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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온유(1)
2023년 9월 17일 / 마 11:28-30, 민수기 12:1-15, 시편 37편 / 찬송 : 529장
마 11:28-30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1. 온유의 뜻
온유(溫柔)의 사전적 의미는 ‘인품이 온화하고 순직함, 부드럽고 유순,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영적인 온유함은 이렇게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많은 사람이 깃들일 수 있는 포근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온유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거침돌이 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다. 매사에 모든 것을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이해하고 포용해 주며,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온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프라우스’로 사물의 ‘부드러운’, 짐승들의 ‘유순한’, 사람들의 ‘온화한’, 징계와 관련해 ‘관대한’이란 뜻이 있다. 그래서 온유는 잘못 이해하면 약하고 비겁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가령 사나운 개를 잘 훈련해 유순하게 되었을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개가 유순하게 된 것은 결코 약하여진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인에게 복종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던 인간들이 변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갖는 마음의 자세가 바로 온유함이다. ‘온유’가 성령의 열매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다. 결국 ‘온유’란 제멋대로 날뛰던 사람들이 성령에 의해서 그 욕망을 조절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되며 낮아진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가 변하기 전에 비하면 대단히 부드럽고 관대하며 잘 참아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나약함으로, 줏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았기 때문에 강한 자요, 자유로운 자이다. 그 인격의 특성으로 ① 외적으로 부드러우면서도 내적으로는 강하고, ② 확고한 생의 목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선적이 아니며, ③ 줏대가 없어 보이면서도 나름대로 확고한 생의 목적과 의미를 갖고 살며, ④ 언제나 내적 자유함을 지니고 있다.
2. 히브리어로 ‘온유한 자’는 ‘아나윔’으로, 우리말로는 ‘가난한 자’ 혹은 ‘겸손한 자’로 번역이 되었다. 이사야 61:1에 보면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 ’고 하였는데, 여기에 가난한 자로 번역된 말이 ‘아니윔’이란 단어이다. 또 스바냐서 2:3에 보면 ‘주의 명령을 따르면서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사람들아, 너희는 주를 찾아라’라고 하였는데, 겸손한 자들로 번역된 말이 역시 ‘아나윔’이란 단어이다. 다시 말해 ‘아니윔’이란 ‘가난한 자, 겸손한 자, 그리고 온유한 자’로 번역함으로 이 말들은 서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처음에 이 말은 순전히 ‘가난’이란 뜻으로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과 권력 있는 자들에게 눌려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 이것이 예언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종교적인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고, 거기서 점차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다 제하여 버리시고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남겨 그들을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룩하여 가신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이 말은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과 같이 교만한 자들과 대조적인 말로 쓰인다.
3. ‘온유’의 반대말은 교만이다.
교만한 자란 자기가 가진 조그마한 재물이나 권력을 과시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못하며, 자기보다 약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이다. 온유한 자란 꼭 이와 반대되는 사람을 말한다. 온유한 자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요, 그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자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자이다. 그래서 온유를 말할 때 겸손과 관용이란 말이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에베소서 4:2에 보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 ’라 했고,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라고 하였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라고 말씀하셨다. 또 고린도후서 10:1에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라고 하였다.
여기서 온유한 사람이란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한 자요, 온전히 그에게 의지하는 자이며,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자기를 자랑치 않으며 관용을 베풀며, 억울함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2. 좀 더 구체적으로 온유한 자가 어떠한 자인지 시편 37편을 통해 찾아본다.
시편 37편은 악인과 그들에게 고난당하는 의인들을 대조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한때는 잘 되는 것 같으나 결국 땅을 차지할 사람들은 의인들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시에서 의인들을 여러 말로 표현하는데, ‘야훼를 기대하는 자’, ‘온유한 자’, ‘가난하고 궁핍한 자’, ‘정직한 자’, ‘완전한 자’, ‘화평한 자’, ‘주의 복을 받는 자’, ‘성도’ 등이다. 그러나 이들이 교만한 자들, 불의를 행하는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에 의하여 억압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에서 ‘온유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 37편을 한 절로 요약하면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이다.
1.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자들이란 첫째로 야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말한다.
이 시에서 여러 가지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야훼 하나님을 의뢰한다, 기뻐한다, 기대한다’라는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온유한 자란 이 세상에 재물이 없거나 있어도 그 재물에 의지하려 하지 않는 자이다. 온유한 자란 이 세상의 어떤 연줄을 자랑하려 하거나 그것을 의지하려 하지 않는 자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그만을 기대하는 자이다. 야훼께서 그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지 무조건 순종하며 나가는 자이다.
그러나 그가 가진 확신은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며, 그의 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시며, 그의 손을 붙들어 주시어 아주 엎드러지지 않게 하시며, 마침내 땅을 차지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는 그런 시대에 살면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온유한 자가 불평하지 아니하며 참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로서 온유는 또 다른 열매인 오래 참음과 관계가 있다. 억울함이나 고난을 당하면서 화내지 않고 참아내는 힘이 바로 온유이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유한 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였다.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고난을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셨고, 그에게 순종하셨으며, 낙심하지 아니하시며 끝까지 가지신 확신은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세력을 꺾고 예수님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을 자라게 하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가져오게 하신다는 것이었다.
■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온유하고 친절했던 이의 표본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생각할 수 있다. 그에게는 많은 친구가 있었지만 동시에 적도 많았다.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스탠톤(Stanton)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신문 지상을 통해 링컨을 ‘교활한 어릿광대’라고 욕하였는가 하면, 공중 석상의 연설에서 링컨을 ‘오리지널 고릴라’라고 조롱하면서 ‘여러분은 고릴라를 보러 아프리카까지 가실 필요가 없다. 일리노이의 스프링필드에 가면 멋진 고릴라를 감상할 수 있다.’라고 까지 비꼬았다. 그런데 후일 링컨이 내각의 각료를 임명할 때 놀랍게도 그를 국방장관으로 발표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는 사람들에게 링컨은 조용히 ‘그 자리에는 그 사람이 적임자’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링컨이 암살되어 그의 시체 앞에 선 스탠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꿇어 엎드려 말하였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았던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누워 있노라.’
온유한 자는 결코 나약하거나 무기력한 자가 아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나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믿음을 가진 이상 그 누구보다도 강한 자이다.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의미에서 누구나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이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자는 온유한 자일 수 없다. 저들은 결국 불의를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악을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함을 뜻한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여 권력을 얻고자함도 아니오, 돈 많은 기업인을 예수 믿게 하여 물질적인 혜택을 누리고자함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기뻐하며 그만을 의지하여 이 땅 위에 진리를 세우고자 할 뿐이다.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온유한 자란 결국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린 자요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소망을 둔 사람이다.
히브리서에 설명한 대로 모세가 영광의 자리인 바로궁의 왕자의 자리를 거절하였고, 일시적인 죄의 향락을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으며, 그리스도가 받은 것과 같은 모욕을 애굽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란 이 세상의 어떤 영광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귀하게 여기는 자이다.
2. 온유한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면서 선을 행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불의한 자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에서 선을 행하며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흔히 불의에 휩쓸리고 악과 타협하게 되기 일쑤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아무리 악으로 기울어진다고 하여도 온유한 자는 그들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법을 따라 진리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이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살면서 쉽게 선행을 단념하여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 어두워지고 더욱 모순된 일이 생기고 불의와 악이 활보를 한다.
온유한 자는 어떤 상황에서나 선을 행하기를 힘쓰며, 공의를 말하며, 마음에 간직한 하나님의 법을 따라 행함으로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는 자이다. 길든 개가 오직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는 것처럼,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그 말씀만을 따라 살아간다.
온유한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 계시에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서는 닫혀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대하여만 열려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자로 취급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고귀한 자로 인정을 받는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든 상관치 않으시고 진리의 길을 행하여 가신 일을 생각할 때 그는 온유한 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신실’ ‘충성’과도 관계가 있다.
3. 온유한 자는 은혜를 베풀고 남에게 항상 나누어주는 사람이다.
시 37:26 / 바르게 사는 사람 언제나 이웃에게 주어가며 살고 늘 빌려주며 사나니 그의 후손도 늘 복 받으며 살리라.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욕망이 없기에 언제나 적은 소유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남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다. 그는 언제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리라 믿고 살아갑니다.
이런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 악을 행하는 자들, 불의한 자들을 끊어버리시기 때문이다. 풀과 같이 속히 베어버리시며. 그들을 연기와 같이 사라지게 하시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이 온 땅을 다 차지할 것처럼 무성해도 하나님이 곧 그들을 베어버리신다고 하였다.
시 37:35-36 / 한번은 독재자였던 어떤 못된 것을 본 적이 있었지. 정말 무성한 송백처럼 모든 사람 위에서 군림하더니 36) 얼마 뒤 지나가다가 다시 쳐다보았지만 찾아볼 수 없었네. 아무리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네.
그러므로 자연히 온유한 자들만이 남아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시 37:34 / 여호와께 희망을 두어라. 주께서 이르시는 길 그대로 지켜나가라. 그러면 너를 드높여 땅을 차지하게 하시리라. 못된 짓 일삼는 것들이 고꾸라지는 꼴 똑똑히 보게 되리라.
온유한 자들은 악인들이 심판받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짧은 역사 속에서 여러 번 이를 보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한 자만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시편 37편에는 땅을 차지한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틀림없음을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다. 악착같이 부와 권력을 갖고자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 땅에서 밀려나고, 나누어주면서 산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결국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아니 결국 그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나라로서 부하고 교만한 자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망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그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고, 오직 온유한 자, 겸손한 자, 가난한 자만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우리가 이 악한 세대에서 불의에 휩쓸리지 않고 어떻게 온유한 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느냐?’이다.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가 지고 있던 무거운 죄짐을 벗어버릴 때 가능하다.
마 11:28-30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리스도의 온유함 안에 거할 때, 세상으로 향하던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쉼을 얻고 온유함을 얻게 될 것이다. 욕망을 모두 버린 가난한 마음에 겸손과 온유가 깃들게 되기에 그곳에 안식과 평화가 찾아온다. 이 땅에서 우리가 집착하며 소유하려던 모든 것,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 바로 온유함이다. 온유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용기가 없으면 갖기 어려운 덕목이다.
3.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온유함에 대해 칭찬하신 사람이 모세이다. 민수기 12:3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이는 그가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고 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심으로 나타내 주신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그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모세에게 갖은 원망과 불평은 물론 하나님 앞에 죄악을 행하며 심지어 대적까지 했으니 이런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이나 광야 생활을 했다는 것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월등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모세는 아무리 살펴봐도 위대한 지도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왔던 여러 사건이 모세가 위대한 선지자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라는 말이 나오게 된 동기는 이렇다.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에서 신음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찍이 당신의 일꾼들을 준비하셨다(출 2장). 그 일꾼은 다름 아닌 레위 지파 가문의 모세이다. 특히 하나님은 모세의 사역을 돕도록 특히 말을 잘하는 형인 ‘아론’과 어머니 요게벳과 함께 모세를 돌보아 주었던 누나 ‘미리암’을 붙여주셨다. 그래서 미리암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여선지자’(출 15:20-21)로, 아론은 우림과 둠빔이 부착된 흉패를 입은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민 2:1; 출 28:15, 30)으로서,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모세’를 돕도록 하였다(출 3:10).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도착하기까지 모세를 중심으로, 아론과 미리암과의 호흡이 잘 맞았다. 그런데 출애굽 이후 오랜 광야 생활을 방황하면서 이들 세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다, 고기와 마늘을 달라, 광야에서 목말라 죽느니 차라리 애굽 땅으로 돌아가겠다.’ 하며 민심이반 현상이 일어나자 동역의 관계가 극도로 흔들렸다.
어려울 때일수록 가족관계를 떠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동역자인 세 사람이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 민심이반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근거 삼아 누이 미리암 여선지자가 모세를 비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민 12:2 / “여호와께서 모세하고만 말씀을 나누셨느냐? 우리하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하고 투덜거렸다.
거기다가 1절에서는 모세의 첫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 그가 다시금 아내를 취함에 있어 이방나라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을 문제로 삼아 모세의 인격적인 면까지 도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아가 모세보다 앞서고자 했던 아론과 미리암에게 하나님의 징벌이 가해졌다. 미리암에게 나병이 발생한 것이다.
2. 아론과 미리암이 보여준 잘못된 행위들
1) 영적 교만 때문에 불행을 당하였다(2절).
아론과 미리암은 ‘여호와께서 모세하고만 말씀을 나누셨느냐? 우리하고도 말씀하지 않으셨느냐?’며 자기들에게도 모세와 같은 능력과 권위가 있다고 주장을 하였다. 이는 지도자에 대한 도전이며 추악한 시기심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인간이 타인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이유는 상대방과 자신을 상대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과 상대방을 비교 평가하기보다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은사와 직능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 평가를 통해 타인과의 비교의식을 극복하고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고유한 인격과 직임을 인정하며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롬 12:3-8).
사실 아론은 우림과 둠밈이 부착된 흉패를 입은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으로, 미리암은 ‘여선지자’로 이스라엘 여인들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들에게 주어진 독특한 권한이자 달란트로 그 누구도 넘겨보지 못할 귀한 것이다. 특히 아론에게 주어진 대제사장 권한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 고귀한 것이었다(민 16:1-22, 민 16:23-35).
민수기 16장은 민수기 12장에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대적하여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다가 회복한 사건 후에 발생했던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도전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론에게 주어진 대제사장 권한과 제사장 권한은 매우 귀중한 것인데,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모세가 가진 영력과 지도력을 탐낸 나머지 질투의 화신과 교만의 포로가 되어 결국은 지도자 모세를 비방하였고 이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만약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에게 맡겨진 달란트가 자신들의 은사와는 전혀 차원이 달랐고, 또 세상 모든 권위와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롬 13:1)을 인정하기만 했더라도 질투와 교만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비방(誹謗) 때문에 불행을 당했다(1절).
모세는 첫 번째 아내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인 ‘십보라’가 사망한 직후 구스 출신의 여인을 새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놓고 미리암과 아론이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違背)된다고 생각하여, 모세를 극렬히 비난했다. 물론 하나님은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셨지만, 그것은 추악한 우상 문화에 찌든 가나안 일곱 족속에 대한 사전 조처였다(신 7:1). 따라서 모세의 결혼은 율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거기다가 ‘구스’는 보통 ‘에티오피아(Ethiopia)’를 가리키나, 발음에 따라 ‘미디안’이 된다. 미디안으로 보게 된다면 모세의 첫째 아내인 ‘십보라’ 역시 구스 여인이 됩니다. 그러나 십보라와의 결혼은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전인 미디안 광야 생활을 할 때였다고 말하지 않고, 십보라가 죽은 후 에티오피아 여자와 재혼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다. 형평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너무 이기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비방이었다.
하지만 저들이 모세를 비방한 실제 속마음은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들로부터 영도자(領導者)로 인정함을 받으니까 평상시에 마음에 담고 있었던 아니꼬운 시기심이 발동하여 비방(誹謗)한 것이다. 그들은 모세를 질책함으로 자신들도 모세와 같은 신적 권위와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미리암과 아론 자신들이 모세보다 못한 게 없으므로 이스라엘에 대한 지휘권을 공유하자는 말이다. 모세 혼자서 결정하고 명령하기보다는 자신들과 함께 의론하여 결정도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아론과 미리암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 모세는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아론과 미리암에게 권위의식을 나타내지 않았다. 매사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하달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다. 만일 모세가 인간적으로 잘못한 것을 아론과 미리암이 책망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세를 변명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비방(誹謗)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헐뜯고, 비판하고, 폭로하는 일로 성도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형제를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약 4:11). 이것은 예수님이 금하신 일이다(마 7:1). 주머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신들은 모세와 비교할 때에 더 많은 죄를 짓고 있음에도 시기와 질투에 휩싸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비방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3) 모세를 동생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하고 비방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원인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자신들의 동생으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본 거룩한 사역 중심이 아니라 인본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리암은 과거 나일강에서 자신의 도움이 없었다면(갈대 상자에 담겨있던) 모세가 물귀신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의 크신 지도자가 되어 일할 수 있는 배경에는 자신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과 그런 큰일을 행한 자신에 대하여 모세와 백성들이 알아주지 않고 있다는 인간적인 마음이 서운함과 원망과 비방의 화살이 되어 모세를 향해 퍼부은 것이다.
4. 하나님의 종을 함부로 비평하지 마십시오.
미리암의 말은 진실하지 않았고 덕스럽지 못했다. 오늘날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에게 악담을 늘어놓는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특별히 일으켜 세우시사 거룩한 사명으로 옷 입혀 주셨으며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하였는데, 모세를 향해 악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다.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의 종들 중 아무리 미약하고 미천한 종에게라도 악담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오늘날 목회 중에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해 고통받는 목사님들이 많다. 그래서 힘든 일도 하시는 분들이 있고 또 그 행색이 변변치 못한 분들도 있지만 그래도 그분들을 은연중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종이 잘못을 저지르면 하나님께서 그 종을 친히 다루실 것이다. 그때 성도들은 미리암처럼 자기 자신들에게 상처를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하나님의 종을 대하는 문제를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거역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안타깝다. 물론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럴만한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들도 실수를 범한다. 그들도 잘못된 정신과 기질을 들어냅니다. 게다가 자신을 지저분하게 변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종들에게 비방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무서운 범죄 행위임을 느끼고 조심해야 한다. 진실로 우리는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는 말을 중대하고도 심각하게 느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장인 사울 왕을 대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귀한 왕으로 여기며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고 또한 그의 옷자락을 벤 것까지 마음 아파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을 사울 왕은 알고 다윗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 후손들을 부탁하면서 그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다.
가능하면 우리는 상대방의 장점만을 보려고 노력해 보자. 그리고 가능한 한 성경에 나타난 모든 방법으로 잘못된 것을 용서하고 장점을 강화하고 발전시키기를 추구해야 한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다가 깨끗하게 고침을 받는 기적의 과정에서 가장 큰 영적 교훈은 모세가 보여준 온유함과 기도의 능력이다.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모세와 같이 비방을 받고 여러 가지 핍박도 겸하여 받게 됩니다.
그럴때에라도 모세의 온유함과 사랑함을 본받아 상대를 위해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나아가 미리암과 아론처럼 ‘교만’과 ‘비방’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나의 욕심을 따라 행하다가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나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 때문에 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가정이 분열되며 개인들이 어려움 당하는 일이 없도록 서로가 조심하며 날마다 말씀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며 돌아보는 귀한 일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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