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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댐 준공(1976.10.28)을 두 달 열나흘 앞둔 1976년 8월15일 오후 네 시 반경에서부터 다섯 시 반경에 걸쳐 분강촌汾江村(분천동, 부내)은 고려 말엽 1350년경 농암聾巖선생의 고조부인 입향조入鄕祖 이헌李軒 공이 정착한 이래 626여 년 만에 수많은 전설을 강물 속에 묻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졌다. 음력으로는 병진년(丙辰年) 칠월 스무날이었으며 12간지 시간으로는 신시에 몰沒하기 시작하여 유시 초입에 절연히 망실亡失 했다. 장구한 세월 치고는 찰나였으며 간장을 도려내는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분강촌 사람들이 살던 원래의 터전은 대부분 수몰되었지만 아랫마을 산골짜기에 있던 주당골과 수루뫼(수림뫼), 은앙쟁이 그리고 비밑 위 행암대가 있던 언덕 상층 지역과 동네 뒷산인 영지산 너머 높은 지대를 형성했던 송티, 고시빠, 넘티, 독짓골, 송곳배알, 마릉당골, 마당재, 병암골 등은 용하게도 잘 살아 남았다. 이 가운데서 송티와 넘티 그리고 마릉당골 아래에는 옛날 부내 마을에 살던 서너 가구의 족친들이 이전해 와서 타지에서 온 서너 가구의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마실을 만들어 옛 부내의 명맥을 간신히나마 이어가고 있다.
분강촌 사람들이 살던 영지산 아래 원래 동네는 흔적도 없이 낙강 속으로 사라졌다. 망망대해라는 말이 꼭 맞을 듯 싶다. 도산서원 진입로에서 서취병산 중턱으로 닦은 산비탈 길을 따라서 도산서원으로 들어갈 때 병풍처럼 둘러싼 산세 밑으로 가득히 강물이 적수되어 있는 지역이 옛 분강촌 동네이다.
♤사진설명 : 옛 부내(분천동, 분강촌) 동네가 만수된 강물로 인해 망망대해로 변했다. 유년시절 뛰어놀던 옛 고향이 그리워서 동창들과 함께 수몰된 고향을 찾으신 형님들의 모습이 웃고는 있지만 왠지 애잔해 보인다. 2023년10월21일, 종친 승철이 할배가 촬영해서 보내준 사진이다. 왼쪽부터 조영기ㆍ이재필ㆍ이명구 형님이다. 형님들의 연세는 올해 74세인데 27세 되던 해에 수몰이 되었으니 벌써 고향이 물에 잠긴지도 47년이 지났다. 위에 사진 두 곳의 위치는 아랫마(아랫마을)에서 고수빠로 올라가는 첫 모퉁이를 도는 지점이다. 수몰 전의 지형으로 보았을 때는 세 분이 서 있는 곳에서 신작로를 따라 40여미터 내려가면 왼편에 부내 동네 첫 집인 성구 형님의 집이 있었다. 첫번째 사진의 오른편 중앙에 강물 속에서도 흔적을 드러내고 있는 분천방구의 모습이 보인다. 안동댐을 막아놓아서인지 최대 수위로 만수된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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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옛날 분강촌 사람들과 숱한 애환을 함께 했던 고시빠의 전설적인 내력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재조명해보기로 한다. 고시빠는 분강촌 입향조인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 공이 670여 년 전인 고려말엽 1350년경 부내에서 터전을 잡은 이래로 이곳에서 생몰한 수많은 사람들과 숱한 애환을 함께 나눈 전설적인 지명이자 또한 신선들이 산다는 영지동천(靈芝洞天)으로 들어가는 삽지껄 주변의 일대를 말한다. 이제 분강촌은 수몰되어 그 옛날 태고 시대에 인적이 미치지 못했던 원래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고시빠는 지금까지도 영지산 안자락에 고즈넉이 머물며 그리운 옛 사람들의 발걸음을 서글프게 기다리고 있다.
타향살이 객지에서 섧은 나그네가 되어 지친 영혼을 안고 살아가는 부내 사람들에게 언제나 향수와 애수를 불러일으키는 처연한 그 이름 고시빠여~. 전설의 분강촌 지명인 고시빠의 내력을 이제서야 다시 쫓아보는 나의 마음은 실로 쓰라리외다.
[※고시빠는 필자의 수필(♧분천동 전설의 지명: 아! 고숫빠: 2023.6.9)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그 지명 생성에 대해서 이설異說을 제기하는 족친이 있어서 필자가 재고찰 차원에서 현장 답사(2023.7.30)와 함께 추가 문헌 탐색을 통해서 재조명한 내용을 여기에 실었다.]
고시빠에 대한 지명 재고찰은 현장 지형 탐방과 탐색 그리고 주변 바위에 새겨진 여러 각자 분석과 옛 시대에 살았던 선조들의 자호自號 등을 종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했다.
고시빠 공굴 위에는 예나 지금이나 세 갈래의 길이 삼지창처럼 여전히 남아 있다. 위로는 송티재로 올라가는 신작로이고 아래로는 수몰 전 부내 동네로 내려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공굴 바로 오른쪽 옆 길로 빠져 "곳庫집" 맞은편으로 난 영지산 뒷편 산비탈 길을 돌아나가서 "광현(廣峴ㆍ광티)" 각자가 새겨져 있는 넘티로 연결되는 길이다. 고시빠와 송티재는 옛날 수몰 전에 목실골 단천 내살미(천사) 토계 의인 섬마 부내 사람들이 이안(예안)장을 보러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지나쳐야 하는 필수적인 고바이 고갯 길이었다. 사실 분강촌 사람이 아닐지라면 고시빠라는 지명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수몰 전 도산골에 살았던 주민이라면 반드시 이 고시빠 지역을 거쳐야만 예안장을 보러 갈 수가 있었다. 다시말해 도산골 사람들이 이곳 고시빠라는 지명을 모를 수는 있지만 실제로는 이 길을 무수히 왕래했다고 볼 수 있다. 구한말 시대만 해도 안동에서부터 토계 마을에 이르기까지 특히 예안에서 송티 고시빠 부내 도산서원 토계까지의 길은 아주 좁은 오솔길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신작로를 만들면서 넓은 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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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는 1907년 한반도 수탈을 위한 수월성 제고를 위해 7개년 신작로 건설 사업에 착수 했다. 한반도의 첫 신작로는 1908년 완공된 "전군가도"인 전주와 군산 간의 도로이다. 그 당시 일본이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착수한 정책들이 바로 신작로 건설과 함께 193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화 된 저수지 및 보 건설 등과 같은 수리 사업(관계시설)이다. 도산골 의인에 앤떼이(둑 혹은 보)를 설치하여 지대가 높은 의인 여울의 물을 부내(분천동)까지 농수로를 만들어서 보낸 것도 곡물 생산을 높이기 위한 책략이었다.
일제는 조선에 신작로 건설을 통해 전국의 군과 군, 군과 면을 이어서 붙였다. 경부축(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연속적인 도로 구간)도 이 정책의 한 권역이었으며 도산면의 신작로도 이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이렇듯 신작로도 알고 보면 일제의 조선 경제침탈과 수탈정책을 뒷받침 하기 위한 교활한 술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산면 부내와 토계 사이의 신작로는 1938년 이후에 건설되었으며 읍ㆍ면 도로로 분류 되어진 등외 도로였다(당시 국도는 도로 등급제 1ㆍ2등 도로이고 지방도와 부도는 3등 도로였다).[참고자료: ♧이종구 교수의 문학산책/ "어느번화가의 소산" 중에서(202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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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빠를 탐방하면서 주변의 산세와 지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숭대들(바위)을 만나볼 수가 있었다. 고시빠 공굴 위에서 곳집 즉, 넘티로 들어가는 옆길로 바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산위를 쳐다보았더니 세 개의 큰 바위가 마치 꼬치에 낀 것처럼 중첩돼 있는 이색적인 전경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옛날 유년시절 국민학교 저학년 때 이 세 개의 바위 주변 어딘가에 두 개의 큰 한문 글씨가 새겨져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한데 지금 생각하니 그 각자는 "환암串巖" 이었다. 환암 각자의 확실한 위치는 생각나지 않지만 고시빠 공굴 위에서 넘티로 들어가는 초입 오른쪽 주변 길가 어딘가에 있었던 글씨로 기억 된다. 이 환암이라는 각자가 사라진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오랜 세월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파손되었는지 아니면 수몰 전 해에 애일당을 고시빠로 급히 이전할 때 "농암 선생 정대 구장壟巖 先生 亭臺 舊庄" 이라는 각자 자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훼손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후자를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환암이라는 글씨가 그 주변에 있었고 앞서 서술한 여덟 개의 큰 각자를 이곳에 길게 이어서 놓을 만한 자리가 나오지 않는 매우 협소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 고시빠 공굴 위에는 예나 지금이나 세 갈래의 길이 삼지창처럼 여전히 남아 있다. 위로는 송티재로 올라가는 신작로이고 아래로는 수몰 전 부내 동네로 내려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공굴 바로 오른쪽 옆 길로 빠져 "곳庫집" 맞은편으로 난 영지산 뒷편 산비탈 길을 돌아나가서 "광현" 각자가 새겨져 있는 넘티로 연결되는 길이다.
♤사진설명 : 고시빠 공굴 위에서 바로 오른편으로 나 있는 영지산 뒷길로 접어들어서 곳집 주변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넓은 광현 즉, 넘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사진은 도산서원 진입로에서 고시빠 지역을 내려다보면서 촬영한 전경이다. 넘티 일대가 된다. 수몰 후 이곳에 서너 가구들이 새로이 생겨났다.
♤사진설명 : 고시빠 공굴 위에서 바로 우회전 하면 골짜기가 나타나고 산비탈로 난 호젓한 세로를 따라서 걷다보면 갑자기 탁 트인 전경이 펼쳐지는 광현이 나타난다. 이른바 넘티(넙티)이다. 고시빠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오솔길은 영지산 뒷길이자 넘티로 들어가는 작은 외길이다. 지금은 산비탈로 길을 닦아 놓아서 도산서원 진입로 입구에 있는 "농암가비聾巖歌碑"까지 연결되어 있다. 농암가비에서 조금만 더 가면 수몰된 옛날 부내로 내려가는 곤재 입구가 나온다. 위 첫번째 사진 밭 속 흙더미 왼쪽 도랑 옆에 두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광현"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지금도 각자가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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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한 바를 참고하여 공굴 바로 옆길 초입 오른쪽 매우 가파른 산기슭에 있는 이 세 개의 포개진 바위와 함께 옛날 이 주변에 있었던 환암이라는 각자와의 연관성을 집중 조명해 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공굴 조금 못 미쳐서 넘티로 들어가는 삽지껄 오른쪽 주변 어딘가의 바위에 환암이라는 각자가 분명히 있었지만 지금은 지형 파괴로 보이지 않고 있다.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환암은 익히 알고 있듯이 농암선생의 다섯째 아들 계량(季樑 1508~?)의 호이다. 선생의 출생년대는 사료에 있지만 작고한 연대는 없어서 환암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다만 계량이 지천명 이후에 자신의 호를 이곳에 썼다고 추정해보고 우리가 수몰 전 1970년대 초에 이 글을 봤다고 가정했을 때 환암 각자가 존재한 시간은 대략 460여 년이 된다.
계량의 호인 환암串巖에서 "串" 자字를 한자사전에서 보면 "곶 곶, 익을 관, 꿰미 천, 꼬챙이 찬"으로 적어 놓았다. 이 글자는 중국에서 "꿸 관"자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음(本音)은 "환"자 이다. "곶串"으로는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고 있다. 이 "串"이라는 글자는 옛날 고대(古代)시대에 화폐(貨幣)로 사용(使用)하였던 조개들을 실로 꿴 모양을 본뜬 상형 문자이다. "串" 자는 언급했듯이 "꿸 관", "꿰미 천(꿰미: 끈 따위로 꿰어서 다루는 물건을 세는 단위)", "꼬챙이 찬" 등으로 읽혀진다. "꿰다"라는 의미와 함께 "곶이"와 "꼬치(꼬챙이에 뀐 물건을 세는 단위)"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또한 이외 "곶 곶"으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계속해서 "串"을 고찰해보자. "串"은 중국에서 한국에 들어올 때 음훈(음과 훈)은 ' 꿰뚫을 관' 이었지만 이 원래의 의미와 함께 "串"의 한자 모양이 "곶이" 같이 생겨서 串에 "이"를 붙여 "串이" 즉, "곶이" 혹은 "꼬치"라고 불리어 지던 것이 그대로 한국식 한자음으로 굳어진 것이다. 즉 "串"이 "곶이" 내지 "꼬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한자의 뜻을 생각해서 읽는 것" 인데 이를 훈독이라고 한다. 다시말해 훈독은 한자의 뜻을 새겨서 읽는 것이고 훈음은 한자의 소리를 나타낸 것이다. 훈독의 반의어는 음독이다. 음독은 한자를 음으로 읽는 것이다. 훈음과 음독은 같은 맥락이다. "곶 곶"으로 읽는 것은 음독이다. 호미곶虎尾串이나 갑곶甲串 장산곶長山串이 그 예이다. 바다나 하천에서 툭 튀어 나온 곳을 "곶"이라고 한다. 이렇게 "串"을 "곶"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串"이 "곶 곶"과 "곶이" 혹은 "꼬치"로 쓰이는 개념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꿸 관串" 자의 경우는 "꿰다"라는 뜻과 더불어 모양이 "곶이"처럼 생겨서 훈독하여 "串이"라고 한 것이 "곶이" 내지 "꼬치"가 되어 그대로 한국식 한자음이 된 것이다. 다시말해서 "곶이"로 사용할 때의 "곶"은 한자의 뜻을 생각해서 읽는 훈독이다. 하지만 "곶 곶"에서 나타나는 "곶"은 "호미곶"처럼 그냥 음독하여 쓰고 있는 경우이다. 이를 훈음식 표기라고 한다.
우리가 양꼬치 식당의 간판에서 대할 수 있는 양육찬 즉, "양러우촨羊肉串은 "양고기"와 "꼬챙이 찬"이 합해져서 만들어낸 말이다. 즉, "양고기 꼬치(양꼬치)"나 "양고기 꼬챙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串" 속에는 "꼬치"나 "꼬챙이" 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렇듯 중국에서 양꼬치 식당의 "串"은 "곶이" 혹은 "꼬치"라는 의미로 중국어 사전에서는 [chuàn(촨)]으로 발음한다. 일본어는 훈독으로 쿠시(くし)라고 하는데 이 또한 꼬치 혹은 꼬챙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본 중국어 "관시串柹(곶감)", 곶감串甘, 양꼬치 집의 간판에서 보이는 "양러우촨羊肉串" 등에서 사용되는 "串" 속에는 모두 "꿰다"라는 뜻이 함의 돼 있다.
이제 고시빠 공굴 위 삽지껄에 있던 환암串巖이라는 각자에 대해서 알아보자. 환암은 언급했듯이 농암선생의 다섯째 아들 계량(季樑 1508~?)의 호이다. 계량은 자호인 환암에서 "꿸 관串"자를 쓰지 않고 串의 본래의 음인 "환"을 사용하여 자호를 "환암串巖"이라 삼았다. 하지만 이 한자를 우리나라 뜻으로 훈독하면 "곶바위" "곶이바위" "꼬치바위"가 된다. 그렇다면 환암선생은 왜 자호를 "곶이바위(혹은 곶바위 내지 꼬치바위)"라고 했을까. 우리 선인들은 자호를 만들 때 산천이나 자연물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도산골 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농암과 퇴계도 그러했고 농암의 자식들인 행암 매암 등의 자호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환암 또한 이와 유추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1970년대 당시 "환암串巖"이라는 각자를 새겨 두었던 부내 고시빠 주변을 지난 7월30일 현장 답사하여 정밀 탐색한 나머지 중요한 자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옛날 환암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던 바위 주변에서였다. 어디에 환암이라는 각자가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옛 시절을 떠올려서 정황적 판단으로 주변을 추적해 나갔다. 그런데 고시빠 공굴 오른편으로 빠져서 "곳집"과 "광현" 쪽으로 10여 미터도 채 못 내려가서 다시 우편에 가파르게 치솟아 있는 영지산 바로 위에서 이색적인 바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 개의 긴 바위가 마치 꼬치에 끼여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층층이 중첩돼 있는 모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아래 사진 참조). 길다란 직사각형 모습을 한 절편처럼 생긴 세 개의 큰 바위가 세로로 포개져서 있는 모양새였다.
다시말해 곶바위 곶이바위 꼬치바위 등의 한문학적인 음훈 및 훈독의 개념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세 개의 바위가 연이어 곶이처럼 연결되어 있는 자연석이었다. 그리고 옛날에 이 곶이바위 주변 어딘가에 환암이라는 각자가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기억도 희미하게나마 되살아났다. 계량은 영지동천을 새겨놓을 만큼 한 때 매우 아름다웠던 이곳에서 이 세 개의 바위들을 빗대어 "꿸 관串"자를 쓰지 않고 원래의 음인 "환"을 사용하여 자신의 자호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시빠 주변 어디를 찾아봐도 이 세 개의 곶이바위 외에는 가파른 벼랑과 낭떠러지, 울창한 나무숲 그리고 맑은 개울 등은 있었지만 달리 의미를 부여할만한 자연물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 외 지형에는 그냥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낭떠러지와 벼랑 그리고 평범한 바위들만 존재했다.
♤사진설명 : 곳바위ㆍ곶이바위 ㆍ꼬치바위와 계량의 호인 환암의 연관관계를 밝혀준 곶이바위의 현재 모습이다. 고시빠 공글 우측으로 나 있는 넘티가는 오솔길 입구에서 영지산을 쳐다보면 바로 보이는 벼랑에 위치해 있다. 세 개의 긴 바위가 마치 꼬치에 끼여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층층이 중첩돼 있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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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곳집 맞은편 개울 건너 길 모롱이 영지산 기슭에 "영지동천靈之洞天"이라는 큰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바로 뒷산은 영지산이다. 그리고 고시빠에서 넘티까지 이어진 골짜기 속으로는 지금도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어쩌면 옛날에는 더 많은 맑은 물이 흘렀을 지도 모른다. 옛날 선조들은 우리가 수몰 전에 알고 있었던 음침한 곳집이 있던 분위기와는 사못 다른 시각으로 이곳 고시빠 주변의 풍광을 아름답게 여기며 영지동천이라는 각자를 크게 새겼을 것이다. 영지동천이란 말은 산과 내로 둘러싸인 산수가 수려한 곳을 말한다. 그래서 이 말 속에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말도 담겨져 있다. 분강촌 전체를 보든 고시빠만 따로 놓고 보든 이 말을 쓰는 데는 손색이 없는 산천과 지세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460여 년 전 계량은 영지동천인 이곳을 족히 여기며 자호로 삼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곳 지형이 아름답게 다가왔지 않았다면 옛 선조들이 큰 숭대에 영지동천이라는 각자를 새겼을 리가 만무하다. 유년시절 우리가 보았을 때는 이곳이 동네에서 외떨어져 있는 매우 후미진 곳이었다. 곳집도 있었고 또한 양쪽 골짜기 위와 아래로 낭떠러지와 벼랑이 있는 가파르고 어두컴컴한 공포스러운 지대였다. 하지만 460여 년 전 선인들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는 그야말로 양쪽 영지산에 붙은 벼랑이 작은 협곡과 골짜기를 이루고 맑은 개울물이 흐르는 영지동천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진설명 : 옛날 선인들은 곳집이 있던 개울 건너편 영지산 기슭에 "영지동천"을 새기고 또 개울가 밭 속에 광현을 새길 만큼 이곳을 아름다운 장소로 묘사했다. 영지동천은 산과 내로 둘러쌓인 경치가 뛰어난 신선들이 사는 곳을 말한다. 고시빠에서 볼 때 양쪽에는 영지동천 각자에 나오는 영지산이 있고 공굴 밑으로는 마당재와 마릉당골에서부터 내려오는 맑은 개울물이 있고 공굴 뒷편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 바위들 그리고 빼곡히 서 있는 솔나무들이 있으니 운치가 심상치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부내 여러 골 가운데 그나마 개울물이 호젓이 흐르는 골짜기는 이곳 하나 뿐이었다. 두번째 사진은 개울가에서 영지동천 각자를 보고 촬영한 사진이다. 잡목이 무성해서 바위만 보이고 각자는 보이지 않는다. 첫번째 사진은 영지동천 가까이 가서 담은 각자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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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串巖에서 串자는 "꿸 관"이지만 본래의 음은 "환"이다. 이 "환" 자가 우리나라에서만 "곶"자로 쓰인다. 계량은 본인의 자호에서 사용한 "串"자를 "관" 대신 원래 음인 "환" 자로 사용했다. 그렇게 해도 훈은 "곶이" 내지 "꼬치"가 된다. 즉 "환" 을 원래대로 번역하면 "곶바위" 내지 "꽂이바위" 혹은 "꼬치바위"가 된다. 계량이 이 고시빠 지형에서 영감을 얻어서 "환암串巖"을 자호로 삼긴 했지만 "串"을 "꿸 관" 자로 쓰지 않고 본래의 음인 "환"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말해 고시빠에 있는 숭대(바위)들의 모양새는 생각하되 "꿰는 바위(관암)" 혹은 "곶이바위 곶바위 꼬치바위"의 음훈이 되는 "곶암" 보다는 "꿸 관"의 원래 음인 "환"을 따서 "환암串巖"이라고 썼을 것으로 여겨진다.]
옛날 유년시절에 고시빠 공굴 아래에 적잖이 들렀었다. 제일 많이 시간을 보낸 곳을 순서대로 적어보면 물레방간 통소 구여울 양수장솔밭 애일당 밀양대 분강서원 구당나무 실거랑 고시빠 송티 넘티 아랫마주당골 순으로 기억된다. 주당골은 거의 가지 않았고 주로 선조들의 시사를 지낼 때만 음복飮福을 받아먹기 위해 애써 쫓아 다닌 정도이다. 그때는 빈난했던 세월이라 굶주림을 채우기 위한 욕구가 늘 생활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고시빠에 종종 들린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가재와 버들뭉치를 잡기 위해 실거랑에서부터 시작하여 이곳 공굴 아래를 지나서 넘티까지 뒤지기도 했다. 그때 환암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분명 이 공굴 위 어딘가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바위가 어느 시절에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유추하건데 수몰 한 해 전인 1975년 부내 동네에 있던 애일당을 이곳 곶이바위 윗쪽으로 이건하면서 그때 분강촌 애일당 아래에 있던 "농암 선생 정대 구장壟巖 先生 亭臺 舊庄(농암 선생이 정자를 지었던 옛 자리)"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진 큰 각자를 뜯어와서 이곳 고시빠에 새로 지은 애일당 아래 길 오른편 산 기슭에 옆으로 나란히 진열해 놓은 적이 있었다. 수몰을 코 앞에 둔 상황이었던지라 경황도 없었고 또한 옮길 만한 마땅한 장소도 없어서 애일당과 각자 모두 정신없이 일단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이 각자를 옮겨 놓는 과정에서 원래 이 자리에 있던 "환암" 각자가 혹시 소실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안타깝게 해 본다.
농암 각자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가 지은 애일당의 원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큰 바위에 새긴 여덟 자의 큰 글씨이다. 일제강점기에 예안에서부터 도산 토계까지 신작로를 만들면서 애일당은 바로 뒤에 있는 지대가 높은 영지산 기슭으로 다시 옮겨 지었다. 농암 각자는 이때 원래 있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 있던 큰 바위에 새긴 여덟 글자였다. 농암 각자에는 "농암 선생 정대 구장壟巖 先生 亭臺 舊庄(농암 선생이 정자를 지었던 옛 자리)" 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각자를 1976년 안동댐 준공 한 해 전인 매우 어수선한 시기에 도려내어서 마을에서 송티재로 올라가는 조금 윗쪽에 위치한 고시빠 지역 즉, 곶이바위가 있는 영지산 기슭에 잠시 옮겼다가 2005년 농암유적지 복원 정비사업 때 그동안 부내와 운곡 등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선생의 모든 문화유적을 가송리로 모두 이건하여 복원시켰다. 농암 각자는 매우 커서 현재 안동 지역에 남아 있는 글씨 가운데 가장 크다고 전해진다. 각자 하나의 글씨가 무려 75㎝ 정도나 된다. 지금은 농암종택을 이건한 가송리에서 만나 볼 수 있다.
가송리로 이건한 농암 각자는 농종종택이 자리한 강변 끝에 있는 학소대 방향 쪽으로 옮겨 놓았다. 애일당 앞마당 담장 바깥에서부터 강각 마루 난간 아래까지 축단을 20여 미터 길게 만들어서 그 위에 "농암 선생 정대 구장"을 진열해 놓았다. 가송리로 이건 전인 고시빠에 있을 때도 공굴 다리 훨씬 못 미쳐서 그곳에 옮겨 놓았던 애일당 올라가는 산비탈 입구 왼편에 축단을 쌓아서 옆으로 길다랗게 각자들을 설치했었다. 각자의 글씨가 커서 그곳에 있을 때도 지금처럼 길이가 족히 20여 미터나 되었다. 진열한 모양새도 지금 가송리에 이전해서 설치해 놓은 것처럼 꽤나 길어서 애일당 입구 왼편에서부터 고시빠 공굴 바로 오른편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언제까지나 필자의 생각이긴 하지만 이 각자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원래 있었던 환암이라는 각자 바위가 사라졌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애써 지울 수가 없다.
♤사진설명 : 환암이라는 각자가 사라진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오랜 세월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파손되었는지 아니면 수몰 전 해인 1975년 애일당을 고시빠로 급히 이전할 때 당시 그곳 애일당 아래 원래의 농암바위에 새겨 놓았던 "농암 선생 정대 구장壟巖 先生 亭臺 舊庄" 각자를 도려내어 고시빠 공글 오른쪽 길 위에 이전하여 설치하는 과정에서 훼손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후자를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수몰 전 환암이라는 각자 글씨가 고시빠 공글 오른쪽 산자락 주변 어딘가에 있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1975년에 여덟 자의 큰 각자를 이곳으로 이전해 놓을 만한 넉넉한 공간은 사실 없었다. 그래서 길 위에 있던 환암 각자 자리에 이 여덟 개의 큰 각자를 포개어 올리지 않았는가 하는 추정을 해본다. 이 사진은 옛날 부내 애일당 아래에 있던 각자를 1975년 수몰 한 해 전에 고시빠 공글 오른쪽 신작로 바로 위편에 10여미터 가로 축단을 쌓고 옮겨 놓은 모습이다. 이 각자가 있던 곳에서 바로 윗쪽으로 10여 미터 올라간 영지산 기슭에 애일당도 함께 이전해 놓았었다.
♤사진설명 : 1975년 수몰 환경으로 인해 어수선하던 당시 고시빠로 급히 이전했던 애일당과
"농암 선생 정대 구장壟巖 先生 亭臺 舊庄" 각자는 2005년 가송리에 새로 조성한 농암종택으로 다시 옮겨와서 강각 앞 오른쪽 지점에서부터 애일당 앞마당 담장 너머 아래까지 10여 미터 가로 축단을 쌓고 그 위에 설치해 놓았다. 사진 왼쪽에 있는 각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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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기억으로는 분명 고시빠에 있던 애일당 아래 주변 어딘가에 환암이라는 각자가 있었다. 만약 그 주변 어딘가에 있었다가 세월의 무게에 못 이겨서 풍화작용에 의해 각자가 지워졌다고 해도 글씨를 새겼던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환암공파의 주인공인 환암선생을 직접적으로 만나 볼 수 있는 이 각자를 잃어버린 것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 "환암"이라는 각자가 곶이바위 주변에 있었다는 것 또한 이제는 전설이 되었다. 아니 이 각자의 존재를 아는 사람 조차도 이제는 대부분 작고했으며 수몰 전 부내에 살았던 지금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각자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선조들이 남긴 유적의 보전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또 그것을 보전하려는 정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각자가 지금까지 그 자리에 존재만 했어도 곶이바위와 환암 관계를 유추가 아닌 직접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와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윗마에 살았던 승철이 할배는 잃어버린 "환암" 각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추정을 했다. 수몰 전 해에 애일당을 정신없이 고시빠로 옮겨놓을 때 함께 이곳으로 이전한 "농암 선생 정대 구장壟巖 先生 亭臺 舊庄" 을 설치한 축대 밑에 이 환암 각자가 있다고 했다. 당시 그 곳에 이 여덟 자의 큰 각자를 놓을 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환암 각자 위에 그대로 이 여덟 자의 각자를 포개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덟 자의 각자가 있었던 중간쯤을 다시 파헤쳐보면 어딘가에서 이 글씨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라도 이곳을 파 보면 될 일이다. 한때 이곳에 있던 여덟 자의 각자는 이미 가송으로 이전해 갔고 지금은 여기에 망가진 축대의 흔적들과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옛날 선조들이 살 때의 고시빠는 우리가 보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곳집이 있는 이곳을 일단 무서워 했다. 그리고 1964년 도산서원 주변에 대민지원을 나왔던 36사단 트럭이 고시빠 공굴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한 곳이어서 부내 동네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음침한 곳으로 여겨졌던 것도 사실이다. 이외 신작로가 이곳에서부터 바로 고바이가 지고 또 길 왼쪽으로는 송티재까지 높은 낭떠러지가 형성된 지형이어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질 않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경치가 돋보이려면 벼랑과 낭떠러지가 험하고 높을수록 좋고 개울물이 맑을수록 좋고 산세가 음침하고 괴이할수록 좋고 솔나무나 잡목이 우거질수록 좋고 바위들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금 괴상한 모양을 한 숭대들이 널려 있을수록 좋고 이런 등등의 유별난 이유를 업고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할수록 경승지로서 구색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요즘 한국의 산천에서 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관광지들이 50여 년 전만해도 바로 이런 요소들을 영락없이 갖춘 곳들이었다. 고시빠를 탐방하여 공굴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이러한 구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을 고향이 수몰된 후 50여 년이 지난 뒤 그적새야 알았다는 것이 한없이 서글픈 감회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선조들께도 그저 송구스런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사진설명: 옛날 선조들이 생각하는 고시빠는 우리가 보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우리는 곳집이 있는 이곳을 아주 무서워 했다. 그리고 1964년 도산서원 주변에 대민지원을 나왔던 36사단 트럭이 고시빠 공굴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한 곳이어서 부내 동네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음침한 곳으로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이외 신작로가 이곳에서부터 바로 고바이가 지고 또 길 왼쪽으로는 송티재까지 높은 낭떠러지가 형성된 지형이어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질 않았었다. 사진은 고시빠 공굴 위에서 아래로 촬영한 사진이다. 옛날에는 매우 벼랑진 낭떠러지였다. 그때는 공굴 아래 주변에 선돌할배 논이 개울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고 논과 벼랑 사이에는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맑은 개울물이 호젓이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60년 전 이 공굴 벼랑 주변에는 크고 작은 사고들이 연이어 일어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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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움푹 후미져 들어가 있는 고시빠 공굴 위에서 동네 쪽으로 내려다보면 부내 윗마(을)은 영지산 때문에 가려져서 안보였지만 새당나무와 공민왕의 전설이 깃든 밀양대(민왕대)와 구당나무와 전평(앞들) 실거랑 청고개 수루미 은앙쟁이 그리고 아랫마(을)과 주당골 송티재 등에 이르기까지 마치 길다란 망원경으로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분강촌 산천의 절반이 산수화처럼 펼쳐진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사진설명: 고시빠 공굴 위에서 수몰된 분강촌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이다. 지금은 잡목들이 밀림처럼 우거져서 시야가 완전히 가렸지만 수몰 전에는 움푹한 이곳에서 바라보면 마치 망원경으로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아랫마(을) 밀양대 앞들 구당나무 새당나무 청고개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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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려 다시 주변을 살펴 보면 공굴과 벼랑 아래로는 맑은 개울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잘도 흘러갔다. 우거진 잡목 속에는 새들이 울었다. 골짜기 양쪽으로는 낭떠러지가 아름다운 지세를 돋보이게 했다. 인적이 드문 골짜기에서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이 도랑물은 실거랑의 상류지대에 해당하는 마릉당골과 마당재에서부터 시작되어 넘티 곳집 영지동천 고시빠의 공굴과 실거랑을 줄줄이 거쳐 통소 오른편에서 분강(낙동강)과 합류했다.
유년시절 실거랑에서부터 공굴 아래를 지나 넘티까지 개울을 거꾸로 올라가면서 버들뭉치와 가재를 잡아서 구워먹고 지져 먹고 했던 추억들이 차고 넘친다. 물이 맑으면서도 차가왔고 비가오면 수량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건조기에는 말그대로 실거랑이 되곤 했다. 하지만 이 실거랑은 분강촌에서 유일하게 농수를 공급해준 몸값이 높았던 개울이었던 만큼 부내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도랑이었다.
고시빠 공굴 위에서 바로 우회전 하면 골짜기가 나타나고 산비탈로 난 호젓한 세로를 따라서 걷다보면 갑자기 탁 트인 전경이 펼쳐지는 광현이 나타난다. 이른바 넘티(넙티)이다. 고시빠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오솔길은 영지산 뒷길이자 넘티로 들어가는 작은 외길이다. 지금은 산비탈로 길을 닦아 놓아서 도산서원 진입로 윗쪽에 있는 "농암가비聾巖歌碑"까지 연결되어 있다. 농암가비에서 조금 더 가면 수몰된 옛날 부내로 내려가는 곤재 입구이다. 유년시절 우리가 본 곳집 앞으로 나 있는 이 좁고도 작은 골짜기 길은 음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양쪽 영지산 사이에 있는 협소한 골짜기 길이어서 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왼편 도랑 건너에는 곳집도 떡 버티고 있었다. 그 적막함과 고요한 분위기가 주는 뉘앙스가 가히 공포스러웠다. 1973년 3학년 어느 겨울날에 할머니(구래실할매)가 돌아가셨을 때 어른들을 따라서 상여를 가져오기 위해 이 곳집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기와를 머리에 씌운 매우 작은 흙집이었으며 나무로 만든 상여물이 빼곡이 바닥과 벽과 천장에 달아매여져 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무섭다기 보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사진설명 : 이승과 저승은 이웃집 거리이다. 그리고 그 가교 역할을 한 것이 곳집이었다. 분강촌 사람들에게 고시빠가 공포스럽게 다가온 것은 공굴 주변에 많은 사고도 있었지만 또한 곳집도 한몫을 했다. 그런데 곳집 맞은편 개울 건너 영지산 자락에 있는 큰 바위 얼굴에 영지동천을 새겼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화엄경"의 핵심 사상을 이루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할 것이다. 사진 중앙에 잡목들이 무성하게 서 있는 윗쪽에 수몰 전 곳집이 있었다. 지금은 허물어져서 집도 터도 없다. 1973년 도산국민학교 3학년을 다니던 어느 겨울날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른들을 따라 고시빠로 가서 이곳 곳집(상여집)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본 기억이 있다. 수몰 전 부내에 살다가 작고하신 모든 선대 어르신들이 이 온량거(행상)을 타고 하늘나라로 가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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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빠에서 이 곳집까지는 족히 300여 미터 정도 되는데 매우 좁은 골짜기 지형이다. 양쪽으로는 영지산으로 둘러싸인 벼랑으로 된 지세이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바로 곳집 옆에서부터 광현과 넘티 그리고 마릉당골과 마당재로 이어지는 넓은 산세가 펼쳐지는 이른바 호리병 같은 지대이다. 다시말해 고시빠에서 광현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좁으나 일단 들어가면 말그대로 넘티 즉, 넓은 골이 일제히 펼쳐지는 큰 골짜기가 나타난다. 이른바 광현이다. 아마 삼국지에서 촉한의 제갈량 승상이 호로곡(호리병) 지형에서 화공 전투를 준비해두고 위나라 재사이자 대도독인 사마의 중달을 유인하여 생포하려고 한 산세가 바로 이 고시빠에서 광현으로 들어가는 딱 이런 골짜기 모양새였을 것이다.
공굴 바로 위 정면 산세도 예사롭지 않다. 낭떠러지로 된 바위산이면서도 솔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서 벼랑과 바위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유년시절 공굴 위 신작로에서 보면 맞은편 가파른 벼랑과 바위들이 잘 보였는데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 벼랑에 나무들이 빼곡하고도 무성하게 자라서 산 전체를 뒤덮었다.
♤사진설명 : 위 첫번째 사진 고시빠 입구에서부터 광현(넘티)이 시작되는 곳집 맞은편까지는 지세가 처음에는 좁아졌다가 점차 넓어지는 형세이다. 위 두번째 사진처럼 양쪽으로 골짜기와 같은 협곡 모양새이다. 고시빠에서 곳집까지는 족히 300여 미터 정도의 거리가 될 것이다. 호리병 같은 지형이다. 다시말해 고시빠에서 광현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좁으나 일단 들어가면 말그대로 넘티 즉, 넓은 골이 일제히 펼쳐지는 큰 골짜기가 나타난다. 아마 삼국지에서 촉한의 제갈량 승상이 호로곡(호리병) 지형에서 화공 전투를 준비해놓고 위나라 재사이자 대도독인 사마의 중달을 유인하여 생포하려고 한 산세가 바로 이 고시빠에서 광현으로 들어가는 딱 이런 골짜기 모양새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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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선인들은 곳집이 있던 개울 건너편 영지산 기슭에 영지동천을 새기고 또 개울가 밭 속에 광현을 새길 만큼 이곳을 아름다운 장소로 묘사했다. 영지동천은 산과 내로 둘러쌓인 경치가 뛰어난 신선들이 사는 곳을 말한다. 고시빠에서 볼 때 앞에는 영지동천 각자에 나오는 영지산이 있고 공굴 밑으로는 마당재 아래 골에서부터 내려오는 맑은 시냇물이 있고 공굴 뒷편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 바위들 그리고 빼곡히 서 있는 솔나무들이 있었으니 운치가 제법 만만찮았을 것이다. 부내 골 가운데 그나마 개울물이 호젓이 흐르는 골짜기는 이곳 하나 뿐이었다.
환암이 살았던 460여 년 전 이곳 고시빠는 계량이 충분히 자호로 삼을 만한 풍광을 갖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계량은 아버지인 농암聾巖은 귀먹바위(이색암耳塞巖)에서 자호를 얻었지만 본인은 이 호젓하고도 아름다운 영지동천 고시빠에서 곶이바위(곶바위 혹은 꼬치바위)를 보고 원래 음을 쫓아서 "환암"을 자호로 삼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곶이바위는 이후 연음법칙에 의해 고지바위가 되고 이후 다시 언어의 변천에 의해 발음하기 쉬운 곶이빠 고지빠 혹은 고시빠 고숫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지게 되었다. 고시빠에서 "빠"라는 것은 "바위"라는 말이 축약되어 경음화 된 현상이다. 부내 사람들은 구여울도 "구열"이라고 불렀다. 엄청난 축약 현상이다. 구여울을 완전히 알고 있는 옛날 부내에 살았던 사람들만 이 축약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고시빠에 있던 "곳집庫집"과 "곶串"자 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이다. 곳집은 사전에서 "상여와 그에 딸린 여러 도구를 넣어 두는 초막이며 흔히 마을 옆이나 산 밑에 짓는다"고 정의하고 있다. 곳집은 "곳庫" 자만 한자로 쓰고 "집"은 한자를 쓰지 않는 훈독이다. 따라서 "곳집"은 한자로 "庫집" 이라고 쓰는 고유명사이다(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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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시빠의 지명 및 언어 변천사 : 곶바위-고지바위 -곶이바위에서 이후 발음하기 쉬운 꼬치바위ㆍ곶이빠ㆍ고시빠ㆍ고수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워짐]
※ 아래 사진들(2019~2023)은 "고시빠에서 넘티까지" 최근 주변 전경과 옛날 "각자"와 그리고 지세에 담긴 민담과 설화와 전설들을 담은 내용입니다.
♤영지동천골 삽지껄인 고시빠는 입향시조 이헌 공 때부터 분강촌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한 전설의 지명이다(♤2019년 12월에 필자가 촬영한 부내 고시빠 전경이다).
♤고시빠에서부터 시작해서 영지동천을 빠져나와 넘티재를 지나 마릉당골로 이어지는 적막한 골은 넓고도 깊어서 옛사람들은 이곳을 "광현" 혹은 "광티" 라고 일컬었다. 농암 선조 이래 지금까지 분강촌 사람들과 함께 한 저 고적한 바위와 그 등때기에 새겨진 "광현"이라는 각자가 처연하게 다가온다(♤첫번째 사진은 수몰 전 분강촌에 살았던 종친 승철이 할배가 2022년 2월 말경에 "광현"이 새겨진 바위 전경을 직접 촬영해서 보내주었다. 두번째 및 세번째 사진은 농암종택에 있는 광현과 영지동천 각자 사진이다).
♤영지동천 골 "광현"의 최근 전체 전경을 조망한 사진이다(사진은 2022년 2월 말경에 승철이 할배가 촬영해서 보내준 것이다).
도산서원 진입로 초입인 "농암가비" 옆에서 영지동천 골인 광현(넘티)을 내려다보면서 담은 전경이다. 파란 지붕 집 뒷밭 오른쪽 도랑길 안쪽 가장자리에 "광현" 각자를 새긴 바위가 누워 있다. 무성한 여름 나무들 잎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저 멀리 이 광현 골로 들어오는 골짜기 초입 지역을 고시빠라고 불렀다(♤필자가 2019년 한여름에 촬영했다).
♤온혜로 넘어가기 전에 오른쪽으로 우회전 하면 도산서원 들어가는 초입 길이 나온다(첫번째 사진). 이 길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면 "광현(廣峴ㆍ광티)" 골 절반 정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광현에서 현(峴)자는 "고개" 혹은 "재"를 말한다. 광현이란 말그대로 넓은 "고개" 내지 "재" 혹은 "골짜기"가 된다. 실제로 보면 지형이 넓은 "재"이자 골짜기다. 이 골과 지금의 도산서원 초입 길이 만난 주변 전역을 옛날에는 "넘티(넙티, 넘티재, 광현, 광티)"라고 불렀다. 송티가 "송티재" 혹은 "송현"으로 불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시빠에서 온혜로 넘어가는 마당재까지의 골짜기 전역을 광현 내지 넘티로 보면 될 것이다.
광현의 우리말은 넘티가 된다. "넙티" 속에는 "넓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자연히 광현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한글에서 "티(峙)"는 "고개 내지 언덕" 혹은 우뚝 솟은 "재"를 말한다. 넘티에는 이런 유래도 있다. 옛날에 퇴계(退溪) 선생이 분강촌에 종종 와서 농암(聾巖) 선생과 교류하다가 헤어지는 장소가 이곳 "넘티"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옛날 분강촌에 사는 나뭇꾼이 나무를 하기 위해 이 높은 재를 넘었다고 해서 "넘티" 라는 말이 생겼다는 민담도 있다. 모든 지명이 생겨나는 데는 여러 연유와 곡절이 있는 관계로 유래된 다양한 "설"과 시각을 가지고 보면 한층 더 흥미로울 것이다.
첫번째 사진 아스팔트 길이 끝난 지점 오른편 모롱이에 현재 "농암가비(聾巖歌碑)"가 세워져 있고(두번째 사진, 흰 승용차 오른편에 농암가비가 보인다. 세번째 사진은 농암가비를 확대해서 촬영한 사진이다) 그곳에서 20여 미터 들어가면 오른쪽에 수몰 전 분강촌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언덕 길이 나오는데 이 길을 "곤재"라고 불렀다(네번째 사진, 노란 가로석 뒤에 마을로 내려가는 언덕 길이 있었다. 다섯번째 사진은 곤재로 내려가는 언덕 지점이다. 옛날 수몰 전 이 언덕 밑으로 가파른 비탈길이 있었다. 지금은 우거진 잡목과 지형변화로 인해 경사진 언덕만 있고 모든 것이 다 변했다. 하지만 50년 전에 그 자리에 서 있던 사진 속의 소나무는 그대로 있었다. 청춘을 지나서인지 노송이 되었지만 여전히 푸르고 아름다웠다. 반가운 나머지 필자가 목례를 한 후 오랫동안 함께 포옹을 했다).
곤재는 "건재"가 언어의 역사성에 의해 발음하기 쉬운 상태로 변한 말이며 "하늘 건(乾)"에 "재"는 고개인 관계로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고개라는 뜻이 함의 돼 있다. 곤재 옆에는 송곳처럼 까푸러운 송곳배알(송곳밴달)이 있었다. 또 다른 설에는 "땅 곤(坤)"을 써서 "땅재"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건"과 "곤"의 뜻은 하늘과 땅이 되는 만큼 반대가 된다. 곤재 길 오른쪽에는 급경사 산비탈인 송곳배알이 마을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위에 있는 <그림>은 옛날 수몰 전 마을 전경이다. 그림 속 왼쪽 상단을 보면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언덕 길이 보이는데 이 언덕 길 주변 산비탈을 "곤재"라고 불렀다. 농암과 퇴계도 이 곤재를 수시로 넘나들며 왕래했던 길인 만큼 전설의 언덕 길이 아닐 수 없다. 이 그림은 종친 이택 화가(78)가 1992년에 그린 수몰 전 분강촌 전경인 "분강도"이다. 이택 선생은 경북교육청 장학관과 경주에 있는 화랑교육원 원장을 역임했다. 그림 속 좌로부터 긍구당, 농암종택, 분강서원, 신도비각, 애일당, 농암 각자 그리고 푸른 분강에 드리운 여러 명물 바위들이 어제 본듯 선하게 다가온다. 이택 선생은 농암 17대 현 종손인 이성원 박사의 사촌 형님이 된다. 이택 선생은 안동댐 준공 무렵인 1976년 8월15일 오후 네 시경에서부터 여섯 시경에 걸쳐 예안(옛날 예안 즉, 구예안)과 고향 분강촌(분천동, 부내)을 오가며 고향 산천이 수몰되는 서글픈 역사의 현장을 생생히 지켜본 목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마지막 여섯번째 사진은 수몰 전인 1960년대 분강촌 시절의 종가집 전경이다. 볏짚단과 곡식 낱갈이가 쌓여 있는 곳이 배꼽마당이다. 사랑채로 통하는 솟을대문과 마당 오른쪽에 자리한 구인수(나무 이름)도 보인다. 자세히 보면 구인수(고목나무) 뒤로 넘티재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곤재 길도 눈에 들어온다(위 <그림>의 왼쪽 상단에 보이는 구불구불한 길이 마지막 사진의 종가집 마당에 있는 구인수 뒤로 보이는 갈지자형의 언덕 길과 동일한 길이다. 이곳이 곤재 길이다). 곤재 길로 올라가면 지금의 도산서원 진입로에 있는 "농암가비聾巖歌碑"가 있는 곳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넓다란 넘티가 펼쳐진다(여섯번째 사진 출처: 농암종택).
분강촌이 수몰되면서 옛날 실거랑 너머 동구밭길[청고개 가는 길, 전평(앞들)] 입구, 천방 안쪽 솔밭 맞은편 새당나무 군락 속에 있던 서낭당(당집)을 고숫빠에서 송티재로 올라가는 신작로 오른편 산자락(은앙쟁이 맞은편에 있는 산자락)에 옮겨 지어서 제례를 이어가는 후대들의 낯설지 않는 서낭제 광경이 고향 잃은 나그네의 심금을 아리도록 후벼판다. 온 산천에 서려 있는 정령들이 보신다면 분강촌 사람들을 굽어살피리라(♤올해 정월 초하룻날 당집 제사를 주관한 종친 상우 아재가 촬영해서 보내주었다. 수몰 전 분강촌에서 매년 정월 초하룻날에 지냈던 당집 제사를 7여 년 전부터 다시 복원해서 지낸다고 했다. 다시말해 1976년 수몰 이후 40여 년 만에 성황당 제사를 다시 복원시킨 것이다. 그리운 옛사람들은 세월따라 다 별이 되었다. 처연한 모습이지만 이를 데 없이 아름다운 광경이다. 고마운 사람들...)
옛 분강촌 자취를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하지만 저 멀리 동취병산 속에 싸여있는 도산서원과 그리고 시사단과 섬마가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둥글게 잡히는 것을 보니 옛 한 때 이 넓은 강물 속에 분강촌(부내, 분천동)이 한 역사를 장식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유년시절 애일당 통마루 난간에 걸터 앉아 눈을 돌려 좌우를 훑어보면 배암이골(병암골)과 삼바꼬(삼밭골), 샅골(살골), 도산서원, 시사단, 섬마와 의인이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선하게 들어왔었다(첫번째 사진). 언듯보이는 분천바위와 감퇴바위의 흔적 만이 한때 이곳이 농암의 얼과 터전과 유산이 있던 자리임을 부표처럼 보여준다(두번째 사진).
고려말엽 1350년경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 공이 입향조인 분강촌은 다시 그 옛날 태고적의 깊은 전설 속으로 되돌아갔다. 억겁이 지난 먼훗날 이 공의 후손들이 망망대해 속에 깊이 잠든 부내 혼을 다시 깨워 일으키리라.
[♤사진은 수몰 전 부내 아랫마 비밑에 살았던 새벽할매 손자인 종친 재술이 아재가 3년 전 어느 겨울날에 강물 속에 잠긴 옛 분강촌을 촬영해서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