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할머니의 기억
가문의 가족묘원이 조성되어 진주 남강변 망진산(望晉山)에 모셨던 할아버지, 할머니 묘를 한 달 전 이장하였다. 일꾼이 와서 무덤을 파보니 오래전에 가신 할아버지는 유골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길고 튼튼한 대퇴골과 정강이뼈 등이 나왔다. 무서울 것 같았지만 흙이 묻은 갈색의 유골을 보니 할머니를 다시 뵙는 것 같아 아주 반가웠다. 대퇴골의 길이를 보니 할머니는 다리가 길고 예쁘셨던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어릴 때의 기억은 할머니와 놀았던 기억이다. “할머니, 돈 한 푼 줘”하면 할머니는 항상 “일전고리도 없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뚜렷하다.
어릴 때 할머니 손을 잡고 다닌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진주의 도동(島洞 현 상평동)이라는 곳에 살았다. 마을의 남쪽에는 U자형으로 남강이 흐르고 북쪽은 외부와 유일하게 연결된 모래밭인데 비가 많이 오면 북쪽의 모래밭으로 강물이 흘러 졸지에 섬이 된다고 ‘도동’이라고 불렀다.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선생님이 종을 치고 마을이 섬으로 변하기 전에 학생들을 모두 귀가시켰다고 한다.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길고 긴 모래밭을 지나 뒤벼리 절벽 아래를 걸어 진주읍내에 가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너무 환해져 할머니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리셨다. 내가 온 길을 기억하여 할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린시티에서 개업을 20년 하였는데 하루는 무속인이 들어오더니 “어허, 이집은 (원장의) 할머니가 보호를 해주시는구나”하는 것이다.
아내가 만난 점쟁이도 나의 할머니가 우리 가정을 보호해 주시고 자녀들까지 능력 이상으로 키워주신다는 말을 들었다. 가끔 할머니가 잠들어 있는 망진산의 밤나무가 울창한 숲속을 찾아가 할머니를 만나고 대화를 한다.
숙부님의 전기(傳記)에서 할머니 부분을 인용한다.
<1889년생인 할머니는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지만 일찍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한자를 습득하고 성격도 밝아 마을의 남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10살이 지날 무렵부터 곳곳에서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15살 때 양반 가계인 할아버지와 결혼하셨다. 할아버지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서당에 못 가고 농사일만 전념하여 무학(無學)이었다. 할머니는 상대가 양반의 아들로 무학이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중매인에게 들은 그대로 만나보니 미남자라 호감을 갖고 부모가 시키는 대로 결혼을 승낙했다. 마을에서 벌어진 결혼피로연은 화려했고 마을사람들에게서 선망과 축복을 받았다. 결혼 후 남편의 문맹(文盲)을 알고는 큰 쇼크를 받았다. 남편의 무지로 인해 보증을 섰다가 집과 논밭을 모두 잃어버리자 할머니는 아무리 빈곤해도 자식들에게는 반드시 학문을 익히게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소학교(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지만 가정형편상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 하게 되자 15살에 홀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많은 십 대 청소년들이 꿈을 가지고 선진국 일본으로 공부하러, 일하러 떠나던 시절이었다. 할머니가 자랑스럽고 존경함과 감사함을 늘 간직하고 있다.
이장을 하며 문중에서 일괄적으로 비석을 세웠는데 묘비에 ‘밀양박씨’만 적어 섭섭했다. 왜 할머니의 이름을 적지 않는 것인가 항의를 하니 수백 년간 묘비에 여성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는 전통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자녀 이름에도 여성을 적어야 하고 묘비에 여성의 이름을 적어야 하겠다.
새로운 터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면서 친척들과 가족들 앞에서 편지를 읽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할머니, 저희 집안을 보살펴주시고 온갖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성격과 치열하고 끈질긴 기질까지 물려주셔서 저희들은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할머니 품에 다시 안길 날을 고대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