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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가톨릭 신자면 누구나 사랑하는 이 구절은 ‘요한복음 14장 6~7절’로, 최후의 만찬 장면 이후에 나온다. 주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시자 제자 시몬 베드로와 토마스는 거듭 여쭙는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하느님을 믿으며,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당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2024년 7월 12일 금요일 오전
한창 바쁘게 일하던 중에, 문득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구절이 머릿속을 스친다. ‘설마 이런 것이 하느님과의 대화인가? 나에게도 성령이 오셨나?’ 하며 피식하고 웃는다. 그래도 근래 들어 ‘열심한 교우’1)가 되어야지 하며 지내온 터라, 순간 찾아온 예수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못 진지해진다.
생각이 넘쳐 잠시 일을 멈춘다. 복도로, 마당으로, 그리고 건물 주위를 천천히 돌며 말씀 내용을 곱씹는다. 시몬 베드로와 토마스가 그랬듯이, 나 또한 ‘수단(길)’과 ‘목적(진리)’을 먼저 단정한다. 그런데 끝이 아니다. ‘생명’이 아직 남아 있다. ‘어, 그러네’ 하면서 참으로 묘한 언어 구조에 감탄한다. 새삼스럽다. 예수님은 분명히 ‘길, 진리, 생명’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아는(또는 알아갈) 사람들은,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하고, 당신을 따라 일치를 목적으로 살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도달해야 함을 알려주신 것이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읽었는데, 오늘에서야 글 속의 ‘시안(詩眼)’이 보인다.
그렇다. 길을 찾고 진리를 깨닫는 것과 함께 우리 삶의 여정은 ‘생명’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때의 ‘생명’은 현세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까지를 포괄한다. 우리는 이 ‘생명’을 얻기 위해 신앙을 갖는다. 불가(佛家)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직지(直指)’를 말한다. 그곳의 궁극은 ‘공(空)에 대한 깨달음과 해탈’이다. 선문답처럼 보이는 ‘공’은 말 그대로 ‘비어 있음/없음’이다. 곧 얻을 것 없음을 깨닫는다는 말이다.2) 엄연히 존재하는 피조물과 그들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두를 공(空)으로 치환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한 피조물과 그들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을 인정하시며, 그들의 잘못까지도 함께 하신다. 그렇기에 성찰과 통회를 거쳐 ‘회심’하는 자에게는 삶의 끝과 죽음의 시작에서 ‘영원한 생명’을 다시 선물하신다. ‘구약과 신약’의 시대에도 그랬듯이, 21세기 현재에도 인류에게 은총을 내리고 사랑하신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 신앙이 좋다. ‘현실을 숙명적 불변이 아닌 창조적 가변’3)으로 바꿀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의 모상(模像)으로 태어난 인간이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늘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장 6절~7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길, 진리, 생명’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오로지 안다는 것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신앙인으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그래서 생명이신 ‘예수님(하느님)’과 일치를 지향한다면, ‘나’만 품위를 지키고 인간답게 살 것이 아니라 ‘우리와 이웃’에게 권면하고 동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하느님에 대한 해바라기 사랑은 나 혼자서도 가능한데, ‘우리와 이웃’을 아우르려 하니 어렵게만 느껴진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애초 신앙생활 입문 때부터 나의 구원만을 위하던 이기심에, 봉사활동의 경우 상황에 따른 선택적 승낙과 거절, 더하여 의지도 미약하다. 이런 상태에서 내 그릇 크기를 넘는 방법(길)만 떠올리니,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톺아 보면 교만함 투성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그분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에 도취되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호가호위(狐假虎威)’의 누를 범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다고 자책만 해서도 안 된다. 우리 인간은 비록 먼지로 만들어졌지만, 하느님께서 숨결을 불어넣어 생명과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4)
나의 신앙적 삶은 2013년을 기점으로 ‘유명무실(有名無實)’하던 이전과 ‘명실상부(名實相符)’를 향해 걸어가는 이후로 나뉜다.
2013년 이전의 나는 ‘길’과 ‘진리’를 모르고 헤매는 ‘길잃은 어린양’이었다. 세상 풍파에 휩쓸려 떠다니며, 어떻게 하든지 그곳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정신적․경제적 가난 속에서 술과 음악만이 친구로 남을 정도로,5) 늘 혼자였고 스스로 살아내야 했다.
2001년 겨울 성탄절 무렵, 성가(聖歌)가 흘러나오는 내덕동 주교좌성당. 노래의 이끌림에 무작정 찾은 날이 있었다. 그 이후 3년 정도 성당에 다녔다. 간혹 누군가가 어떻게 성당에 다니게 되었냐고 물으면 “내가 그곳을 찾아갔다.”고 대답했다. 내 의지와 선택의 결과로 여겼고, 옳은 선택을 한 나 자신을 기뻐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이렇듯 교만한 마음에서 싹튼 어리석은 나의 언행은 주위의 사람을 조금씩 멀어지게 하였고, 그것들이 쌓여 상처가 되었다. 어른들과 같은 성실한 신앙심으로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젊은이 특유의 약삭빠른 체념으로 괴로움을 망각했다. 그 길은 자연스레 ‘냉담’으로 이어졌다. 오히려 더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살았다. 대학원 공부에만 정진할 수 있었고, 중국 산동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도 실현했다. 그런 나에게 있어 가톨릭 신앙은 팔아도 되는 ‘그림자’6)였다.
2013년 봄 아들이 ‘소화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김석문가를로 원장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전에 신앙생활을 했었다는 말씀을 드린다.
“아, 그러셨어요. 그럼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전혀 강요도 아니고 ‘부담이 되면 다음이라도 가능해요’ 정도의 순한 어감으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감사했다. 이미 하느님께 지은 죄가 있었기에….
그렇게 ‘사창동성당’에서 두 번째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죄지은 사람은 두려움과 간절함에 목이 마르다. 그 갈증을 아셨는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코복음 1장 9절~11절)라고 하시면서, 신앙생활 재도전에 빗물 같은 용기를 내려주신다. 더욱 다행인 것은 아내(정혜엘리사벳)와 아들(프란치스코)도 세례를 받으면서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마음이 더욱 튼튼해졌다. 씨앗이 좋은 땅을 만난 격이다.7)
마음이 튼튼해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건강해졌다. 이 무렵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애증도 해소된다. 젊어서 한때였지만, 내 시련의 단초를 가난한 부모 탓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멍청하고 완고한 짓이었는지를 통회하면서, 대상을 객체화하여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까지 체험한다.
‘1950년 열 살 어린 나이에 아비를 잃고, 뒤이어 어미까지 잃은 그가 도대체 무엇을 해서 제대로 살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만약 나라면 어떠했을까? 더 비약해서, 지금 열 살이 지난 아들 프란치스코를 두고 내가 먼저 간다면, 아이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가 견뎌내야 했을 고단한 삶을 편린이나마 이해하고 연민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애증’은 아침 햇빛을 만난 이슬처럼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고향에 계신 아버지 그레고리오는 나보다 더 ‘열심한 교우’이시다.8) 그것도 이제야 보인다.
나로부터 비롯된 모든 잘못에 대해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 큰탓이로소이다’ 하며 용서를 구한다. 주관(主觀)의 매몰(埋沒)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었고, 불안의 미망(迷妄)에서 해방되어 떳떳하고 싶었다. 이것을 예수님이 주셨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님께 의지하면서 자유를 누리며 떳떳하게 살기 시작한 것이다. 박차를 가하고 싶었다. 이때 떠오른 것이 ‘불성실’한 나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늘 성실하게 살아가는 아내에게 방법을 물었다. 우문(愚問)에 그녀는 ‘성실함’이라는 현답(賢答)을 제시한다. 이후 매번 ‘성실함’을 위해 노력하게 되고,9) 나의 삶도 깊고 넓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잊고 지냈던 ‘그림자’도 다시 찾았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생명’을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일, 더 정확히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일을 찾고 알아가는 중이다. 물론 이 과업은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반석으로 해야 한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 ‘슐레밀’과 같은 과학자는 아니더라도, 내 남은 삶은 가톨릭 신앙과 관련되는 일을 하였으면 하는 바람도 갖는다.
재주와 덕은 받아서 다시금 천주께 돌려드려야 한다.
그래야만 능히 나고 이루어지는 것이 훼손되지 않는다.
네가 재주와 덕이 있다 해서 스스로를 믿거나 헛된 기쁨을 내어 다른 사람을 가볍게 대하지 말라.
모름지기 자기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모두 주의 은혜임을 생각해야 한다.10)
생각을 거듭하면서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20여 년 넘는 기간 동안 문학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이,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 선조들과 관련된 글을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주신 능력을 이웃과 나누라는 소명(召命)이라 믿고 결심하게 된다. 2013년 회두 이후 10년 만에 얻은 깨달음이다. 이제 올바른 길을 찾고, 진리를 추구하여 생명에 이르고자 하는 나에게 당부와 격려를 전하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
‘교만’에 대해 당부를 합니다.
오랜 기간 교회에서 멀어지게 했던 ‘교만한 마음’도 늘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삼가는 마음을 갖더라도 교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교만할 때면, 그것이 교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로 거기에서 멈출 수 있습니다.
교만으로 죄를 지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화해의 성사 ‘고해’를 하십시오.
보속과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게 된 이후 변화하는 저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쉰세 살을 살아가는 오늘 저의 모습입니다.
서른에도 없었고, 마흔에도 없었습니다.
제 삶의 여정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열네 살, 서른한 살, 서른일곱 살, 마흔세 살 때입니다.
앞의 세 번은 이별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흔세 살 만남 이후로는 예수님 뒤를 따라 잘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보다는 제 것이 훨씬 가볍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벼움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진리이기에 그 길을 걸어갑니다. 때가 되면 십자가 무게도 늘겠지요.
그래서 참 행복합니다.
창조주이신 성부께서 은혜로이 보살펴 주시기를,
사랑이신 성자께서 함께 하시기를,
교회를 깨우치시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윤의병, 『은화』(상․하),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열심한 교우’는 윤의병 신부님이 쓴 소설 <은화>에 나오는 명사구로, 수차례의 군난(窘難) 속에서도 열심히 수계하고 때로는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천주교 신자들을 가리킨다. 마침 2024년도 청주교구 사목지침인 “신앙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어가는 교구공동체의 해”와 연관되고, 신앙의 숭고함을 지켜나간 그들의 신앙을 배우려는 의도에서 인용하였다.
2) <반야심경(般若心經)> 중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3) 염무웅, 「黃色紙 文明의 偶像化」, 『한국의 대중문화』, 나남, 1987. p.85.
“현실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제약하는 숙명적 불변이 아니라 참된 인간적 용기에 의해서 무한히 확장되기를 기다리는 창조적 가변이다”
4) <창세기> 2장 7절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5) 샹송 가수 조르주 무스타키(Georges Moustaki)의 노래 <Ma Solitude>에서 이 구절을 생각했다.
6)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최문규 옮김, 『그림자를 판 사나이-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 열림원, 2019.
‘그림자’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나는 그림자를 신앙(또는 양심, 종교, 하느님, 예수님 등)으로 여긴다. 상황에 따라서는 존재조차 희미해질 수 있지만, 삶의 궁극에는 꼭 필요한 것이 신앙이다. 그림자도 그렇다. 있다고 해서 눈에 띄는 도움은 없지만, 그마저도 없으면 사람(존재)이 아니다.
7) <마태오복음> 13장 8절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8) 먼저 신앙 생활을 하게 된 나는, 고향에서 근근히 살아가시는 부모님께 신앙생활을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시골집과 읍내를 오가며 교리공부를 하셨고,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는 교리선생님의 방문 교육으로 세례를 받으셨다. 23년 동안 병석에 누워계시던 어머니는 2021년 여름 소천하여 현재 강화군 갑곳리 성지성당에 봉안되어 계신다. 아버지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시며, 기도하고 전구를 청하신다.
9) 『중용(中庸)』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성실함은 하늘의 道요, 성실히 하려 함은 사람의 道이니, 성실함은 힘쓰지 않고도 (道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고도 바르게 되어 조용히 道에 맞으니, 聖人이요, 성실히 하려는 사람은 善을 택하여 굳게 잡는 자이다)”.
10) 판토하 지음/정민 옮김, <마음의 덕을 뽐냄을 경계함>, 『칠극』, 김영사, 2022, p.50.
“才德受而復歸天主 故能生成不毁 爾有才德 勿自恃 生虛喜而輕他人 須念非自我來 悉惟主惠”
첫댓글 일전에 청주교구 신앙체험수기 공모에 제출했던 글입니다. 입선하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버려두기가 아쉬워 여기에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