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스웨터를 입고 여름으로 가면] 걷는사람 시인선_163
저자(글) 박영선 · 2026년 09월 28일
책 소개
“거품으로 얼어 죽은 내가
8월의 햇살 아래 녹는다”
평범한 하루의 균열 속에서
사물이 몸에 새긴 계절의 감각들
박영선 시인이 2020년 등단 이후 두 번째 시집 『겨울 스웨터를 입고 여름으로 가면』을 걷는사람 시인선 163번으로 선보인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당신이, 나를/조금 느끼길 바랄 뿐이다”라고 썼다. 기원을 실체화하려는 듯 자신을 활짝 열어 보인다. “고등어구이 따위를 가지고 맹세를 하는(포인트)”가 하면, 아름답다는 말이 형용사인지 추상 명사인지를 놓고 밤을 새우“(붉은 냅킨)고, ”비염을 고치려다/미각을 잃어버린(닭치고, 가족이야)”다. 시들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계절이 있고 사물이 있다. 바로 그것들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지점에서 함께 맺히고 열린다. 상실이 이루어진 자리에 누구보다 오래 서서 흔적을 응시한다. 동시에 신심의 어떤 것도 잃지 않고 온전히 감내하며 같은 통점을 공유할 뿐이다. 골목이 붉어질 대로 붉어져도 기어이 “신들이 사랑하기 적당한 때(피장파장)”을 건져 내듯 말이다.
시인의 문법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삶의 쪽으로 가자고 제안하거나 죽겠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살아 있기와 죽어 있기를 반복하며/그래도 사 분의 일쯤은 살아서 아침을 맞(가로등)”는다. 지난 다음에야 망고였던 시간을 어루만지는 데다, 누군가의 흰색 사멸을 하염없이 말하는데도, 슬퍼하기보다는 다만 잘 보내는 법을 안다. “잠에는 중력이 없어서 넘어지지 않는다(피켓 같은 잠)”라는 말은 시인이 생의 속성을 계절과 함께 생동하도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음을 뜻한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려면/다시 허물어지는 담장이 있어야(브레이크 타임)” 함을 충분히 안다. 그의 활자를 더듬다 보면 어떤 때를 붙잡거나 되돌리지 않아도 회귀하는 경험이 자연스러워진다. 상실을 감내하고 다음 시절로 넘어갈 용기를 얻는다. 두 계절을 잇는 지금, 책장을 들추자 지난여름과 함께 어디선가 어김없이 초판본 노을 향이 난다.
저자(글) 박영선
경기 남양주에서 태어나 2020년 《발견》으로 등단했다. 2022년 시집 『여기 잠깐만 앉았다 가면 안 돼요』를 냈다. 〈화성작가회의〉 회원이자 〈해시〉 동인이다.
목차
1부 오늘은 누가 되어 볼까
포인트
짜장면과 생양파와 비에 젖은 멸치와
어둠이 거미줄에 걸리는 시간
카푸치노
서양식 이름을 주세요
붉은 냅킨
자주 체하는 언니에게
정육점 옆 한의원
성에
버스
엘리베이터
닭치고, 가족이야
촉법, 봄
간수
2부 우리는 오래도록 서 있겠다
피장파장
무릎을 펴다
가로등
심부름 가는 길
집
죽은 과일을 만지는 시간
구룡령
쿠키 영상
하염
화가의 방
산책을 위한 텍스트
밟으면 꿈틀해요
부고
제주에는 바다가 살지 않는다
3부 겨울 스웨터를 입고 여름으로 가면
스웨터
싸움의 시작
왼손잡이
부캐 전성시대
구작 영화
피켓 같은 잠
배달 사고
개미와의 산책
불안한 마르틴 발저 씨
몽골몽골
허물어지는
혹시
풍경화
수면양말
4부 과수원에서 나오는 법을 잊은 것처럼
녹음
전쟁
오래 서 있는 저녁
도망쳐
옥상에서
위장 전입
브레이크 타임
초판본 노을 팝니다
마지막 개그
시계가 있는 과일가게
합장
누구
겨울 생
유전
해설
익숙한 하루를 고장 내는 말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책 속으로
유리문 사이로 빛이 내리꽂히고 있다
아름답다는 말이 형용사인지 추상 명사인지를 놓고 밤을 새우던 때
(중략)
흉기를 피하려 흉기 뒤에 숨는 건 보편적 사랑의 비밀이고 깨진 유리문 사이로 빛이 꽂히는 건 개별적 사랑의 비밀인가요
날을 숨긴 칼은 달콤했고 프리즘으로 비춰진 세상은 황홀했던걸요
절벽으로 떨어진 냅킨은 붉게 물들어 있다
-「붉은 냅킨」 부분
흘러내리다 죽고 싶다고 말해요
봄에는 죽는 얘기는 하는 게 아니라는데
나는 촉법의 봄에 숨어 살고 있으니 괜찮아요
봄과 보오옴의 가운데쯤 숨어서 하면 돼요
인생이 직선이면 안 되죠 힙합은 삐딱하거든요
엄마, 이불은 두고 나갈까요
엄마, 난 진짜 안 볼래요, 캠퍼스의 봄
보오옴 난 안 봄 진짜 안 봤음
-「촉법, 봄」 부분
햇빛은 위에서만 내리는 게 아니라서 나는 고개 숙인 채 방 안에 여름을 들여놓고 한 번도 천장을 밀어 본 적 없는 무릎부터 펴 본다 몸을 구긴 푸른 잎이 다리를 펴 본 적 없는 내게 손을 내민다
내가 식탁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그는 창가에 서서 물을 마시고
우리는 오래도록 서 있겠다
각자의 여름 창가에서
-「무릎을 펴다」 부분
낮이 부끄러운 거니
아직 순정이 남아 있는 거야?
씨 한 주먹 들고 나간 아침 해는 밥은 먹었을까
해바라기는 가벼워져 꺾인 머리로 생각한다
밤마다 귀들이 씨 볶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부터 책상과 의자와 나는 너무 낡았고,
검은 티끌만 떠다니는
그냥
그 방은 해바라기였어
-「화가의 방」 부분
일주일은 벽을 허물고 일주일은 벽을 쌓고 일주일은 벽을 감추겠다고
월요일 아침부터 허문다
위층을
(중략)
그나저나 저들은 내가 지우기 쉬운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았을까
벽이 허물어지는 소리
내가 지워지는 소리
나는 이런 나로 벽을 어떻게 쌓을지 몰라
위층에 귀를 바짝 댄다
-「허물어지는」 부분
작가의 말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어떤 글을 쓴 건지 모르겠다
당신이, 나를
조금 느끼길 바랄 뿐이다
2026년 9월
박영선
추천사
김근 (시인)
박영선의 시적 주체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그 “시간이 망고였다는 걸” 알 때까지, 실은 그 “망고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 때까지 시간의 “죽은 과일”을 감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히 회상으로만 끝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시간의 과일들이 떨어져 죽고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된 아스팔트에서 기어이 새롭게 열리는 과일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현재적 발견 속에서 “은하에 잠긴 오래된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다시 쓰”고 싶은 열망이 익어 간다. 자신의 세계를 “씨앗부터 시작하고 싶”은 시적 주체는 “거꾸로 살아 봐야겠다고” 마음먹기에 이르는데, 이 태도가 시집의 일상과 풍경의 묘사 속에 비약과 환상을 끌어들인다. 결코 과하지 않게 섬세한 감각을 보여 주는 이 시집의 묘사가 서늘함을 지니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누군들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기겠는가. 그럼에도 “맨발로 걷지만 읽은 곳을 또 읽어서 내 안에 햇볕 한 줌 끼워 넣자 다시 시작되는 나만의 싸움”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실패와 분투의 기록 없이 삶이 어찌 아름다운 노을 한 장을 보여 줄 수 있겠는가. 이 시집은 그러므로 실패와 분투를 온몸으로 통과해 온 박영선이 우리에게 보내는 “초판본 노을”이다. 시집을 읽어 가는 동안 노을이 우리의 온 시간으로 번져 올 것이다.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