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4년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피사에서 태어났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처음에는 갈릴레이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1581년에 피사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수학에 더 큰 흥미를 가졌다. 1583년에는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여 맥박계에 응용하였다. 1585년에 피사대학을 중퇴한 뒤, 피렌체에서 수학 연구를 계속했다. 1589년에 피사대학의 수학 강사가 되었으며, 후에 베네치아공화국(북이탈리아)의 파도바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 동안 축성술, 기계공작기술상의 여러 문제를 연구하다가 동력학의 연구로 진출하였는데, 그 유명한 관성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1609년에는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해서 그 배율을 높여, 천체 관측에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관측으로 달의 표면에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 금성이 달처럼 차고 이지러진다는 것, 태양에 흑점이 있어 태양면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것, 희미한 은하수가 실은 많은 별들의 집단이라는 것, 목성 주의에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목성의 위성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그의 친구였던 독일 천문학자 케플러에게 써 보냈다.
1610년에는 피렌체 공국 코시모 2세의 초청을 받아 궁정 소속의 수학자가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지동설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결과 16l6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이 학설이 금지되어 갈릴레이의 활동은 중지되었다. 그 후 갈릴레이는, 그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던 오르바누스 8세가 교황에 즉위하게 되자, 다시 새 학설을 담은 책을 낼 것을 결심하고, 출판의 허가를 얻기 위해 직접 로마에 갔다. 그는 교황청 도서 검열계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가설로서만 서술한다면 출판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수년 동안 집필한 것을 천문대화라는 제목으로 1632년에 출판하였다. 그런데 이 저서에는 표면상 천동설을 지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지동설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천동설이 옳다는 자백을 하였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이 재판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70세나 되는 고령이었다. 그는 종신 금고형을 선언받고 나머지 생애는 엄중한 감시하에 피렌체 교외의 자택에서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이 근신 중에 갈릴레이는 '신과학 대화'를 써서 출판이 자유로웠던 네덜란드에서 1638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 해 갈릴레이는 장기간의 무리한 망원경 관측이 원인이 되어 실명하고 말았다. 그리고, 쓸쓸한 말년에 '진공의 연구'로 유명한 제자 토리첼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1642년 세상을 떠났다. 이 해에 뉴튼이 태어났다. 갈릴레이가 죽은 후 교황청에서는 공식적으로 장례를 지내는 것도, 묘비를 세우는 것도 금지하였다.
1992년 10월 31일 로마교황청은 10여년 동안 특별재심과학위원회에서 1633년 6월 22일의 종교재판에 대해 다시 검토한 결과 과오를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갈릴레이의 완전복권을 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