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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25 / 하나님의 사랑으로 (로마서 8:26-39)
일전에, 최근에 상영 된 사도 바울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이전에 나왔던 영화들이 주로 바울이라는 인물의 일대기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이번 영화는 사도행전을 근간으로 하여 누가의 시각으로 본 로마교회에서의 박해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목이 사도 바울이지 내용상으로는 누가가 주인공인 듯한 인상을 주는, 짧지만 꽤 임펙트 있는 영화였습니다.
사도 바울! 그는 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의 인생은 크게 둘로 나뉘어집니다. 예수 믿기 전과 후가 그것입니다.
믿기 전의 삶을 ‘율법’ 곧 율법에 얽매인 삶이라 한다면, 믿은 후의 삶은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 받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무엇으로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이 달라집니다.
은혜를 거부하고 무시하는 불신자는 차치하고라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 중에도 은혜를 율법으로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랑으로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행위의 기준을 소위 ‘법대로’하려 하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려 합니다.
각설하고. 여러분은 혹시 '시험의 목적'이 무언지 알고 계십니까?
인생에는 많은 시험들이 있습니다. 입학시험, 취직 시험, 면접 시험이나 면허시험처럼, 너 나 없이 우린 살면서 많은 시험들을 치러왔습니다.
그런데 세상 시험의 주 목적이 떨어뜨리는 데 있다는 사실은 아마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시험의 목적은 떨어뜨리는 데 있습니다. 목적이 그러하다 보니 시험 문제를 내도 꼭 떨어뜨리기 위한 문제들만 골라서 냅니다.
‘떨어뜨리는 것!’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구원 받음에 있어 율법은 구원 받지 못할 부자격자를 골라내기 위한 기능으로만 작용합니다.
로마서 3:20을 보세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 즉 이 말은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는 허물 많은 죄인이구나!’ ‘내가 은혜 받지 못하는 이유가 나의 죄 때문이구나!’를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답니다. 그리곤 기껏 한다는 말이 ‘더 회개해라. 더 노력해라. 더 착하게 살아라.’ 등등처럼 구원받을 듯한 법적인 자격을 갖추기 위한 인본주의적인 행위만을 강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 시험이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라면, 하나님의 시험은 합격시키시는데 목적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게 ‘율법과 은혜’, ‘율법과 사랑’의 차이입니다.
프레드 브라운이란 사람은 율법을 ‘치과용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끝에 동그란 거울이 달린 막대기가 환자의 입안 구석구석을 비쳐가며 충치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거울의 기능은 거기까집니다. 거울이 충치를 치료해 주지는 못합니다.
율법이 그렇습니다. 인생의 수많은 시험 앞에서 율법은 우리가 무능하고 부자격자임을 들추어내지만, 그것들에 대한 해결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떤 시험이든 정답은 하나다. 모든 것에 대하여 사랑으로 하라!’
답을 알면 시험이 쉬워집니다. 정답을 안다면 이미 문제는 문제가 못되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이 ‘난 문제 없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이 말이 과연 그에게는 진짜 문제나 시험이 하나도 없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문제는 있고 시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미 문제에 대한 해답과 시험에 대한 해결책이 있기에 더 이상 그들에게는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고, 시험이 시험이 못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모든 문제의 정답이 예수님이시고, 모든 시험의 해결책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는 여러분에게도 각종 시험 앞에서와 갖가지 문제 앞에서일지언정 ‘내겐 시험이 없어!’ ‘난 문제없어!’라는 자신 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데 미처 시험공부를 하지 못한 한 학생이 주관식 문제에 답을 쓰더니 그 답을 화이트로 지운 다음 그 옆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동전으로 긁으시면 답이 나옵니다.’
교무실에서 채점을 하던 선생님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채점은 해야겠기에 동전을 꺼내 들고 긁어가며 채점을 하던 선생님이 갑자기 자리를 차고 일어나더니, ‘이노무 자식이~~’ 라고 하며 교실로 뛰쳐 올라갔습니다.
뭐라고 써 있 길래 저리 화가 났을까 싶어 옆 선생님이 슬쩍 보니, 답란에 이런 글이 보였습니다.
‘꽝!~~ 다음 기회에~~’
다음 기회 좋아하시네요. ‘다음 기회’는 채점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시험을 치는 그 학생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의 답이 꽝이니 합격은 다음 기회에, 좋은 점수도 다음 기회에 .....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와 시험 앞에서 보기 좋게 포장은 하고 있지만 그냥저냥 교회만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리 해야 한다 저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교회가 주는 율법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신앙 결과 역시 늘 ‘다음 기회’를 바라볼 수밖에는 없게 됩니다.
‘응답은 다음 기회에, 축복도 다음 기회에 ...’
인간은 누구도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법은 말 그대로 지키지 않는 자를 향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 무슨 특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보니 법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율법도 마찬가지구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학교에선 선생님들의 골치를 썩이던 불량소년이 있었습니다. 부모님께는 늘 야단과 회초리를 맞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좀 더 커서는 법을 어겨 소년원엘 들락거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한 체벌을 받고 감옥 생활을 하면 할수록 아이가 변화되기는커녕 죄성은 더 대범해지고 죄질도 더 악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되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가 한 여학생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아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더 이상 죄 짓는 일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매 맞고, 벌 받고, 감옥까지 들락거렸어도 고쳐지지 않던 아이가 사랑주고 사랑하는 대상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법이 하지 못하던 것, 의지가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사랑’이 해냅니다.
'사랑이 해답'입니다.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보세요.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하고 공부해야 하는지요?
청년이 취업 시험을 치기 위해 얼마나 혹독하게 애쓰고 준비하는지를!
서울 노량진 쪽으로 가 보면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 한 번 붙어보겠다고 그 귀한 젊음을 다 바쳐가며 고생고생하며 삽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우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받기 위해 우린 얼마나 노력하며 애쓰고 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린 어느 만큼이나 시도하고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믿음도, 기도도, 사랑도, 감사도, 아니 우리 신앙생활 전반에 걸쳐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잘해내기 위해서는 우리도 혹독하게 ‘믿음 공부’를 해야 합니다.
학생이 참고서를 파고 들 듯, 성도도 성경을 펼쳐 들고 말씀을 파고들어 공부해야 합니다.
운전면허시험 하나 붙어보자고 수많은 연습과 훈련을 반복하는 것처럼,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성도도 수없이 많이 기도하며 반복해서 믿음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해서 몸에 배게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랑 없인 안 됩니다. 그 사랑이 ‘있다가, 없다가’ 해서도 안 됩니다. 나아가 믿음의 첫 출발이 율법이나 인본적인 내 행위가 되어서는 더더구나 안 됩니다.
우리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으로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만나는 현장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고 나의 믿음도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몇몇 남자들이 모여서 아내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아내는 예쁘지 않느냐! 우리 아내는 요리를 잘 한다. 우리 아내는 남편에게 너무나도 순종적이다.”라며, 저마다 다들 아내 칭찬을 하고 있었는데 한 남자분 만이 침묵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네도 뭔가 자랑을 해보게”라고 하자 드디어 입을 엽니다. “아내는 늘 내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네.”
그러자 모두들 ‘와 대단한데?’ 라며 감탄했습니다.
이어 남자가 말하기를 “어젯밤에도 아내는 여느 때처럼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내 앞에 무릎을 꿇었지. 이마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어.”
“이 화상아! 당장 침대 밑에서 안 나오면 죽는다!~”
부부간에도 사랑해서 결혼했고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때론, 아니 너무도 자주 이런 모습일 때가 있습니다.
부부면서도 이럴진대, 교인들 간에,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게 우리네 사랑의 한계입니다.
반면에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1.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으로 삼위를 갖고 계시되 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성령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모든 사람 속에 성령 하나님은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허물도 아시고 우리의 죄악도 아십니다.
그렇게나 잘 아시기에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주십니다.
본문 26-27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 잘못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간혹 능력이 모자라고 여건이 안 되고 재물이 없어 못할 수는 있더라도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본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주려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 그러하십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주려 하십니다.
자녀 된 우리가 잘 되기만을 노심초사하며 기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보세요. 부모는 자녀를 위해 뼈를 깎는 수고도 마다치 않으며 자녀가 커서는 잘 되라고, 소 팔고 논 팔아 대학에도 보냅니다. 그런데 거기까집니다. 거기까지가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자녀가 잘 크고, 공부 열심히 하고, 그의 인생을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부모의 능력 밖입니다.
힘껏 노력해야 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며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것은 오롯이 자녀의 몫입니다.
군대 간 자녀를 위해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최대한 면회 자주 가고 용돈 쥐어 주고 제대하는 날까지 매일 매순간 기도해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자녀가 군대에 잘 적응해서 군 생활 잘하다가 무사히 제대하는 것은 온전히 자녀의 몫입니다.
하나님과도 그렇습니다. 자녀 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십니다.
우릴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하나뿐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릴 위해 탄식하면서까지 중보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실지라도 정작 자녀 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사느냐 못 사느냐는 오직 자녀 된 우리들 각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 노력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말씀을 공부하고 믿음을 훈련하세요.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순종하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때까지 살아 온 것이 우리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성령 하나님의 중보기도의 덕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일들과 친히 간구하시는 중보기도의 응답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2.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사랑하시는 것이 맞나 할 정도로 의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을 보면 그것이 엄청난 사랑인 것을 알게 됩니다.
잘 기억해 두세요. 신앙에서 ‘믿음과 의심’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 믿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있는 의심부터 지워내야 합니다. 믿음의 첫 출발은 우리 속에 있는 각종 의심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에서는, 여러분이 가고 있는 신앙의 과정을 보지 마시고 여러분이 도달하게 될 신앙의 결과만을 소망하며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8절을 보세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목회를 해 오는 동안 저는 이 구절을 늘 가슴에 새기며 목회를 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쉽게 표현하면 “현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내게 유익한 일이요 기쁜 일이요 복 받게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모든 성도들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이 이 시간 여러분의 믿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앞의 상황들이 얼핏 보기에는 일시적으로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일시적으로는 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망한 것이 아니고 끝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망하게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왜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역시 나인 것을 믿으세요.
하나님께는 여러분이 그런 존재들일진대,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 어찌 여러분을 그냥 버려두시겠습니까?
혹, 실패했습니까? 사업을 하다가 망했습니까?
학교 시험에 떨어졌습니까? 인간관계 관계 때문에 힘들고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그런 상황에 두고 계실까를.....
단순히 내가 범죄하고 잘못해서 징계하시는 걸까요?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까?
설마하니 하나님이 나의 현재의 상황을 모르고 계실까요? 그냥 이대로 버려두고 마실까요?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결단코 하나님은 그러실 리 없기에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결국은 현재의 어려움은 나중에 큰 복이 되게 됩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이미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서의 노예 시절에 가정 총무가 되어 집안 살림 전부를 맡아본 경력이 있었기에 훗날 나라의 살림살이를 맡은 국무총리직도 감당 할 수 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과거의 시련과 경험이 '지금'을 위한 큰 공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현재의 어려움, 특히 고난과 핍박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참고 견뎌보세요. 나중에 그 고난과 핍박이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선한 결과를 가져다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라면 하나님이 나의 실패와 괴롬과 아픔들을 합력하여 ‘어떤 선을 이루실까?’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를 소망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미 그 사랑을 저와 여러분이 받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본문 33-34절을 보세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어떤 동물학자가 병아리를 품고 있던 암탉을 붙들어 매어 놓고 그 앞에서 막대기로 병아리들을 해코지 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실험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미 닭이 푸드덕 거리더니 죽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죽은 암탉을 가져다가 해부를 해보았더니 내장이 다 끊어져 피범벅이 되어 있더랍니다.
피조물인 닭도 자기 새끼를 지키려고 애간장이 끊어지는 사랑을 하는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이 어찌 당신의 자녀들을 고통 속에 내버려두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이 이러하기에 그 어떤 세력도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어서 37절도 같이 한 번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기는 ‘우리’가 누굽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위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요즘은 이상하게 왜곡되어버렸지만 원래는 ‘모든 사물을 귀하게 보면 한없이 귀하지만, 하찮게 보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법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내 자식이 정승이 될 것이라 믿고 기르면 정승이 되겠지만 내 자식이 하잘 것 없는 사람이라 보고 대하면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누구로 보고 계십니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세요. “나는 누군가?”
하나님은 여러분을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서 자녀를 삼으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나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나를 누구로 여기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무시하고 무능하게 여긴다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 믿으면 여러분은 그 사랑을 체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하고 뜨거운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랑이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했고, 그 사랑이 있기에 장차는 우리가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가 아닙니다. 내가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시고, 그 사랑에 감격하며, 그런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하나님도 그런 여러분을 '사랑하셨고, 사랑하시며,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