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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2 사순1주간 토 – 133위 086° 박익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133위 086° ‘하느님의 종’ 박익서
이름 : 박익서(세례명 미상), ‘하느님의 종’ 박의서·박원의 아우, 박상래 야고보(1935~2015) 신부 증조부
출생 : 1823년 수원(아산시 인주면) 걸매리
순교 : 1867년 3월(음), 교수(추정), 수원
박익서는 대대로 수원 걸매(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에 살던 밀양(密陽) 박(朴)씨 집안의 삼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기한’(基漢)인데, 아쉽게도 그의 세례명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1867년 수원에서 함께 순교한 박의서 사바와 박원서 마르코는 모두 박익서의 형들이다. 그의 집안은 선대에 이미 아산만 방조제 축조와 간척 사업을 주도하여 지역 사회에 도움을 준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1]
박익서의 집안에서 처음으로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조부 박종학(朴宗鶴, 1751~1836년)으로, 그 시기는 1784년 말에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고 이어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내포(內浦)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므로 박익서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게 되었고, 부친 박상환(朴常煥)도 어린 자식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걸매 박씨 집안이 처음 박해를 당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때였다. 이 박해로 교우들이 체포되자, 박익서와 형제들의 가족은 모두 박해를 피해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수원 포교가 다시 들이닥쳐 걸매 에 남아 있던 교우들은 물론 여사울에 살던 박익서와 형제들, 형 박원서 마르코의 아내 이 마리아, 사촌 박인서 등을 체포하였다.
이때 박익서의 형 박원서 마르코가 평소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순교를 다짐하는 말을 하자, 맏형인 박의서 사바 회장은 용기를 내서 “우리 삼형제 모두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자.”고 권면하였다. 이어 삼 형제는 체포된 이들과 함께 수원 관아로 압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삼형제가 한결같이 천주교 신자임을 굳게 증언한 뒤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7년 음력 3월이요, 당시 박익서의 나이 44세였다.[2]
순교한 뒤 박익서와 형제들의 시신은 당질인 박웅진 바오로 등이 거두어 아산 맹고개(현 충남 아산시 인주면 냉정리)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1988년 9월 20일에는 삼형제들의 무덤이 맹고개에서 확인 발굴되었으며, 같은 날 그 유해가 공세리 성당 경내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어 1996년 9월 19일에는 성당 경내의 무덤 옆에 순교 현양비가 건립되었고, 2007년 11월 20일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된 납골식의 순교자 현양탑이 완공 봉헌되었다.[3][3.1]
[註]__________
[1] 걸매 밀양 박씨 집안의 내력에 관해서는 하성래의 『무명 순교자들의 뿌리를 찾아서』(가톨릭출판사, 1995)와 『가장보고』(家狀寶庫, 필사본, 밀양 박씨 집안 소장) 등을 참조할 것.
[2] 『치명일기』, 정리 번호 389번; 『병인치명사적』, 11권, 50-51면; 24권, 12면. 『병인치명사적』 24권에는 박익서의 순교일이 1867년 9월 5일(음력 8월 8일)로 나온다.
[3] 차기진, 『공세리 성지·성당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2008, 32-36면. 삼형제들의 시신을 거두어 맹고개에 안장한 박웅진 바오로는 뒷날 함열 용왕동(현 전북 익산시 함열읍 석매리 점촌)으로 이주해 살았다.
[3.1] 맹고개 순교자 묘 발굴 및 이장 보고서
1. 문서 작성: 2006년 11월 15일 대전교구사연구소 김정환 신부
2. 발굴 및 이장 일시: 2006년 10월 30~31일
3. 장소: 충남 아산시 인주면 냉정리 맹고개 밀양 박씨 의암공파 문중 선영
성명 | 순교지 | 순교일 | 근거자료 | 이장 항아리 번호 | 비고 |
박인서 | 수원 | 1868년 8월 8일 | 증 163 | 1번 | 박의서의 사촌 |
이 마리아 | 수원 | 1867년 8월 8일 | 증 163 | 2번 | 박원서의 처 |
박제환 베드로 | 서울 | 1867년 | 증 163 | 발견되지 않음 | 박기천이라고도 함 |
이씨 | 수원(옥사) | 1868년 8월 8일 | 증 163 | 3번 | 박의서의 종제수 |
박홍갑 | 서울(참수) | 1866년 | 증 163 | 4번 | 박의서의 장남 |
조 모니카 | 수원(옥사) | 1868년 | 증 163 | 5번 | 박덕여(기덕)의 처 |
박화진 알렉산데르 | 서울 | 1868년 8월 15일 | 증 163 | 6번 | 박덕여의 장남 |
4. 발굴 및 이장 대상 묘(7기)
5. 발굴 및 이장 참여자
· 김진소 신부 : 호남교회사연구소장
· 이무삼 교수 :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
· 이원순 신부 : 대전교구 사무처장
· 오남한 신부 : 공세리 본당 주임
· 김정환 신부 : 대전교구사연구소장. 교구 서기 자격으로 참석
· 박홍신 : 박씨 종중 대표
· 박정래 : 종중 어른. 순교자 묘들에 대한 실 고증 및 증언자
· 공세리 본당 신자 24명(비디오, 사진 촬영자 2명 포함)
· 대전교구 홍보국 파견 2명(촬영)
6. 진행 상황
○ 2006년 10월 30일(첫째 날)
11시 45분 : 맹고개 박씨 문중 묘에 김진소 신부 일행 도착
11시 50분 : 시작 예절(성인 호칭 기도)과 관련자 소개. 공세리 본당 주임 신부인 오남한 신부가 주례
12시 00분 : 사무처장 이원순 신부와 홍보국 직원 도착
12시 05분 : 박인서의 묘(1번) 탐침 작업
12시 30분 : 점심 식사
13시 00분 : 이 마리아의 묘(2번) 탐침 작업. 봉분이 전혀 없는 곳에서 발견됨.
13시 10분 : 박인서의 묘(1번) 발굴 작업. 13시 50분에 완료
13시 50분 : 이 마리아의 묘(2번) 발굴 작업. 14시 45분에 종료
14시 45분 : 중간 휴식
15시 10분 : 이씨 부인의 묘(3번) 발굴 작업. 15시 40분에 종료
15시 50분 : 3기의 무덤 탐침 작업. 박홍갑으로 추정되는 묘(4번) 발견.
17시 05분 : 본당 신부의 마무리 기도(주모경, 영광송)
17시 25분 : 1~4번에서 나온 출토물(한지로 포장하여 박스에 넣은 것)을 본당 신부 차에 실어 공세리 성당으로 옮김
17시 38분 : 공세리 성당 도착
17시 44분 : 1~4번의 출토물 항아리를 성당 피정의 집에 모심.
○ 2006년 10월 31일(둘째 날)
9시 40분 : 시작 예절
9시 50분 : 박홍갑의 묘(4번) 주변의 다른 봉분들 파묘 작업. 봉분이 있는 3기의 묘를 파묘하였으나 모두 생땅이었음
10시 00분 : 박제환의 묘로 추정되는 봉분(박제현 베드로 순교현양비 주변)을 파묘하였으나 생땅이었음
10시 40분 : 합장되어 있는 조 모니카(5번)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박덕여의 묘 파묘. 문패 크기의 묘석만 발견됨
11시 05분 : 박화진의 묘(6번)를 파묘하였으나 빈 무덤이었음.
14시 00분 : 공세리 성당 피정의 집에서 사무처장 신부가 1~6번의 출토물을 봉인하여 항아리에 넣음
· 항아리 1번 : 박인서의 묘로 추정되는 곳에서 거둔 나무관에 부착되어있었던 옹이 조각 12점과 상·중·하반신의 부토
· 항아리 2번 : 이 마리아의 묘로 추정되는 곳에서 거둔 상·중·하반신의 부토
· 항아리 3번 : 이씨 부인의 묘로 추정되는 곳에서 거둔 상·중·하반신의 부토
· 항아리 4번 : 박홍갑의 묘로 추정되는 곳에서 거둔 상·중·하반신의 부토
· 항아리 5번 : 조 모니카의 묘석과 진토 일부.
· 항아리 6번 : 박화진의 묘에서 거둔 부토
14시 39분 : 6개의 항아리를 교구 대표의 인준과 함께 숯 처리와 함께 완전봉인하여 성체조배실에 모시고 작업 종료. 이후 사무처장 신부가 오남한 신부에게 항아리를 더 안전한 곳으로 모시도록 하고, 항아리 뚜껑에 안전한 관리를 위한 추가 봉인을 요청함.
○ 2006년 11월 7일(화)
이무삼 교수의 재확인 요청에 따라 박인서의 묘에서 나온 출토물(항아리 1번)을 공세리 본당의 부회장과 시설분과 위원장이 전북대학교 내 해부학부 이 교수에게 가져감.
○ 2006년 11월 10일(금)
김정환 신부가 호남교회사연구소에서 김진소 신부와 이무삼 교수를 만나 출토물(항아리 1번) 최종 결과를 확인함. 김정환 신부가 공세리 본당을 방문하여 이 출토물을 오남한 신부에게 전달하고 결과를 알려줌.
7. 발굴 작업 내용과 결과
1) 박인서의 묘(항아리 1번)
박씨 문중 묘는 총 17단(열)의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데 박인서의 묘는 제6단의 맨 왼쪽에 봉분과 함께 있었다(제5단의 ‘이씨 부인 순교현양비’ 바로 아래에 위치). 이미 1988년에 공세리 성당 구내로 이장한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삼위 순교자의 묘와 같은 단에 위치해 있었다.
파묘 결과 홍대(관 뚜껑) 조각 2개와 관의 나무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이무삼 교수는 관의 나무 조각 일부와 옹이 부분을 사람의 뼈로 판단하였었다. 하지만 11월 7일 이후의 재확인 결과 모두 나무 조각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나무 조각들은 자연 상태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며 관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2) 이 마리아(항아리 2번)
박씨 문중 묘 제7단에 있는 ‘이마리아 순교현양비’(비석만 있고 봉분은 없음) 바로 뒤편을 탐침하였으나 한 번도 판 적이 없는 생땅이었다. 하지만 뒤편 2미터 지점, 즉 제6단과 제7단 사이를 나누는 경사면에서 무덤 자리가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무덤을 팠던 자리는 분명한데 아무것도 출토되지 않아 흙만 거두어 한지로 싸서 항아리 2번에 넣었다. 이 마리아가 박원서 순교자의 부인이므로 제6단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하여 이 자리를 이 마리아의 묘로 보았다.
3) 이씨 부인의 묘(항아리 3번)
박씨 문중 묘 제7단에 아무런 표식이 없고 봉분만 있는 무덤이 맨 왼쪽, 즉 ‘이마리아 순교현양비’ 왼쪽에 있었는데 이 무덤을 이씨 부인의 묘로 추정하였다. 묘를 판 자리는 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으며 흙만 거두어 한지로 싸서 항아리 3번에 담았다.
이 묘는 무덤 판 자리의 방향이 봉분과는 달리 정면에서 1시 방향(남남동향)으로 틀어져 있었다. 본래 산비탈의 방향에 따라 남남동향으로 무덤을 팠는데 후에 봉분을 하면서 주변의 봉분과 같이 모양을 맞춘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적으로 종중 내력에 의하면, 이 선영 전체는 곤좌(坤坐)로 모셨음을 고증함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묘의 방향이 일치하였다.
제5단에는 봉분 없는 ‘이씨 부인 순교현양비’가 있다. 그러나 이 묘비는 실제의 무덤 자리를 알지 못하고 단지 종중에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4) 박홍갑의 묘(항아리 4번)
박씨 문중 묘 제8단에 봉분이 없는 ‘박홍갑 순교현양비’가 있다. 뒤편 2m 지점 봉분 모양이 전혀 없는 곳에서 묘가 발견되어 이를 박홍갑의 묘로 추정하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으며 흙만 거두어 한지로 싸서 항아리 4번에 담았다.
이 묏자리는 ‘이씨 부인의 묘’와 방향이 같았다(남남동향). 묘의 시신의 길이가 다른 것에 비해 1/3정도가 길었는데 실측 결과 대략 185cm였다.
5) 박제환 베드로의 묘
박제환의 묘로 추정되는 봉분을 파묘하였으나 한 번도 판적이 없는 생땅이었다. 종중 고증에 의하면, 순교자는 절두산에서 집단으로 순교를 당하였기에 미처 시신을 거두지 못한 사실을 감안하면 이 선영에 모시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6) 조 모니카의 묘(항아리 5번)
조 모니카는 박덕여의 부인으로 합장되어 있기에 박덕여(기덕)의 묘를 파묘하였다.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고 다만 묘석이 하나 묻혀 있었다. 묘석의 내용은 세로로 쓰여 있었다.
이 묘석은 오남한 신부가 복사품을 만들어 본당 내 순교자 현양탑에 모시기로 했고, 진품은 향후 봉헌할 박물관에 전시하기로 합의를 한 후 공세리 본당으로 옮겼다. 일반적으로 묘석은 사발과 함께 묻혀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찾아보았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7) 박화진 알렉산데르의 묘(항아리 6번)
박씨 문중 묘적도에 박화진의 묘로 표시된 곳을 파묘하였으나, 아무것도 없는 생땅이었다. 박화진의 손자가 해방 후 이곳으로 이장해왔는데 봉분은 1976년에 다시 만들었고 묘비는 1999년에 세웠다는 고증을 들음. 이장 당시부터 흙이나 유해의 일부분(머리카락 등)만을 모셔 왔기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거둔 흙을 항아리 6번에 담았다.
8. 첨부 자료
1) 박인서의 묘(항아리 1번) 출토물에 대한 보고서(이무삼 교구 작성)
2) 박씨 문중 묘 배치도
◆첨부 1. 박인서의 묘(항아리 1번) 출토물에 대한 보고서(이무삼 교수 작성)
가) 조사 대상 및 목적
① 대상 : ‘맹고개 순교자묘 공세리성당 이장’에 따른 작업 중 1번 묘 (박인서의 묘)에서 출토된 유해 중 홍대라고 써진 창호지 묶음 1개 (내용물 : 나무 조각 2점), 유골이라 써진 창호지 묶음 1개 (내용물 : 유골이라 추정되는 유물 10점). 이중 유골이라 써진 창호지 묶음 속의 내용물 즉 유골이라 생각되는 유물 10점,
② 조사물 인수 날짜 및 장소 : 11월 7일 오후 1시 전북대 의과대학원 2호관 104호 해부학교실
③ 조사물 운반자 : 공세리 성당 부회장님 외 1인
④ 목적 : 대상물이 뼈인지 아닌지를 판별하고 뼈일 경우 신체의 어느 부위 인가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 목적임.
나) 조사 방법
조사물에 붙어 있는 흙을 솔로 털어 제거하고 육안으로 관찰하여 일차 판별한 후 물에 씻어도 좋을지를 판단한다. 물에 씻어도 손상이 없을 것으로 판단될 경우 물에 씻어 좀 더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하여 입체현미경으로 구물(구물조직, 그물세포와 그물섬유로 이루어진 결합조직. 지라·골수·림프샘 따위에서 볼 수 있다)의 미세구조, 구성 물질의 물리적 성질 등을 조사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잘린 단면에 자외선을 조사하여 뼈인지 판단하고 일부를 떼어내어 칼슘 성분 함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화학적 분석을 의뢰한다.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다른 해부학 교수나 체질인류학 전공 교수의 자문을 받는다. 털어낸 흙은 여과지로 걸러 말린 다음 따로 보관한다.
다) 조사일지
● 11월 7일 (번호는 사진 참조)
▶1번 : 종아리뼈(경골)의 중간 부분(경골체)으로 보였던 조사물.
흙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종아리뼈(경골)의 중간 부분(체)으로 보였으나 세척 후 입체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뼈의 특징인 치밀질(뼈에서 뼈 층판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단단하게 된 부분. 뼈의 둘레에 형성되어 있고 단면에서는 희게 보인다)과 해면질(해면처럼 구멍이 있는 조직)의 모양은 관찰되지 않고 세로로 된 층층의 나무결이 관찰됨. (모양과 크기는 아래 사진 및 그림 참조)
▶2번 : 종아리뼈(경골)의 아래 끝부분 즉 안쪽복사뼈(내과)로 보였던 조사물.
흙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종아리뼈(경골)의 아래 끝부분 즉 안쪽복사뼈(내과)로 보였으나 세척 후 육안과 입체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뼈의 특징인 치밀질과 해면질의 모양은 관찰되지 않고 나무옹이와 층층의 나무결이 관찰됨. (모양과 크기는 사진 및 그림 참조)
● 11월 8일
▶3번 : 종아리뼈(경골)의 아래 끝부분 즉 안쪽복사뼈(내과)로 보였던 조사물
흙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종아리뼈(경골)의 아래 끝부분 즉 안쪽복사뼈(내과)로 보였으나 세척 후 육안과 입체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뼈의 특징인 치밀질과 해면질의 모양은 관찰되지 않고 작은 나무옹이와 나무테 모양의 나무결이 관찰됨. (모양과 크기는 사진 및 그림 참조)
▶4번 : 자뼈(척골)의 위 끝 일부분 즉 팔꿈치머리(주두)로 보였던 조사물
흙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뼈(척골)의 위 끝 일부분 즉 팔꿈치머리(주두)로 보였으나 세척 후 육안과 입체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뼈의 특징인 치밀질과 해면질의 모양은 관찰되지 않고 나무옹이와 층층의 나무결이 관찰됨. (모양과 크기는 사진 및 그림 참조)
▶5번 : 노뼈(요골)의 맨 아래 끝부분 즉 붓돌기(경상돌기)로 보였던 나무
흙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노뼈(요골)의 맨 아래 끝부분 즉 붓돌기(경상돌기)로 보였으나 세척 후 육안과 입체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뼈의 특징인 치밀질과 해면질의 모양은 관찰되지 않고 나무옹이와 나무테 모양의 나무결이 관찰됨. (모양과 크기는 사진 및 그림 참조)
▶6번 : 노뼈(요골)의 맨 아래 끝부분 즉 붓돌기(경상돌기)로 보였던 나무
흙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노뼈(요골)의 맨 아래 끝부분 즉 붓돌기(경상돌기)로 보였으나 세척 후 육안과 입체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뼈의 특징인 치밀질과 해면질의 모양은 관찰되지 않고 나무옹이와 나무결이 관찰됨. (모양과 크기는 사진 및 그림 참조)
▶7번 : 종아리뼈(비골)의 중간 부분(비골체)으로 보였던 나무
흙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종아리뼈(비골)의 중간 부분(비골체)으로 보였으나 세척 후 육안과 입체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뼈의 특징인 치밀질과 해면질의 모양은 관찰되지 않고 세로로 된 층층의 나무결이 관찰됨. (모양과 크기는 사진 및 그림 참조)
▶8번 : 목뼈(경추)와 손목뼈(수근골)의 일부분으로 보였던 나무
흙을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목뼈(경추)의 일부분(비골체)으로 보였으나 세척 후 육안과 입체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뼈의 특징인 치밀질과 해면질의 모양은 관찰되지 않고 층층의 나무결과 절단면에서 송진이 관찰됨.
또한 손목뼈(수근골)라 생각되었던 2개의 조사물에서도 나무의 특징인 나무결이 관찰됨. (모양과 크기는 사진 및 그림 참조)
● 11월 9일
위의 결과를 정리하고, 그 결과를 호남교회사연구소장 김진소 신부에게 전화로 보고하였으며, 11월 10일 오후 1시경에 전북 완산구 비봉면 소재 호남교회사연구소에서 만나 최종 결론을 내리기로 함.
● 11월 10일
조사물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전주교구 전북 소재 호남교회사연구소에서 호남교회사연구소장 김진소 신부, 대전교구사연구소 김정환 신부, 전북의학대학원 해부학 교수 이무삼 등 3인이 오후 1시에 모여 관찰한 소견을 종합하여 도출한 결과 다음과 같다.
1) 발굴 당시 조사물에 흙이 묻어 모양과 질이 뼈와 매우 흡사하였으나, 흙을 제거하고 무늬, 나무옹이, 결, 성질 등을 참고하여 볼 때 조사물 모두가 뼈가 아니고 나무인 것으로 결론을 내림.
2) 조사물의 두께가 거의 일정한 것으로 보아 관을 만든 나무판 중 부식이 비교적 잘되지 않는 나무옹이나 일부분일 것으로 생각되며, 관의 다른 부분은 부식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측됨.
라) 정리
‘맹고개 순교자묘 공세리성당 이장’에 따른 1번 묘 (박인서 순교자의 묘)에서 출토된 조사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 조사 대상물 모두가 뼈가 아니고 나무인 것으로 결론을 내림.
② 조사물은 관을 만든 나무판의 일부인 것으로 추측되며 관의 다른 부분은 부식된 것으로 추측됨.
③ 따라서 출토물이 뼈가 아니므로 뼈의 위치 판정은 의미가 없음.
마) 유품의 반환
대전교구사연구소 김정환 신부가 11월 10일 호남교회사연구소에서 공세리 성당으로 운반.
◆별첨 ☞ 아래
▲별첨 1. 조사물의 사진
▲별첨 2. 조사물의 개별 계측치 그림
위와 같이 보고 합니다.
2006년 11월 14일
전북대학교 의학대학원 해부학교실
교수 이 무 삼
▲별첨 1. 조사물의 사진
1번 : 종아리뼈(경골)의 중간 부분(경골체)으로 보였던 것
2번 : 종아리뼈(경골)의 아래 끝부분 즉 안쪽복사뼈(내과)로 보였던 것
3번 : 종아리뼈(경골)의 아래 끝부분 즉 안쪽복사뼈(내과)로 보였던 것
4번 : 자뼈(척골)의 위 끝 일부분 즉 팔꿈치머리(주두)로 보였던 것
5번 : 노뼈(요골)의 맨 아래 끝부분 즉 붓돌기(경상돌기)로 보였던 것
6번 : 노뼈(요골)의 맨 아래 끝부분 즉 붓돌기(경상돌기)로 보였던 것
7번 : 종아리뼈(비골)의 중간 부분(비골체)으로 보였던 것
8번 : 목뼈(경추)의 일부와 손목뼈(수근골)로 보였던 것
기타 : 손목뼈(수근골)라 생각되는 2개의 구조물도 나무로 판명
▲별첨 2. 그림 조사물의 개별 계측치 그림
◆첨부 2. 박씨 문중묘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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