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집(勉菴集) 최익현(崔益鉉)생년1833년(순조 33)몰년1906년(고종 43)자찬겸(贊謙)호면암(勉菴)본관경주(慶州)소자기남(奇男)특기사항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학자이자 의병장
勉菴先生文集卷之十九 / 序 / 寧海朴氏派譜序
天生烝民。各有其類。氏以類聚。族以惇叙。不可亂也。故周官小司之職。有奠世系。辨昭穆之法。司馬之屬掌公族睦友之政。是致化行俗美。人各親其親。長其長。而固無待於譜也。降自叔季。敎弛俗頹。世之寖遠。則或不知吾身之爲某祖出也。族之愈疎。則便不識某人之爲某派分也。然而無譜則滔滔一世。盡歸昧昧。得於天而根於心者。梏喪太盡。尙何望惇叙之盡其道也。老泉蘓氏。伊川程子。有見於此。或曰孝悌之心。油然而生。或曰明譜系收世族。管攝天下人心者。良有以哉。我東氏姓。植根固而發源長。碩大繁衍。莫如朴氏。而就中寧海氏。尤有別焉。盖其先世忠烈公。當夷陋未革之際。委身命於豺虎犬羊之中。而判大義於談笑從容之間者。如彼其磊落光明。夫人金氏之哭望東溟。節死鵄嶺。又如彼其無所爲而爲。則實以基東方節義之倡。而樹人紀於無窮者。不可誣矣。傳至莊光之際。又有如遯叟,逋臣,濯纓,雲窩六七公者。與金東峰曺靜齋攜手幷肩。翛然遠引於千山萬水之中。而沒身無悔者。殆求之往牒而鮮見其儔。則桂林無別枝。玉山多層峯者。又實境語也。噫。它人之譜。譜其族而已。名義相將。寧海氏之所獨也。詎不偉歟。濯纓后孫憲植。以其派譜之將入梓也。丐余一言以相役。竊惟譜中䂓例。自有一門公議。無容架疊。至若名義二字之有關世敎。則無傷乎重言復言。而寓秉彜之同情。遂書此以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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勉菴先生文集卷之二十四 / 告祝 / 金化九隱祠遺墟。設壇告由文。純祖戊寅。建祠享金東峯時習。配曺靜齋尙治,朴遯叟渡,朴坰隱濟,朴濯纓齋奎孫,朴雲窩孝孫,朴司直千孫,朴正郞璘孫,朴逋臣季孫。今上戊辰毁撤。
猗歟先生。海東伯夷。存髥淸標。考槃于玆。
時惟靜翁。朴門七贒。惠好同歸。所立卓然。聖山峨峨。如拱越中。汶水湯湯。冷浦與通。莊陵純臣。生死齊名。子䂓賡章。唱酬同聲。高風峻節。百世不忘。疇昔崇報。共享一堂。中間見撤。氣數攸關。蔓草荒原。過者涕潸。於焉卅載。復院無望。况値叔季。禮義都喪。多士彷徨。倍切瞻仰。爰謀私享。畿湖是倣。經始設壇。役旣告成。一壑增彩。九位肅淸。籩豆菲薦。爲歲定式。儀雖草卛。寸誠靡忒。伏惟英靈。儼臨千秋。敬奠一杯。敢告厥由。以靜齋曺先生,遯叟朴先生,坰隱朴先生,濯纓齋朴先生,雲窩朴先生,司直朴先生,正郞朴先生,逋臣朴先生配。
[주-D001] 季 : 저본에는 '秀'로 되어 있으나, 《性潭集》 卷26 〈逋臣朴公墓表追記〉, 《老洲集》 卷20 〈兵曹判書朴公謚狀〉 등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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勉菴先生文集卷之二十三 / 跋 / 跋濯纓齋遺稿
夫策名委質以事人者。不幸値艱險危疑之際。則處之當如何。吾夫子嘗曰。志士仁人。無求生以害仁。有殺身以成仁。而至穪伯玉之贒。則又曰。邦有道則仕。邦無道則可卷而懷之。是其可死則死。可去則去。俱在聖人所許而不可差殊看也。寧海朴氏濯纓齋諱奎孫。以前任禮賓卿。當世祖朝。卛土含生。擧慶堯舜之理。而乃與金東峯,曺靜齋兩先生。曁其同堂若 遯叟以下五六諸公。飄然遠引。同歸于花江之草幕洞。賡子䂓之詞。效採薇之節。徜徉棲息三十餘年。每晨夕。必東向瞻拜。淚濕衣裾。遭艱執喪盡禮。後公之昆季諸從。或東或西。皆求深僻地爲隱。公獨不去曰。此卽吾父母之鄕也。丘墓在邇。不忍遠去。幕谷孤月。杏亭春風。㪺彼淸泉。可以濯吾纓而止也。噫。公之忠孝大節。於斯備矣。夫人以眇然之身。與天地並立而爲三者。以其有仁義也。仁莫大於父子。義莫重於君臣。而公之樹立。無慊於君臣父子之大倫。則所謂扶持宇宙之棟樑。奠安生民之柱石者。公實庶幾焉。求忠臣必於孝子之門。益可驗也。而其視成,朴諸公之致命。亦何欿然乎哉。又於一門之內。曰叔。曰侄。曰兄。曰弟。同其心迹。名節並耀。則其世類所係。不可誣矣。觀於此稿者。勿以寂寥而忽之。考世易地而師法。其秉心處義。則其於艱險危疑。未必無得力之一助云爾。
면암선생문집 제23권 / 발(跋) / 《탁영재유고(濯纓齋遺稿)》 발
이름을 신적(臣籍)에 올리고 예물을 임금께 바쳐 신하가 된 사람은 불행히 국가가 위험한 시기를 당하게 되면 어떻게 처신해야 되겠는가? 우리 부자(夫子 공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삶을 구하기 위해 인(仁)을 해치지 아니하고 몸을 희생하여 인을 완성한다.”
하였고, 또 거백옥(蘧伯玉)의 어짊을 칭찬하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물러 나와 간직한다.”
하였다. 이는 죽을 경우를 당하면 죽고, 물러가야 할 경우를 당하면 물러가야 하는 것으로써 다 성인이 허여한 바이므로 다르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영해 박씨(寧海朴氏)에 탁영재(濯纓齋) 휘 규손(奎孫)이란 분은 전임 예빈 경(禮賓卿)이었다. 세조조에 온 천하 백성들은 요순의 정치를 경축하였지만, 그는 마침내 김동봉(金東峯 김시습(金時習))ㆍ조정재(曺靜齋 조상치(曺尙治)) 두 선생 및 돈수공(遯叟公) 이하 5, 6인의 동족과 표연히 멀리 가서 화강(花江)의 초막동(草幕洞)에 자리 잡고는 자규사(子規詞)를 화답하고 채미절(採薇節)을 본받아 숨어 산 것이 30여 년이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동향하여 첨배(瞻拜)하였는데 눈물이 옷깃을 적셨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다.
그후 공의 형제와 사촌들은 혹은 동으로 혹은 서로 모두 궁벽한 곳을 찾아서 은둔하였으나 공만을 떠나지 않고 말하기를,
“이곳은 우리 부모의 고향이다. 산소가 가까이 있는데 차마 버리고 멀리 가겠는가. 막곡(幕谷)의 외로운 달과 행정(杏亭)의 봄바람에 저 맑은 샘물을 떠서 나의 갓끈이나 씻을 뿐이다.”
하였다. 아, 공의 충효 대절은 여기에서 갖추어졌다 하겠다.
사람이 자그마한 몸으로 천지와 아울러 삼재(三才)가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仁義)가 있어서이다. 인은 부자(父子)보다 큰 것이 없으며 의는 군신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공의 수립한 바는 군신 부자의 대륜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른바 ‘우주를 부지하는 동량(棟樑)이요, 생민을 편안히 살게 하는 주석(柱石)이다.’란 말이 공과 가깝다 하겠으며,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라.’는 말이 더욱 징험이 된다. 저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제공의 목숨을 바친 일과 비교하여도 역시 무슨 손색이 있겠는가. 또 한 가문 안에서 숙질 형제가 같은 마음을 가져서 그 명망과 절개가 함께 빛났으니, 그 가문의 친족 관계가 좋았음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유고를 보는 사람은 그 소문이 고요했다 해서 소홀하게 여기지 말고, 그 시대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여 그가 잡은 마음과 처한 의리를 본받게 되면, 위태한 세상을 사는 데 꼭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주-D001] 자규사(子規詞) : 단종(端宗)이 자신의 신세를 자규(두견새)에 비유하여 읊은 시. 단종이 재위 3년 만에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선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사육신(死六臣)이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주륙되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寧越)로 유배되었다. 자규사는 그때 지은 칠언 율시(七言律詩)로 매우 애절하다. 《箕雅集》[주-D002] 채미절(採薇節) :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절개.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정복하자, 백이ㆍ숙제는 주 나라의 곡식을 의리상 먹을 수 없다 하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도련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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濯纓先生文集續上 / 詞 / 次曹靜齋 尙治 子規詞 金東峯時習,朴遯叟渡和之。東峯爲余誦傳。因次其韻。◇庚戌
子規啼子規啼。永夜窮山空自訴。不如歸不如歸。蜀嶺連天那可度。花枝染着色殷紅。萬事傷心心血吐。啾啾百鳥共爭春。爾獨哀呼頻四顧。已而參橫月落聲轉悲。懷佳人兮目渺渺氣激激。孤臣寡婦哭無數。
原韻
子規啼子規啼。夜月空山何所訴。不如歸不如歸。望裏巴岑飛欲度。看他衆鳥摠安巢。獨向花枝血謾吐。形單影孤貌憔悴。不肯尊崇誰爾顧。嗚呼人間冤恨豈獨爾。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屈指難盡數。
附[和韻]
子規啼子規啼。月落天空聲似訴。不如歸不如歸。西望峨嵋胡不度。懸樹苦啼呼謝豹。點點花枝哀血吐。落羽蕭蕭無處歸。衆鳥不尊天不顧。故向中宵幽咽激不平。空使孤臣寂寞窮山殘更數。金時習
附[和韻]
子規啼子規啼。咽咽凄凄若有訴。不如歸不如歸。欲歸巴峽不能度。山空月落夜何其。灑血花間哀冤吐。跳枝竄葉聲聲苦。不西不東但北顧。悲來乎使人聽此淚不禁。楚魂嗚冬靑樹。一般恨千古數。朴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