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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에게 주는 선물, 전도자세미나[2023. 10. 16], 임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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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특정 건축물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건물의 조감도(鳥瞰圖)와 설계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조감도는 건물 전체를 보여주고 설계도는 건물의 세부적인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 둘을 함께 보면 그 건물의 형태와 특징을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특정 건물을 이해하려면 먼저 건물의 용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 구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주거(住居)가 목적인 건축물이라면 방, 거실, 주방, 다용도실, 그리고 위생시설 등이 필수입니다. 창고(倉庫)로 사용할 건물이라면 “어떤 물건들을 저장할 것인가?”에 따라 구조와 시설, 크기가 달라집니다. 만약 예배당이라면 대중들이 한 곳에 모여 예배할 넓은 공간을 중심으로 교육시설과 특별용도실 그리고 위생시설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글 씀’에 있어서도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쓰느냐?”에 따라 글쓰기의 방법과 구조가 달라집니다. 이러한 특징은 성경의 기록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으므로 독자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살펴본다면 깊이 있고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특히 로마서는 이러한 구조가 분명합니다.
1. 로마서 한눈에 보기
그렇다면 로마서는 어떤 목적, 어떤 방식으로 쓰여졌을까요? 우선 <표 1>을 통해 로마서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로마서 5장의 내용과 목적, 그리고 위치를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표 1> | ||
장 | 핵심 내용(핵심 성구) | 구원의 시기 |
1 | 논지: 격려(12), 신앙교육(11), 선교(13-15), 죄인된 이방인들과(18-32) | 구원 받기 이전 |
2 | 죄인된 유대인들(17, 28-29),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정의롭게 심판하신다.(12-16) | |
3 |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다.(9-10, 23) | |
4 | 율법은 정죄하고(15), 믿음은 의로움을 준다.(3, 5, 9) | |
5 | 그리스도야말로 우리 믿음의 대상(對象)이시다.(1, 11, 17) | |
6 | 죄인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세례를 통해 이루어진다.(3-11) | 구원 받는 현재 |
7 | 구원 이후의 성도가 선과 악 사이에서 겪는 갈등은 성화의 과정이다.(15, 24) | 구원 받은 이후 |
8 | 성령께서는 성도들을 큰 은총으로 안내하고 보호하신다.(2, 26-27) | |
9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신앙의 원칙을 보여주셨다.(25-27) | |
10 | 의로움은 믿음으로(10),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긴다.(17) | |
11 | 믿음을 지켜 남은 자가 되어(4),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36) | |
12 | 성도는 항상 예배하는 자세로 생활하며 살아야 한다.(1-2) | |
13 | 가장 위대한 성경의 준법은 사랑에 있다(8), 그리고 그 때를 바라보라.(11) | |
14 | 성도의 거룩한 생활의 목표와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6-8) | |
15 | 선교와 봉사는 영적인 최고의 투자다.(20-24) | |
16 |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라.(16) | 구원 받은 사람들 |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은 “바울과 로마교회 상호 간의 격려와 친교, 선교와 협력, 그리고 신앙의 진수(眞髓)” 등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격려와 친교는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한 로마서 1장 12절에서 보듯이 바울과 로마교회가 서로 교제하고 격려하여 모두가 훌륭한 신앙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읽을 수 있는 ‘피차 안위’에 대한 헬라 단어 ‘쉼파라칼레오(συμπαρακαλέω)’는 ‘함께 격려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통해 본다면 바울은 로마교회를 통해서 얻고 싶은 것이 있었고, 로마교회 역시 바울로부터 특별한 무언가를 얻어 상호 간에 서로 힘이 될 거라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서로 ‘윈윈(win-win)’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 윈윈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당대 최고 도시에 있던 로마교회의 ‘선교후원’이 필요했고, 로마교회는 로마서를 통해 바울이 전해 주는 신앙의 진수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로마서를 통해 신앙의 교제와 선교협력의 당위성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2. 로마서 5장의 구조와 내용
이러한 전제에서 5장을 살펴보겠습니다. 5장은 크게 두 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문단인 5장 1-11절에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 후 얻는 신앙의 대가”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특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기록한 1절이 5장 첫 번째 문단의 논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문단은 5장 12-21절인데,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 온 경로와 의로움이 형성되는 경로”입니다. 즉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한 형벌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면, 의로워지는 경로는 고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은혜로 얻어짐을 설명합니다. 이렇게 문법상 평행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대구법(對句法)은 문장이나 연설에서 큰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고 말하면서 세상에 죄와 죽음이 어떻게 들어 왔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한 5장 17-19절을 보듯이, 죽음이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지은 죄를 통해 시작되었듯이, 의로움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은혜의 행동을 통하여 세상에 도래했다고 강조합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죽음과 의로움이 이 부분에서의 대구를 형성하여 우리에게 이해를 도와줍니다.
3. 5장 12절, 17-19절 해석의 논란
4세기 말 5세기 초의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는 로마서 5장 12절, 17-19절을 해석하며 ‘원죄론’을 제기하여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즉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그가 지은 죄는 자자손손 인류에게 전이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죄를 물려받고 태어났으므로 출생하자마자 죄인이 됩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당대의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Pelagius)’는 “인간은 태어나서 자기가 지은 죄로만 심판을 받는다”는 요지의 주장으로 원죄론에 반대하였습니다. 치열한 논쟁의 마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파가 펠라기우스 파를 정죄함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다수결이었을 뿐 진리가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이나 펠라기우스의 자범죄에 대한 이론에는 모두 한 가지 이상의 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죄론의 허점은 첫째, 이론을 명확하게 뒷받침할 성경 구절이 없으며, 둘째, 하나님을 정의롭지 못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타인이 지은 죄의 값을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 정죄받는 부조리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성경의 진리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인간의 공리(公理)에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에도 결정적인 허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도 의로워질 수 있다.”는 극단 윤리입니다. 이 주장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는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났고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인간 스스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비성경적인 논리를 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양측의 주장은 대를 이어 역사에 이어졌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칼뱅(John Calvin) 파에게 이어지고, 펠라기우스의 주장 대부분은 네덜란드의 신학자인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와 웨슬리 파, 그리고 환원운동가들로 이어져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원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어떠한지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성경에는 ‘원죄’라는 용어 자체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미 앞에서 말했던 로마서 5장 12, 17-19절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기록한 시편 51편 5절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만 이 구절들은 명확하게 원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개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로마서 5장 12, 17-19절은 아담이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렀듯이 모든 사람들도 죄를 지으면 동일한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형벌에 처해진다는 성경의 원칙을 그대로 소개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시편 51편 5절 역시 명확하게 원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죄가 가득한 세상에 아기는 순결하게 태어났는데 세상에 나와 후천적으로 오염되었기에 범죄의 과정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공리와 사회정의는 모세오경인 율법에도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한 신명기 24장 19절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과 신약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훗날 에스겔은 이 구절을 바탕으로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2-4) 고 말하면서 유다의 범죄를 고발하였습니다. 이 구절뿐 아니라 에스겔 18장 전체는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한편 팽팽하게 평행선을 그리는 이들의 강력 논쟁 이면에 있는 그들의 생애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는 주창자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마디로 ‘돌아온 탕자’ 같은 사람이었고, 경건이 몸에 밴 수도사의 아들로 태어나 본인도 죽는 날까지 수도사로 살았던 펠라기우스는 대표적인 ‘모태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짧지 않은 기간 방탕을 경험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서는 ‘원죄’가 하나님의 뜻같이 느껴졌을 것이고, 펠라기우스의 입장에서는 인간 스스로도 거룩해 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을 겁니다. 이처럼 그들의 주장에는 ‘자신들의 경험’이 크게 반영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의 주장을 할 때 신중해야 하는 대표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 나오는 말
로마서는 로마교회의 선교 협력을 모색하던 바울이 상호간의 ‘격려와 친교, 선교와 협력, 그리고 신앙의 진수(眞髓)’ 등 크게 세 가지를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에스파니아)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고 한 로마서 15장 23-24절에서 보듯이, 이미 서아시아와 유럽 동부의 주요 대도시에서 선교를 마친 바울은 유럽 서부에 있는 에스파니아 선교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든든한 경제력과 인맥을 구축한 로마교회의 적극 협력을 희망하며, 그들이 이 선교 프로젝트에 동참해야만 할 이유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로마서가 완성됩니다. 그러한 전제에서 5장은 바울이 전해야 할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인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평화”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침수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믿음의 대가인 상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받은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받아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은 “아름다운 발을 가진 전도자”(롬 10:15)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아름다운 발을 가진 그 주인공인 전도자”들입니다. 영광스럽고 감사하게 여기면서 끝까지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