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27 사순5주간 월 – 쾌락의 정원에서
“한낮에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수산나는 남편의 정원에 들어가 거닐곤 하였다.”(다니 13,7).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과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라는 두 작품을 본다.[1]
세 폭의 그림 ‘쾌락의 정원’은 시간상으로 과거·현재·미래를, 공간상으로는 낙원·세상·지옥을 그린 그림이다.
낙원은 ‘타락의 정원’이고 세상은 ‘쾌락의 정원’이며 지옥은 ‘죽지 않는 고통의 정원’이다.
좌측의 ‘타락의 정원’(낙원)은 하느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본성적 욕구와 처벌을 담고 있다.
중앙의 ‘쾌락의 정원’(세상)은 삶의 무미건조·우울·절망을 쾌락으로 달래려는 세상의 모습을 그렸다.
우측의 ‘고통의 정원’(지옥)은 두 정원을 거친 인생이 지옥에 떨어져 죽지 못하고 끝없이 겪는 고통을 담고 있다.
18명의 얼굴이 빽빽이 등장하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는 동시공간에서 보이는 세 부류의 삶을 대별하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 주변에 감도는 욕설과 분노와 조롱에 찬 잡소리를 지껄이는 인물들(박해자·좌도)이다.
다른 하나는 박해자들의 선동과 잔행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지만, 침묵과 평화를 지키지 못하는 인물들(우도·예루살렘부인들·키레네 시메온)이다.
마지막은 이드로 밀려나 조용한 그리스도와 주님의 수난과 뜻을 읽고 공감하며 참여하며 관상하는 ─ 파스카 신비에 들어선 인물들(성녀 베로니카·예수님)이다.
인간은 점점 강도 높고 고도한 쾌락과 자기만족을 갈망한다.
‘지금 여기’ 살아있음도 ‘행복해지고 싶다’와 ‘죽지 않고 싶다’라는 두 가지 본능이라는 바퀴로 굴러간다.
하지만 타인이 그렇듯이 나도 죽고 만다.
십자가의 길에서 ‘제6처’에서 성녀 베로니카의 시선은 그리스도께 공감하고 그리스도의 생사에 참여함으로써 낙원과 세상과 지옥을 넘어 ‘하느님 나라’를 향하고 있다.
수산나가 겪은 ‘유혹의 정원’(다니 13장)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타락의 정원’(창세 3장)부터 시작되는 ‘쾌락의 정원’[2]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세상을 ‘쾌락의 정원’으로 만들어 가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은 육욕과 환락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본다.
남녀 수백 명의 문란한 행위, 동식물들과의 특별한 교감을 문화적 진보 또는 인간 행방과 자유 ─ 인문학적 발견과 실천으로 볼 수 있을까?
출애굽 사건도 자유와 해방, 인간 의미와 삶에 대한 발견과 실현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이 빠진 인간들만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삶의 발견과 실현은 허구이다.
인간은 죽음으로 그 존재든 본질이든 현상이든 모조리 파괴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그 자체로는 무엇으로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인생은 죽음으로써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고통과 부조리를 끝없이 겪을 수 있는 가능태이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생겨난 인간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에서든 고통과 불행이 멈추지 않는 지옥에서든 영원히 존재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낙원에 대한 회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낙원은 인간에 의해 ‘타락의 정원’이 되었다.
세상은 인간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쾌락의 정원’일 뿐이다.
지옥은 인간 그 누구도 가길 원치 않는 ‘불행한 정원’이다.
그리스도 신앙이 바라는 궁극 목표는 ‘하느님 나라’,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시는 그 나라이다.
그 나라는 오직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갈 수 있는 나라이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의 면모를 살피면 그중에 내 모습이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께 내가 박해자인지, 방관자인지, 추종자인지 가려질 것이다.
[1]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또는 Jerome Bosch, 1450~1516) : 본명은 Jheronimus van Aken. 네덜란드 화가. 상상 속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로 유명하다. 20세기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보스는 북유럽 미술사에서 얀 반 에이크와 브뢰헬의 사이에 위치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활동 시기가 거의 같다. 그러나 반 에이크가 개척한 사실주의, 즉 일상 속 사물의 빛나는 표면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데서 오는 시각적 쾌감이 그의 그림에는 없다. 레오나르도로 대표되는 남유럽 르네상스의 밝은 자신감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에도 관심을 가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보스가 산 때는 이성과 과학과 인간을 믿었던 낙관론의 시대 르네상스의 절정기였지만, 그는 이들에게 고딕 부흥가(Gothic Revivalist), 중세주의자(Medievalist)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구시대적인 비관주의를 보여줬다. 잦은 천재지변과 전염병, 전쟁, 반란 등 역경의 14세기를 겪은 사람들 일부는, 1000년에 안 왔던 세상의 종말이 1500년에 올 것이라고 믿었는데, 보스의 그림은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 속 세상은, 곧 심판이 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죄악과 폭력이 난무하는 무섭고 추악한 곳이다. 그가 그린 사람들은 거의 모두 어리석고 악한 죄인들이다.
보스는 대중적으로 인기 있고 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던 주제인 성모자상을 단독으로 그린 적이 없다. 그의 그림 속 그리스도는 수난과 핍박을 받으며 이를 묵묵히 감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조롱당하는 그리스도’(가시관을 쓰심, Christ Mocked[The Crowning with Thorns])에 보이는 예수 역시 그러한 모습이다. 예수를 둘러싼 네 명의 인물은 군인, 타락한 성직자, 회교도, 유태인을 나타내거나, 네 가지 유혹 혹은 해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어느 경우든 예수를 괴롭히고 고문하는 사악한 존재이다. 예수는 이 사람들과 이들이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화면 밖을 평온하게 응시하고 있다.
중세 말에 성직자의 타락이 극심해지면서, 삶의 쓰라림에 대한 위안을 기성의 종교에서 얻지 못한 사람들은, 순회 설교가나 은둔 수도자에게 관심을 갖고,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과 같은 책에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는, ‘근대적 신심’(Devotio Moderna)이라는 경건주의 운동 등에 심취했다. 이들에게 이 세상은 진정한 안식처가 아니라, 험난한 순례를 하며 스쳐 지나가는 죄악으로 가득 찬 곳이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조롱과 모욕을 당한, 이를 인내와 순종으로 이겨낸 그리스도의 모습이 신자들이 지향한 삶의 모범이었다. ‘조롱당하는 그리스도’(가시관을 쓰심)가 보여주는 예수의 모습은 이런 신앙을 가진 신자 개인을 향해, 악한 세상을 자신과 같이 참고 견뎌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수난 장면을 담은 그림 중 가장 독창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Christ Carrying the Cross)이다. 대각선 구도의 중심에 서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 주위를 둘러싼 18인의 얼굴만 보이는 아비규환 형상이다. 등장인물들은 각양각색을 하고 있다.
① 오른쪽 위 끝에 우도(右盜)와 그의 선의를 의심하는 수도자인 고해·영적지도 사제, 그리고 우도의 어깨를 잡고 가슴을 찌르며 마음을 바꾸라고 종용하는 고위 지도자.
② 오른쪽 아래 예수님께 적의를 품은 좌도(左盜)와 그것을 극찬하며 희화화하는 광대 3명.
③ 예수님 제거를 주도하고 여론의 추이를 살피는 백성의 지도자(최고의회의원: 백성의 원로·수석사제·율법학자) 3인(마태 16,21; 마르 8,31; 루카 19,47).
④ 얼떨결에 잡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뒤에서 떠받치는 키레네 사람 시메온.
⑤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오며 거짓 동정심과 혐오감을 번갈아 보이며 괴롭히는 3명.
⑥ 예수님의 땀·피·침·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드린 수건을 들어서 보이는 성녀 베로니카.
⑦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⑧ 성녀 베로니카의 수건에 찍힌 예수님의 얼굴은 눈을 뜨고 놀라는 관람자(오늘의 우리)를 상정한다.
(예수님과 성녀 베로니카만 눈을 감고 침묵과 평화를 지키신다.)
[2] ‘쾌락의 정원’(El jardín de las Delicias, 1500~1505, 패널에 유채, 220x389cm)은 세 폭과(triptych) 또는 다폭화(polyptych)인데, 멀리 있으면 멀게, 가까이 있으면 가깝게 보이는 원근법으로 그려져 낙원과 세상과 지옥의 실상을 실존의 입장에서 볼 수 있게 하였다.