드는 게 음식이 그냥 우리가 먹는 일반적인 게 아니라 술이 포함
되어있다 술을 먹는 양반들의 식생활 특히 남성중심의 식생활이라고 생각되는데
아녀자가 만든다고 해도 아녀자가 먹는게아니라 남편을 포함에 주변 남자들이 먹는 음식에 술이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1800년대 책도 살펴봤는데 시의전서에는 술에 관련된 건 없다.
여기에도 93종류 음식이 있고 51가지의 술이 있는데 그만큼 음식 비중이 있다. 주방문이 이거보다 빠를 수 있다.
고추대신 천초나 후추가 있다 식품영양학과가 17세기로 본 건 고추를 기준으로 ..
전희가 표기법으로 이 자료를 평가해야하기 때문에 이 표기가 근대국어의 표기법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 봤을 때 여기 표기법은 장씨부인이 오기전에 한문 다 깨우쳐 그런데 한글에 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한문이 있는데 한글로 표기했다는 것 이 자체는 그 당시 이미 한글은 구어에서 널리 쓰이고 있어서 자연
스럽게 이게 아녀자가 쓰는 거면 서문에 그런게 나타났잖아
이 자료 특징은 인쇄된 게 아니라 필사되어서..그런 측면을 보면 쉽게 쓴 걸 고려하다 그리고 문어체가 아니라
여기 표현이 그냥 그렇게 되어있다 말하듯이..문장이 연결형 어미로 연결되면서 말하듯이 되면서도 아주 상세
하게되다
그리고 분량을 아주 상세하게 하고 그리고 여기 음식만들 때 주의 할점이 들어있다 특히 술만들 때 보면 독을
깨끗하게 씻어서 말려야되고 만일 그렇지않고 말릴때는 따뜻한 물로 완전히 씻어서 하라 줒의사항까지 아주
상세히 적혀있다
그래서 누구나 봐도 쉽게 다시 고대로 따라할 수 있는데 아마 서문에 보이듯이 내가 이렇게 눈이 어두운데도
쓰는데 이 법을 잘 알아 내마음뜻을 잘 아라 분량이나 유의사항 잘 알아서 그래야 음식의 제맛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식문화 표기라든가 이런 점에서 국어학적인 자료가치도 있고 식문화를 읽어내는 건 민속학의 역할..
배영동선생 민속학쪽으로 하는데 제가 자료 읽은 걸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선생님은 재해석헤애 하니까 나중엔
아마 술에 대한 관련은 있지만 a많은 dusr할 걸로 보이다.민속학자 국어학적인 '측면에서 강조한다.
0315
크게는 세가지로 국어학적인 가치 식품영양학적인 가치 그 다음에는 민속학적인 가치 .국어학적인 가치는
어두명사라든가 어중에서의...요음의 표기 반치음이 방언에서 그대로 그런 측면..종성표기 어말자원군회표기등
이런 것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면서 중앙문헌과의 차이를 보이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그건 표기법적인 가치고 그 다음에 제가 보는 건 표기법도 표기법이지만 문장이 구어적이기
때문에 제가 요부분은 더 살펴봐야한다 여기 나타나는 구문의 문장의 특징이 뭐냐..아주 단문으로 되어있고
구어로 되어있고 그 다음 연결형 어미라든가 조사라든가 이런 것 생략이 많다 어떤 용언의 축약과 방언에 용언
의 축약에 관련해서 방언에 나타나는 그런 특징을 제가 보고있는데 그런 측면들이 굉장히 많다
현재 방언조사를 나가면 채취할 수 있는 그런 어휘들이 이 문헌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라는 거다
그 다음에 어휘자체에
0450
표기법하고 어휘하고 문장에 쓰인다. 표기법자체는 지금 보며는 그냥 말하듯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적는 것처럼
그렇게 쓰는 것이 있고 문장에서 보면 아주 단순한 문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말의 굉장히 축약되서
방언에서 쓰는 형태 나타나고 어휘는 방언적인 지령같은 안동에서 많이 쓰이지는 않지만
어휘자체로서 방언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표기법이랄까 문장 어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0550
당장 대번에 다 읽어봤거든요 다 읽어봤을 때 우리가 자료라고 하는 건 문어체적인 감이 있는데 자료를 읽었
는데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기에서 방언조사에서 나타나는 표현하고 닮아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방언조사를 해서 말하는 걸 그대로 녹취해서 그대로 전사시켜보는 거하고 다를바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건 상당히 구어적인 측면이 강하다. 그 다음에 1670년 자료라는 것 거기 1700년대에 언간이라
는 한글자료가 많이 나타나거든 시점이 거의 비슷한 시점에서 나타나는 자료고 더 중요한 건 안동인근의 자료
라는 거다 그러니까 고향이 안동이고 시집은 영양이지만 영양하고 안동하고 거의 비슷한 방언을 나타낼기
때문에 그런 지역화자가 쓴 것 그런 것이 저는 매력이다.
0730
맛질은 예천에 있다 지금 현재 맛질이란 건 촌락단위 명칭인데 여기는 반서울이라고 한다 그럴정도로 거기에
많은 인재들도 나타나고 거기의 음식들도 그 나름대로 굉장히 조금 다른 지방하고 차이가 있다
제가 의문스러운 건 장씨부인이 결국 그 전에 맛질을 방문이라고 했으니가 직접 가서 했으면 거기에 친척이
있거나 그래야 갈 가능성이 있는데 저는 거기까지는 찾아보지못했는데 어쨌든 자기 집안의 음식에다가
또 다른 동네에 음식까지를 적었다하는 건 단순히 자기 집안의 음식을 써서 대대로 남기면 자기집안만 썼겠지요
근데 같은 종류의 다른 지방의 비슷한 음식을 특히 '맛질방문의 음식을 요렇게 한다 자기집안의 음식하고 차이가
있는 걸 반영하는 거다 이건 장씨부인의 생각이 단순히 한 여자로서 남편을 현모양처로 더 나아가서 어떤 분들은
더 나아가서 요리가로서 자격도 갖추고 있다하는데 그 정도로 관심을 훨씬 더 포괄적이다
그래서 그런 부분도 표현햇고 비교차원을 생각했다느넉지..그런측면이 특이했다.
0920
연구 성과? 국어학적인 의미?
음식 만드는 법은 상세히 잘 모른다 그런데 이걸 하다보니까 음식에 대해서 기존의 만두라든가 상화라든가 이런
것들은 주방문에도 상화와 만두의 차이를 잘보여준다고 보여진다 중국에서 기존에 만두와 상화를 비교했다고
할 수있느데 음식에 대한 구체적인 걸 알게해줬고
이건 더 나아가서 우리의 식문화에서 주식으로 했던 만두라든가 이런 것들의 변천사를 알 수 있다 음식명의
변천사죠 그래서 여기에 나타나는 건데 침체의 변천사도 있는데 침체라고하는 것이 지금의 김치와는 담그는
방법이 침체 담글 침자거든요 뭔가 물에 담그는 침자고 짠지는 물에 담그는 방법은 아니다 그러니까 어휘를 통해
그런 측면 볼 수 있고 처음에 본인은 왜 음식디미방이라고 했는데 후대에 자식들이 규곤시의방이라고 했는가
저는 요런 시각에서 보고싶은데 이름속에 명칭속에 역할이 들어있다.
예를들어 아내부에 여자가 그렇게 한자를 풀이한다 여자가 빗자루를 들고있는 형상이다 그럼 여자가 집안을 청소
할 현상이다 그다음에 계집녀자는 ..어휘가 여성의 역할을 나타내는 것같다 언어자체에 역할이 보이듯이 구태여
규곤이라는 이름을 보이는 건 아녀자들이 하는 것이라고 역할을 단정하는 것에서 기존에는 허균에서 남자들이
음식을 기록하기도했지만 특히 아녀자가 음식을 만들고 음식에 관련된 걸 논의했다는 점에서 역할이 분명하게
여성의 역할을 어휘에서 보여주는 것도 있다
제가 후대에서 읽을 때 그런 측면이 보인다 그다음 여기서 연구성과는 표기라든가 어휘라든가 문장의 궂가 된다
저희들은 기존의 논의하고 다른 점은 주를 하나 꼼꼼하게다뤄서 탈락된 건 어떻게 탈락되고 그런 걸 꼼꼼히
현대어로 해서 어휘를 해석하는거다 학생들도 읽어보면 느낌은 아는데 느낌은 아는데 어원이라든가 이런 건
불분명하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그런 걸 중세어 사전이라든가 옥편 총동원해서 그런 것들을 최대한
주석을 달아서 문맥의 의미라든가 어휘를 살펴보고 이런 평상시 쓰는 어휘들이 문헌에 어떻게 나타났나를 학생
들과 살펴보는 거고 그런 걸 주를 달아 현대어로 옮기는 작업과 저는 어문 표기법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다른 자료
들하고 비교해볼 필요가있다
온주법 거기에는 1700년대니까 그것과의 차이-시의전서가 1800년댄데 상주방언을 사용했을 가능성..
같은 지역의 방언들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고 이런 것들이 주변의 다른 음식자료들을 다 살펴 보면서 포괄적으로
표기법 논의해야하고 거기에 따른 방언들의 분화랄까 이런 것들도 살펴볼 수 있는 그런 연구로 앞으로 더 나가야
할 것같다.
1500
문장표현은 단문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어미라든가 조사라든가 생략하는 이런건 일상 구어에서 나타나는 그런
방식이죠..문장이라고 했을땐 난 학교에 간다 조사를 많이 생fir하고 어미를 많이 생략하는 형태들이 나타나고
그런 측면에서 보면 문장구조를 다시 한번 문장구조가 좀 특이하다는 걸 알 수있고 거의가 연결형 어미로 이어
가기 때문에 문장이 중세어에도 보면 내포된 게 많은 방면 여긴 내포문에 의한 건 거의 없다 좀 있지만 전반적
으로 보면 대등접속절로 이어지거나 연결형 어미로 이어지는 좀 긴듯한데 문장구조자체는 단순구조,..
어휘자체에서 재미있는 건 말자음 군에서 흙같은 경우에 흘이러거든요 흙이를 경상도에서는 흑이 이렇게 한다
여기에서도 흘이라고 나타나서 방언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어말에서 겹장으로 나타나는 것들..
방언에서는 표준하고 다르게 나타나는 것 그것이 그대로 발음되는 것 그대로 표기되어서 어미적으로 재미있고
지령이라든가 이런 건 거의 많이 사라진 어휘라고 할 수 있다 단지령 전지령 그런거라든가 김치 짠지 ...
문현속에 보면 지랑 짠지랑 진채 이런 것들이 어휘의 분화가 세밀하게 분리..그런 것들은 어휘변천사를 통해
어떻게 나타나고 그이후의 문헌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나 변천사를 통해서 살펴봐야할 것같다.
1820
기존의 아마 장씨부인이 한문에 뛰어나다고 했으니까 주로 음식에 관련되는 건 중국에서 많다요 이전에 15세기의
자료들이 한문으로 되어있고 16세기까지 한문으로 된 자료가 있고 17세기가 주방문과 음식디미방인데 주방문은
남자 허생원이라는 분이 그것도 위상이긴 하지만 남자분이 했다는 건데 음식디미방은 여자가 했다
자기가 한문실력이 있지만 한글로 표기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 이전의 음식자료는 필사본이어서 국가
적으로인쇄하고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음식에 관련된 자료들만 필사본이 많다 자기가 필요하면 배껴서가고 그러는데 다른 사람이 가장 시조가
되었다는거지 가장 처음으로 음식 만드는 법을 한글로 기록했다는 거 그다음 17,18세기는 이 자료를 근거로 붙이
거나 뺐다는 점에서 음식에 관련된 자료를 가장 초기에 모습으로 한글로 표기해서 다른 사람 음식자료를 쓰는데
도움을 많이 줬을 가능성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35
국어학은 딱딱하다고 생각해서 재미없다고 생각하는데 국어학이 우리 일상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저는 알려
주고 싶었다 근데 강좌면이 고군세기 때문에 문헌자료를 통해서 그 시대와 접해가는걸 고려한다
그렇기 때문에 쉽다는 건 아니다 고어도 많이 나오고 생략된 것도많고 상당히 어려워하지만 그래도 이런 우리
고향에 있었던 분이 이런 자료를 썼고 또 우리가 현대에 와서 자료를 읽어서 그당시의어휘를 아 이속에 이런
방언이 나와있다 이렇게되면방언조사를 가도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것이 방언화자로 남아있다는 건 굉장히
설득력이 이싿 그다음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끊어쓰기가 안되어있다
2차적인 것이 끊어읽기다 아버지가방에 들어가셨다 할 때 이 부분을 잘못읽으면 잘못해쎡될부분이 많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읽다가도 서로 잘못끊어서 발표할 때 서로 너무 웃기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럴 때 얼마나
띄어쓰기가 중요한지 알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한다 저는 제 1차적으로 문맥을 부드럽게 읽어보는 걸 목표로
하고 더 나아가서 그 어휘가 사전에 어떻게 나타나고
이런 걸 한다 그래서 지금은 처음에는 학생들이 더듬더듬 했는데 지금은 누구 다 읽어보다 또 다른 자료를 접하면
줄줄 읽고 어디서 끊어읽고 그것이 결국 모국어 화자가 가지고있는--
테이프 8'
2333
이것은 아마 필사본이기 때문에 필사본이 문헌보다 반세기 앞선다 그러기 때문에 이게 1670년대에 근대 후반
이라고 하더라도 16세기 초라든가 좀 더 거슬러올라가면 15세기의 특징까지 반영한다 문헌이 훨씬 뒤에 기술
되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 문헌자료에서 설명하기 어려워JTejs 부분들의 공백을 메워준다는 측면에서 표기법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 어휘에서 방언어휘가 결국 고어의 15세기의 어휘들의 형태들에 많이 나타난다
방언 어휘자체가 15세기 어휘라든가 그런 문헌속에 나타나는 방언어휘들이 많이 나타난다는거 그다음에 문장이
상당히 단문으로 되어있어서 이건 훈민정음 서문에 있는 구절처럼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여러개의 연결형어미로
이뤄졌다는 측면..
2505
가장 한글이 쉽게 읽히고 쓸 수 있다는 걸 가장 잘 살렸다. 문장을 하더라도 말하듯이 했다 이런 측면이고
또 이쪽에서 말하듯이 할 때 방언이 들어갈 수 밖에 없겠지 그리고 문맥에서 아주 문장이 말하듯이 하다보니까
이건 방언의 특징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것들이 아주 잘 반영되어서 그렇기 때문에 서문에서 이야기했듯이 누구나
이걸 그대로 읽어보면 그대로 따라서 할 수 있고 그런 측면이 잘 적혀있다고 보인다.
2554
장씨부인이 서문에서 제가 보기엔 이 책의 가치를 잘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눈이 이렇게 어두운데도
간신히 썼으니 이대로 잘 따라하라 이 뜻을 잘 하라 이뜻이라는 건 이 정도로 음식을 상세하게 기록했으니까
그것은 읽는 사람이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썼다 그건 할글이 가장 누구에게나 쉽게 빨리 읽힐 수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본인이 한문도 하지만 한글을 이용해서 썼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구어체라고 하는 건 말하듯이 했다는 건 방언에서 보면 줄여서 쓰는 형택 많이 나타난다 그렇게 말하듯이
표현을 했으니까 누구나 봐도 한글을 깨우친 사람이누구나 봐도 쉽게 쓰여져있다는점 이점이 아마 이 책의 중요한
점이다.(누구나 쉽다..구체적인 예?)
(서당앞에서 후손 인터뷰)
4416
이 사당은 석계선생께서 영해서1640년에 자제분들을 거느리고 여기에 이사를 왔다 그래서 여기에 초당을 짓고
자제들을 강독하고 이 주위에 있는 유생들을 모아 강독한 곳이다. 처음 석천초당이라고 했다
그 이후 1800년경 석계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그 유업을 다시 잇기위해 유림과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현재와같은
석천서당을 재건하고 이 석천서당에서는 제일 먼저 아버지의 유품을 제일 먼저 강독한 분이 넷째아들 그다음이
맏아들 그 다음이 갈암아랫대 밀암이라는 분 3대에 걸쳐 여기서 강독했는 뜻있는 서당이다.
4530
이 석천서당은 석계게서 영해서 이리로 1640년에 이주 초당을 짓고 여러 자제와 이 근방의 유생을 모아 강독한
곳으로 그 어른이 돌아가신 후 넷째아들이 선업을잇기위해 강동하고 그다음 맏아들이 강독하고 손자되신 밀암이
여기서 제자를 모아 강독한 유서깊은 서당이다.
4610
학발삼장 목판은 지금으로부터 150년전에 증조부되는 어른 호가 정산이라는 할아버지께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4634
학발삼장 목판 뿐만아니라 장씨 부인의
4650
장씨부인의 실기에 대해서는 현재 증조부되시는 어른 호가 정산이라는 어른이 실기
4710
학발삼장목판은 지금으로부터 150년전에 저의 증조부되는 어른이 호가 정산이라는 할아버지께서
장씨부인의 실기를 완성할 때 만들었다고 추정된다
테이프 9
정부인 안동장씨 신위 모셔져있다
`불천위를 모시는 그림..(불천위인 이유...)
(불천위가 모셔져있는 곳에서 후손과)
0146
우리 집안의 가장 자랑이 지금으로부터 500년밖에 안됐는데 경남에서 영해로 이사와서 불천위가 3대 4위가
있다 이 어른 윗대 운학이라는 분이 불천위고 그 다음 운학 아랫대 이 어른이 불천위가 이 어른 둘째 아들 존재
불천위고 갈암이 불천위기 4대불천위 모시는 분은 영해의 우리 집밖에 없다.
0246
불천위가 네분이 계신데 첫째는 석계선생의 윗대가 불천위가 이어른이 불천위고 존재가 불천위고 셋째 갈암이
불천위고 한번 4대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정부인 안동장씨의 기일은 칠월칠석날이어서 손님이 아주 많다
(석계고택에서 후손과)
1322
이 집으로 볼것같으면석계선생이 안동에서 돌아가시고 3년상을 마친 뒤에 그 아랫대가 정부인을 모시고 선업을
잇기위해 이 동네 귀가하면서 여기서 4년을 살다가 돌아가시다 약 1800년-
이 집은 석계고택이라고 명명하고 있는데 왜 석계고택이냐 석계선생께서 안동에서 돌아가신 후에 3년상을 마친
뒤에 그 아랫대를 따라 정부인이 이 집으로 같이 이주해서 여기서 살다 돌아가셨다
그래서 이 집이 석계고택이라고 한다.
(방에서 후손과)
1607
우리 일가의 파인데 여기에 우리 집은 석계선생부터 나온다 여기서 장씨 부인은 계비로서 여기 이제 나오고 있다.
여기 또 학발삼장에 대한 시에 대한 것도 여기에 나오고 있다. 그 당시 이것을 보면 아들과 딸이 전부 한데 있어
아들 일곱분과 딸 세분 10남매를 훌륭히 키웠다는 걸 알 수 있다.
1710
(정부인장씨 포스터에서 팬하면 PD와 후손이 앉아서 족보보며)
이것은 족보는 영해파본데 석계 웃대 운학할배로부터 석계는 셋째아들이다 이 어른에 대한 계비가 첫째는 광산
김씨 계비로서 정부인 안동장씨가 있고 여기엔 학발삼장과 소소음을 기록했다는 것이 나와있고 특히 이 어른
아랫대는 아들 칠형제분과 딸 삼형제분을 훌륭히 키워서 사회에 배출했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1800
(족보 타이트)
장씨 부인의 부군되시는 석계선생이고 R 아들이 상일 이어른은 장씨부인 소생이 아니고 김씨부인 소생이고
여기는 그 아랫대가 되는데 아랫대도 양자를 보셨다. 광산김씨에서 첫 번째 딸 정씨가 시집을 와서 이 집도
굉장한 불천위도 모신다. 그래서 전체 아들이 일곱분하고 딸 셋을 10남매를 훌륭히 잘 키운 얼굴이다.
-족보보기
-선조비실기 보기
학발시 나오고 (학발시 타이트한 것에서 오디오만)
이거는 학발시는 아마 정부인이 10세전후되던 시기에 이웃에 사는 서민층의 어떠한 가정에서 노모가 자식을
수자리에 보내고 애절하게 하는 슬픈 마음을 읊은 것이다. 늙은 부모는 병에 걸렸는데
그 아들은 만리 수자리에 갔더라 아들은 언제나 돌아올것이냐..그 다음에 새하얀 머리가 된 늙은 노모는 서산에
넘어가더라...하늘을 우러러 노모는 병이 깊어 일어났다 자빠졌다하는 때에 바깥에 속옷을 펄럭이며 쫓아간들
어떻게 그 아들을 만나리오
(성인음부분)
이건 성인음이라고 하는데 성인음은 일러서 그대로다 성인이때 나지못해서 성인 얼굴을 보지못했으나 성인말씀
을 들을 수 있어 성인 심정을 알 것같더라..
소소음은 자연을 읊은 소리로 창밖에 비가 솔솔 나리는 소리 자연스럽더라..내가 그 자연의 소리를 듣고있노라면
내 마음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내 몸이 곧 부모로부터 얻은 몸이나 가히 내 몸을 부모로부터 공경하지않으리 이는 부모를 욕되게 함이니 지 몸을
잘 다스려서 공경하라..
테이프 10
후손 인터뷰
2900
정부인 가족관계?
정부인 장씨가 태어나기는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던 그해 태어나서 우리 집에 오시기를 19살에 오셨으니까
그 오게된 동기도 역시 경당 우리 선조 석계가 아마 제일 마음에 드는 문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당시 석계께서는 전취부인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혼자 계셨는데 1남2녀를 남겨둔 자리에서 후실로 와서 이
어른이 아들 여섯분 딸하나를 낳았다 10남매를 훌륭히 키워내다 또 조금 자라나고 난 다음 책자를 보면 이웃
사랑이 극진했고 또 나라의 혼란기 병자호란에 의병하라고 독려도 하라는 우국정신도 있고
3050
10분 아들 중에 전부를 훌륭하게 키워서 아들 일곱을 칠현자라고 유림에서 이야기
3110
실기는 어느분?
실기는 셋째아들 현일..갈암이 행실기 쓴 것이 실기의 원본이다 거기에 후손들이 조금 덧붙여 쓴 게 현재 실기로서
전하고 있다.
3130
실기는 그 어머니의 좋은 점을 세상과 아랫대에 전하고자 갈암이 쓰신거다.
3150
실기는 셋째아들 갈암이 행실기를 쓴 걸 원본으로 해서 그 후손들이 다시 조금 보충한 것이 현재 실기라고 전
하고 있고 쓴 동기는 이 아름다운 여성의 상을 후손과 자녀들에게 전하기위한 그것이 전가보첩이라 하는데
전가보첩을 일명 팔룡수첩이라고도 한다 팔룡수첩은 일곱아들과 그 부군인 남편을 모아서 용을 일곱 마리를
그려서 팔룡수첩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 석계가 글씨를 잘 써서 석계의 글씨에 시는 장씨부인의 시 수는 장씨
며느리의 둘째며느리 박씨부인이 수를 놓아 그 수첩이 0000이라 전한다.
우리 일가의 세가지 절정품이라 전하고 있다. 그것은 불천위를 남편이 불천위에 오르면 여자는 자동으로
남편과 같이 모신다.
-전고대방이라는 책
3451
정부인이 시집을 올 때 19살인데 올 때 전처소생이 3남매가 있었다. 아들 한분 딸 두분 있는 집에 가서 그 어른이
아들 여섯과 딸 하나 낳아서 10남매를 훌류앟게 키웠는데 그 중 둘째 셋째는 진사의 부름을 받아도 안 올라간
어른인데 셋째는 몇번이나 나라에서 올라오라고 하니까 올라가서 최후 벼슬을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판서를
역임한 게 셋째어른이다. 아들 과 딸 세분을 훌륭하게 잘 길러낸 어른이라고 생각된다.
-곽주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
3603
곽주가 그의 부인에게 안주를 담아서 내일로 보내되 생치 즉 꿩고기등의 고기를 넣어서 안주를 장만하라
3737
술 잘먹는 어른 친구들이 서울로부터 함께 와서 내일로 집에 들어가니 좋은 술을 많이 구해놓 았다가 마시게 하소
3800 어르신네들이 모여 계셔서 나보고 술을 가지고 오라 하시니 가장 술로 가려서 두병만 하고 도시락에 안주를
가장 좋게 꾸며서 낮쯤에 여기에 오도록 보내소
3900
집의 아이가 종기가 걸려서 침도 주고 뜸도 주고 했는에 안 낫다 소주를 먹으면 좋다고 하니 조그마한 병에 꿀을
반종지만 넣고 꿀위에 소주를 가득 넣어서 소주의 김이 빠져나가지않게 단단히 봉해소서 보내소..
소주가 제일 좋은 약이라고 하네
3942
친구 한분이 돌아가셔서 내일 성북한 후에 치정할것이니 치정에 필요한 안주와 제주를 차려서 종이 올 때 내일
좀 보내라.
4040
곽주집안의 연하라는 여종이 갑자기 죽다.음식 잘만드는 종인데 안타까워 해 연하의 어머니가 오는데 가서 가장
맑고 좋은 술을 장만해서 안명제를 했다..장사 지낸 후에 안명제를 하라고 술을 아주 좋고 맑은 술을 줘서
안묘제를 하도록 하소
4135
큰 물이 WU서 사달이라는 곳에 있는 논의 둑이 터지다 둑을 막으려고 일을 시키려고 하는데 부인에게 종들에게
먹일 탁주를 한 두루미를 걸러서 내보내소 종들에게 탁주를 먹여가며 일을 시켰던 그런 내용을 볼 수 있다.
4222
곽주의 시집 간 달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진데 물건을 보낸다 약주 두병 과일 대구 두 마리 이런 거 버선도 보냅
니다.술은 사라의 종들이니 먹이게하소서
4321
(편지 던지며)
현풍 곽씨 연간은 현풍은 소래마을에 대대로 사는 곽씨문중..곽주의 처의 묘를 이장하던 중 관속에서 발견된
편지다 전체가 170매이고 1602년과 1652년사이에 쓰여진 것인데 곽주와 그의 딸들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임진왜란의 삶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
**백교수 인터뷰
4424
이 한글편지들은 17세기 초 그러니까 임진왜란 직후에 경북 달성군 현풍에 살던 곽씨문중의 생활사를 담고 있다.
4444
이 편지는 임진왜란직후에 달성군 현풍에서 살았던 곽씨문중에서 나온 편진데 임진왜란 직후의 삶의 모습들
양반층의 문화들 그 생활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연드이 이 편지에 담겨있어서 조선시대 생활사 문화사
연구의 보고라고 말할 수 있다.
4520
정부인 장씨와 동시대?
시대적인 거리는 30년..정부인 장씨의 어린 시절과 같은 시기..이 편지에 담겨있는 여러 가지 요리나 음식문화는
장씨부인이 남긴 음식디미방에 나온 내용과 동일한 것이 적지않다.
4557
이 편지의 많은 내용들이 음식과 관련되거나 술과 관련된 게 많다 특히 술과관련된 게 여러군데 나오는데 대체로
양반사회에서 술을 어떻게 썼느냐 예를 들면 접빈객으로 어떻게 쓰였느냐 좋은 술 많이 하고 이런 저런 안주
마련해서 대접하라는 접빈용이 있고 약용..아이의 종기치료를 소주에 꿀과 섞어서 아이에게 먹이고 쏘주를 약으로
스는 것도 나오고 노비들에게 일을 시키고 술 먹이는 탁주 이런 이야기도 같이 나와
당시 술이 양반사회생활에서 어느 방면으로 어떻게 쓰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4730
관시언간에는 당시 양반들이 술을 KT용하는 여러 용도가 나온다 포도주 죽엽주 만드느 방법이 나오는데 이런
고급술을 손님대접용 그다음 소주가 여러번 나오는데소주는 귀한 술이어서 약용으로 쓴 예도 나온더.
또 노복들에게 일을 시키고 노복들을 먹이는 술로 탁주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 편지로 당시 음주문화나 술이
어떤 쪽으로 쓰였는가 물론 제사용도 포함..그런 용도가 이 편지에 나타나서 당시 술이 17세기에 양반사회에
어떻게 씅고 어떤 생활에 비중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5000 여기 사신지는 그렇게 오래 안 사시고 조금있다가 출가하셨으니까..
5030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집이 비니까 친정에 와서 식구 돌보고 제사 받들고 그렇게 생활했다
5100
다시 할머님을 재취로 모시고 와서 동생들 나으니까 아버지 돌아가셔 동생 어머니 모시고 시집근방으로 이사
시켜서 장성해서 결혼시켜서 친정으로 돌려보내다 대단히 훌륭한 일을 하신거다.
- 경당고택..집
@@ 테이프 11
경당문집 경당신위
5914
족보.. 석계선생에게 출가..나중에 출가한 이후에 상태를 알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 후사가 없다 그래서 할머니
에게 다시 친정에 와서 새로 계모 얻어서 맏이가 서로
-목판 문집 :경당 후손 인터뷰
0701
이 할아버지께서는 처음부터 관가의 벼슬이나 이런 건 아주 생각을 안했다 퇴계학봉..후학들의 교육이나 그런
사상에 도취해서 학문만 깊이 연구하셨지 벼슬에는 아주 취미없고 생각도 안해..그 후학들이 많을때는 200명
까지도 되다.
0736
처음에는 할아버지께서 그때 이후로는 여자들은 공부를 하는 게 아니다해서 글을 안 가르쳤다
그런데 이 할머니께서 그 제자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듣고 그게 선천적으로 재주가 있었던듯..경당 할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고 답하는 가운데 대답을 못하는 후학들이 있었다 할머니가 오늘 아버지가 낸 문제의 답이
이게 아니냐 해서 탄식하며 ...그리고 그 분의 할머니의 글씨체계는 이런 글씨체가 여자 중에는 없다.
남자의 필체지 여자의 필체는 아니다라고 경탄 하실정도로 필체에 힘이 있었다.
0910 아쉬움이 남는다..
0935 경상북도 안동시 서부면 성곡동 관명은 성곡동인데 춘파..제 나이 올해 예순 둘 장성진..
# 치암선생 고택
2128
(고택 들어가며 전문가와) 이건 치암선생의 고택이다 조선조말기 양반가의 가옥구조를 대체로 잘 유지하고 있는
집이다. 이 복원을 못했다고 그렇게한다. 다섯칸이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많을 수도 있고..좌우대칭형으로 됐고
가운데는 ...
2340
저희집 내부구조를 설명해드리겠다.
전통적인 양반가옥
입구자 우물정자 앞마당인데 여기는 중간세대가 기거하는 방이고 저쪽방은 신세대가 사용하는 공간이고 그리고
이쪽의 방은 할머니가 사용하는 공간..안방이다. 그리고 이 큰 마루가 가족전체가 활동하는 공간이고
그리고 특히 큰 행사시 제사 모실 때 큰 마루에서 제사 모신다. 그리고 지금은 구조가 변경되었지만 부엌공간..
그리고 저기는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보관하는 창고..이런 공간이다.
2550 전체가 안채공간인데 여기는 중간세대가 사는 공간이다 그리고 저쪽방은 신세대가 사는 공간이다.
2613
여기는 부엌이다.부엌이고 여기는 생활용품..그리고 여러 가지 주식이라든지 부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되겠다.
@@ 테이프 12
(전문가)
2750
여기 보이는 공간들은 전부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고 자녀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는 건 남성들을
위한 공간이고 이 집의 최고가장을 위한 공간이고 외부손님의 접대의 공간이다
여성공간인 이 안채는 서열적인 공간구성을 취하고 있다 저쪽 끝이 안주인이 기거하는 안방이고 여기가 중간
며느리가 기거하는 방이고 그리고 옆에는 가장 젊은 손부며느리가 기거하는 방인데 이것은 조선사회의 유교적
서열구조를 주거공간속에서 반영한 것이고 유교적인 이념을 실천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후기 사회로 오면 특히 가부장적인 권위가 강화되고 남녀의 내외법이 보다 분명하게 정해짐으로써 남성
공간과 여성공간의 분화가 엄격하게 적용되고 그것이 보편화됨으로서 사랑채와 안채의 분화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집도 그와같은 사례로서 대표적으로 뽑을 수 있다.
2928
여기는 중방이라고 이해가 되는데 며느리의 방이다. 저쪽 끝에는 상방이라는 이름인데 손부며느리의 방이구요
저쪽 반대편엔 안주인..안방에 계시는 할머니께서 작고를 하시면 중방에 계시는 자부께서 안방을 물려받는
방물림을 하는 것이다.
3000
안방에 계시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중방에 계시는 자부께서 물려받는다 이걸 방물림이라고 한다
그러고나면 상방에 사는 손부며느리께서 다시 중방으로 옮겨오게된다.
3025
여기는 사랑채의 제일 큰 사랑방으로 연결되는 곳이다 일상적으로 가족성원들과 함께 생활할 때만 이 문을 사용
하고 외부인이 오면 이 문을 출입할 일이 없고 바깥에서 외부인을 맞이하게된다.
3052
여기는 안방이고 안방 바로옆에 부엌이 있다 이건 여성들의 취사활동에 편의를 제공하기위해 안방 옆에 부엌을
배치했고 부엌옆에는 다시 부식을 저장하는 창고를 배치하고 있다 이것 역시 여성들의 공간내에서 동선을
최대한 줄여주기위한 것이고 실용적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3148 여기 전체가 사랑챕니다. 사랑방
3150
이 건물 전체가 사랑챈데 사랑채안에는 상당히 서열적인 공간배분이 이뤄져있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방이 큰
사랑방으로 이 집의 남자최고어른인 가장이 기거하는 방이 있고 그 옆의 방은 중간사랑방으로 아드님이 기거
하는 방이고 저쪽 끝에 보이는 방은 작은 사랑방으로 손자가 기거하는 방이다
물론 장녀나 손자이거나 혼인을 한 손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조선후기사회의 부계 직계가족 삼대가 서열화를
꾀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공간구조가 이뤄져있다 이와같은 방식은 조선후기로 오면서 유교윤리에 의해서
남성의 권위가 보다 강화되고 강화된 속에서도 세분화가 어떻게 이뤄졌나를 보여주고 있다.
3305
사랑방이 이렇게 서열화가 되어있는 건 조선후기에 오면서 부계가족제도가 강화가 되고 그에 따라 남성들간에
서열화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뤄져야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3335
양반가옥에 있어서 안채와 사랑채가 분화되는 건 조선전기부터 있는 현상..그러나 조선중기가 되면서 남녀유별
이라는 유교적 내외법이 보다 강화됨으로해서 더욱더 보편화되고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17세기 넘으
면서 그와같은 현상 뚜렷하게 나타나서 양반이 아닌 집에까지 나타나게된다 이 집도 그와같은 남녀내외법의
윤리가 공간속에 적절하게 반영되어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3536
술?
저는 생각컨데 그러한 문제는 한국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때 어느 정도 답이 날 수 있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 술이라는 건 남성본위의 기호품이었다 여성들은 비록 술을 빚었다하더라도 자신들이 먹기위해 술을
빚었다기보다 오히려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남성을 대접하기위해 술을 빚었다
왜 여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술을 빚은 것이 아니라 조상과 남성들을 위해 술을 빚었는가하는 건 술이 가지는
권위적인 문제 권력과의 문제에서 답이 마련될 수 있다. 다른 음식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만들었다할지라도
자신들이 먹고 또 타인들도 먹고 하는데 술은 빚는 자신들은 정녕코 먹는 대상에서 상당히 배제되어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건 술 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의 문제 지체와의 문제와 연결되어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성들이 전혀 술을 먹지않았느냐 그런 건 아니다
여성들의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데보면 여전히 술을 맛보게하는 게 있다 그건 남편을 위해 술을 빚을 때
어떻게 빚어야하는 가를 조금 일깨우고 술의 사회적인 의미를 간파하게끔 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게아닌가
생각한다
술을 먹는데 보면 어디까지나 연령이 높은 어른이 손아래사람에게 권하고 술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도 어른들
이었다. 따라서 손아래사람들은 어른들앞에서는 자유롭게 먹는데는 제약이 있었다
이런 측면으로 볼 때 술이 권위의 상징이다 지체의 상징이다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후기로 오면 부계중심적 사회원리가 보다 강화되면서 남성들과 여성들의 차별관념이 고조되고
특히 남성들의 지체가 보다 강화되었다 그러면서 외부에서 많은 손님들이 찾아올 때 술을 대접하게되고
그 술을 통해서 그 집의 가풍이라든지 가격같은 걸 어느정도 상징할 수 있는 작용을 했다
또한 술을 대접하는 사람입장에서는 술에도 어느정도의 등급화 서열화가 이뤄지지않았나 청주와 같은 맑은
술은 상품으로 귀한 손님이 오면 대접하고 탁주와같은 술은 등급이 퍽 낮은 술로 쉽게 대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술이 아니었나 보는 것이다
이와같이 상중하정도의 등급이 매겨진 것은 많은 손님들을 대접할 때 거기에 맞는 술이 무엇인가 하는 걸 생각
하게 했던 것이고 또 지체가 높은 집은 자기집의 가풍과 가격을 전달하기위해서 다양한 술을 만들 필요가 있었
다고 생각된다.
물론 조선후기에 오면 양조법이 발달하면서 술의 재료가 더 많아지게되고 재료가 많아지면서 술의 종류가 더
많아진다고 하는 것은 고려해야겠지만 전적으로 그와같은 문제로 술의 종류가 다양화된다고 생각할 수 없고
방금 설명한 것과같이 남성본위의 사회가 보다 더 확대되고 그 의미가 크게 강조됨으로써 거기에 걸맞는 술들
이 다양하게 빚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서 조상의 제례와 같은 의례에서도 술이 반드시 끼어들게되는
데 그것은 신과 인간의 교감을 술로서 실천해본다는 의미를 담고있었던 것이고
또 한편으로 봐서는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들어모신다는 건 살아있는 사람과 조상간의 관계를 보다 더 정확하게
확인하고 확고하게 이미지지우기위해 그와같은 술을 다양하게 빚어서 결국 부계중심사회에서 가계계승원리를
술을 통해 또한 실천했던 그런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와같이 해서 음식디미방에서 51가지 정도의 술이 나올 수 있지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그 51가지 술을 늘 만들
어서 먹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토록 다양하게 빚을 수 있다는 건 그 당시 사회의 술에 대한 상징성과 의미분화
가 보다 더 정교화되고 세분화되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4205
뭐 아시다시피 조선후기 양반들은 신분적으로 특권을 가지고있었던 사람들이다 이와같은 특권을 식생활 또는
주생활을 통해 실천해왔었는데 술을 담그는데 있어서 그와같은 문제를 연결시켰다
따라서 주부들의 경우에는 어떡하면 우리 집의 신분적인 특권이 술을 통해 차별적으로 확보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고심을 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술재료가 눈에 띄기만하면 물론 대표적으로는 계절이
바뀌면서 다양한 술재료들이 발견되었을 때 어떡하면 이걸 통해서 우리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고 또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데 유용한 술을 만들것인가에 연결시켜 술을 빚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체적
으로 얼마만큼 헌신적으로 했는가 이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4330
외부에서 오는 손님들의 경우는 어떤 집에 가니 무슨 술이 맛있더라 그 집에 가면 무슨 술이 연상된다 이런 게
문헌에 나타나는 걸로 보아서 그 술을 대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우리 집의 얼굴이다
우리 집의 가풍을 전달하는 하나의 매체다는 식의 의식을 가졌다
4400 제사 때문에 술이 다양해진 건 약하다.
4430
방금 제가 설명드린 것처럼 양반가에서 이런 책이 만들어졌고 양반들은 신분적으로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월적인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신분적인 특권들을 조리서를 통해서 또는 양조서를 통해서도 변별적으로 확인해
내고자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다 그와같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음식디미방 서문 뒤쪽에 보면 이 책을 함부로
훼손하지말라든지 딸자식들은 배껴만가서 유용하게 활용하라하는 언급이 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고루 보고 이와같은 술을 빚고 음식을 만들라는 권유는 빠져있고
자기집의 자손들만이 이 책을 읽도록 배려하는 것은 양반들이 가지는 신분적인 특권을 자기 가문에 국한시켜
계속 계승함으로해서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는 인식이 그 서문의 글귀에서 확인된다고 생각한다.
4600
음식디미방말미에 보면 내가 눈이 어두운데도 정성들여 책을 쓰니 이 뜻을 알아서 이대로 시행하되 책을 함부로
다루지말라..딸자식들은 배껴서 보고 길이길이 간직하라라는 뜻이 적혀있다 이와같은 기록은 양반들이 신분적인
특권의식을 다른 사람들과 차별적으로 확인해내고자하고 가통을 음식을 통해 양조법을 통해 계승해내고자하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고 생각한다.
4700 맛질
--권씨일족..?
5112
이 동네 맛질?
맛질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라고 하는 건 참 막연하네..산천이 생겨나면서 산과 골과 이름이 생겨난다
한자가 들어오기이전 말이 쓰이다 맛질은 순수한 우리 고유어다 고유어인데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곳을 저곡
저상 얘기를 한다 물자 저 골골 저 산은 뫼산자지 여기 사람들은 저자를 저로 읽지않고 저로 읽어서 저로 하는
것이 고유명사가 되었다 여기 설이 여러 가지 있다. 말을 캐러가는 길목이라서 맛질이다 또 맛이 --
5230
그러는데 왜 맛질이라고 했냐하면 천지가 개벽하고 산과들과골의 이름이 생겨난다 그때는 우리 순수한 고유
어지 한자어는 없었다 한자로 견강부회를 한다 그건 금물이다 그러는데 내가 알고있는 바로는 말을 캐러가는
길목이라서 맛질이라고 했었다 또 맛있는 음식이 이 고장에서 만드는 솜씨가 좋은 사람들이 살았다고해서
맛질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한자로 제사..제곡이라고 한다. 그러는데
삼수변에 논자..물가저..이 근처에서는 제곡으로 고유명사 이 근처가 물이 맑다 사람이 살았던 자취로 큰 돌이
박혀있었는데 잘 살아보기 운동하면서 모두 깨내버렸다 이건 나중에 아고보니 고인돌이다
그런데 여기의 고인돌은 남방식과 북방식이 혼재해있었다 그러니 바로 이 뒷산이 소백산맥인데 소백산맥의
남북을 가지고 간다 그러니 북쪽에 있던 고구려나 거의 넘어온 남방한계선이 이곳이고
남방식 고인돌이 올라가다가 멈춘 곳이 이곳이기 때문에 남북읜 지석묘가 여기 혼재해있다 사람사는 건 아주
오래되었고 한자는 천수백년 물맛좋다 물가다 수량이 풍부하다 그런 뜻에서 제곡.,.
그리고 맛질은 말을 캐러 가는 마을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마을 그런 뜻이 되겠다
5520
이곳에 안동권씨가 온 건 조선초기다 그러는데 이곳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건 안동권씨들도 나름대로 좋은
지역이 있지만 정부인 장씨의 외가라는 뜻에서 근간에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는데 안동권씨로 경남이
정부인 아버지가 그 외손녀가 되시길래 외가에 자주 왕래를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외가에 와서 음식을 맛보고 거기에 특색있는 음식들을 음식디미방에 기록해서 맛질음식은 이런 것이
라고 기록했다 그러니까 예를 하나 들자 식혜가 있는데 안동식혜와 예천식혜는 다르다 안동식혜는 엿기름을
많이 넣어 발효시킨 건 맞는데 예천 건 달고 안동 건 떫은 맛이 나면서 신 것이 특징이다
그러니 안동문화권과 예천 문화권의 문화권이 다르다 그러니 예천의 음식들이 정부인의 어린 생각에도
이상스럽게 느껴지고 별다르게 느껴져서 아무래도 그렇게 거기에 기록했을 것으로 보인다
맛질와서 맛본 건 여러 가지가 나타난다
@@ 테이프 13
## 계속 인터뷰(맛질 정용수선생)
5757
정부인이 외가를 다닐때는 바로 이 마을..그러는데 외삼촌들이 봉화로 옮겨갔다 그래서 안동장씨들도 외가의
예천의 맛질이 아닌 봉화라고 생각하고 봉화로만 왕래하고 있길래 맛질이라는 건 모르고 지내왔다
그러나 그 뿌리를 캐보면 봉화에 와서 사는 경당의 처같이 정부인의 외갓집이 당시에는 여기에 살았다
그래서 맛질음식이 디미방에 자주 나올 수 있었다.
5850
음식으로는 유명하지않다 그러나 원래 음식이 인간의 수명과 관련있다 임진왜란 전 16세기 말에 여기 퇴계
학봉선생이 이 근처를 지나다보니 부자가 다 100살을 넘겼다 그래서 어떻게 그러냐하니까 이 마을 이름이 뭐냐
하니까 맛질이라고 대답..노인촌이 이 마을이다..바로 여기에서 이 근처 물맛 좋고 음식 잘 만들었고 좋은 물
있었고 맛깔스러운 솜씨 있고 예천 토성이 아니다 안동문화하고 예천문화..음식문화 두가지를 접합해서 만들어
낸 것이 맛질음식의 특징이다.
0030
이 마을은 한 성씨가 세도하는 마을이다 흔히 보면 요새 사회용어로 집성촌 이야기하는데 집성촌은 이성하고
저 성하고 섞여사는 게 집성촌..여기에는 안동권씨와 함양박씨가 세도하면서 두 세력들이 이 마을앞의 맛질장터
에서 1년건너 한번씩 --하던 서낭당들이 남아있다. 그 서낭은 상주에서 왔다
상주 조판서댁 --하나는 총각선왕이고 하나는 처녀선왕이다 그래서 어미 선왕이고 선왕이 세 개가 있는데
세 개의 선왕신을 달래려고 별신 굿이 있었는데 일제후 사라지고 자취가 없다 지금도 별신굿은 꼭 지내고 있다
0626
정부인 장씨의 외가집터라고 전해져오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부인장씨가 외가에 오면 외손자의 정자인
야옹정에 와서 노셨다는 것이 확인될 수 있다. 지금은 집이 없어졌나? 지금은 집이 없다 그 이후 여기 집을
지어서 살기도했는데 나가고 빈집되다보니 나가고 허물어졌다. 바로 옆에 옥산정이 있습니다만
0812(집터에서)
이 지역이 맛질이라고 불리면서 도참설이 발전하면서 뭐가 되었는고하니 정감록에 십승지가 있다
십승지속에 세 번째가 예천- 그 금당곡은 속명으로 금당맛질..금당실이 -----
0930
###이문열선생 집
@@ 테이프 14
2514
정부인장씨가 훌륭한 점이 있다면?
제가 조상으로서가 아니라 한 훌륭한 선배..참
다시)) 조상으로서가 아니라 한
2610
제가 정부인한테 감동을 느낀 건 가장 큰 건 개인적인 재능이 아니고 만년이 될 수록 익어가는 모성 또는 사회성
이다. 그래서 아침에 머슴을 내보내서 연기가 안 나는 집이 있냐 물어봐서 그 당시 연기가 안난다는 건 굶는다는
뜻이니까 그 집을 그것도 그냥 가장을 불러서 일을 시키고 곡식을 보내는 이런 형태의 일화를 보면 그분이
그때는 단순히 자기 아이들만의 어머니가 아니고 사회전체를 끌어안는 모성의 확대로 보여지고 그것들이 그
할머니한테서 가장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된다.
2714
시에 대해서?
그 시들이 대부분 한시형태라서 내가 정통하게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그 특징은 말할 수 있다 우선 이조의 여류
시인들 중에서 한시를 남긴 분들이 많은데 11편은 적은 수가 아니다 굉장히 많은 수 상위 몇 명안에 들어갈
정도로 많은 시를 남겼는데 특징은 그 전에 다른 여류시인들이 남긴 시와는 다르다.
다른 여류시인들은 규방시라고 해서 어떤 규방의 한이라든가 아니면 경치를 서술하거나 자기 정서를 서술하는
게 끝이다
그러나 정부인 시는 그런 게 없다 경신음이나 성인음같은 경우에는 유교의 학문적인 걸 시로 표현했고
소소문같은 건 자연철학같은 걸 잘 들었고 학발시는 민중시적인 민중의 애환을 이 사람이야말로 양가의 규수로
알 리가 없는데 민중의 애환을 노래한 시다 그래서 격을 달리하고 또 형식도 특이하다
보통 그때는 근세시라고 해서 당시의 일들을 많이 썼는데 정부인은 중요한 시들은 시경시형태다 사언고시
오언고신데 이 양식도 아마 익숙하기 쉽지않다 특히 시경시같은 경우는 학문적인 바탕이 없으면 쓰기 어렵다.
(시경시 학문바탕 있어야한다?)
3000
자녀교육?
보통 우리 고향에서는 현모양처를 더 높이 친다 좋은 교육을 하고 남편을 잘 모시고 사실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
하면 정부인도 행운인지도 모른다 똑똑한 아들이 있어서 교육의 효과가 드러났고 저는 그걸 무시하는 건 아니
지만 그게 할머니의 가장 큰 공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부분도 어떤 것들은 부부관계같은 것들은
요새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다른 특징이 있다 그 분도 석계선생 모실 때 귀한 손님 모시듯이 했지만 그쪽편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중햇던 사이로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귀하게 여겨지고 특히 우리 집안 같은 경우는 옛날부터
남녀평등 있어서 재령이씨 분재기라고 하는 국보급 문서가 있는데 거기 보면 재산을 나눠주는 건데 사오백년전
에 재산을 구분없이 같이 나누다 그게 배경이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거의 평등에 가까운 부부사이 그러면서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부부사이 그런 건 요새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진 거같아서 그걸 특별히 말하고 싶다.
3210
자녀들 완성?
정부인 당신도 그렇지만 자제분들도 실제 지금까지 별로 알려지지않았다 그건 그 당시 정치사와 관계가 있는데
가람같은 분은 말하자면 마지막 실력자였던 노론과 첨예한 투쟁을 벌였던 분 그 중에서도 영순위었고 살아계신
동안이 아니고 돌아가신 뒤에도 노론정권의 굉장한 견제를 받다 그 바람에 알려지지않았는데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건 거기 나오는 일곱분은 지금 우리에게 알려지지않아도 민족백과사전에는 다 나온다 그런 게 있고
그 다음에 일단 옛날 체제에서 어떤 사람이 호와 문집과 정자를 가지고 있다면 일단 그냥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일곱분이 다 여섯자제분이 다 호와 문집과 정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건 단순한 부나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학문과 관계가 있는 것이고 또 그 분들 저서를 다 모으면 옛날식책
으로 하면 과장 보태서 한00찰거다
3410
전가보첩?
전가보첩의 경우는 사실 저도 처음 볼때는 이게 무슨 대단한 보물인가싶을정도로 잘 이해안되는 부분이 있었다
우선 내가 아는 바로는 세가지가 어우러진 건데 이 수의 양식이 아주 독특하고 특이하다
지금 한국수가 있지만 그걸 보면 거의 재연이 어려울 정도로..그때 보면 중국식의 양식인지는 모르겠다
그 다음에 그 안의 글씨가 좋고 글씨 내용 시가 좋고 이 세가지가 어우러져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일반적
으로 가치를 이야기하기 어려워도 옛날사람들은 귀히 여겼던 것같다 왜그런가하면
이것이 종가가 좀 어려워져서 그 당시 세력이 노론가문에 갔다가 정조때 00선생이 그걸 칮아서 우리 집안에
돌려준 적이 있다. 그때 아 참 신기한 물건이라고 정조께 권했다고..정조 그걸 보고 감탄하면서
이거 절묘한 물건이다 내가 여기다 화조를 하나 놓을까 어필로 자기 감상을 적는 거다.
말렸다..지금 이 대로도 지키기 힘든데 여기에 어필이 대지면 정말 더 지키기 힘들거다 그래서 어필 화조를
못놓게했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그 당시로는 가치를 인정하는 것같다 요즘도 각 분야에서 대단하다 말한다.
3645
저는 요리책같은 것이 정부인의 사회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보면 그 요리책이
다양하지도않고 진귀한 요리도 없다 그건 오히려 우리가 보기엔 이미 있는 것 그러나 기록하고 보존하고 또
더 늦게 전하기위한 수단으로 보여지고 이 부분에서 아는 걸 아는 걸로 그치지않고 남한테 전하려고 하는
정부인의 사회성같은 게 볼 수 있다.덧붙여서 말하면 그 글을 쓰실때가 일흔다섯..
그때 자식들 출세한 뒤인데 부러울 것없는 대갓집 마낫님이 몇일밤을 새워가며 글 쓰는 걸 생각하면 정부인의
또다른 측면 사회성의 확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830
정부인을 모델로 선택이란 글을 썼는데 그것 때문에 여성계에 공격을 많이 당했다 재주가 없어서 글을 잘못
써서 조상을 욕보인게 아닌가 할 정도로 공격을 당했는데 거기에서 기본적인 오해는 나는 오히려 정부인을
통해 여성이 얼마나 자기를 확대하고 얼마나 자기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는가 그걸 보여주고싶었는데
거꾸로 여성의 적처럼 생각된 거 그건 유감이다 다시한번 읽어보면 결코 여성을 다시 노예로 만들고
여성을 봉건시대로 끌어내려고 한건 아니고 그 어려운때도 이렇게 훌륭하게 자기성취를 하고 이웃에까지
끼친 분 이런 걸 쓰고싶었던 건데 오해가 있었던 듯..
@@테이프 15
**박광용인터뷰
2300
원래 전통문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의식주문화.옷과 음식과주택이다 그 중 음식
부분에 관련된 저서를 남겼다는 건 전통문화에서 식생활관련에 대단히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음식디미방은 특히 중국에서 들여온 술도 있고 안동지방의 독특한 요리도 있다
즉 여러 가지 전통적이고 국제적인 요리들을 그 당시에 맞춰서 종합적으로 정리했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2430
요리 남겼다는 건?
원래 요리책을 남긴다는 건 전통문화가 정착되어간다는 의미 향약집대성운 우리나라의 약이 정착되어간다는
의미 그와 마찬가지로 그 지역정서 그 당시 사대부지방에 맞는 요리서를 만들었다는 건 우리 사대부집안의
요리문화가 정착되어왔다는 의미다.
2530
17세기의 변화중에서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여성에게 그 전까지 재산이 상속되던 것이 사회관념상 재산이 상속
되지않는 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주자의 종법이 도입되면서 남성은 사회활동을하고 여성은 가사
활동을 한다는 내외법이 보다 강력하게 적용되던 시대다 이 두가지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
으로 이조시대보다 낮아지고 활동범위가 좁아졌다.
2622
구체적인 제약은 사회관념상 나타나는거다 정부인당시에는 새로운 가문을 만든다는 것 때문에 창조적인 방향의
여성활동이 가능했는데 일단 그러한 가문이 만들어진 뒤에는 여성들에게 창조적인 가풍을 만들다기보다는
그걸 지킨다는 것에 더욱 강력하게 요구되다.그런 부분이 후대로 갈수록 여성의 창조성을 막아가는 것으로 작용
했을 가능성이 있다.
2714
정부인장씨의 생애 기록을 보면 당연히 저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다 당시 보통여자는 후학 정도를 배웠을
것이고 그 뒷사람은 여사서라는 여자용의 저서만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인 장씨는 소학은 가장 기본일뿐
아니라 소학외의 사서 오경 현실에 직접적용할 수 있는 역사책 중국의 십구사략을 모두 공부한 걸로 되어있다.
그리고 15세 전후에 남아있는 시는 수준높아 중국의 고서와 전부 관통이 되는 것...
그래서 학문수준자체는 대단히 높았는데 다만 가정교육을 위해 그걸 숨겨놓고 지내셨다
따라서 그것이 말년이 될수록 저절로 드러나듯이 말년에 요리저서를 남긴 건 어느 의미에서 볼 때 당연하다.
2904
집안을 일으킨다는 건 유교적인 개념이다 그 이전까지는 혈통이 중요시되었는데 성리학이 도입되면서부터 집안
을 일으킨다는 것이 고귀한 혈툥을 보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학문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또는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인정을 받고 이걸 바탕으로 그 지역에서 대표적인 가문으로 성장하거나 더 나아가
국가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성장하는 걸 말한다 이것이 가문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가문을 세우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한 분들을 사림파라고 한다 그런데 사림파들은 16세기 초에 중종연간에
한번 이러한 운동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후해서 가문운동 벌이다
임진왜란 광해군 q병자호란 뒤 더욱 더 학문실력과 도덕적 행위를 바탕으로 가문을 세우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라는 인식이 사대부들 사이에 많이 퍼지다 정부인장씨는 이러한 학문실력과 도덕적인 실천을 바탕으로 전국적
으로 이름 있는 가문을 세우기위해 남편과 함께 전력을 다한 분이다
3110
우리나라에 이상적인 인간형들은 대단히 다양하다 예컨데 --의 경우에는 무당같이 신들린 것같은 감성적인 사람
불교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자
이성적으로 대단히 높은 위치에 올라가있는 대단히 철저한 분을 의미한다
성리학에서는 그러한 이성적인 인간을 군자라 부른다 군자는 현실사회의 잡다한 상황을 자신의 행동으로 풀어갈
수 있는사람 우리는 그것을 삼강오룐 실천자라고 하지만 오늘날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면 현실상황의 복잡한
상황을 자신의 행동으로 풀어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
3239
이런 것은 보통 사회활동을 하는 남성들만이 가능한데 저웁인장씨의 경우 여성으로서 남성까지 본받아야할 것을
그런 모범을 보여줬다는 의미 그런 점에서 여성군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3300
사회성?
당시 우리나라 사회..이른바 사대부사회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셖어지내는 독특한 구조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섞여사는 독특한 구조는 동양 특히 동아시아외에는 거의 존재하지않을 정도로 독특하다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심복시키는 방법으로 썼던 것이 마을약속이다 즉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서로
모여서 마을약속을 제시하고 이 약속대로 마을을 이끌어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다
지배계층으로서는 피지배계층을 돌봐주고 피지배계층은 지배계층에게 예의를 지키는거다 이러한 피지배계층을
돌봐주기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전근대사회애서는 언제나 질병문제 가난의 문제다 질병과 배고픔이 피지배
계층이 보았을 때 지배계층은 모른 척하지않고 헌신적으로 도와줄 때 지배계층으로 자기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거다 이것이 일종의 마을약속 향약이라고 부른다.
향약정신에 투철했다는 것이 정부인 장씨의 행실기에 아주 깊게 기록되어있다.
3511
정부인장씨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 시대에 창조적인 역할을 했느냐
안했느냐에 있다 그 시대 창조적인 방향은 사족들에 새로운 가문을 일으켜세움으로서 사회분위기 쇄신하는
것이다 정부인 장씨는 여자임에도 어른 군자로 대접받으면서 남자들과 대등하게 집안을 일으켜세울 수 잇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것 이부분이 후대에 인정되었다는 frjt이 중요 그 다음에 오늘날도 본받아야할 점은 대단히
많다
예컨데 생활하는데 있어 온유함과 강인함을 겸비했다든지 오늘날 가정교육의 모델과 같은 분 우리나라의 맹자
어머니같은 분이라든지 그 다음에 시라든가 글을 볼 때 대단히 맑은 심성을 가진 분이라는 점 이런 걸 종합해서
평가할 때 저희들이 역사적으로 충분히 기억해야할 분이라고 생각된다.
3700
정부인장씨의 가족입지가 강력했다는 건 그당시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라는 걸 분명히 감안해야한다
특히 병자호란 후 북벌론이 성행해고 실지로 북벌준비가 있었다 남자들이 북벌을 위해 떠날 수 있게 여성들이
그 자리를 메워야된다 그 자리를 메울 수 있는여성을 키우기위해선 아주 강인한 생활력 동시에ㅐ 어느 수준의
학문실력이 필요했다 정부인장씨는 그 당시의 사회적필요성에의해 그렇게 키워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을 충분하게 보여주신 분이다.
3820
요즘은 교통발달해서 집안과 집안사이를 다니는 일이 가능하지만 그당시에는 친정과의 거리가 몇백리 떨어져
있다는 걸 먼저 감안해야한다 서로간에 소식이 왔다갔다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친정과 시댁간에 관계를 원만
하게하면서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시켜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 다음에두집간의 문제를 같은 문제로 설득시킬 수
있었다는 것 그건 이 분의 행동력이 아니면 불가능 그래서 그 당시의 본가와 시댁이 몇백리 떨어져있다는 걸
감안하면 그 일이 마음이 있어도 하지못하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분은 마음뿐이아니라 실제로 왔다갔다하며 시행했고 그래서 아버님의경우엔 후사를 대신해서 결혼을 하고
그 작식들을 학문으로 키워서 또하나의 그 지역의 기둥되는 가문으로 키운 건 그 보통의 성의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4030
오늘날 우리나라의 여성의 지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열악하다는 이야기 많이 듣는다 그 이유는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남성만큼 쓰여지지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그건 우리나라에서 창조적인 능력을 버리고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여성의 창조적인 능력을 되살리기위해선 우선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여성의 창조
적인 능력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한다
그 이전에 사임당신씨 황진이 같은 분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만가지고 이전 전통적인 여성들의 창조역
을 이야기할 수 없다 오히려 정부인장시의 창조력을 이야기할때우리나라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력을 더 많은
분야에서 보다 더 풍부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정부인장씨는 앞으로 우리나라 여성이 창조적으로 나갈 때 하나의
방향제시를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전적으로 방향제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방향제시를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평가는 분명히 내려져야한다고 생각한다.
4231
제가 말씀하고싶은 건 바록 가문을 세울 때 학문적인 바탕과 도덕적인 신천을 통해 가문을 세운다는 정신같은
것이다.
4255
그건 그분을 하려면 음식디미방의 역사적인 평가가 분명해져야하는데...음식디미방을 통해서 역사적인 평가를
내린다면 어렵긴한데
4352
굉장히 어려운이유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이야기할 수 있지만 중국같은 경우는 이런 요리서가 남아있는 게
비교가 되지않기 때문에 이거 하나 가지고 지나치게 강조하게되면 굉장히 어렵다
4459
음식디미방은 당시 발표에 의하면 일반적인 요리를 기록하지않고 특수한 요리 그 지방 요리라든가 독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리 또 반드시 필요한 요리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런 의미는 전통문화의 계승 특히 전통문화의 기본
바탕 중 하나인 식생활문화를 실제화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오늘날 술문화하나만 하더라도 한국인을
대표한다 그런데 오늘날 술문화는 이전과 굉장히 많이 다르다
이전의 술문화는 각 지방마다 독특한 술이 있고 각 가정마다 독특한 술이 있다 이 술의 필요성은 기본적으로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기위해 필요하고 생활의 흥미를 주기위해 필요하고 한 것이 술문화다
그래서 삼사십년전만해도 지방에 가서 그 지방의 토속주를 마시는 것이 그 지방을 이해하는 것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요즘엔 이 부분이 많이 무너져있지만 정부인은 이러한 토속문화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더 잘 깨닫고 동시에
그 이전에 있었던 주자의 종법이라든지 또는 중국에서부터 전해내려오는 여러 가지의 생활방식이라든지 하는
걸 종합해서 당시 사대부가문에 알맞는 것을 음식디미방에 종합해놓았다고 할 수 있다.
4820
정부인장씨는 말년에 음식디미방을 중요하게 생각한 건 틀림없다거의 가보비슷하게 보존하라는 말을 남겼다
이건 본인이 학문과 도덕으로 가문을 세으고 그 마지막 완결로 부인이 이제ㅐ까지 노력해왔던 가정공동체에
대한 봉사 또한 사회공동체에 대한 봉사로서 음식디미방을 남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5130
그 이전시기에 비해 여성들의 전반적인 교육은 훨씬 수준이 낮지않았나 생각한다 더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남성들조차도 저서를 남긴다는 게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가 오늘날 저희들이 17세기 여성을 제대로
연구하지못하는건 사료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인장씨는 사료가 풍부할뿐아니라 음식디미방이라는
저서까지 남기다 이건 여성사적으로 볼 때 굉장히 중요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테이프 16
**황혜성서생과 둘이서
맛질방문,,
0440
청어
맛질방문은 맛질방문이 맛이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해석들 할 때 몰라서 경상도 사투리도 모르고 맛질방문
이라고 썼길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 맛있는 방법이다 쉽게 그렇게 해석을 했더니 나중에 그게 큰 잘못
이었다는 걸 알았다.
0515
안동장씨네 집이 친정에 외갓집이 있었나봐 동네이름이 맛질인데 ...안동장씨네 친정이지 그 시집가기전에 친정
에 다녔겠지 외갓집에 근데 거기에 있던 걸 써놓은 것을 내가 해석을 잘못했단말이야
0620
맛질이 처음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경상도사투리도 모르고 해석하는데 여기가 걸리니까 맛질이 뭐냐 몇날을 생각
하다 맛있는 방법이다 이 어른이 맛있는 방법이다 하고 열몇개를 써놓은 걸로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해석을 해서 책까지 내놓은 다음에 문제가 있어 맛질이란느 소리를 외갓집에서 하더라
그게 아니고 맛질이란 동네가 있다구요 근데 그게 장씨네 외가동네엿다
그래서 처녀시절이지 맛질이라는데를 다니면서 음식을 듣고 배워서 기록을 하다
그사람이 보통 열심히 아니었다 외갓집에 다니면서 배워와서 그걸 기록을 해놓고 그것을 자기가 실연을 했겠지
그걸 볼 때 아이고 나는 뭐라고 해야될지 몰라서 맛있는 방법이다 방문은 그런 뜻이다
그러니 너무 틀린 소리다 나중에 외갓집 할아버지가 외갓집에 찾아갔다 안동에서 찾았다.
찾아갔더니 그거 좀 틀렷네 ..네?그fot더니 맛질이란 동네가 있다 그러니 처녀때 외갓집 다니면서 음식조사릃
한거지 말하자면 그걸 자기가 쓰는 책에 옮겨노았다 그러니 얼마나 열성적이었나를 알 수 있다.
0917
처음에 내가 이 책을 찾으러 돌아다녔잖아 경북대 도서관에 가있다고 해 그런데 하두유명하다니까 도서관에
넣어버렸다 이돈이라는 종손도 가서 빌려달라고 했더니 안 빌려줘
사진을 찍어서 그걸 이제 글씨가 나타나 있으니까 나를 주는데 내가 얼마나 기뼈 그러니 댁에서는 재령이씨
댁에서는 읽을 사람이 없어 잠도 못자고 해석을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특별히 맛질방문이라고 토를 단 데가 많다
거기가서 딱 걸렸다. 아마 이건 맛있는 방법이라는 듯뜻인가보다 그래서 이걸 맛질방문은 맛있는 방법이다
해설본을 내놓았는데 안동장씨 가니까 할아버지가
---
1440
그때내가 교수시절이지 그때 경북대 김사엽선생 논무에 실린 것 논문에 실어내는데 거기에 소개..
훌륭한 요리책이다 디미방이라는 걸 보고 반해서 썼는데 내가 볼때는 꼭 그걸 봐애겠다 내가 볼때는 문집에만
흥미가있지만 난 문집은 그만두고 음식책을 찾아야겠다 그래서 김사엽선생이 대구의 교수인데 찾아가다 일본
가고 안곅서 책은 어디있나 하니까 일본 가지고 가셨대..그 양반도 무슨 뜻이 있을텐데
그 양반을 몇 년을 기다리고 그걸 이돈씨한테 하소연을 해서 그 책을 가지고 가서 안온다
김사엽선생 몇 년후에 오셨어 원본을 찾으니까 w도서관에 뒀다 그러니까 이돈씨가 도서관에가서우리책이다
달라 하니까 안 줘 그러니까 몇번 가서 간청을 해서 그걸 얻어서 사진을 찍었다
그때만해도 사진판 될 때다 사진찍어서 필름판 되니까 인쇄체 만든 걸 나한테 주시더라 난 그때부터 경상도
사투리 책을 읽어야하는데 충청도사람이 알게 뭐야 그래서 연필로 찍어가며 읽기를 1년을 읽어Tsqhk 1년동안
어디서 끊어야할지 끊는데가 없다 끊고 경상도사투리 알 수 없어
내곁에 경상도사람도 없어 그래서 그걸 고민을 많이 해서 해석을 했더니 그걸 이돈씨가 책을 만들어서 자기
종친들한테 폈다 종친들은 모른다고 까맣게 그래서 그 책을 받아서 교육을 하는거다 그래도 그책이 그렇게
발견되기도 잘 했고 김사엽선생 발견한 것도 잘했다
1920
난 궁중음식만 대단한 줄 알았거든 그러니 맨날 창덕궁 도서관들이 있으면 거기만 찾아가서 배껴 오는데 그거
배껴서 해석을 하고 그랬는데 궁중음식만 훌륭한게 아니구나 임금만이 아니라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된다
백성이 쓴 게 이런 거구나 그래서 그걸 궁중음식하고 비교하면서 공부하는거다
시골의 양번음식이 어떠했나를 알게되는데에 눈을 뜨다 그저 n궁중음식만 반하다가 양반들도 먹고살았는데
이렇게 귀한 게 어딘가..내가 하두 감격을 하니까 우리 전수하는 사람이 감격하는 책이 어떤건지 공부하자해서
우리 전수생들한테 고웁도 시켜Te 어디서 끊는 줄도 몰랐다가 연필로해서 했는데 나중에 qhslRK 틀린 게 있다.
2120
원래 시작은 궁중음식에 반해서 시작했는데 도중에 김사엽선생이 발견해서 논문에 싣고 또내가 보고 그 책을
따라다니는거지 또가면 보나 하고 그런데 너무 훌륭해 궁중만 사람이 산게 아니다 이건 양반집에서 더구나
안동에서살아가신 분이 붓글씨로 써서 이렇게 남겨놓으셨다
그런데 그게 그 집에서도 오랜만에 나타난거다 그 책이 바로 발견된 겡 아니다 그걸 하고 너무 기뻐서 나는
공부할거 신경끈다
그래서 그 책을 신주모시듯 하면서 맨날 연필로 찍어서 어딧거 끊어야할지 모르잖아 그래서 어디서 RMsg나
하는데 굉장히 힘들었다 그대로 읽는 건 읽지만 그걸 어디서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몰라서 고생하다 기쁘기는
이루 맗랄데없다 내가 시골 여러 책을 찾으러 다닌 적이 있느데 그런 책들도 물론 좋은 책이 있다
그런데 누가 썼다는 걸 모른다 이책은 확실히 안동장씨가 썼다고 하는데 얼마나 그 분이 보고싶은지 돌아가신지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이 충청도 황가라는 사람이 할머니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고웁한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 책이라는 게 이 세상에 발견된 게 얼마나 다행이었다
그걸 해석해서 우리 제자들을 공부시켰다 그래서 재연을 해봤다 더덕요리가 나오잖아 그렇게 한 것이 며십년이
흘려서 그때 내나아가 사십이나 되었을까 그때 너무 반해서 이책을 신주 모시듯이 한다
그렇게 우리가 음식문화를 만드는 법만 가지고 얘끼할 게 아니라 그배경도 알아야하고 공부할 꺼리 많이 생겼다
**안으로 들어가서 두사람 앉아있다.(황혜성과 한복려)
2820
처음 보았을대
내가 세상에 공부한 셈으로 쳤는데 아직 공부할 게 많구나 감격을 많이 했다 옛날에 할머니가 이렇게 훌륭한 책을
남겼으니 내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2850
그때 원본구경도 못하고 애를 쓰다가 사진판 구해서 책이 되었는데 충청도사람이 경상도 사투리 몰라서 어디서
귾어야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걸 몇 년 걸러서 해석대했더니 너무 좋은 음식법이 여기 나오다더라 r그래 이게
안동양반집의 음식이구나 하는 생각에 하감격을 많이 해사 할머니는 뵙지도 못한 분이지만 그렇게 훌륭한 책을
썼다는 건 이 나라가 대단한 나라라는 걸 하게 되었다.
2957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법하고 옛날의 음식법이라는 것이 양념에 있어서 많이 차이난다 그런게 있고 재료 지금
없어진 재료들 그렇지만 삼사백년저에 있던 재료가 지금도 이어진게 신기하고 필요없는 건 없어지고 우리한테
맞는 음식은 그대로 남아있지않나 여기엔 고추에 대한 얘기는 없다 그리고 지금은 다 되어있는 재료로 음식을
하잖아 그러나 옛날에는 원형의 재료를 가지고 시작을 하는게 나오니까 처음에 가루를 내는 법은 어떻게 하라
든지 불을 어떻게 떼라든지 그런 표현도 나오고
--황혜성선생이 번역한 책을 넘기면서
@@테이프 17
3237
녹두 불린다..
이제부터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착면법에 대해 할텐데요 착면이라는 것은 녹두를 가지고 녹말을 만들어서 화채로
만들어 먹는 것이다 여기 오미자하고 깨가 있어서 국물을 만드는거다 우리가 착면을 하려면 녹두녹말부터 만들
어야한다 그래서 옛날 방법 그대로 녹두녹말하는 걸 해볼까한다 그래서 우선 지금은 이런 녹두는 빈대떡에 많이
쓴다 여기서 녹말을 빼려면 진짜 녹말을 만들어보지 물에 충분히 담궈 하룻밤 불궈서 이만해줬다 껍질 벗겨야된다.
그릇이 도돌도돌 하잖아 보릿살 벗기고 손으로..손으로 비비거나 으깨서 씻어 그럼 뽀얀 물이 나오지 갈지 말고
충분히 여기서 비빈다..그럼 이걸 바가지에 눃고 이렇게 놓으면 가루니가 껍질은 여기 남잖아 알갱이 녹두만 남으
니까 이걸 갈아서 만드는거다.
**한복려 음식 만들다 인터뷰
5348
언문체 고체 끊어지지않으니까 사투리 섞여 어렵지만 잘 끊어보면 어떤 도구를 써서 얼만큼 하라 이런 걸 보면
당신이 직접 잘 알고있는 거라서 자손들한테 정확히 전달하겠다는 생각으로 쓰신 것이 확실해서 요즘 요리하는
사람들이 그런 걸 잘 받아들여야한 얼만큼 친절하게 이거를 할 수 있게 만드느냐 이것이 이책에서 보여진다.
5450
우리가 지금은 다 되어있는 재료를 쓰잖아 옛날에는 파는 게 없으니까 다 집에서 만들어야하니까 녹말도 만들어
야하고 밀가루도 만들어야하고 그중 녹말은 때가 있는 거니까 그때 많이 만들어서 여름에는 화채로 쓴다든지
메밀에 섞어서 국수로 한다든지 옛날책에 보면 조려서 윤기나게 한다든지 그런 건 기본적인 재료였다.
5555
다 옛날에는 집에서 만들어서 쓰니까 그 때에 맞ㅊ어서 만들되 음식디미방에 보면 제일 첫 번째 녹말만드는게
나온다 국수종류 나오는데 화채에 쓴다든지 다른 가루에 섞어서 쓴다든지 음식을 만들 때 다른 재료에 쓴다든지
곳곳에 나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만들어야하는 재료다
5650
녹말을 만들어서 면을 만들 때 하는 방법이 네가지 있다 반죽을 해서 밀어서 써는 거 그다음에 죽처럼 써서 구멍
난데다 흘려서 먹는거 그다음에 중탕하는 방법이 있고 그다음 틀에 누르는 방법이 있는데 오늘 화채는 중탕하는
방법으로 할거다 큰 솥에 그릇을 집어넣어서 익히는 방법이 된다.
@@테이프 18
**한복려 음식 만드는 중에
재미있는 건 토장법과 오미자차에 대해...옛날분들의 지혜
얼음을 어떻게 저장했는지 시원하게하라는 이야기 나온다
**요리 마치고 인터뷰
1341
우리가 음식이라는 건 치미랗게 잘 써주면 고대로 하면 된다 몇백년이 흘렀다고해서 못하는 건 아니다 해보니까
그대로 되는데 글로 쓰는거하고 감으로 하는 건 좀 다르다 몇분해라 그런 건 없고 말갛게되면 대충되고 여기
자세하게 쓰여있다고해도 여자면 다 아는 보편적인 건 건너뛰어
요즘 사람은 모르는게 있는데 그래도 어찌했든 너무 좋은 게 지금 이런 화채 안 먹거든 근대 이렇게 만들어 먹으
라는 걸 그당시에 멋스럽잖아 영양도 있지 색도 아름답고 이런 음식이 그 옛날에 있었다는 거 감탄..
1500
그대로 쫓아서 하게되면 거의 아 이래서 이것이 좋다고 그랬구나 알 수가 있다 조리도구 그리고 얼만큼을 넣으
라는 것도 이 책에도 보면 상세하게 치밀하게 되었구나 느끼게된다.
**재료들 앞에 놓고
4600
한홉은?
한홉이라고하면 요렇게 생긴게 한호빈데 지금으로 말하면 한컵 200cc 이걸 한홉을 한 걸 점점 늘어 가면 가루를
셀 때 쓰는 단위 여기 착면법에 보면 녹말가루 한홉이 이렇게 넣어서 한다고 하잖아 몇되가 나온다 하는 건 한홉
이어서 다섯 열 소도 한되 되도 한되..말 되 가루를 젤때는
4750
이렇게 작은 모양의 것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한 컵이 되는거다 그래서 음식디미방의 착면법에 보면 한홉 이렇게
나와있는 건 우리가 지금으로 봐서
4815
여기서 한홉이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한홉 넣어서 물을 넣어서 중탕하라 한홉은 한컵의 분량을 말하는거다 그래서
이 음식디미방에 보면 계량의 단위가 한홉 말 되 이렇게 나가는 걸 보면 계량의 단위가 너무나 정확하게 표시가
되어잇다는 걸 알 수 있다
5000
음식디미방에는 조리할대 어떤 도구 쓰라고 단계별로 되어있다 체를 예로 들자면 여러 종류 나오는데 체 입자에
따라서 고운 것 깁체 또는 총체라고 하는데 깁체 또 중간체가 되겠고 이런 건 굵어서 어레미가 된다.
그래서 발을 얼마나 곱게 가늘게 하느냐에 따라 체이름을 다르게 부르고 또하나는 이 발을 뭘로 만드느냐에
다라서 총체라든지 말총으로 만들었다든지 그런 표시가 있다 그다음에 이런 건 고운 가루 중간ㅊ에 쓰지만 더군
다나 녹말앝은 걸 만들때는 아주 고운 걸 여기에 내린다음에 주머니나 보자기를 쓰거든요 베를 썼다든지 모시를
썼다든지 명주주머니를 썼다든지 그런 것까지도 세밀하게되어있어서 얼마나 과학적으로 이해했느닞도 볼 수
있다.
--대구누루미
@@테이프 19
1050
지금과 어떻게 다른가?
누르미라는 조리법은 지금에 와서보면 w경상도지방에 일부 남아있다 생선할 때 나중에 거룩하게 풀기있게
하는게 남아있지만 이렇게 하다보니 먹는 사람이 좋지않으니까 기름이 흔해지면서 발라서 기름에 튀기는게
누름젖기억든 지금은 아마 하나는 찜으로 통하고 하나는 기름에 지진 전같은 젖으로 파생되어서 나눠졌다
그리고 여기서 대구껍질에서 볼 수 있는 건 생선껍질로 알뜰하게 썻다 그리고 재료를 다양하게 썼다 만두속하면
고기다진 거에 채소 넣는데 여기는 각종 버섯을 다양하게 사용하면서 고기가 꿩고기를 썼다
그런데 옛날 고서나 궁중의 음식을 보면 꿩고기가 훨씬 상급의 것으로 고기로 쓰였거든
그때 당시는 겨울에 꿩 사냥을 많이 하니까 광에 걸어놓고 필요할때마다 고기로 사용 그래서 꿩은 주로 겨울철에
많이 먹는 음식 뼈는 뼈대로 육수로 먹고 살은 다져서 고기로 만두속에 넣고 음식디미방처럼 안에다 넣는 채소로
넣는 재료로 쓰엿다
1311 사진자료..
1615
음식디미방의 첫부분에는 만두와면류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여기 보면 이것이 메밀만두 수교애 석류탕 난면
그다응에 우리가 해봤던 착면이라고 녹두녹말로 만든 국수 이런 것이 나와있다.
1721
요것은 떡류거든요..석이병이랃든지 율고라든지 그다음에 이게 전화법이라고해서 지금 말하는 화전같은 것
빈자병 증편 상화병이런 것들이 있다.
1835
(사진 올리며)
처음 올리는 메밀만두 수교애 물만두 석류탕이라고해서 석류모양으로 빚는 만두류 그다음에 난면은 국수반죽을
할 때 달걀넣으라고해서 난면 착면은 녹두녹말 만들어서 중탕해서 오미자 띄우는 화채 같은 것...포장법이다.
1914
그다음에 여기보면 떡류 거기보면 상화병이라고해서 밀가루 찐방 그다음에 증편 술로 발효시켜서 만드는거
그다음에 석이떡 그다음에 화전이라는 건데 찹쌀에 꽃을넣어서 지지는 진달래꽃을 넣어서 하는 그다음에
빈자병이라고해서 녹두 갈은 거에 단팥소를 넣어서 지지는거니까 빈대떡이라고하면 고기넣는 건데 이건 달게
만든 것 잡과편은 철떡에 여러 가지 과일이나 이런 걸 묻혀서 하고
2002
별미?
이 책에 나와있는 음식들은 일상적으로 먹는 게 아니고 별미가 나온다 밥이라든가 이런 반찬종류는 별로 없고
국수를 해먹어도 오미자국에 띄운다든지 말하자면 석이가루를 썼다든지 이런 귀한재료를 많이 썼기 때문에
특별한 난 맛있게 해먹는 게 많다.
2050
이 책에 요리들의 특징이라고 하면 재료가 지금 쓰이지않는 재료를 다양하게 썼다 그래서 고기류 중에는 닭은
일반적이지만 개고기를 쓴 것하고 그 다음에 곰발바닥이니 양 소의 양이라든지 이런 재료 꿩고기 이런 걸 많이
썼고 생선중에서도 숭어라는 생선 많이 썼다 해삼전복 말린 재료 많이 쓰고 채소중에는 동화라는 재로 많이
써서 동화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요리를 하는 것이 많이 나온다
그다음에 발효된 젖갈같은 거 이런 것도 나오게 되고 말리는 거 과자하는 방법을 특별하게 하는거 기름을 사용
하지않고 한다든지 이렇게해서 여러각도로 본다하면 특징이 있는 다른 요리책 처음에 나온 것으로 특징이 있는
요리책이 아닌가한다.
2240
음식물을 식품을 저장하는 방법중에 우리나라에는 만히 쓰지않지만 기름에 저장하는 방법이 있다서 양에서
보면 --다른데서는 볼 수 없는데 전복에 참기름을 담가둔다했는데 그건 참기름에는 황산화제 그러니까 변하는
걸 막는 그런 작용을 해주고 또 기름층이 재료에 둘러싸여이써서 공기를 차단해서 미생물이 번식하는 걸 막는
작용을 하는 것같아서 기름저장이 쓰였던 것같다,
2325
생전복
2335
생전복을 단지에 담아서 참기름을부어놓으면 새것같다고 하는데 효과가 보면 참기름은 변질을 안 시키는
황산화적인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런 역할을 했던 것같고 그다음에 기름이 이렇게 막을 씌우고 있으면 공기와
차단되니까 미생물 번식이 없었던 것같으니까 얼만큼 그 당시에 우리 선조들이 지혜로웠던가 이런 걸 이런
저장법에서 알 수 있다.
2420
생전복을 단지에 담아서 참기름에 부어놓으라는 그런 기름저장법이 있다 그건 지금와서 보면 참기름에는
황산화적인 요소가 있어서 좋고 그
2440
그렇지요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쓰는 저장법은 아니다 외국에 있는데 기름을 넣음으로서 재로하고 기름이 싸여
지잖아 그러면 공기와 닿을 수 있는 면적이 적어지니까 부패방지를 하게된다 미생물작용을 못하니가 이런 걸
보면 그 당시에 얼마나 저장법에서 지혜롭게 되어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2517
궁중음식과 유사한 것도 있거든..
2529
민가에서 요리문화발전?
여기 나와있는 걸 보면 지금에 못지않게 요리는 발전되어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재료 다양하게 죠 조리법 다양
하게 멋도 내면서 이렇게 한 걸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종류가 많다는 것도 있지만 여기에서 어떻게하면 더 맛있게
할까 그런 방법이 나오는데 인절미를 굽는 방법에서 안에 엿을 넣어서 애초에 붙여놓았다가 바로 구우면 단맛과
인절미의 쫄깃한 맛을 같이 느끼게 했다든지 약과법이 나오는데 약과의 밀가루를 한번 볶아서 하라는 게 나오다
그건 뭐냐하면 밀가루의 끈기를 없애야지 과자가 바삭바삭하게된다 그러면서 아궁이에 기름에 지지지않고
암기와와 숫기와 사이에 과자를 구우라고 하면 지금 와서 보면 우리나라의 조리기법은 아니지만 오븐과같은 형태
이런 것을 조리법에서 아주 특별한 것을 볼 수 있다.
2700
이 책에 식품을 갖다가 보관하는 방법이 고기류도 그렇고 채소류도 보관방법이 많이 나오는데 그건 그당시에
바로 먹을 수 없고 두고 먹어야되고 또 제철 것을 미리 받아가지고 그거를 둬서 새것처럼 한다고 했는데
이 댁이 안동의 양반댁이어서 모든 재료가 다 이썼다..새로 음식 만들어서 내야하기 때문에 보관하는 방법 많이
나온다.
2750
옛날에는 마른 해삼 많이 썼는데 볏짚은 결국 알카리 재나 이런거기 때문에 재료가 연하게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 질긴고기를 어떻게 삶으라든지 그런 얘기가 나온다 이 중에 앵두나무를 어떻게 해라 닥나무 이런 조율가
나오는데 그건 나무안에 단백질을 연하게 하는 성분이 있다 옛날사람은 확신은 못하지만 여러 가지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겨난 것같지
2840
여기에 보면 국에 탄 것이라는 제목으로 나오는데 큰 잔치때 암탉을 삶아서 물에 고아 어느 음식이든지 조금씩
써라 그건 뭐냐하면 조미료가 없던 당시에 감칠맛을 내는 방법을 얘기를 한 건데 제가 얼마전에 대구에 가서
본 것중에 닭지령을 들어TEk 닭을 맛있는 걸 고아 넣어서 옛날 그당시 있었던 것이 지금도 전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2930
여기 연계찜이라고 나오는데 그게 뭐냐하면 어린 닭을 잡아서 배에 여러 양념을 넣어서 양념에서 밀가루를 갠
것을 싸서 그거를 중탕으로 하는 방법이 나온다 대개 요새 약재를 넣어서 삼계탕식으로 하는데 된장을 넣으면
고기가 연해지면서 더욱 우리한테 맞는 맛이 되기대문에 이건 요즘 사랃믈이 해잡수셔도 맛있다고 느낄 것같다.
3022
여기 순풍이 소개되어있는데 여기서 특벼한 건 꿩국을 하면서 거기에 마른 비웃이라고 생선 말린 걸 뜯어서
넣는게 나온다 그것도 맛을 도와주는건데 지금 멸치있는데 비툿은 그 지방의 특별한 생선 말린건데 그때 당시
에도 쓰였는데 그게 반찬이 아니고 조미료로 스인 것이 특징이다.
3111
어머니가 그쪽 지방에 다녀와서 그걸 발견했을 때 어머니가 더 감격..저희한테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두고두고
연구하며 이거는 훌륭한 책이라는 걸 누누이 말씀하시면서 관심있게 보기시작하니까 전시회하면서 훌륭한 점
발견되더라 사실 이책은 그때보다 두고두고 가치있는 책이 되었다
3200
저희가 지금 요리전문가라고 하지만 그당시에 가르치는 분 없었지 그 분은 몇십년을 살림을 하면서 터득한 것을
자세히 일러준 것을 보며는 우리 요리연구가들이 본받아야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3231
지금 저희가 요리전문가라서 몇백년전에 여인이 이렇게 자세하게 다양하게 친절하게 알려준걸 보면 우리가
전문가지만 우리 이상의 요리전문가라고 칭찬해도 좋을듯하다
3300
저희가 단순히 여기 요리를 잘만들어싸보다는 음식을 만들 때 보면 그분이 어떤 성품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여러 다방면으로 재주가 있다고 하지만 모든 것을 잘 하시는 분은 음식도 잘 만드시고 우선 음식 만들 때 내
가족에개 얼마나 잘해서 먹이는 지 자식 기를 때 정말 정성을 다해서 했는지를 짐작해서 할 수 있다.
@@테이프 20
1600
임진병자양란을 거쳐가면서 그동안 가족질서 흐트러지며너 그러면서 복우너해가고 계승해가고 하는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그리고 또하나는 조선왕조가 건국하면서 유교문화가 더 정착되어가는 단계이기도 하다.
그런데서 흔히 우리가 가장 큰 변화는 결혼제도에서 그동안 남자가 여자집에 들어가는 장가간다는 풍속이 조선
전기부터 금지했지만 하루아침에 바뀌지않아 반 친영이라든가 이런 식으로 해서 시댁에 여성이 직접 들어가는
구조를 국가에서 권장하던 것이 이 시기에 정착한다 그렇게되니 여자가 시댁에 들어가면 시댁의 가족구조속에서
얽매이게되고 그러면서 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역할과 제약이 강조되게된다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 제사상속에서 여자가 배제되고 제사상속에서 남녀균등의 분배가 여성이 차별을
받고 적장자계승원칙에도 그러한 재산권에대해서도 제약을 하고 특히 열녀관에서도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절이데올로기가 강화된 측면이있다.
1820
17세기는 임재왜란이라든가 병자호란 양란을 거치며 그동안 이어져온 질서가 흐트러지고 그러면서 다시 복원
하고 계씅해야되는 그런과제도 남아있는 시기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초기에 유교적인 이데올로기 속에서 가족
질서가 정착되어가는데 이 시기를 조선후기라고해서 유교적인 가족질서가 강ㅎ롸되는 측면도 나타난다 그런
대표적인 것이 결혼제도에서 조선전기 남자가 여자집에 일정기간 들어가서 살다가 여자를 자기집으로 데리고
오는 제돈데 조선전기 이런 제도를 규제하지만 하루아침에 이런 제도가 없어지지못했다
국가에서는 친영이라고 해서 시댁에서 여자를 친히 맞이하면 여자가 결혼하면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는 제도를
권장을 했는데 그게 여의치않으니까 반 친영제도가 진행되기도 했는데
17세기에 오면 친영의 제도로 정착되어가는 단계다 그렇게되다보니까 여성이 치넞ㅇ에 머물러있을 때 권하과
시댁그들어가면 달라진다 예를드면 재산관리나 분배에서 남녀 균등분배에서 적장자중심으로 가게되고 특히
제사봉사가 강조되니까 제사상속도 적장자맏아들 중싱므로 가게되니까 여자가 점차 소외도이거가 그런점에서
여자 입지 축소되는 측명 있다.
2048
정부인장씨는
2120
정부인장시는 무남독녀로 재능이 측출해 아버지로부터 인정돼 여성교육이 인정되지않던 시대에 스스로 교육의
기회를 쟁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되면 이씨집안에 들어가서 자기의 총명한 지혜를 상당히 슬기롭게 발휘를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 시기가 여성이 가정내에서 역할이 강조된다 이렇게 볼 수 도 있지만 여성의 제약이
심하다할지라도 여성이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에 따라 자기입지 넓혀가는게 장부인에게서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뭐냐하며는 정부인장씨를 보면 지금도 불천지로 안동
2232
정부인장씨는 무남독녀로 자라는데 어려서부터 상당히 총명했다 그런대세 여성의 교육은 허용되지않는 예절교육
에는 학문이라든가 이런게 전수되
2325
정부인장씨는 원래 무남독녀로서 어렸을때부터 상당히 총명했다 당시 여성에게 예절교육외에는 학문이라든가
이런 게 전수되지않는 상황에서도 아버지가 그 재능을 감탄하면서 교육 받을 수 있는 기회 넓혀갔다
이씨집안에 시집가서도 그런 총명한 지혜 슬기로움을 발휘해서 시아버지나 남편이나 자식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
주위를 감화시키고 이웃에 대한 배려 소외된 노비에 댛나 배려 이런 것들로 상당히 주위에ㅐ서 존경받는 어른
으로 모셔질 수 있다.
2510
정부인장씨는 무남독녀로서 실제로 그당시에는 여성에 대한 교육은 예절교육에 한정이 되어있었는데 원래 어렸
을때부터 총명한 아버지눈에 띄어 학문이라든가 이런 걸 전수받을 수 있는 입지를 넓힐 수 있었다
그래서 이씨집안으로 시집을 갔을때도 그런 총명함과 슬기로움을 발휘하면서 시부모라든가 남편이라든가 또
이웃이나 친족 노비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 이러한 것들이
2640
정부인장씨는 무남독녀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눈에 의떠 당시 여성에겐 예절
2710
정부인장시는 무남독녀로 자라면서 어렸을때부터 총명성을 바뤼해서 아버지 눈에 들어당시 여성에겐 예절교유
에 한정되었던 걸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을 수 있었고
2750
장부인의 총명한 지혜가 시집에 들어갓더도 여러 가지 신망과 존경을 받게되는데 장부인의 어떤 이웃을 돌본다
든가
2820
정부인장씨는 무남독녀로 자라는데 어려서부터 총명성이 아버지눈에 의떠 당시 여성은 예절교육에 국한되던
것을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를열어갔고 시집에 들어가서도 이씨집안에 합리성을 받으며
주위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는다 시이바리로부터 인정받고 남편 내조 자식에 대한 지성교육뿐아니라
인성교육의 어머니로서의올바른 교육열 이런 거슫ㄹ 친족과 이웃에 대한 배려 소외돈 노비에 대한배려 이런
합리성이 인정받데괴니까 당시 출가외인이 상당히 강했는데도 친정아버지 돌아가시니까 친정돌볼 수있을만큼
인정되고 그걸도통해 가족의 화합과 조하ㅗ 이러눠내는 건 장부인의 지혜라든가 당시 어른으로서 장부인의
폭넓은 역할 이런게 많은 족적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않았나 생각되고
지금도 불천위로 정부인 장씨 제사를 받드는 건 당시 남성중심의 가치를 서서히 변화시켜서 여성의 존재가치를
일깨워주는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3040
정부인장씨를 통해서 보면
3100
우선 정부인 장씨가 남긴 음식디미방이라는 요리서는 최초로 여성에 의해 쓰여진 요리서라는 것에 의미가 있고
또하나는 한글로 쓰여져서 17세기 한글의 문체라든가 문법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자료가 되고 또하나는 이
시기에 어떻게 17세기라는 것이 사회변화에서 흐트러지는 질서라든가 가족에 대한 질서 이런 것들을 다시 가꿔
가면서 뭔가 계승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가정내에서 만들던 요리섣르을 자손에게 남기고 이웃에사회에
파급될 수 있는영향은얼마든지 가능했다 특히 음식디미방에 느낄 수 있는 것이 계절적이 특성 양반가문의 요리
방법 이런 것들을 우리가 추적해갈 수 있는 좋ㄹ은 자료가 되는데
그 중에도 재료를 통해서 보면 우리 주변에서 여러 가지 만들 수 있는 요소를 개발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를
개발하느 s하나의 당시의 실용적인 정신이 장부인에게서 이미 들어있다는데서 하나의 이제까지 이시기때의
실학이 대두되기 시작하는데서 장부인자체에서도 실학적인 정신을 볼 수 있지않을까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3310
우리가 이 시대에서 정부인장씨를 통해서 되새겨볼 수 있는 정신은 장부인을 토앻서 인간주의적인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여성사에서도 여성의 지적계보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보는데 16세기에는 신사임당 허난설헌의
뒤를이어서 17세기에는 정부인장씨 18세기에는 성리학자 임윤지당 그 이후에 실학자였던 빙허각 이런 여성지식인
계보를 이어가는데 디딤돌을 이뤄놓았다는데서도 큰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요즘에도 새롭게 개발할 필요가 있는 것이 장부인의 자녀에 대한 교육정신이다
가문영광을 위해 출세만을 원하는 교육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인을 만들기위한 지성교육 위기에 대한 대처능력
올바른 자녀교육을 지성과인성교육을 더불어 이어냈댜는 건 우리가 배워야할 정신-또하나 교육열이 문화발전에도
상당히 컸는데 특히 장부인을 통해 교육열에의한 훌륭한 아들뒤에 훌륭한 어머니
3520
우리가 흔히 훌륭한 인물뒤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신사임당과 유사하게 정부인 장씨도
갈암이현일이라든가 자손이 사회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잇는 기틀을 마련해주신 분이고 특히 이런 것들이
하나의 교육정신이 조선의 문화발전을 이루어냈고 장부인은 스스로가 시를 쓰고 음식조리서를 TM고 글을 남기
면서 조선의 문화발전 또하나는 한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 교훈으로 받아들여야된다.
3630
이 장부인이 책을 남겼다는 건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는데 우선은 책을 통해서 실용주의 정신을 남길 수 있다는
거 글을 쓰고 각별히 전수하는데 당부했다는데서 계승성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부각되어있고
또하나는 여성이 별로 글이 없던 시절에 장부인이 이런 글을 남김으로 인해서 여성의 역사가 전면으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고 이런 것들이 우리의 조선문화발전을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3750
장부인이 음식조리서의 책을 남겼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책속에 나타나는 실용
정신은 실학의 학문의 하나의 태두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실지로 글을 쓰고 남기기 위해 각별히 자손들에게
남기기위해 역사적인 계승성을 부각시키는데도 중요한 의미가 있고 그
3840
정부인장씨가 남긴 음식디미방이란 책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 속에 담겨있는 실용정신은
실학의 학문적인 태두가 되었고 또하나는 글을 쓰고 글을 남기기위해 각별히 자손에게 당부하는 건 어떤 역사
적인 계승성을 지키는데 상당히 중요한 욯소가 있고 도하나는 당시
3925
이 정부인장씨가
3930
정부인장씨가 남긴 음식디미방이라는 책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욧한 의미가 있다 우선 책속에 담긴 실용주의적인
정신은 실학이라는 학문의 태두가 된다고 볼 수 있고 자웁인 스스로가 이것을 글으 짓고 남기기위해 자손
4010
이 정부인 장씨가 남긴 음식디미방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우선 책속에 담긴 실용주의적인
정신은 실학의 학문의 태두라고 볼 수 있고 저웁인 스스로가 글을 짓고 자손에게 각
4100
정부인장씨가 낙민 음식디미방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읨가 있다 o챗곳레 담겨진 실용주의적인 정신은 실할의
태두 또하나는 장부인 스스로가 글을 짓고 나믹고 보존하기위해 자손에게 각별히 다웁한 건 역사의 계승성을 부각
시키는데도 중요하고 또하나는 이제까지 역사의 뒷전에 가려져있던 여성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고 본다
4210
음식디미방에는 3분의1이 술에 대한 주조에 대한 부부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냐하면 당시 양반사대부가문
에서 술이 얼만큼 중요한가를 가늠한다 왜 술이 주용하냐하면 당시 유교문화의 여러 가지 의식절차에서 술은
매개체가 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명절을 비롯한 세시풍속에서라든가 통과의례에서 관례 혼례 특히 제례 상례
에서 술은 중요한 요소 또 사회적으로도 향음주례라든가 공동체라든가 유교적 도덕적 질서를 추구하는데도
술이 향락의 의미가 아니라 양반사대분의 권위나 술을 법도있게 배우고 마시는 자세를 깨우치게 하면서 하나의
책임의식이라든가 그런 여러 가지 양반의 정서 문화성을표현하는 하나의 매개체가 된다고 본다.
4400
특히 지역사외헤서 향음주례보면 지역의 원로들과 지식인들이 모여서 연령대로 연장자가 연하자에게 따라주는
술법도를 가르치는데 이걸 통해서 유교적인 도덕의 함양이라든가 또하나는 덕담이라든가 교훈을 주면서 지역의
혁명 공동체의식을 개발하는 과정속에서 술은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또 일반가정에서는 어떤 접빈객이라든가 봉제사 고사를 지낸다든가 이런데서도 술을 중요하게 쓰는데 여하튼
술이 향락이라는 의미보다 술을 통해 양반가문이나 유교적인 법도를 배우면서 양반의 권위 올바른 자세속에서의
법도는 어떤 사회로서의 책임의식을 깨우치는데 일조를 했다고 본다 그런데서 양반가문에서 술을 정성스레
담그고 가능하면 더 향기롭고 맛있게 담그는 방법을 여성들이 부단히 추구하는 가운데 정부인 장시의 음식디미방
에는 다양한 술제조방법 또 정성에 대한 것이 다분히 담겨있는 것이다.
@@테이프 21
1620
(선택 책에서 줌아웃..투샷)정부인 장씨같은 경우에는 물론 사적으로는 제 13대손이 된다.화보의 앞에 보면 이
분이 석계선생이고 이 분 사이에 우리는 넷째분의 직계가 된다. 결국 종계는 아니지만 직계다..
그러니까 내가 이 글을 특히 소설로 쓰고싶은 건 이런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무렵 지금도 있는 이상한 사회
적인 -- 때문에 쓰고싶었다 지금도 뭐가 잘못 알려져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선택을 쓰면서 자기성취하고 현모
양처가 서로 배치되는 대립되는 상태로 하지않았다 자기성취의 여러갈래중에서 현모양처로 대표되는 가정적인
성취도 포함될 수 있다..근데 현대는 이걸 빼는 거같아서 그렇지않다
가정적인 성취 현모양처로 알려진 성취도 여성의 자기성취의 훌륭한 항목이 될 수 있다
그 얘기를 하고싶었던 건데 많은 오해있다 하필 이 할머니를 하게된 건 이 할머니야말로 그 시대 여성으로 가정
속의 성취도 가졌고 아울러 사회성도 가졌기대문에 한 모델이 될만하다해서 썼다.
1830
(선택책에서 줌아웃..) 정부인 장씨는 제게 직계 13대 할머니다 여기 우리 설계도가 있는데 그 분의 자녀중에서
넷째분집이 우리 집이다. 그러나 제가 선택의 주인공으로 정부인을 선택한 건 제 사적인 관계때문이 아니고 이
할머니께서 보여주신 삶이 우리가 흔히 현모양처로 대변되는 가정적인 성취도 충분히 이루었고 아울러 사회성도
어떤 여인 못지않게 뛰어난 분이어서 이 사회 이상적인 전형이 될 수 있다고 보아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취재같은 경우 물론 어렸을 때 들은 얘기도 있지만 충분하게 자료들이 많습니다.
여기 보면 자제분이 쓴 갈암집의 27권에 보면 어머니 실기가 있고 이건 정부인 부녀들이 마을에서 그네들이
개별적으로 필사를 해서 가지고 있다.
이런 거 많은데 이건 그 중의 하나다 거의 이 시기를 번역한 건데 그 뒤에 자료들은 여러 가지 남기신 규곤시의방
이라든가 많은 자료강 lT다 그리고 연구실적이 많고..(아무런 정보 없는 상태에서 어렵지않나
2045
재취라는 것이 이쪽도 아무런 사유가 없고 이쪽 상처 저쪽 미혼이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정실이다.
그래서 문제는 없는데 그래도 요즘 사람들 보기에 이상할텐데 제가 보기에 석계선생과 경당사이에 사제간의
믿음이 작용한 것같다 왜냐하면 정부인이 혼인적령기 되었을 때 그 무렵 석계할매 상처를 하셨다
저희들이 추측하기로는 사제간의 믿음으로 이런 것으로 된 결혼이라고 생각된다.
2150
재취라는 말이 요새사람에게 이상한가본데 그건 정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거다 아마 경당선생이 석계할배를
몹시 아끼시고 마침 그 시기 석계선생이 상처하고 정부인이 적령기가 되고 그러니까 아마 탈상을 기다려서
따님을 주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
2310
이 책들이 부자분의 부자 여덟문집중의 하나다 이건 석계선생의 문집이고 이건 맏이인 존재선생의 문집이고
이건 갈암이다.문수가 많이 있는데 몇 개만 가지고 왔다 보통 옛날 족보에 보면 유호 아무 설명없이라도 어떤
분이 유 문집 유호 유정자까지 있으면 정자와 호와 문집이 있으면 그 시대 나름대로 뭔가 했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여기있는 분은 다 문집과 호와 정자가 있다
2430
(전가보첩 보다가) 이게 전가보첩인데 들리는 말로는 정조가 전가보첩을 보고 그 참 기이한 물건이라고 하면서
손수 어필을 놓았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시와 서와 수 이 세 개가 어울려 삼재라고 하는데 특히
시에 대한 감탄이 큰 걸로 한다.
3234
(행실기보며) 총명하다..
소학과 십구사략등을 배워서 능통어와 경은...논어와
3626
(곽주의 처 편지를 펴며)
이 자료가 바로 1989년 4월에 현풍곽씨 문중에서 진주 하씨 묘를 이장하던 중에 발견된 한글편지다 전체분량이
170매정도 되고 이 묘의 주인공인 하씨부인은 곽장군의 종질부되시는 분으로 편지에 담겨있는 시대가 정부인
장씨가 살던 시대와 거의 같은 시대다..그래서 이 편지속에는 당시의 생활문화 음식관련 문화라든지 술 음주문화
이런 걸 표현한 양반의 생활문화가 여러 가지로 많이 나타나 있다
특히 이 편지에는 여러 가지 술에 대한 이야기가
3736
이 자료가 1989년 4월에 현풍곽씨 문중에서 그 윗대 할머니였던 진주하씨 묘를 이장하던 중에 관속에서 나온
한글편지들이다. 전체분량이 170매가량이 되는데 진주하씨부인은 곽재우장군의 종질부되시는 분인데
그 시대가 정부인안동장씨가 사셨던 시대와 거의 같은 시대다 170매나 되는 한글편지속에는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생활문화 음식문화도 있고 음주문화 그 다음에 손님접대하는 문화 그 다음에 날받는 이야기 당신의 세속
적인 생활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 있어서 생활문화연구에 아주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이 편지속에는 술에 대한 언급이 약 40번정도가 나오는데 그 술의 용도가 손님접대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제사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약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이런 노비들에게 일을 하고나서 대접하는 그런
용도로 쓰기도 하고 음주에 대한 술문화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
3937
전체 40회정도 되는 걸로 판단이 되는데 그 40번 중에는 양반들이 서로 손님을 대접한다거나 제사용으로 쓰거나
소주는 약용으로 소주를 사용하기도 하는 그런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4010
여기나온 이 자료가 1989년 4월에 경북 달성군 현퓽에서 현풍곽씨문중에서 진주하씨 묘를 이장하던 중 관속에서
나온거다 분량이 전체 170매정도 되는데 이 진주하씨가 살았던 시대가 정부인 안동장씨와 거의 같은 시대다
같은 시대에 나타난 것으로서 여기 170매나 되는 한글편지속에는 당시 여러 가지 음식문화라든지 술문화 그
다음에 생활의 여러 가지 습속들 이런 것들이 다앙햐게 나타나서 생활사를 연구하는 자료로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 나온 술에 대한 기록을 보면 빈도수가 마흔번정도가 술의 용도가 제사용이 있고 손님접대용이 많다
소주는 아이들 종기 치료하는 약용으로 쓰기도 했다 노비를 부린 뒤 그들에게 먹이는 탁주이야기도 여러번 나오고
있다 그래서 당시의 술문화에 대한 좋은 자료가 된다.이렇게 말할 수 있다.
(펴지 보다가 줌인 되면) 노비들에게 탁주 주라는 거다..
(투샷에서) 이 편지가 현풍곽씨 편진데 이게 하씨부인 남편이 쓴 편지다..곽주라는 어른이 쓴 편진데 부인에게
여러 가지 사연을 보내는데 여기여러가지 사연이 있다 곽씨부인이 후실로 온 관계에서 정실이 돌아가시고..
여기 재미있는 게 나옥 그 다음에 하씨부인보고 친히 종들을 시켜서 밥을 어떻게 직접 짓는고...
----테이프 바뀌고
4630
체계적?
이 음식디미방의 내용을 보면 분류가 체계적이어서 어육류 면병류로 구분되었다 설명방법도 세밀하고 단계적
으로 되어있어서 오늘날 음식 만드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로 죽 따라하면 그 대로 만들정도로 잘 되어있다
오늘날 연구하는 사람으로는 무엇을 만들어서 어떤 재료를 넣어서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볼 수 있는 생활문화사
적인 자료다
4735
이 음식디미방의 내용을 보면 분류가 아주 체계적으로 되어있다 면병류 어육류 주국방문 그안에는 여러 가지
음식 만드는 방법이 설명되어있는데 방법이 아주 세밀하고 단계적으로 되어있어서 그 방법대로 따라해보면
그대로 음식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당시 사람들이 무슨재료로 어떤 음식을 어떻게 만들어먹엇나 그대로
알 수 있는 생활문화사적 가치가 큰 자료다
(책으로 들어가서 집어들고) 이 책이 바로 규곤시의방이다 규곤은 안들 여자들이 거처하는 방이고 시의는 옳은
뜻을 적은 방법이다 그러데 안 표지를 한 장 넘겨서 보면 책이름이 음식디미방이라고 되어있다
음식디미방이 바로 장씨 부인이 직접 붙인 이름인데 나중에 장씨부인남편이 이시명어른께서 책의 외형적
품겨을 갖추기위해 한문으로 붙인 것이고 실제 이름은 장씨부인이 직접 쓴 음식디미방이 옳은 것이다.
--책 넘기며 몇가지 설명한 것이 좋다
5305
미암일기 꺼내기
미암일기꺼내고
모두 몇권? 12권
선조때부터..
음주문화 나오나...? 많이 나온다..
음주문화도 있고 선물 주는 것도 있고..술을 마시면서 시 읊은 것도 나오고
5504
(둘이 책을 보며)
12월27일자를 보면 선물이 들어온다 백미 중미가 들어오고 청주 탁주 들어와서 일배씩 나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성주로부터 과실주를 보내왔다..
(위의 두 내용 타이트한 tit)
5700
5월12일날이 전라북도 완산 진안에서 봉안사 밥화를 만나서 술을 먹으면서 시를 읊은 것이 나온다...
밥을 먹으며 술을 한잔 먹는다..그래서 대곡으로 돌아갔다..이 말이다.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한잔 들었다..대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나온다..
정일권이 먼저 와있었는데 매남과 만나서 정이권이 먼저 와서 송순이와 만나서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같이
한잔씩 들고 대곡으로 돌아갔다.
송사제와 함께 점심을 먹고 점심을 먹으면서 술을 한잔하고 대곡으로 돌아갔다.
0131
모주라고 되어있는데 이건 거르지않는 술-술 한동이를 보내면서 다음과같은 시를 읊다
0200
기사년 9월달을 보면 초하룻날 모주 담은 것이 나온다 거르지않은 술을 말하는 것인데 한동이를 성준이한테
보내면서 술은 좋지않지만 추위를 달래기위해 마셔라 그러면서 다음과같은 시를 지었다
그 옆에 보면 이순이한테는 모피와 술을 주는 기록이 나와 있다.
기사년 9월달을 보면 초하룻날에 모주라고 나와있는데 이건 거르지않는 술 한동을 성준이에게 보내면서 술은
좋지않지만 추위를 달래기위해 마셔라 그런 내용이 담겨있다 그 다음에 그 옆을 보면 이순이라는 사람이면
모피하고 술을 주었다는 기록이 나뫄있다. 이런 것을 보면 여러차례 술자리가 베풀어졌다는 걸 알 수 잇다.
(손으로 가리키며)한페이지에서 술을 대접했다는 두 기록과 술을 가져왔다는 것과 술 대접했다..
..깨알같이 써놓은 일기...
"22일 맑음.. 먼동이 밝기전에 출발해서 아침에 덕현에 이르니 김판을 만나서 몹시 반가워 담화하고
같이 술을 마셨는데 미산도 음식과 반찬을 보내왔다."
(타이트한 그림 좋다)
23일에보면 또 여기도 맑았는데 손님들이 와서 판윤이 와서 신형수와 함께 주과를 마셨다..
거의 매일 사람 만나서 술 마시고 양반들이 그러는게 일인 모양이네
@@ 다시 서울
모현관외경
이동환교수 인터뷰
1655
안동장씨가 시가 전부 7편- 아들한테 준 편지가 한편 모두 8편이 전한다. 7편 중에 네편이 시로서 지어진거고
여러 가지 작품적 의미는 노년에 지어진 다른 세편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10여세 소녀가 쓴 시가
뭐 그리 문학사적 사상사적 의미가 있냐하고 회의할 지 모르지만 이 걸 바로 이해하기위해 전제적인 몇가지
사실이 필요하다 그 정부인 장씨가 10t세에 한시를 썼다고 해서 장부인이 특별히 예외적인 천재다 우연히
천제적인 재주로 예외적인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그 당시 10여세면 아주 특별한 천재가 아니라도 영특하게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면 일반적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일정하게 사회속으로 그런 사람의 경우는 준 성인으로서 지식인 대우를 하기도했다.
이를테면 이이선생은 13살에 진사시에 합격-같은 때에 율곡선생과 같은 13살 소년이 합격했다 진사시는 조선
왕조에서 지성인 그룹이다. 거기에 13살 소년도 그런 시험에 합격해서 대우를 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장씨부인이 특별히 예외적인 사실은 결코 아니고 자질이 남달리 영특한 건 사실이지만 아까
얘기했듯이 천재가 우연이 만들어낸 작품은 아니다 ---
장씨부인의 지성적자각에 의한 작품이라면 도학적가치체계의 실천의 국면을 두고 심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장씨
부인의 경당 장흥효라는 분은 바로 스승의 학봉선생이고 학봉은 잘 아시다시피 퇴계선생의 직계제자..퇴계선생의
학품이 심학이다
장씨부인의 작품은 퇴계의 심학의 주류적인 맥락속에서 자질이 영특한 장씨부인의 이른 나이에 심학이라는
지성적 자각하에 쓴 것이다.그런데 대체 우리가 정부인 장씨 작품이 많지않지만 심학의 양대축을 작품이 구현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 양대축은 한가지 축은 --인격적인 도덕적 확충이 한 축이고 그걸 기반으로 한 세계
모든 사물과의 관계를 평화롭게 한다는 지향- 장씨ㅏ부인은 양은 많지않지만 두 심학의 비젼을 가지고 있다.
성인음 경신음 소소음 학발시에
2250
성인음?
성인음은 불생성인시 성인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못해서 성인의 얼굴을 뵙지못했지만 성인의 말씀은 들을 수
있어서 성인의 마음은 볼 수가 있다. 시로 보면 소박한 표현이 소박새서 문학적 표현이 별로 없다.
장씨부인은 시공부는 별로 하지않았다 작품성은 문학적인 평가보다도 아까 말씀보다 아까 말씀 드린 심학..
지성적 자각에서 오는 내면의 즐거움..그걸 표현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심학적 세계에 대한 자기자신의 지성적 자각이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지
거기에 아름답게 장식을 해서 문예미를 추구한 것과는 다르다 단순 소박하다 얼핏보면 크게 그당시 말하자면
소학이라든가 유교의 수신체계에 흔히 나오는 얘기일텐데 뭐가 그리 중요하냐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 보면 주체의 정립 도덕적 주체의정립이 확충의 비전이 들어있다
는 건 뭐에서 알 수 있냐하면 일반적으로 성인의 말씀을 들어서 성인의 교훈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일반적인 표현
이다 이랍ㄴ적인 심상학 그렇게 표현되기 일쑤다 성인의 마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교훈을 알 수 있다가 아니라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성인의 마음이 뭐냐 이것이야말로 도학에서 말하는 도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주체의
최대확충의 형태다 마음이라는 건 세계의 사물들을 통솔하고 주제하는 세계의 주체로서의 하나의 주체다 바로
근데 도학에서 이상적인 건 주체와 세계의 합일이다.
흔히 말하는 이나 일체 나와남이 하나가되고 그것이 바로 도학의 가장 이상적인 주체의 형태고 가치의 형태고
그것이 성인으로 표상 장씨부인은 책에 표현된 성인의 말씀을 통해서 성인의 마음을 깨달은거다 마음을 본거다
성인의 마음을 안다가 아니고 본다고 했다 이 볼견자는 물론 안다는 뜻이지만 이건 추상적으로 알지자와 성격이
다르다 이건 구체적인 시각영상에 관련된 동사적인 푷련이다.
본다라고 할 때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 장씨부인의 성심에 대한 예리한 자각을 볼 수 있다 마음에는 보이지않는
추상체를 본다라고 우리가 흔히 불교에서 견성성불이다 성을 보고 직지이심..
성을 보아서 부처를 이룩한다해서 견자..추상적인 경험할 수 없는 마음이란 실제를 본다는 시각영상적인 표현이
장씨부인의 시 주체에 대한 지성적 자각을 잘 보여주고 있고 바로 그러한 것을 보는데에 대한 즐거움을 나름대로
읊은 것이 성인음이다. 그럼 성인음이란 어떤 거냐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거나 깊고깊어서 말할 수 없다
거나 하늘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다에서 시가 연상되낟 그런 성인의 시의 현상을 자각한 그것을 지향하고자하는
말하자면 의지와 즐거움을 보는 게 성인음이다.
2844
학발시?
10대 작품 네편중에 성인음이 주체의 정립 내지는 확충과 연결된다면 학발시는 흔히 말하는 세계와의 화해 즉
세계 모든 존재와의 평화롭고 조화로운 관계를 표현한 시다 이건 바로 부인이 말미에 적어놓듯이 이웃에 80
노인이 자기 아들을 국가에 징발을 당해서 변경에 가서 그 아들을 보내고 난 뒤에 그 고통 마음 아픈 이것을
장씨부인이 소식을 듣고 그 노파의 마음과 함께 마음아파한 기치를시지를 시로 표현한거다 .
거기에 보면 병든 노파..앓아누운 노파 그래서 보면 이 시는 중국의 옛날 시집인 시경...
시경의 시체로 되어서 한 행 넉자 그리고 사행 그러니까 넉줄 1장 3장으로 되어있는데 요컨데 병들어 앓아누운
노모가 멀리 떠나간 아들 ...그 아들 몸부림 치는 마음이 참으로 여실하게 드러나있다
그래서 그당시 징발당해서 수에 간 일반 평민 민중들의 소관이다 민중들에게 부하된 임무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일단 보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사회고발시 다시 말해서 사회부조리와 모습 이를테면
우리가 생각하는 80노모가 보낸 아들이라면 이삼십대 새파란 아들은 아니다 그럼 최소한 50대 가까이 됐거나
짐작할 수 있지만 문맥이 나타나지않는 불확실한 건 그먼두더라도 어찌했든 병든 노모와 돌아올 길 없이 멀리
떠나가는 아들...사람에게 아픔을 주고 슬픔을 주는 이건 하나의 부조리고 그래서 따라서 세계화해..파열..
그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우리가 이른바 지배계급의 자기들의 통치능력의 문제점 때문에 민중들 고통을 몰아
넣는댜는 시각에서 보면 강력한 사회고발시가 된다
그다음에 아가 말한 화해에 성실한 점에서 보면 도학의 화해 비젼..왜냐하면 그런 병든 노모와 멀리 떠나간
자식과의 국가 강제력에 의해 개입되든 결과적으로 아픔과 슬픔을 주는 이런 현상은 바람직하지않는 화해적
이지않기 때문에 그걸 마음아파하고 같이 함께 아파한다는 건 화해에 대한 갈구..
그런 점에서 화해 해소할 수 있다. 고발시로 보든 도학적인 화해 성취로 보든 다 같인 동일한 정신기반에서 출발
한다 이른바 심학적인 전통속에서 이 시를 보면 시에는 인이 사실 심의 주체였던 실질 내용이거든 ..
인의 인이 화해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거기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화해로 볼 수 있지만 사회고발시도 결국은
인이다., 휴며니즘이다 휴머니즘이 사회교발시의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도학적인 입장에서 화해성취의 비전
으로 이해하든 사회사적인 시각에서 현실고발시로 이해하든 그건 di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거기 때문에 어느쪽으로 이해해되 좋지만 이 작품이 민중고발시로 이해할때도 사실 조선시대 여류
작품에서 만나기 쉽지않은 매우 고도의 성취를 이룬 작품이고 화해입장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민중의 아픔을
인간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그 마음이 시경시라는 매우 소박하면 서 경높은 형식과 조화되어서 아주 효과적
으로 잘 q표현된 시고 아마 장씨부인 시 중에는 가장 많이 역대로 상참되어온 잘 된 작품으로 칭찬된 작품이다
채재공은 장씨부인의 학발시만한 작품은 찾기어렵다고 할 정도로 표현한거다.
3625
그 시대 사대부층의 연령과 지성적인 수준을 말씀드렸는데 그 당시 한문이라는 어느 책에는 거의
사대부집에서는 거의 자기화되다..오랜 기간 동안 준국어과정...준 우리말처럼 그렇게 구사할 수 있
는 저력..그래서 아까 말씀드리지만 자질이 좀 영특하고 특히 조기교육이 이뤄진 경우라면 그런 경
우는 하등 놀랄 것 없다 오늘날 우리가 한문이라는 걸 역사적인 유물로서 대하는 것하고 그 당시는
사용하는 하나의 언어였기때무에 그런 격차에서 오는 관점의 차이지 그 시대에 돌아가면 별로 놀라
운 일이 아니다.
3830
아무리 한문이 그 당시 지배층에게 일정하게 생각되었어도 우리 국어자체는 아니니까 그러니까 누구라고해서
다 ygus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환경적인 조건 그 당시 사대부층들은 사회적인 교제의 공간이나 가정생활속에서
늘 그런것과 연관된 즉 한문문화와 연관된 사고 언어 행태 관습 여러 가지 이런 분위기에서 하니까 그래서 거기
다가 그래서 좀 자질이 영특한 사람은 배우지않아도 대충 크면서 지적으로 흡수해서 성장하기도 한다
옛날에 특히 여성들에게는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지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여성들이 많이 표현의 기회를 많이 누리지못했지만 그러나 남성들의 경우는 아주 어릴때
부터 남성들은 그럴 경우 많았는데 그건 자질이 특별히 뛰어난 것이 아니라 기회가 남성들에게만 주어지고
여성들에게는 주어지지않았기대문에 그렇다 장씨부인의 경우는 무남독녀다
대학자의 무남독녀다 거기에 자질이 영특하니까 그 아버지가 발견하고서 교육시켰다 그러니까 그런 작품을 쓴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4154
아까 말한 일반적으로 오늘날 보다 정신적인 성숙 정도가 오늘날 사람들에 비해 훨씬 조숙한 면이 있어서 그런
일종의 지성적 자각이 좀 빨랐던 셈이다 거기에다가 자질이 뛰어난 경우 교육을 받는 경우는 10세전후해서
얼마든지 지성인사회에서 정상적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스고 그것이 그 사람의 생애에 사상이나 작품에
연관해서 장난이 아닌 정상적인 자리매김을 받는 것이 --
4300
사회일반의 정황이 그러한데다가 장씨부인의 경우는 경당 장흥효라는 분이 퇴계학맥의 직계로서 독실한 심학
공부를 하고있었고 무남독녀인 장씨부인을 어려서부터 교육을 했고 그런 점에서 바로 장씨부인도 그런 도학내지
신학에 대한 지성적 자각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자각으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4405
신사임당과 비교는?
그 비교는 어늦 점에서 비교될지모르겠지만 어쨌든 상당히 비교되는 건 사실이다 서로 취향방향이 다르다고
할꺄 신사임당은 대단히 예술취향적이다 화조도라든가 그림을 많이 남겼다 시작품은 완전한 것은 두편 그
다음에 단편적인 것..두연인가 한연인가 이렇게 전하는데 그건 우리나라의 도학사 그러니까 도학의 발전심화
역사와 관계되겠지만 신사임당 세대에는 여류로서 이런 자각에 여성으로서 이런 자각을 기대하기 어려웠는지
모르겠는데 어찌했든 신사임당이 예술취향적이라면 장씨부인은 심학취향적인다 철학취향적이다
오늘날 특히 주목되는 건 장씨부인 이후에도 여성으로서 가령 조선후기에 오면 여성도학자가 있다 윤지당임씨는
여성도학자다 수준높은 여성도학자가 나오기도 하짐나 여류문학자로서 이런 도학적인 심학적인 내용과 지취
취지 정책을 시로 표현한 경우는장씨부인 이외에는 조선후기로 와서 한분 정도 있고 장씨부인은 거의 독보적
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단히 특이하게 돋보이는
<다른 테이프>
4700
정부인장씨의 시의 흐름?
우리가 사실 문학사와 사상사가 사실 구분되지만 결국 문학을 풀이하는 것도 결국 사상과 정치 감정인데
사상사 중요한 것같기도 하다 그런 걸 전제로 해서 문학사..연관을 가지면서도 문학사 여류를 빼고 여류문학사
라는 시각에서 볼 때 현상적으로 볼 때 장씨부인의 시작품은 독특하다
이를테면 장씨부인보다 한세대 앞서 여류시인 허난설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여류시인이
라고 할 수 있는 허난설헌과 장씨부인이 대조적이다 허난설헌은 주로 개인적인 고뇌 인생적인 고뇌 자신의
실존문제에 내면적인 고뇌를 강한 서전풍으로 읊은데 비해 한세대 뒤의 장씨부인은 아주 그것과는 다른
성인음이라든가 학발시라든가 소소음을 보듯이 그런 자기 개인적 자아의 고뇌와는 거리가 대조적인 기본적
으로 자기의 다른 사람과의 관계 다른 사물과의 관계 즉 세계와의 관계에서 도덕적 주체의 문제 세계와의 화해
의 문제로 관심을 가지고 작품화했다는 점 그러니가 아까 말한대로 매우 짙은 서정적인 취향하고는 대조적인
도학적 심학적 취향이라는게 장씨부인의 여성문학사에서 독특한 것이다
다소 조금 현상자체가 왜 그런지 규명은 안되었지만 장씨부인 이후에 다소 공백기라고 할까 좀 희소해진 경향이
있다 그러다 18세기에 들어와서 18세기에서 19세기 걸쳐서 여류시인들이 말하자면 상당히 양적으로 상당히
매우 증가하면서 또 각기 나름대로 취향을 보여주는데 그 장씨부인의 후대 여류시인하고 대비해서도 장씨부인은
독특하다
후대에서도 윤지당 임시같이 아예 도학자로 여성으로서 도학자도 있고 그러다보니까 다소 그 시기에 여류시인의
작품으로는 도학적 연관된 작품이 보이긴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여성들의 생활과 정당의 서정적 표현에 표현이
주류였다
그리 보았을 때 역시 장씨부인의 후대 작품과 비교해서도 특이한 그래서 우리가 여류문학사의 현상속에 장씨부인
의 문학사적 위치도 매우 독특한 면이 있고 바로 도학글씨를 썼다는 점에서 장씨부인의 작품은 문학사적 연구
에서 그치지않고 사상사적 연구와 깊이 관련있다 정조때 박만중은 영남 신학 영남 도학의 한 결절점이라고할가
그거 이루어주는 계기가 된다 그 분 자제로 존재와 갈암이라는 분들이 영남 도학의 퇴계학맥의 전통 계승해나
가는 계승자로 있기 때문에 장씨부인의 신학적 정신세계와 작품은 바로 다음 세대의 영남도학의 결점점을 마련해
주는 계기로가지 주장하고 있다
그 점이 장씨부인을 문학사적으로 봤을 때 독특한 점이고 도학사적으로 봣을때도..하는 그런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5428 장지현선생
우리나라에 술이 들어온 역사?
우리 전통주의 발달경유를 보면 우리나라가 농경사회를 개발시키는데 근원이 있다.
5500
술이 어떤 연유로 생겼느냐 그건 나라마다 사정이 다른데 공통적인 건 술이 신화와 상당히 연결되어있다 술의
기원이라는 게 건국신화와 상당히 밀접되어있다 때문에 술이 언제부터냐 하는 건 확실한 대답을 하기 힘들고
한 예를 들면 신이 곡주를 빚는 방법을 가리킨 것으로 되어있다 또 희랍으로 내려가면 타카스신이 있지 포도
제배 인도만해도 감로주 빚었다 중국의 경우는 의적이라는 딸이 처음 술을 빚어서 술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고
고구려 신화속에 보면 고구려 주몽이 탄생한 경로가 술과 인연이 있다
그러니까 천재 아들 헤모스가 능심원에서 하백의 세딸을 만났지 그 딸들중 00를 아내로 치유하기위해 술을
먹였다 술힘으로 도로 돌아가는 중에 큰 딸을 취했다 큰 딸과 인연을 맺어서 낳은 게 주몽-
어느 나라든간에 건국신화와 관계가 있다.
농경문화라는게 곡류 채소류..곡류를 일찍이 재배했기 때문에 곡주권에서 정착하다.
0014
조선시대로 내려와서 말씀하시는 술의 종류라는 게 안동장씨가 창안한술은 아니다 물론 그 중에는 안동장씨의
비법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러나 우리나라의 술의 발달 사를 보면 고려시대까지 완전히 다양한 술이 잡혀있다
그다음에 고려문집 고려사를 비롯해서 고러문집에보면 상당히 많은 술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안동장씨의 조리서에 수용된 술의종류를 보면 옛날부터전해내려오는 술의 일부분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분이 처방을 아는 거 아 니면 필요한 처방을한데 모아 적은 게 주방이아닌가 생각한다.
0200
장씨가 저줄한 음식디미방..일명 규호시미방이라고도하지요...
어쨌거나 음식디미방..술 조건을 보면 제가 대충 술의 이름만 가지고 대충 세어보니까 한 48가지-그러니까 이게
무슨 얘기냐하면 술의 처방 술의 처방의 수가약 48개가 된다. 그 중에서 술의 이름으로 술의 종류 이름으로
따지면 39--그러니까 39가지가 되고 아까 얘기했듯이 술의 처방으로 보면 48..그렇게 되어있다.
0302
여하간에 술의 처방의 수로 보면 약 50개가 넘은 53가지다 근데 이 놈을 술의 이름으로 보면 약 39가지가 된다
근데 술 처방의 수로 어떤 술의 종류가 몇가지냐 그런 걸 잠깐 정리해보면 청주계 맑은 술 이게 24가지 그 다음
순탁주가 네가지..이름으로 보면 한가진데 그처방이네가지 그다음은 속성주계통이 10개 있고 그 다음에 단술이요
감주계통이 서너가지되고 그 다음에 약용주가 바로 두가지가 있다
약용주중에는 오가피주라든지 자주라든지 여기에 들어가지 두가지중에 그리고 소위 술의 분류상으로 합주라는게
있다 곡주와 소주를 혼합한 술-소위 음식디미방에서는 과하주가 여기에 해당하는거다 .
이게 하나가있고 그 다음에 소주 증류주지 증류주는 네가지 이렇게 분류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절대 수가 순양조주쪽이지 곡물을 바탕으로 해서 빚은 술의 종류가 술의 처방이 상당히 많은데
그것이 40가지가 훨씬 넘지 이런 분류상으로는 그렇게되기 때문에 책속에 들어가있는 술들을 얘기했지만 몇가지
분류 술의 분류로 정리하면 청주 탁주 순례주라고해서 속성주 감주계통의 단술 그다음에 약용주 합주 소주이러한
고려시대 조선시대 거쳐서 있었던 술의 대부분을 이렇게 분류해놓은 거로 볼 수 있다.
0700
음식디미방속에 담겨져있는 순 청주계 술을 보면 순향주가 있고 삼해주가 있고 삼오주가 있고 그 다음에 송화주
그 다음에 죽엽주 그런데 이 맑은 술인데 두가지는 특별하다 송화주는 송화의 가루를 넣었기 때문에 술의 색이
송홧가루 색을 띈다 아울러서 향은 송화의 향을 얻어내는 특별한 술이고 죽엽주는 동밑에 죽엽을 깔고 술을 담근
다음에 또 위에다가 죽엽.그러니까 대나무 잎을 넣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술색깔이 참색이 돈다
그러니까 맑은술이면서도 각기 색이나 향을 추구하는 술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다음에 청주로 이화주가 있다 향원주도 청주고 소곡주도 청주고 그 다음에 백화주라는 게 있다..
백화주는 우리나라에 고려때부터 전해지는 별명이 방문주라고 되ㅓ있다 대표적인 청주로 일반화되어었던
방문주라고 하지 그다음에 봉양주가 청주가백향주 남성주 그 다음에 녹파주 이런 게 다 청주다
또 족보중에 또하나 벽향qurgid 주도 청주고 별주도 청주계에 속하고 향화춘주라는게 또 이t다
이건 계절적으로 춘주계통은 정월부터 담지만 이것도 청주고 하향주라는거 이것도 청주고 그 다음에 부의주라는
게 있는데 부의주가 어떤 특징이냐하면 술이 무르익었을 때 술밥을 넣은 쌀알이 동동 뜬다 그래서 그걸 부의주
라고 한다 맑은 술에 개암같은 밥풀이 동동 떠서 부의주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다음에 약산춘라는게 있고 이런게
음식디미방속에 수용되어있는 청주계통의 술이름이다.
1050
청주라는 게 맑게 빚어먹는 술을 가리켜서 이야기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청주라는 이름도 쓰지만 맑은 술이라는
이름도 쓰고 모든 양조주가 다 청주일수는 없지만 그러니까 그 술을 만들어서 맑게 빚어서 마시냐 아니면 그 술
찌꺼미하고 분류하기로 해서 걸러내느냐 아니면 용수를 담아서 맑게 고인술을 떠서먹느냐 여러 가지 여과방법이
있지 아니면 여과하지않고 고대로 맑게 된 것만 더내서 청주다
맑은 술이 이렇게 해오고 있다 그런데 술중에 우리나라 현재 보면 소위 탁주라는 이름이 있는데 음식디미방에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술인 탁주가 빚어져있다 그것을 별명으로 이화주라고 한다
배꽃 필무렵부터 담궈서 이화준데 이 이화주의 특징은 누룩을 쌀로 만든다 다른 술은 다 밀술이지
근데 요놈만은 쌀누룩이다 살은 그대로 했느냐 그게 아니고 쌀을 가루로 내서 누룩을 만든거다
그 다음에 술밥은 쌀을 Wu서 넣는 게 아니라 이것 역시 쌀을 살각루로 만들어서 이걸로 떡을 만들어서 Wu서
으깨서 풀같이 풀어서 거기에다가 물하고 쌀누룩을 섞어서 양조한 게 이화준데 요놈이 걸를 필요없이 탁하게
빚어진 걸 그대로 마시는거다 그러니까 청주계와는 아주 다르지
일반청주는 밀누룩인데 이건 쌀가루누룩이다 걸를게 없다 ..오늘날 탁주라는 걸 막걸리로 오인하는경우들이 많다
막걸리라는 건 낱말의 원천이 춘향전에서부터 나오는데 먹걸리..술찌꺼기들..그래서 먹걸리가 막걸 리가 되는데
현대용어는 막 걸렀다는 의미-그것과 순탁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주조법을 보면 막걸리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않는다 간혹 조리서에 막걸리를 써라라는 게나오기도 하지 그러나 막걸리는 탁주를 의미하는
게 아니고 우리 술문화권에서는 막걸리를 사주라고 한다
이렇게해서 순탁주와 막걸리를 구분할 필요있다 이건 우리 주조사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구분할 필요가 있다
1540
이게 (이화주) 특별한 술이다 우리나라 양조회사의 술의 발달과정을 보면 쌀 누룩을 만들어서 쓴다 밀누룩은
별로 안쓴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상당히 선진적인 쌀누룩문화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1610
그게 그거다 그러니까 어떤 양조주든지 술을 빚어서 맑은 술은 떠내고 그 나머지 술을 물을 첨가해서 다시 숙성
시키거나 그대로 대량생산을 한다 그러니까 노동자라든지 농민이지 주로 소작인들을 위로하기위해서 술대접을
한 게 막걸리다. 탁주는 아니다. 그러니까 모든 청주에서 막걸리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막걸리를오늘나르이 술의 분류로 보면 재제조..다시 만든 술이라는 의미 양조주를 빚고 그걸 이용해서
다시만든 술/..거기에 속한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특히 음식디마방을 쓴 안동장씨의 생활배경-적어도 사대부집
인데거기에서 막걸리를 만들었겠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테이프>
@@ 장지현교수 인터뷰
1805 일반적으로 사대부간에 주고받았던 대표적인 술이 방문주다. 흰 안개같은 술-
일본하고 교류하는 과정에서 그러니까 에도시대이후 통신사들이 많이 가는데 주로 방문주와 소주를가지고 간다.
이건 우리나라 방문주에 미치지못한다. 그만큼 술의 기술이나 이런 건 우리나라가 앞서 있었다.
현대화과정에서 뒤진 것뿐이지.. 그 다음에 그러니까 속성주 속성주중에는 점강주라는 게 들어가고 그 다응에
감향주라는 것도 들어가고 그 다음에 점주 점주라는 게 또 나온다 그 다음에 점감주가 나오는데
이건 술의 분류상 탄술 감주..그러니까 이건 주정도가 낮고 달다..그래서 이건 술을 잘 못하는 손님을 위해서 대접
하거나 고려때는 외국사신들을 맞아서 잔치를 할 때도 대개 독한 술을 안한다 탄술계통을 한다.세번 정도 돌린다.
그러니까 그 술을 대접하는 대상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주정이 변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제 집에 대갓집에서
사대부집에서 농사를 짓기시작한다하면 2,3월달에 소작인들을 배불리 먹여야하잖아
그다음에 농사짓을 때 새참으로 또 술을 내려야하잖아
그래야 그분들의 피로회복용으로 또 배불림용으로 쓴다 그럴때는 대량생산하지않으면 그분들의 술을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럴 때 먹는게 막걸리다. 소위 말해서 농주라고 하는 거 더구나 기록은 잠깐 잊었지만 남대문을 개축할
때 동원된 일하는 사람들도 막걸리를 아주 술을 제가 잊어버려요 상당히 많은 술을 대접한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술을 대접하는 상대에 따라서 더구나 고려때 주성이라고 알려진 사람 있지 이 사람 술 없이는 못살지 술의
성인으로 되어있다 이건 오나가나 술이다
그런데 그 분들 먹는 술 종류는 그냥 대개 주변사람들이 위로하느라고 갖다드리고 스스로도 빚고 그러겠지만
대개 고급주들이 많다 특별한 이름을 대기보다도 청주계통이다 맑은 술 계통이 많다
약용주도 있다 그 다음에 담술..순례주 하다가 현재 음식디미방에 소개되어있는 술의 처방중에 순례주라고 해서
속양주지 점강주가 여기 들어가고 하절삼일주가 여기 들어가고 사순주가 여기 들어가고 그 다음에 일일주라는
이름으로 나와있는 술이 거기 들어가고 그 다음에 절주 그 다음에 칠일주 그 다음에 두강주 그 다음에 절주 또
하절주라는 게 있다
하절주 그 다음에 시일을 다퉈서 만드는 시급주라는 게 한자로 되어있다.그런 것이 들어가있다
그다음에 칠일주라는 게 또 있고 그러니까 24시간에 걸쳐서 술이 얻어진 술은 일일주다
그런 식으로 일주일내에 빚는 술 이건 순례주라고 해서 속양주라고 한다
2515
왜 이렇게 빨리?
그러니까 고급주와 같이 적게 빚고 예를들어서 삼해주가 고급준데 삼해주지 이건 세 번 빚는 술이잖아 근데
여기에도 스무말들이가 있고 열말들이가 있고 석되 처방이 있고 두되처방이 있다 그러니까 삼해주이름 여기
많지 근데 그게 다 쌀의 양이 얼마에서 시작하느냐하는 처방이다.
그러니까 스무말 열말 석되 두되 이런 식으로 빚ㅈ잖아 근데 이게 반주로 먹는다든지 손님이 드나들 때 쓴다
든지 그럼 금방 동나잖아 그러니까 저장된 술이 없거나 저장되고있는 술이 적을때는 속성주를 만드는 거다.
그러니까 속성주가 어떤 의미에서 잔치EO도 쓰이는데 그게 술 대접하는 계층에 따라 급히 만들어서 대접
하기위한 그러한 의미에서 이런 순례주 속양주가 발달하느거다 그러니까 생각해봐라 일주일만에 내일모레
우리집에 잔치가 00일인데 술은 없다 그럼 어떡하나 1회밖에 안 남았다 그럼 속양주 빚어야지 다른 고급주는
한달만에 빚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속양주는 속성..순례주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건 급히 술을 만드는 처방
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질을 여기서 따지기 어렵다
다른 건 술이 다 고여서 덧밥츠로 쓰고 다시 술이 익어서 맑아지면 또 덧밥으로 하고 이건 거의다 1차담금으로
거의 다 마무리 하는거다. 소주도 네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소주가 시작된 건 고려때부터다
이것이 음식디미방에도 거의 그대로 수용되어있는데 여기에 네종류가 똑같은 소주가 아니다 처방이 각각
다르다 하나는 멥쌀로 담근 술이고 하나는 밀로 담근 술이고 하나는 찹쌀로 담근 술이고
그다음에 소주 별주로 쌀로 담았지만 위의 처방과 다른 거 어쨌든 어떤 곡물로 담았든간에 이건 증류로 해서
했기대문에 상당히 적은 양이다
그러니까 어느정도 밑술이 만들어졌느냐에 따라서 거기서 증류주에서 나온 증류에는 고리라고 하잖아 고리를
통해서 얻어진 소주가 양이라는 게 상당히 적지
그러니까 이건 그런 용도고 이 소주라는 게 저도 확실한 거는 어렵지만 고려대에도 왜놈들하고 전쟁하는 식의
소주도가 있다. 그러니까 장군인데 소주를 하두 퍼마셔서 소주고 이런 이름이 붙은 살암도 있다
그토록 소주라는 게 저도 생각해보건데 반주 조금씩 드는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물론 df반대중이
소주까지 퍼진 것 조선후기에 이뤄진다 조선후기는 마포에는 삼해주를 담는 술도가가 상당히 많았는데
소주를 아주 대중들이 즐기기 때문에 청주를 팔지않고 그걸 증류해서 삼해주라는 이름으로 팔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근데
3110
술이 고급주 청주 이런 건 사대부간에 사대부중에서도 문인들의 교류라든지 이러한 술자리라든지 이러한데서
고급주가 나온다 왜냐하면 내놓은 술이 어느 집에서 내놓았다하면 금방 술이 평가가 나온다 좋다든지 더 가져
오라든지 이런 소위 정자에 여름에 자리하고 그 지방 동인들의 문인들이 모였다고 가정하자 술상이 반드시
나오는데 술이 저질이면 안된다 그러니까 상류사회에서 맑은 술 청주를 먹는데 이화주는 특별한 탁한 술의
고급주에 들어간다기 보다 대접을 하는 술이다.
3310
근데 술을 먹는 기회라는 것이 제주용이 있잖아 그 다음에 손님대접하는 술이 있고 그 다음에 각종 잔치에
걸맞게 만드는..그러니까 그때 모인 대접할 사람의 수에 따라서 결국 지휘에 따라서 청주계통이 고급주로 대접
하는 것도 있고 중간 층 속성주를 대접한다든지 하류층에는 막걸리를 대접한다든지 대충 짐작은 해볼 수 있다
소주의 경우는 소주의 소용이 약용주 대신도 한다 반주 대신도 하고 더구나 구라파 술문화에서 블란서같은
경우에는 다 음식을 먹고 소화촉진을 위해 증류주를 먹잖아 꼬냑을 먹든지 꼬냑이나 블론디는 식사도중에는
절대 안먹는다
식사전에 먹는 에피타이저로 먹는게 소위말해서 달콤한 술 음식먹으면서 조금 씩 반주하는 것이 와인..
시큼 털털한 달지않는 포도주 그 다음에 다 먹고 나서 반드시 포도증류즈 블란디나 꼬냑 그것도 조금 입가심
으로 먹는 거죠
물튀기고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소주를 주로 애용한 계층이 다량의술 안먹고 적은 술 먹고도 만족할 수
있는 소주 술값으로 치면 훨씬 비싸다 대중술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약을 위해서 반주를 위해서 소량씩
그건 중산층 이상에서 먹었으리라 본다 경우에 따라서 약용주로 먹은 건 지붕유설에 그런 게 나온다
소주를 먹어가지고는 성에 차지않아서 거기에 고춧가루까지 타서 먹ㄴ느다 그래섲 죽은 사람이 있다
근데 이게 무슨 듯이냐하면 고춧가루와 인연이 있는건데 오늘날 서민층읙 감기치료약으로 소주에 고춧가루
넣어서 먹는게 이게 다 소주는 물론 약은 아닌데 고춧가루를 먹는 촉매로 먹는거겠지
그래서 그걸 먹으면 땀이 퍽 나지 그래서 감기를 낫게하는 민간요법으로전해지듯이 소주가 그런 용도로 이용된
것같다 그런데 소주가 오늘날 같이 옛날에는 발달을 하지않았는데 소주 먹을 수 있는 계층이라는 게 고려시대만
해도 상계급들이다 술을 아무리 많이 빚어도 거기서 나오는 소주의 양이 적으니가 또 비싸서 사먹을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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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제주지 일종의 제주의 경우는 대개 곡주를 쓴다 그건 전통적인 농경문화권에서 형성된 배경에서 볼 수
있다 나라를 빚어서 조상을 술을 다하고 술을 빚어서 그걸 조상에게 바치는
그러니까 곡준데 대개 맑은 술이다 제주로 쓰는 건 그러니가 술이 전혀 없을때는 술대신 물을 쓰잖아 명수 맑은
물을 대신 한다든지 정화수를 이용한다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물론 우리나라의 제주중에도 서낭당 제사냐
기우제냐 동네제사가 얼마나 많으나 그때는 다 술이 나오는거지 그러니까 대개 그때도 생각해보라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럼 고급청주를 eof 수 없지 그럴 때 속성주들이 역할을 하는거다.
반드시 제삿상에 올르거나 성묘할 때 쓰는 술이 맑아야한다는 기본 원칙은 아니고 제주로 쓰이는 뜻은 사람이
하늘과의 관계 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체역할을 하는게 술이다
그로하여금 술이 끊이지않게 발달한 것도 그 원인이다 그러니가 사람과 사람의 대화속에서 술의 역할이---
과하면 별 이상한 일도 벌어지지만 술을 서로 나눠 먹었을 때 그 대화하는 사람의 모든 감정이 술에 다 녹아
버린다 그게 기본이다 근데 과하면 폭음..
4040
제주라면 나랏님이 특별한 뜻을 가지고 제사를 지낼때를 포함해서 개인으로 보면 성묘를 한다든지 상을 당해
다든지 시제를 지낸다든지 도는 한 마을에서 동제를 지낸다든지 여하간 술이 하나의 신과의 매체역할을 죽 해왔
는데 그 종류 어떠한 술이 쓰여졌느냐 그건 특별한 예법상의 규정은 없는 것같고 궁중에서 주로 행해지는 모든
행사에는 고급주들이 등장..
4237
53중 청주는 24 순 탁주는 네가지가 있다 그 다음에 속양주에 속하는 순례주에는 열종류가 있다 그 다음에 단술
계통은 세가지가 있고 그 다음에 약용주로는 두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한가지는 오가피고 또하나는 자주다.
자주가 뭐냐 이것은 지금 맑은 술에다가 원하는 약들을 넣고 중탕을 한다
중탕을 해서 맑게 분리한 술이거든...그러니까 같은 약용주라도 오가피는 처음부터 오가피를 술에 담근 원료와
같이 빚었지만 자주는 다 된 술에 약을 넣어서 중탕을 해서 걸른 술이다 그게 차이가 있다
그런데 합주가 또 한가지가 있는데 합주는 일반 양조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에 저술했듯이 며느리 맏며느리
에게만 물려주는 술이기 때문에 안동장씨가 살아서 살았던 당대까지의 안동장씨가 알았던 술처방을 다 기록
했다고 봐야지
4440니화주?
이화주라는 것이 다섯가지네 니화주법 니화주볍해서 다섯가진데 그 중 첫 번째가 니화주 누룩만드는 방법..
이게 바로 ..그러니까 다른 술에는 누룩 만드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유독 이화주에만 누룩만드는 방법이 있다
다른 술에 없다는 것이 술마다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뭐냐 이 책에 보면 주국 방문이라는 게 하나 딱 있다
이게 바로 누룩 그러니까 누룩을 만드는 처방인데 이것은 모든 술에 다 적용되는 소위 누룩처방이고
이 이화주에서는 그와 달리 이화주만을 위한 누룩이 따로 적혀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이 상당히 특별한 술이라는 얘기를 하는거다
삼오주도 처방이 각각 있다..
이것도 정월달부터 빚는 술이다 오라는 게 소날 소날 담그는 술이지 오...말날이지..말날에 담그는 술이지
이화주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화주누룩이 쌀 누룩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거지 그런데 여기 보았듯이 이화주
담글 때 한말비지 방법 닷말비지 방법 등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기본은 마찬가지다..
4713
점강청주가
여기서 송화주가 바로 술에 송화향을 곁드린 술이다..
죽엽주는 가향주라기보다 가향주는 차원이 다르다 가향주는 국화주를 가향주식으로 담으면 술 빚은데다가
매달아놓는다 그래서 향이 침투하도록 한 것이 가향주고 이런 것들은 향을 유도했지만 일반청주계로 보고 있다.
죽엽주도 아까도 말씀드렸지 마찬가지다 죽엽을 깔고 술을 담기전에 그 밑에 깔고 술을 담그고 그 다음에 죽엽을
위에 덮고 이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색을 죽엽에 색을 유도하는 그런 양조기법이다.
노완섭교수 인터뷰
5036
우리나라는 그 당시 교통이 발달 안되어있기 때문에 소위 물삼이 왔다갔다 안한다 그리고 지방마다 나는 특산
물이 있는데 그걸 오래 갈무리하려면 가장 큰 원인이 냉장고가 발달 안했다는 거 지방마다 특산물이 있다는
거 그러니까 음식의 종류가 다르니까 저장법이 달라야되겠지..
그러니까 경험적으로 그 지방에 맞는 여러 가지 갈무리법..
순수한 우리말로 갈무리법..수장이라는 건 원래 중국말 그대로 우리말로는 갈무리법..
갈무리라는 독특한 방법들이 생겨난거다.
5122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그 당시에는 교통이 발달 안되어서 물산이 왔다갔다하지않다 그리고 지방마다 나는 특산
품이 있기 때문에 그걸 날때만 먹고 나지않을때는 못먹게되니까 소위 수장법 순수한 우리말로는 갈무리법이
라고 합니다.
갈무리하는 방법이 발달하게되었고 경험적인 우리 조상들이 그 지방에 적당한 갈무리법을 그 지방에서 나는
물건들을 이용해서 갈무리를 하다보니까 지방마다 고을마다 갈무리법이 모두 다르고 독특한 갈무리법이
생겼다.
5213
그런데 원칙은 세가지로 나눠진다 첫째 일반식품은 그대로 놓아두면 수분이 빠져나간다 수분이 빠져나가면
맛과 향이 없어지니까 어떻게하면 수분을 고대로 유지하게하는가 하는 얘기고 그 다음에 대부분의 식품원료
들이 죽은 게 아니라 살아있다 그러니까 호흡을 하게되면 생리적으로 영양성분이 소모되고 수분이 소모되
니까 소위 양도 줄고 영양소도 준다 그러니까 수확할 때 그대로 보존하기위해 여러 가지 갈무리법을 만들게
된거다.
5254
수장법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
동아같은 건 소금에 절이는 건 우리가 쉽게해서 염장이라고 하지..오늘날 단무지 담그는 그 원리고 그 다음에
꼭지가지에 꼭지를 딴 다음에 밀랍을 바른다고하는데 그건 호흡할 수 있는 막을 막아버리는 거다 그러면
가지가 살아있다
호흡을 한다는 거 영양소를 소모한다는 이야기고 그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영양소가 산화되니까 말하자면 질식
을 하게 말하는거다 공기가 통하지않게 덮어버리는데
현재 그 방법을 미국에서는 어디에 쓰냐하면 오렌지가 잘 말랐을 때 그걸 밀랍을 한 꺼풀 완전히 코팅한다
그러면 호흡을 못하니까 그대로 있는거다 말하자면 현대판 통조림하듯이 한다 그다음에 이걸 재에 집어넣는데
재에 집어넣는 이유는 재에 살균력이 있다 그러니까 침입하는 미생물을 살균을 하고 재속에 들어가있는 동안
공기와 차단이 된다 재가 곱기 때문에 공기가 통하지못하도록 밀봉한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봤을 때 완전히 밀봉을 해서 살아있는 식품의 호흡을 정지시켜서 산화가 안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아주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5515
마른 해삼?
그당시에는 몰랐겠지만 볏짚에는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가 있다 그것이 해삼이 거기에 닿으면 효소작용에
의해 연해지고 말하자면 분해가 되는거다 그거 요새 그걸 사용하는 것이 연육소를 가지고 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5545
복숭아를 밀가루풀에 말하는 건 아주 좋은 방법인데 복숭아도 호흡을 하면 영양성분이 소모되고 수분이 날아
간다 그러니까 이걸 밀가루풀속에 넣으면 빠져나가는 수분을 막아주고 설사 수분이 빠져나가더라도 흡수가
되겠지..그리고 어차피 호흡을 하면 영양소가 소모되니까 밀가루풀에서 탄수화물이라는 영양소가 복숭아속
으로 들어가겠지 왜냐하면 복숭아속에 있는 것도 주로 탄수화물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이 빠져나가더라도 풀에 있는 영양소가 들어가니까 말하자면 복숭아하고 밀가루풀 사이에
영양의 균형을 맞춘다는 이야기다..그러니까 이것도 아주 현명한 방법이다.
근데 이때는 방법이 온도가 낮아야한다 온도가 높으면 풀도 썩고 복숭아도 썩는데 이때 온도라는 것이 영하
온도가 아니라 한 10도이하면 거의 변하지않는다 왜냐하면 복숭아는 지금도 냉장고에 안넣는다 온도가 낮으면
오히려 냉해를 입어서 상한다.
예를들면 바나나같이 열대과일은 절대 냉장고에 넣지않는다 냉장고에 넣으면 냉해를 입어서 더 빨리 상한다.
그래서 이 식품을 저장할때는 낮은 온도보다 중요한 것이 다소 높더라도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
하다
그러니까 온도가 낮았다 높았다 하면 미생물이 소위 연자극을 받는다 그걸 전문적으로 히트쇼크라고 한다
예를들면 요즘 그런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 포도주는 오래 되도 몇 년 묵을수록 좋다 근데 시간이 많이 걸리
니까 경제성이 없을때는 포도주를 저장해놓고 저장고의 온도를 올렸다 낮췄다하면 빨리 익는다 그런 방법을
지금도 쓰고 있다.
5814
개고기 많은 이유?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과거 농경민족이기 때문에 소가 다 일을 했다 소에 대한 신성한 감이 있고 소가 농가
에서 재산목록 1호다 그러니가 그걸 잡아먹기에는 너무 귀하고 흔치않았는데 ekgod히 우리나라에는 개가
많았고 꿩이 많았다.지금은 꿩이 적지만 그당시에는 꿩이 많았는데 꿩이 생물학적으로 볼때는 우리나라에
아주 적합하다..그러니까 과거에는 꿩이 많았고 들과 산에 꿩이 먹을 게 많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소는 희소가치가 있고 개나 꿩은 흔하니까 그 고기가 흔하다는 거고 특히 만두속 빚을때는
꿩고기가 훨씬 맛이 있다 그래서 그걸 많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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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식디미방에 보면 여러 가지 수장법이 나오는데 과거에는 우리 조상들이 과학적으로 어떤 내용을 알고
한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 의해 그런 수장법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오늘날 발달된 식품공학적으로 해석할
때는 너무 과학적이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이 지금보다 과학적인 현명한 지식을 많이 알고 그걸 생활에 적절
히 활용했다
그 대표적인 게 김치를 발명한 게 우리 조상들의 슬기라고 말할 수 있는데 김치는 갈무리법인 동시에 가공법
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수장법이 김치라고 얘기할 수 있다.
0025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볼 때 땅은 적지만 기후변화 심하다 그 이유는 산이 많고 사계절이 뚜렷하니까..
그리고 산이 막혀있기대문에 거리는 짧더라도 온도변화는 심하다 우리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동해와 서해 온도
차이 많이 나듯이 그러니까 지방마다 기후풍토가 다르니까 거기에 걸맞는 갈무리법 수장법이 생겼다
거기에 나는 식품도 다르고 그 수장하는 방법도 그 주위에서 나는 여러 가지 물건이나 식품이나 우리가 생활
도구 가지고 많이 사용했다 그런데가 결정적인 이유는 교통이 발달 안되었기 때문에 어떤 한 지역의 수장법이
다른데까지 잘 번져가지않았고 자연히 그 지방에서 자연 발생적인 수장법이 경험적으로 생겼다
오늘날은 모든 것이 냉장고로 통일되었지만 옛날에는 냉장고도 없고 기후조건이 다 달랐으니까
거기에 걸맞는 여러 수장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0156
우리나라 수장법도 여러 가지 있지만 식품을 부드럽게 한다거나 저장기가능을 길게 한다거나 더 맛이 나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재료를 넣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들 속에는 대부분 공통적으로 색 향 맛이 독특한게 많고
특히 그 안에 넣는 그 당시로는 첨가물이지 첨가물에 특벽한 효소들이 많다
이 효소는 식품을 부드럽게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단단하게도 해주고 또 향을 좋게도 해주고 색깔을 진하게
도 해주고 그런 방법을 썼다
그러니 한가지 예를들면 치자를 많이 썼다 치자가 식중독 살균을 하는 성분도 가지고 있다 이걸 갖다 유효적절
하게 썼다
예를들면 우리가 동화 갈무리할 때 꼭지를 따고 천연밀랍을 바르는 방법도 있지만 참기름 바르는 방법도 있다
참기름 바르면 두가지 장점이 있는데 하나는 참기름을 발라놓으면 기름에 막이 생기기 때문에 공기가 통하지
않는다 소위 유막이 생기니까 마치 우리가 모기를 없앨 때 연못에 석유를 뿌리는 것과 같은 원리 참기름에는
-0 성분이 황산화작용한다 산화가 잘된다는 건 부패한다는 것 거기에 참기름을 하면 부패하지도 않고 굳지도
않는다 참기름 바르고 기름브르면 인절미 굳지않는다
수분이 빠져나오지않으니까 굳지않으니가 수분이 안 바지니까 항상 말랑말랑한 걸 유지할 수 있다.
참기름을 바르는 방법이 음식디미방에도 많이 나온다.
그외에 사용하는 게 들깨기름도 사용하고 기타 여러 가지 향신료를 쓰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향신료는 약간의 살균력을 갖는다 대부분의 향신료는 약간의 살균력을 갖는다 그래서 이것들과 같이
넣어주면 그만큼 식품이 오래 저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그게 1년12달 저장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몇
가지 적당히 나아지면 그 기간 훨씬 연장될 수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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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거기보면 복숭아 뽕나무 잎을 넣는게 동편에 넣는다 서편에 넣는다 과거에는 미신으로 읽혔는데 동편
서편 따지는 건 햇빛을 피해서 갖다놓는다 이건 굉장히 의미가 있다.처음에 연구가 안되었을대는 이거 미신
이다 그랬는데 말하자면 그 당시엔 자연광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피하고 그랬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두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양지바른데 두면 온도가 높으니까 빨리 상한다 그렇지않은 곳에 둔다는 건 자연의 광선을 최대한 피해서
저장했다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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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지금으로 치면 온실이나 마찬가진데 땅에 움을 팠다는 건 땅은 비교적 온도가 일정하다 거기에다가 두엄을
갖다놓았다 두엄이 발효할대는 온도가 최대한 80도까지 올라간다.
그러니까 자연 난방이 되어서 그 안의 온도는 절대 영하로 안내려간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금으로 치면 온실
효과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86도 정도 두엄이 발효할 때 열이 나니까 그 열을 고대로 이용하니까 겨울에도 거기
서 얼마든지 채소를 재배했다
그다음에 또 한가지는 우리가 무나 감자 배추같은 걸 과거에는 땅을 파고 북쪽지방에서는 그 안에 넣어놓았다
그 이유는 온도가 일정하니까 상하지않는다 온도가 낮더라도 낮았다 높았다 낮았다 높았다 온도가 심하게
변하면 낮은 온도에서도 부패했다
다소 온도가 높더라도 땅속에서 온도만 일정하면 부패하는 시간이 훨씬 연장된다 그래서 감자 고구마 배추를
다 움속에 저장했다
그리고 움속에는 적당한 습기가 있다 또 땅하고 항상 맞닿아 있으니까 그 식품들이 자라던 가장 자연스러운
환경이니까 어쩌면 오늘날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 보다 더 자연스럽고 변하지않았겠지 그러니 전체적으로 볼 때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수장법은 우리가 과학이 발달해 냉장고에 저장하는 것보다 제가 보기에 훨씬 과학적이고
자연적이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