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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백장암~부운마을)
▣ 일 시 : 2023년 1월 23일(월)~1월 24일(화)
▣ 코 스 : 백장암-매동마을-람천교-소동폭포-도탄-내령-흑담-황계폭포-부운마을
▣ 인 원 : 4명
▣ 날 씨 : 첫날 저녁(-10도), 다음날(-14도)
1611년 3월 28일 유몽인은 남원 관아를 출발하여 진사 김화의 재간당(남원 산동면 목동리)에서 하룻밤을 묵고 지리산 유람에 나선다. 일행은 승주(순천) 부사 유영순과 재간당 진사 김화, 생질 신상연과 신제, 운봉 현감 이복생 등 6명이다. 29일 아침 재간당을 출발하여 번암→황산비전→혈암을 거쳐 운봉 역참에서 운봉 현감 이복생이 합류한다. 29일 밤 백장사에 투숙한다. 남원 관아(현 용성초교)에서 백장암까지는 이미 서너 차례 답사를 하였다. 백장암 들머리(구룡호텔)와 날머리(매동마을), 부운 마을에서 환희령(화느재)까지 미답 구간이다. 백장암에서 매동 마을까지 왕복을 하고, 차량으로 소동폭포와 내령마을 도탄, 흑담과 황계폭포를 연결하였다.
다음날 아침 기온이 영하 14도인데도 꾸역꾸역 부운 마을로 향했다. 간밤에 눈이 살짝 내려서 하부운 마을에 주차를 하고 도보로 올라갔다. 마침 부운마을 계곡가든펜션 공한수 님을 만나 '화느재'를 다시 확인하였다. 환희령 초입은 부운 마을 식수 물탱크 직전이 진입 지점이다. 계곡을 건너다가 등산화가 물에 빠져서 마을 터와 길의 흔적을 확인하고 부득이 후퇴를 하였다. 답사를 마치고 복기를 하면서 흑담에 있는 7언절구 28자 중 26자를 판독하였다. '소동폭포(蘇東瀑㳍)'와 '박상호(朴相湖), 박상래(朴翔來), 박동한(朴東漢), 김창순(金昌珣) 原 觴詠所' 명문의 '壬戌 七月'은 소동파의 「전적벽부」 첫 문구인 '壬戌之秋 七月'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임술(1922)년 7월 박상호, 박상래, 박동한, 김창순이 의은정을 짓고 술잔을 나누고 시를 읊으며 소동폭포라고 이름하고 석각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 백장암(百丈庵)의 연혁과 문화재
전북 남원시 산내면 수청산 중턱에 위치하는 백장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인 실상사의 부속 암자이다. 실상사 연혁을 보면 실상사는 신라 말에 지금의 백장암 터에 홍국사(770-840년 경 생존추정)가 828년(흥덕왕 3년) 창건하였는데, 규모가 커지자 제자인 수철화상(秀澈和尙 817-893년)에 의해서 지금의 실상사 자리로 옮겨갔다고 전해진다.
실상사는 구산선문 중 최초이자 으뜸 사찰로 발전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백장암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선종을 개창한 역사와 관련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라 하겠다.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백장암 3층 석탑(국보 제10호)과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의 제작 연대로 보아 사찰의 건립시기는 적어도 9세기(신라 말)로 추정된다.
백장암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신 증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530)』, 『난중잡록』, 『동국여지지(1656)』 등이다. 이에 따르면, "백장사 재수청산 격계남대지리산 [百丈寺在水淸山 隔溪南對智異山] 『東國輿地志(1656, 유형원)』" 등 대부분의 문헌에서 백장사(百丈寺)로 기록돼 있어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규모가 꽤 큰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상사가 1468년(세조 14년) 화재로 폐허가 되다시피 하여 약 200년가량 승려들이 백장사에 머물렀을 정도로 백장암은 선종사찰이 이어왔다. 불행히도 1679년(숙종 5년) 화재로 백장사가 소실되자 다시 사찰을 건립하기로 논의하였는데, 협소한 백장사 터보다 넓은 옛 실상사 터에 절을 짓기로 중론을 모았다. 1680년(숙종 6년) 실상사를 중창한 후로 백장암은 부속암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스님들이 백장선원에서 옛 가풍을 일신하고자 올곧게 정진하고 있다. <백장암 안내판>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백장사
○ 3월 29일 <중략> 북쪽으로부터 산세는 점점 높아지고 길은 점점 험난해져, 말이 끄는 수레에서 남여(藍輿)로 바꾸어 타고 백장사(百丈寺)로 들어갔다. 순지(순천 부사)는 숙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먼저 불전(佛殿)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코를 고는 소리가 우레처럼 들렸다. 어린아이가 꽃 두 송이를 꺾어 가지고 왔다. 하나는 불등화(佛燈花)라고 하는 꽃인데 연꽃만큼 크고 모란꽃처럼 붉었다. 그 나무는 두어 길이는 됨직하게 높았다. 다른 하나는 춘백화(春栢花)였는데 붉은 꽃받침은 산에서 나는 찻잎처럼 생겼고 크기는 손바닥만 하였다. 병풍과 족자에서 본 것과 같았다. 절의 위쪽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천왕봉을 바로 마주 보고 있어 두류산의 참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박상호(朴相湖)는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의 아들로 매동에 살았다. 박상래(朴翔來, 1883~?)는 산내면 삼화실(三化洞), 박동한(朴東漢, 1875~?)은 산내면 묘동(猫洞)에 살았던 인물이다. '壬戌 七月'은 소동파의 「前赤壁賦」에 나오는 첫 문구로 소동폭포의 이름과 유관한 듯하다. 이곳에 의은정(疑銀亭)이 있었다고 한다. 운성지 속편에 의은정(疑銀亭)의 원운(原韻)과 기문(記文)이 『운성지』 구지(舊誌)에 실려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했다. 지금은 의은대(疑銀臺) 석각만이 남아 있다. 임술년은 1922년으로 추정한다.
注 1. 박상호(朴相湖) : 호 율포(栗圃), 본관 밀양. 매동에 살았음. 『운성지』 속편에 따르면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1825-1907)의 차남. 1870년 父 매천(梅川)이 지은 퇴수정(退修亭) 옆에 1922년 관선재(觀善齋)를 지어 유림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음. 삼서(三嶼)에 밤나무 수백 그루를 심어놓고 ‘율포(栗圃)’ 두 글자를 석벽에 새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율포’라 하였음. 박상래(朴翔來, 1883~?) : 본관 밀양, 호 삼은(三隱) 박동한(朴東漢, 1875~?) : 본관 밀양, 호 연포(蓮浦), 통덕랑, 父 박상철(朴相喆, 義府都事 行泰川郡守), 매천(梅川) 박치기(朴致箕)의 손자,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槫)의 11世孫.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조선신사보감, 신사 494> 2. 壬戌之秋 七月既望 蘇子與客泛舟 遊於赤壁之下 [임술년 가을 7월 기망(기望)에 나(蘇子)는 손(客, 양세창)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에서 노닐새...] 「前赤壁賦」 3. 오연교 님의 남도 정자 기행 : 율포(栗圃) 박상호(朴相湖), 통덕랑 연포(蓮浦) 박동한(朴東漢), 삼은(三隱) 박상래(朴翔來), 춘강(春崗) 김창순(金昌珣) 등이 정자(의은정)를 짓고 자연을 벗삼아 시를 읊으며 교유했던 장소였다. 1935년에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그들의 시문이 전하고 있어 이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매일 : 南道 정자기행(4380)-남원 의은정(疑銀亭)
산내에서 뱀사골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영대(靈臺 : 산신령 바위) 앞 만수천 계곡가의 외진 곳에 도탄 변사정 선생 관련 석각이 있다. 桃灘邊先生遺䑓(도탄변사정선생유대)의 석각은 도탄 변사정의 제자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산 둘레길 안내판에 쓰여있는 영대(靈臺)와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영대촌(嬴代村)과 한자가 일치하지 않는다. 내령 마을은 도탄(桃灘) 변사정이 도탄정사(桃灘精舍)를 짓고 은거한 곳이다. 유몽인은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 들어온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영대촌(嬴代村)으로 이해한 듯하다.
注 1. 변사정 (邊士貞, 1529~1596) : 조선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ㆍ의병장. 본관은 장연(長淵).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옥계 盧禛(1518~1578)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원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움. 본관은 장연(長淵), 자는 중간(仲幹), 호는 도탄(桃灘). 참판(參判)을 지낸 수정(水亭) 변처후(邊處厚)의 5 세손이며, 생원(生員) 변호(邊灝)의 아들로 1529년(중종 24)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남원의 운봉(雲峰)의 뱀사골 도탄에 桃灘精舍(도탄정사)를 짓고 은거하여 도탄(桃灘) 선생이라 칭하였다. 2. 영대촌(嬴代村) : 진(晉)나라 때 무릉(武陵)의 어부가 복사꽃이 흘러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을 만났다는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관련지어 말한 것이다. 영(嬴)은 진(秦)나라의 성씨이다. 3. 遊頭流山百韻 : 마을 이름이 영대이니 진나라 유민임을 알겠네.[村名嬴代認逃秦] 「於于集後集卷之二 詩 頭流錄」
■ 靈臺(영대)의 어원과 유래
유교 경전 가운데 『시경』과 『맹자』에 '靈臺(영대)'가 나온다. 주문왕이 만든 대인데, 원문에 "經始靈臺 經之營之(영대를 지으려고 헤아리기 시작해서, 그것을 헤아려 보고 그것의 위치를 정하니)"라. 그 주석에 "靈은 별안간 만들어져 마치 신령이 만든 것 같음을 이르는 말이다. [謂之靈者 言其焂然而成 如神靈之所爲也]"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는 유교 사회여서 '영대'란 이름은 아무래도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靈臺(영대) 이름을 지은 것은 도탄 변사정 선생으로 '도탄 변 선생이 이름을 남긴 靈臺(영대)'라고 이해가 된다.
대개 사람들은 이 석각을 '도탄변선생유기'로 읽고 있다. 오류의 근원은 향토지(운성지에서 찾지 못했음)를 근거로 농어민신문에 보도되었고, 온라인에 그대로 분별 없이 소개되어 널리 퍼진 듯하다. 허나 조금 다르게 읽은들 어떠랴. 계곡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영대의 모습은 신령스럽기만 하다.
▶ 1611년 유목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영대촌과 흑담
○ 4월 1일 <중략> 골짜기에 두세 집이 있는데 영대촌(嬴代村)이라 하였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마을로, 깊은 골짜기와 많은 봉우리들 사이에 있었다. 참으로 하나의 무릉도원이었다. 이 마을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구나. 한 곳에 이르니 높은 언덕에 가파른 협곡이 나타났다. 양쪽 언덕으로 길을 내놓았는데 협곡이 매우 깊었다. 그 협곡 안은 모두 바위다. 시냇가에도 큰 바위가 수없이 널려 있었다. 이곳의 이름을 흑담(黑潭)이라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세상에 단청(丹靑)의 그림을 좋아하여 자신의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 화려하게 꾸며놓은 사람이 있었다네. 지금 이곳을 보니, 돌이 희면 이끼가 어찌 그리 푸르며 물이 푸르면 꽃이 어찌 그리도 붉은가? 조물주도 한껏 화려함을 뽐냈으니 그 화려함을 누리는 자는 산신령인가?” 라고 하였다.이에 녹복(祿福)은 비파를 타게 하고, 생이(生伊)는 젓대로, 종수(從壽)와 청구(靑丘)는 태평소(太平蕭)로 산유화(山有花)의 곡을 불게 하였다. 음악이 산골짜기에 울려 메아리치고, 시냇물 소리와 서로 어우러지니 즐거워할 만하였다. 어린아이에게 통을 열어 먹과 붓을 준비하게 하고, 암석 위에서 시를 지었다. <한국문화콘텐츠닷컴>
注 1. 영대촌(嬴代村) : 내령 마을은 도탄(桃灘) 변사정이 도탄정사(桃灘精舍)를 짓고 은거한 곳이다. 유몽인은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 들어온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이해한 듯하다. 2. 흑담(黑潭) : 중국 장안(長安)의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있는 못. 물이 깊고 거뭇하여 예로부터 비가 오기를 비는 곳이었다. 수월대를 흑담으로 추정한다.
▼ 於于集卷之二 / 詩 頭流錄
黑潭(흑담) 二首
千峯齊聳鬱嵯峩 : 천 봉우리 일제히 솟아 장대하게 우뚝하고
億丈高柟碍日華 : 수억 길의 높은 녹나무가 햇빛을 가렸구나
碧澗誰令漫白石 : 푸른 시내엔 누가 백석을 널어놓게 했는지
蒼苔仍復藉紅花 : 푸른 이끼 깔린 곳에 붉은 꽃이 낭자하네
如拳肥蕨猶堪豆 : 주먹만큼 살찐 고사리 접시에 올릴 만하니
通印文魚且莫叉 : 도장 찍은 듯한 문양의 물고기 잡지 말게
鐵笛一聲山竹裂 : 쇠 피리 한 곡조에 산죽이 찢어질 듯하고
諸天仙侶舞傞傞 : 하늘의 신선들 너울너울 춤을 추는 듯하네
吾股酸哀吾脰勞 : 내 다리 저리고 시리며 목덜미도 뻐근하고
眼和心地共蕭騷 : 눈과 마음 모두 쓸쓸하여 처량하기만 하네
高江霆闘群巒殷 : 높은 강물 요란하고 뭇 봉우리는 성대하며
珍木陰繁萬吹嘷 : 진귀한 나무 무성하여 온갖 소리 들려오네
此日恣探眞佛界 : 오늘 참된 부처의 세계를 마음껏 둘러보니
一生虛惱軟塵囂 : 일생의 허튼 번뇌 작은 티끌처럼 소란하네
雲衣霞餐從此足 : 구름옷 입고 노을 먹으면 그로써 족하리니
誓解銀章券外抛 : 맹세코 수령 인장 풀어 문서 밖으로 던지리
출처 :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시(최석기, 강정화)
次養竹原韵
養竹 원운에 차운하다.
十里長江一石坮 : 십리의 긴 만수천이 흐르는 한 石坮에
丹崖碧沼爲離開 : 붉은 절벽 푸른 소는 속세를 벗어났네
天藏地秘千秋下 : 하늘과 땅이 감추고 숨겨서 천년 후에
水月主人子坮來 : 수월대의 주인 그대가 대에 온 것이네
樵岡
注 養竹 : 백거이(白居易)의 양죽기(養竹記)에 “대는 현자와 비슷하니, 어째서인가? 대의 뿌리는 단단하니 단단함으로써 덕을 세우는 것이요. 대의 성질은 바르니 바름으로써 몸을 세우는 것이요. 대의 속은 텅 비었으니 텅 빈 마음으로써 도를 체득하는 것이요. 대의 절개는 곧으니 곧음으로써 뜻을 세우는 것이다.〔竹似賢 何哉 竹本固 固以樹德 竹性直 直以立身 竹心空 空以體道 竹節貞 貞以立志〕”라고 하였다. 離開 : 떨어지다. 벗어나다. 이탈하다. 天藏地秘 :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다. 이곳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깊이 파묻히다. 養竹과 離開는 판독이 정확하지 않음. 樵岡 : 산내면 중황리에 살았던 인물. 만수천에 초강천석(樵岡泉石) 석각이 있음.
초강천석(樵岡泉石) : 천석(泉石)은 침석수천(枕石漱泉) : ‘돌을 베개 삼고 샘물로 양치질한다.’라는 뜻으로 ‘초강(樵岡)이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간다.’라는 의미인 듯하다.
▶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환희령(歡喜嶺)과 내원(內院)
○ 4월 1일 <중략> 황계 폭포(黃溪瀑布)를 지나 환희령(歡喜嶺)을 넘어 이어진 30리 길이 모두 푸른 노송나무와 단풍나무였으며, 비단 같은 날개를 가진 새들이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다녔다. 내원(內院)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수를 놓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였다. 소나무 주변의 단(壇)은 숫돌처럼 평평하였고, 금빛과 푸른빛의 단청이 숲 속 골짜기에 비추었다. 또 천 번이나 두드려 만든 종이에 누런 기름을 먹여 겹겹이 바른 장판은 마치 노란 유리를 깔아놓은 듯, 한 점 티끌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허연 늙은 선사(禪師)가 승복을 입고 앉아 불경을 펴놓고 있었다. 그의 생애가 맑고 깨끗하리라 여겨졌다. 이에 머무는 대신 시를 지어놓고 떠났다.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환희령(歡喜嶺)으로 기록하고 있다.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을 환희령(歡喜嶺)이라고 한다. [聽鍾之地曰歡喜嶺也] 부운마을 토박이인 계곡가든 펜션(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길 49) 공한수 님은 '화느재'라고 하였다. 이 고개가 부운 마을에서 반선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길은 흐릿하지만 톱질한 풍도목이 길을 안내한다. 오래된 감나무와 낙엽송 군락은 이곳이 화전민들이 살았던 터임을 말해준다. 만수천을 따라 평탄한 길을 가지 않고 환희령을 넘은 것이 의문이다. 지대가 높아질수록 기온이 급강하하고, 계곡 물에 빠진 발끝이 점점 아려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능선을 코 앞에 두고 미련을 두고 돌아섰다. 끝.
注 1.환희령(歡喜嶺) : 故見獐之地曰獐項 聽鍾之地曰歡喜嶺也 : 그러므로 노루를 본 곳을 장항(獐項)이라고 하고, 종소리를 들은 곳을 환희령(歡喜嶺)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2. 내원암(內院) :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있으며 동서의 시냇물이 합류한 위에 있다. 그윽하고 깊으며 맑아서 사람들은 지리산 제일의 명찰이라고 한다. 시승 처능의 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목줄기 뒷봉우리 석양빛이 밝고 골짜기 바람은 살포시 구름을 흩는다.' 『운성지』 구지(舊誌) 상권(乾) 8권 사찰
첫댓글 인문산행은 여전히 진행중이네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런 문구가 있네요.
"故見獐之地曰獐項 聽鍾之地曰歡喜嶺也 : 그러므로 노루를 본 곳을 장항(獐項)이라고 하고, 종소리를 들은 곳을 환희령(歡喜嶺)이라고 하였다."
『운성지』 구지(舊誌)에
"내원암(內院庵):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있으며 동서의 시냇물이 합류한 위에 있다."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나오는 내원(內院)도 내원암에서 유래된 반선(伴仙)의 옛 지명입니다.
"내원암(內院庵)에 이르니 두 줄기 시냇물이 합쳐지고, 꽃과 나무가 산을 이룬 곳에 절이 세워져 있었다."
새로운 사실들이 보강되어 더욱 풍성한 인문산행이 되어갑니다
손톱으로 바위를 뜯고 있습니다.ㅎ
환희령처럼 모르는 것을 알았을 때의 느낌은 새롭습니다.
도솔님의 지리역사 (탐구) 인문산행은 늘 새로움을 주는것 같습니다 이또한 지리매력에 빠지는것 같습니다
늘 좋은정보 감사 합니다
내원암의 종소리가 들리는 곳이 환희령입니다.
반선교 건너서 탐방지원센터를 내원암으로 추정합니다.
산불경방기간에 유몽인길 함께 하시면 어떨지요.
@도솔산인
예ㅡ 좋습니다
술도 한잔 나누고 ㅡ환영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